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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야기/정치 / / 2022. 4. 17. 14:57

김민석 의원 고향 재산 부인 자녀 학력 이력 프로필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15대, 16대, 21대 국회의원이다. 극적인 정치적 부침과 오랜 야인생활을 거친 정치인이다.

 

김민석 의원 고향 재산 부인 자녀 학력 이력 프로필

 

김민석 프로필
김민석

 

김민석

金民錫 | Kim Min-seok

 

출생

1964년 5월 29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거주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시범아파트

 

본관

경주 김씨

 

 

가족

부인 이태린

딸 김비단(1992년), 아들 김희단(2005년)

형 김민웅, 김민화

 

학력

숭실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학 / 학사)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 스쿨 (행정학 / 석사)

칭화대학 법학원 (중국법 / 석사수료)

럿거스 대학교 법학대학원 (법학 / J.D.)

 

병역

면제 (수형)

 

종교

개신교 (침례회 → 성결교회)

 

경력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제15·16·21대 국회의원 (서울 영등포구 을)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특별보좌역

새천년민주당 대변인

새천년민주당 총재 비서실장

민주당 최고위원

통합민주당·민주당 최고위원

아이공유프로노보코리아 대표·상임이사

한양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초빙교수

단국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민주당 대표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특보단장

제19대 문재인 대통령후보 종합상황본부장

민주연구원장

제21대 국회의원

더불어민주당 포용국가비전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영등포구 을 지역위원장

일본경제침략대책특위 부위원장

미국 변호사 (뉴저지주)

 

 


김민석 생애 고향 학력 이력 가족관계

학생운동 시절

1964년 5월 29일,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본 유학 시절 결혼했다. 1982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으며, 4학년 때인 1985년 서울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돼 전국대학 총학생회 연합체인 '전학련' 의장으로 활동하는 등 1980년대 초의 학생 운동을 주도하였다. 1985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및 삼민투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5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고 3년간 복역하였고, 1988년 사면으로 출소했다.

학생운동 활동이야말로 정치인 김민석의 행보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수감 중 작은형 김민화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김수환 추기경의 노력으로 귀휴 조치되었고 이때 조문객으로 찾아온 김대중을 만났다. 당시 김민석의 어머니 김춘옥 여사는 교통사고 사망 보상금으로 "민화의 집"을 설립하여 구속자 가족과 수배학생들을 돌보았고, 김대중과 김영삼 부부가 민화의 집 개소식에 함께 참석할 정도로 "김민석 어머니"에 대한 신망이 높았다고 한다. 어머니 김춘옥 여사는 김민석이 옥고를 치르는 동안 구속자가족협의회를 설립하였고, 재야단체인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약칭 민가협) 초대 의장이 되었다.

 

김민석1김민석2

 

 

DJ계로 정계입문

1990년 3당 합당 이후 이기택 등이 주도한 `꼬마 민주당'에 입당함으로써 정치에 입문하였다. 이후 민주당과 김대중의 `신민주연합당'이 합당한 `민주당'에 참여했다.

당시 민주당 당수이던 DJ에게 상품성을 높이 평가 받아 약관 27세의 나이로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을 선거구에 공천되어 출마하였다. 김대중의 전폭적 지원에 민주자유당 나웅배 후보에게 불과 260표차로 안타깝게 낙선하면서 화려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보수 성향이 강했던 여의도동에서 표차가 크게 벌어진 게 패인이었다지만, 애초에 상대 후보인 나웅배는 상공부 장관과 경제부총리, 3선 의원을 역임한 여당의 중진 인사였다. 이런 거물을 상대로 27살짜리 정치 신인이 고작 260표차로 낙선했다는 건 당선 못지 않은 영광인 셈이다. 낙선 뒤인 1993년 KBS 아나운서인 김자영과 결혼하고 나서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1994년 1월부터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석사과정을 한 학기 이수한 뒤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스쿨로 옮겨 행정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995년 귀국했다.

1995년 지방선거에서 조순 서울시장 후보 선거대책본부의 기획실장 및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그 후 김대중의 정계 복귀로 인한 민주당 분당 과정에서 김대중을 선택해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제14대와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한국당 최영한(최불암) 의원을 꺾고 31세의 나이에 초선의원이 되었다.

