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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문희갑 나이 고향 학력 이력 프로필

대한민국의 前 관료, 정치인. 독립유공자 문영박의 손자이며, 문태갑 前 국회의원은 그의 사촌 형이다. 대구광역시의 폭염을 낮추는 전환점을 마련한 인물.

 

정치인 문희갑 나이 고향 학력 이력 프로필

 

문희갑 프로필
문희갑

 

문희갑

文熹甲 | Moon Hee-gab

 

출생

1937년 6월 9일 (86세)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 본리동

(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거주지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관

남평 문씨

 

 

재임기간

제16대 경제기획원 차관

1985년 7월 12일 ~ 1988년 12월 5일

 

노태우 정부 제2대 경제수석비서관

1988년 12월 5일 ~ 1990년 3월 16일

 

제28-29대 대구광역시장

1995년 7월 1일 ~ 2002년 6월 30일

 

배우자

정송자(鄭松子)

 

자녀

3녀

 

학력

대구화원초등학교 (졸업)

대륜중학교 (졸업)

경북고등학교 (졸업)

국민대학교 (법학 / 학사)

서울대학교 (행정학 / 석사)

 

경력

제5회 행정고시 합격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 사무관 (박정희 정부)

경제기획원 예산국 사무관 (박정희 정부)

경제기획원 방위예산담당관 (박정희 정부)

국방부 예산편성국장 (박정희 정부)

국보위 입법회의 전문위원 (전두환 정부)

경제기획원 경제개발예산심의관 (전두환 정부)

경제기획원 예산실장 (전두환 정부)

민주정의당 국책연구원 정책연구실장

제12대 국회의원 (전국구 53번 / 민주정의당)

제16대 경제기획원 차관 (전두환 정부)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노태우 정부)

제13대 국회의원 (대구 서구 갑 / 민주자유당)

제28-29대 대구광역시장 (민선 1·2기 / 무소속·한나라당)

국민대학교 총동문회장

푸른대구가꾸기시민모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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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갑 생애 고향 학력 이력

1937년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인흥마을의 남평 문씨 본리세거지에서 대구우체국장을 지낸 아버지 문긍만(文亘萬)과 어머니 재령 이씨 이재호(李在浩)의 딸 사이의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경북고등학교(37회), 국민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이후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경제관료로 근무하였다. 1980년 신군부가 창설한 국가보위입법회의에 참여하였다. 이후 경제기획원 예산실장을 역임하였다.

 

문희갑 대구시장정치인 문희갑

 

경제기획원 예산실장 시절인 1984년에는 방위비를 그동안 유지되어온 "GNP 대비 6%"보다 낮게 책정했는데, 이에 합동참모본부 육군 장성 2명이 권총을 들고 난입해 항의하는 곤욕을 겪기도 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같은 해 7월 경제기획원 차관에 임명되어 전국구 국회의원직을 사임하였다. 1986년 남북 경제회담 수석대표에 임명되었다.

1988년 노태우 정권이 출범하자 같은 해 12월부터 1990년 초까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을 역임하였다.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토지 공개념도 도입하려다 땅투기에 열 올리던 재벌 총수들에게 빨갱이 소리도 들었다. 1989년 조순 경제부총리와 함께 토지 공개념 3개법안 입법을 주도하여 통과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택지소유상한제, 개발이익환수제, 토지초과이득세 강력한 투기억제책이었는데, 야권의 지지를 받았지만 오히려 여당인 민정당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 법안은 10년 뒤에 모두 "법 설계 측면에서" 위헌판결을 받았다. 「택지소유상한제」와 「토지초과이득세」는 지나친 규제라는 이유로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고 1998년 폐지됐다. 「개발이익환수제」는 2002년 1월부터 부과를 중지했다. 수도권에 대한 부담금 부과는 2004년부터 중지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공개념 정책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며, 이를 지지하는 학자들이 여전히 세를 얻고 있다.

또한 분당, 일산 등 1기 신도시 건설을 주도하여 부동산 폭등 억제정책을 주도하였으며 무주택 서민들의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 도시에 영구임대주택 20만 호 건설도 추진하였다.

영종도에 동북아 허브공항을 건설하는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이것이 오늘의 인천국제공항의 기원이다. 경부고속철도 건설을 주도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KTX의 기원이다.

 

 

문희갑 정치 활동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그 해 7월 경제기획원 차관에 임명되어 전국구 국회의원직을 사임하였다.

1990년 초, 5.18 민주화운동 관련 여론과 청와대의 압력으로 민주정의당 정호용 국회의원이 사퇴하자 치러진 대구직할시 서구 갑 선거구의 재보궐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여 무소속 백승홍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하지만 백승홍 후보가 무려 42.5%를 득표하면서 겨우 9% 차이로 당선되었기 때문에 여당 텃밭 대구에서 3당 합당의 시너지 효과조차 거두지 못한 찜찜한 의정복귀라는 평을 들어야 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으로 출마한 정호용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복당한 정호용에게 지구당위원장 자리도 내 주게 되자 이에 대한 반발로 1995년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였다.

 

문희갑 정치활동문희갑 근황

 

대구광역시장 재임

민주자유당을 탈당했던 1995년에 치러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대구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럼에도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로 TK지역에서 문민정부에 대한 반감이 거세진 상황에 힘입어 자유민주연합 이의익 후보, 무소속 이해봉 후보, 민주자유당 조해녕 후보 등을 꺾고 당선되었다.