1997년 한보그룹 청문회 때는 돋보이는 논리와 질문으로 청문회 스타가 됐다. 제 15대 대선 때도 단독으로 나와 김대중 지지 광고를 찍을 정도였다.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부터는 '김대중의 정치적 아들'이라는 평가를 여권뿐만 아니라 야권에서까지 정치계 전반에서 두루 받았을 정도로 압도적 포텐셜을 인정받는 사람이 되었다.

1999년에는 새천년민주당 창당준비위 대변인으로서 창당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같은 해에 외곽 지원조직인 `젊은 한국'을 결성, 차세대를 의식한 행보를 계속해왔다. 1999년 10월에는 영문 시사주간지 `아시아위크'에 의해 아시아의 새천년 젊은 지도자 20인에 선정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재선에 성공하며 386세대의 대표주자 위상을 확보했다. 2000년에는 세계경제포럼이 선정한 미래를 이끌어갈 세계 지도자 100인에 선정돼 주목을 받았다. 이때만 해도 순풍에 돛단 듯한 행보였다.

 

 

정치적 역풍과 첫 실패

386세대의 대표 주자로서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지만, 2000년 5·18 기념식 전날 벌어진 이른바 새천년 NHK 사건으로 도덕성에 흠집이 생겼다. 이 사건은 김민석을 포함한 386세대 정치인 전부에게 상당한 이미지 훼손을 가져왔다.

2000년 12월 `권노갑 2선 후퇴' 요구를 계기로 민주당이 쇄신 파문에 휩쓸렸을 때, 당권을 쥐고 있던 주류 동교동계편에 서면서 비개혁적이라는 비판을 들었다. 당시 정풍운동을 주도하던 천신정 등 소장 정풍파 의원들에게 "질서 있는 쇄신"을 해야 한다고 비판하였다. 김민석은 대학생 시절에는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학생운동권의 주류의 리더였고, 정계 입문 후에는 김대중의 총애와 동교동계의 무조건적인 지원을 받는 주류 중의 주류였다.

그래도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언변 덕분에 새천년민주당 지지자들에게 대체로 인기가 좋아서 2001년 당내 대선 후보 여론조사 2위까지 오르며 유력 대권 주자로 주목 받았다. 그 결과,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이상수를 경선에서 누르고 새천년민주당의 서울시장 후보가 될 수 있었다. 대선 후보 여론조사 2위인데 왜 대선 대신 서울시장에 나섰냐면, 2002년 기준 만 38세라 대통령 후보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헌법에서 대통령 출마의 자격은 만 40세 이상에게만 주어진다. 이로부터 약 20년 후, 보수정당에서도 이준석 신드롬이 불며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었다. 그 거대한 새천년민주당에서 대선후보 순위권에 들 정도였으니, 이준석 신드롬의 원조격인 셈이다. 2021년 12월 말 지방선거와 총선의 출마 나이대가 25>18세로 조정되는 국회안이 통과되었으니, 조만간 대선 또한 선거 연령 하향이 가능해질 수도 있다.

서울시장 선거운동에 나서 초반 우세를 보였으나, 김대중 대통령의 친인척 비리, 측근 비리 문제로 여론이 급속히 악화되면서 분위기는 박빙으로 흘렀고, 결국 2002년 월드컵의 영향으로 젊은 층의 투표율까지 저조하면서 이명박 후보에게 10%가 넘는 큰 차이로 패배해버리고 말았다. 당시 함께 출마한 서울 지역 구청장들과 지방의원 후보자들은 더 큰 표 차이로 패배하였다. 그리고 당선된 분은 서울시장을 계기로 승승장구하며 대통령까지 올랐음에 반해, 김민석은 이때를 기점으로 내리막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시장 선거에 나가기 위해 김민석은 국회의원을 사퇴했고, 지방선거 이후에 치뤄진 영등포 을 보궐선거에선 한나라당 권영세 후보가 당선되었다.

 

김민석3

 

 

김민석 그리고 노무현

이때까지만 해도 충분히 재기할 수 있다고 여겨졌지만, 서울시장 선거 패배 이후 당의 대선 후보였던 노무현의 지지율이 떨어지자 2002년 말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둔 10월 17일 갑자기 민주당을 탈당하고 정몽준 캠프로 이적하면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김민석은 철새 정치인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겨났다. 심지어 이때의 행적으로 당시 김민새라는 별명까지 생겨났을 정도. 아무튼 이때까지만 해도 김민석 본인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여유있게 "새들도 저 때문에 피해를 많이 봤다."라고 말하는 상황이였다.

참고로 당시 대선후보 지지율은 노무현이 17%, 정몽준, 이회창이 각각 30%를 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김민석의 탈당은 의외의 후폭풍을 몰고 오는데, 지방선거 참패와 후단협의 흔들기, 월드컵 이후 정몽준의 급부상 등으로 계속 폭락하던 노무현 지지율이 반등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관망하던 개혁성향 유권자들이 노무현에 대한 동정심리 등을 이유로 재결집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면초가에 놓여있던 노무현 캠프는 다시금 활기를 찾았고, 이후 정몽준과 후보단일화하겠다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한다. 지지율이 상승세로 반등했으니 여론조사로 붙어도 정몽준을 누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김민석은 유권자들에게 철새 정치인의 낙인이 찍혔다.

 

 

2002년 대선 과정에 대한 본인의 주장

김민석은 더불어민주당에 복당한 뒤 2016년 김어준의 파파이스 115화에 출연해 당시 상황에 대해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계속 떨어지는 상황에서 이회창 후보의 승리를 저지하기 위해 후보단일화가 필요했다. 노무현후보가 단일화를 반대하는 상황에서 여론조사에 의한 후보단일화를 만들어내고 민주당으로 복당하겠다고 성명을 내고 정몽준 캠프에 합류했고 실제 정후보를 설득해 여론조사 단일화를 성사시켰다. 당내 대부분이 단일화의 필요성을 얘기했지만 실제로 이를 위해 움직인 사람이 본인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단일화를 통해 이회창 후보에 대해 승세를 굳혔으나 유세 마지막 날 정몽준의 지지철회 파동 때문에 대선 후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고 해명했다.

파파이스에서 "왜 정몽준에게 갔느냐"는 질문에 "정몽준에게 가서 단일화를 시켜도 대선에 이기면 이후에 결과로 평가될거라 생각했고 워낙 대선승리가 절박했다", "누가 봐도 단일화가 없으면 지는 상황이었다"며 이회창이 되면 남북관계가 급속히 냉각되거나 단절된다는 정치적 공포가 있었고 서울시장 낙선 이후 북한에 유학생을 보내는 사업을 하고 대선에 관여하지 않으려 했는데 대선판세가 급격히 안 좋아져 고심끝에 행동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자서전에서 "김민석의 행동은 충격이었고, 단일화를 위한 합리적 충정이었을 수 있으나 본인은 아주 어렵게 되었다."는 취지로 기록한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도 말했다.

"단일화 이후에는 왜 돌아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당시 단일화 이후에는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고 대선이 다 끝나고 돌아가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대선이 끝나면 어차피 정치적 상처가 생겼으니 잠시 정치를 떠나 유학할 의사를 주변에 피력했다고 한다.

 

 

고난의 정치 여정

결국 "가출했던 아들이 집에 돌아온 심정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국민통합21을 탈당한 뒤 2003년 새천년민주당으로 복당했지만, 이후 출마하는 선거마다 고배를 마셨다. 당장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영등포구 갑으로 지역구를 옮겨 출마했지만 한나라당 고진화 후보에게 패배했고 심지어 열린우리당 김명섭 후보에게도 밀리면서 3위로 낙선하는 수모를 당했다. 여담으로 그가 새천년민주당에 복당한 시점은 2003년 11월 4일로 열린우리당 창당 일주일 전이었는데 차라리 새천년민주당 복당 대신 열린우리당 입당을 선택했다면 당장 17대 총선에서부터 재기에 성공했을지도 모를 일.

실제로 우상호, 임종석, 송영길 등 김민석과 행보가 비슷했던 386 정치인들 대다수는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해 신생 정당인 열린우리당으로 가서 현재까지 굵직한 행보를 보여온 반면에 새천년민주당은 17대 총선 당시 탄핵 역풍을 제대로 맞아 9석밖에 확보하지 못했고 지역구 5석도 전남에서만 얻는 등 한 때 여당이었다는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심각하게 쪼그라들어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노무현과 척을 졌던 송석찬, 김명섭, 송영진 등도 열린우리당에 합류했던 만큼 김민석이라고 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이후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예비후보로 경선에 뛰어들었지만, 이인제 후보에 밀려 2위로 탈락하였다.