경제관료 경력을 내세워 '대구의 분노 선거로 보여주고 대구의 자존심 경제로 살립시다' 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재임 기간 동안 경제시장을 표방했으며,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까지 역대 민선 대구광역시장 중 유일하게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난 대구광역시 출신 시장이기도 하다.

다만 지난날의 정책 입안 행보와 별개로,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회창을 지지하여 새로 개편된 "친정" 한나라당에 복당한다.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대구광역시장 재임 당시 많은 반발을 무릅쓰고 "도심지의 노른자위 땅에" 2.28기념중앙공원과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을 조성하고 옛 중앙공원을 경상감영공원으로 재정비하고, 쓰레기 매립장을 대구수목원으로 탈바꿈시키고, 도시 곳곳에 나무를 심는 등 대대적인 녹화사업을 실시하였다. 문희갑 시장의 재임기간 동안 600만 그루가 넘는 나무가 대구 시내 곳곳에 심어졌으며, 후임 대구 시장들도 나무심기 사업을 전개하였다. 이 사업은 단순 경관 개선 효과를 넘어, 2000년대 중반부터 대구가 전국 최서지역에서 벗어나는 기념비적인 현상이 나타나 주목받게 된다.

 

나무 심기 외에도 대구 도시철도 2호선 착공과 대구공항의 국제화를 이루어냈으며, 신천대로의 보조격 도로 신천동로를 건설했으나 복잡한 구조로 인해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낙동강변을 따라 도시고속도로 건설도 추진하였으나 민자 유치 실패로 무산되었다.

이해봉 전 의원이 시장 시절 구상한 경대사대부중고를 이전시키고 옛 대구상고(현 상원고) 부지를 묶어 대구광역시청 신청사를 건립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무산됐다.

행정구역 개편 관련해서는 1996년 대구와 경북 전체의 통합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대구와 같은 생활권인 경산시, 칠곡군, 고령군 일부를 대구에 편입해야 한다고 의견을 밝힌 바 있다.

무난하게 시장 직무를 수행했으나, 밀라노 프로젝트로 적지않은 예산이 대구시로 유입되었음에도 막상 제대로 써먹지 못했다고 비판받기도 했다. 

 

문희갑 정치활동

 

2002년 비자금 파동 등이 불거지며 2002년 3월 곧 있을 지방선거에 출마하지 않을 것을 선언했다. 결국 시장 임기 말엽인 2002년 5월, 지역 건설사인 태왕그룹으로부터 9천여만원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5월 말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10월 23일 대구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2심에서 집행유예로 감형되며 출소는 했으나, 형 확정일로부터 피선거권이 10년간 제한됨에 따라 정계를 떠나게 되었다.

 

정계 은퇴 이후

정계 은퇴 후에도 대구에서 거주하며 지역 원로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중이다.

2015년 40대 이상 대구시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가운데 역대 대구 민선시장 중 일을 잘한 시장 1위에 꼽혔다. 37.6%의 지지도를 받아서 2위인 김범일 시장(19.6%)보다 2배 가량 지지도가 나왔다. 

그래서인지 정계 은퇴 후, 정당과 지역구를 가리지 않고 러브콜을 받고 있다. 본인도 다른 대구 지역 원로들과 달리 민주당계 후보들을 마냥 꺼리지는 않아서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2016년 1월 15일에는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선거사무실을 찾아 덕담을 건넸고, 제7대 지방선거를 앞둔 2018년 5월 23일에는 자택을 방문한 진보 성향 홍덕률 교육감 후보에게 덕담을 해주기도 했다.

대구시 녹지 조성사업으로 도시 경관 개선과 폭염을 낮추는 전환점을 마련한 인물로, 정계에서 은퇴한 현재는 푸른대구 가꾸기시민모임 이사장을 맡고 있다.

 

문희갑 정계 은퇴

 

이전부터 각종 논란에 휩싸이더니 대구광역시 코로나19 허위 백신 도입 추진 사건으로 비판이 절정에 이른 권영진 대구시장을 향해서 대통령 바꾸는 것만큼 대구시장 바꾸는 일도 중요하다고 제대로 쓴소리를 날렸다. 사실 이 기사는 권영진의 대구경북 통합신공항 등 시민들의 비판을 받는 정책에 시민 여론과 반대로 우호적인 논조를 가진 영남일보라 조금 축소 보도된 것으로, 프레시안 기사에선 통합신공항 이전이나 정치적 행보 등도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이 드러났다. 이 같은 비판에 권영진 시장 본인은 별다른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지만, 권 시장의 측근인 장원용 대구평생교육위원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원로의 길'이란 글에서 그를 꼰대라고 비난했다.

2022년 들어서는 홍준표 수성구 을 의원에게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대구광역시장 출마를 권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홍준표 의원은 대권주자인 자신을 향해 대구시장에 출마하라는 말에 불편한 내색을 보였으나 경선 탈락 이후 문 전 시장이 “대구는 더 이상 망할 데도 없고 더 이상 망해서도 안 된다“며 출마를 강력히 권유하자 출마설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

이후 홍준표가 대구광역시장 출마를 결심하자 그를 지지하였고, 후보로 확정되자 후원회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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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갑 선거 이력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7,040,477 (35.2%) 당선 (53번)

초선

 

1990

4월 재보궐선거

(국회의원)

대구 서 갑

41,970 (51.55%) 당선 (1위)

재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서 갑

26,763 (27.30%) 낙선 (2위)

 

1995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대구광역시장

무소속

383,272 (36.79%) 당선 (1위)

초선

 

1998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대구광역시장

570,167 (71.98%)

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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