 

2008년 총선엔 서울시장 선거 당시 선대위에서 영수증 발급을 잘못한 정치자금법 문제에 대한 책임을 후보가 지게 되어 컷오프를 당했지만 결국 낙천에 승복한 뒤 오리알 유세단을 이끌었고 그 후 전당대회에 통합민주당 최고위원에 2위로 당선되며 부활하는 듯 했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불법 정치자금 수사가 발목을 잡았고 당시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비난하며 김민석은 당사에서 한 달간 농성을 벌였지만 끝내 구속되고 말았다.

2009년 3월 지인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 7억2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과 함께 추징금 7억2000만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2심에서 벌금 600만원으로 형량이 낮아졌다. 2010년 8월 대법원에서 2심 판결이 그대로 확정되면서 2015년까지 피선거권을 상실하였다. 당시 선고받은 추징금 7억2000만원 중 1억원가량만 납부하고 6억2600만원을 12년 후인 2020년 총선 출마 당시까지 납부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대법원 심리가 진행 중이던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부산광역시장 출마를 선언했지만, 경선에서 김정길 전 대한체육회장에게 밀렸다.

당적이 자동소멸되었던 상태에서 (안철수, 김한길의 새정치민주연합 출범으로 민주당 당명이 사라지자) 민주당의 이름과 전통을 지킨다며 2014년 원외 민주당 창당을 주도하였고 이후 당대표로 취임했다. 이 민주당의 존재로 인하여 새정치민주연합이 당명을 바꿀 때 '민주당'을 사용할 수 없다는 문제가 걸려 논란이 있었으며, 더불어민주당으로 당명을 결정했을 때 원외 민주당에서 반발한 적이 있다.

 

김민석4

 

복귀

2016년 10월 원외 민주당이 더불어민주당에 흡수통합되면서 이를 통해 언론 및 방송에서 더불어민주당을 '민주당'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추미애 당 대표 특보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문재인 대통령 후보 종합상황본부장, 민주연구원장을 거쳐 2020년 21대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자신의 옛 지역구이자 정치적 고향 서울 영등포구 을에서 재기를 노리게 됐다. 이 지역구 재선 현역인 신경민 의원과 공천장을 놓고 진행된 경선에서 승리하면서 2000년 16대 총선 이후 20년 만에 민주당 후보로 총선에 도전하게 됐다.

선거 결과 개표 전 지상파 출구조사에는 미래통합당 박용찬 후보에 1.4% 차(김민석 46.9% vs 박용찬 48.3%)로 밀리는 것으로 나왔으나, 실제 개표에서는 50.3%의 득표율로 낙승하면서 국회 복귀에 성공했다. 2002년 서울시장 출마를 위해 의원직을 사퇴한 뒤 정확히 18년 만의 원내 복귀이다.

그가 낙선한 17대 총선부터 재기에 성공한 21대 총선까지 연달아 당선된 사람들이 현재 무려 5선이다. (더불어민주당에서는 김진표, 변재일, 조정식, 안민석, 이상민 등이, 국민의힘에서는 주호영, 조경태 등이 있다.) 그리고 김민석 의원이 재선 의원일 때 초선 의원으로 16대 국회에 들어온 박병석은 그 이후로 5번을 내리 당선되어 지금 국회의장으로 있다. 즉, 의장보다도 정치경력은 선배. 계속 영등포에 있었으면 55세에 7선 국회의원이었을 수도.(14대 총선에서도 낙선했는데, 이 때도 당선됐으면 8선 국회의원 즉, 김영삼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총리, 박준규 전 국회의장 다음으로 높았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21대 국회 최다선 의원이 되어, 지금 의장은 박병석이 아닌 김민석이었을 것이다. 더불어서 권영세의 국회입성이 늦어지거나, 아예 국회에 들어올 일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2021년 6월 16일, 민주당의 대선 후보군 중 정세균을 공개 지지선언했다. 

 

 

 

김민석 논란 사건 사고

코로나 검사 새치기 논란

김민석 의원은 9월 2일 오전 9시10분쯤 코로나19 검사를 받으러 서울의 한 병원을 찾았다. 당시 검사를 받기 위해 시민들은 줄을 서 있었는데, 김 의원은 병원 측 안내를 받으며 바로 검사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먼저 기다리던 시민들에게는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고 한다.

병원 측은 SBS 취재진에게 "평소 코로나 검사에 대해 예약을 받지 않는다면서도 VIP나 응급환자에 대해서는 필요한 경우 먼저 검사를 받게 한다"며 "김 의원 측의 연락은 전날(1일) 받았다"고 밝혔다. 다만 병원 측은 '새치기 논란' 관련해 "당시 시민 5~6명 정도만 줄을 서 있었다"고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로 당일 병원의 무료 검사를 받기 위한 줄은 8시 40분 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며,기다리던 시민들은 5~6명 내외였다고 한다. 김 의원은 유료 검사를 받기 위해 미리 시간을 예약하고 방문한 것으로 뉴스가 상당히 악의적으로 보도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해당 병원은 영등포구 신길동 소재 성애병원으로 해당 병원은 유료 검사로만 진행이 되며 시간 예약을 받지 않고 시민 누구나 줄을 서서 검사를 받아야 한다.

 

 

김민석 재산

2021년 3월 기준, 김민석 의원의 재산은 빚만 3억 7227만 4천원이 있는 것으로 신고됐다. 이는 전년도대비 2억원 가량 증가한 금액이다.

(전년도 빚 5억 8000만원 가량)

 

김민석 재산

 

 

김민석 여담 일화 인간관계

정계 입문 자체를 매우 이른 나이에 했다. 1964년생인데, 20대 후반의 나이에 14대 총선에 출마했고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15대 총선 당시만 해도 32세에 불과했을 정도로 젊었다.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출마를 위해 의원직을 사퇴했을 당시에도 겨우 38세였다. 그래서 2002년 지방선거에서 21대 총선까지 무려 18년간의 긴 공백이 있었음에도 2020년 기준 국회의원 전체 평균 정도인 50대 중후반이다.

그의 큰형은 월간 말의 기자를 지낸 조국백서추진위원장 김민웅 목사이다.

1993년, 서울대 동창인 KBS 김자영 아나운서와 결혼했다. 결혼할 당시 `운동권과 제도권의 결합', '한국의 케네디-재클린 커플' 이라며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1남 1녀를 두었으나, 2014년 12월에 이혼했다. 이후 2019년 12월 12일에 같은 교회(신길교회)에 다니는 이태린 씨와 신길교회에서 재혼했다.

일본 고노 다로 전 일본 방위상과는 오랜 친구 사이로, 일본 해상초계기 사건으로 한일관계가 급랭하던 때 도쿄의 모처에서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만남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숭실사이버대학교 교수 곽동수는 자신의 유튜브를 통해 김민석이 철새가 아님을 주장했다. 이걸 본 김민석 본인은 감동받아 크게 울었다고 하며, 이것을 자기 유튜브에 다시 올리기도 했다.

중앙일보가 공개한 21대 국회의원 총 재산 액수 순위에서 뒤에서 2위를 기록했다. 신고된 액수는 -577,019,000원이다. 참고로 꼴찌는 같은 당 진선미로, 그보다 약 2배나 더 채무가 많은 -1,147,271,000원.

원래 이름이 '완석'이 될 뻔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성함인 '주완'에서 '완', 자신을 받아준 산부인과 의사 이름에서 '석'. 그러나 형들이 동생이 남의 아이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민'자 돌림으로 이름을 지어야 한다고 완강하게 주장해서 아버지는 자신의 이름자를 넣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고 한다.

 

김민석5

 

 

김민석 선거 이력 경력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영등포 을

48,151 (40.95%) 낙선 (2위)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49,657 (48.87%) 당선 (1위)

초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50,438 (60.39%) 당선 (1위)

재선

 

2002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

1,496,754 (43.02%) 낙선 (2위)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영등포 갑

21,033 (20.88%) 낙선 (3위)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209,872 (0.88%) 낙선 (2번)

 

2020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영등포 을

47,075 (50.26%) 당선 (1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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