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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야기/정치 / / 2022. 4. 19. 23:19

국민의힘 이정현 고향 재산 부인 자녀 학력 프로필 (전남지사 후보)


전 새누리당 대표 겸 現 3선 친박 중에서도 진박 국회의원이다. 18대 비례의원이었으며 이후 19대(곡성-순천 보궐) 및 20대(순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친박계로 일명 박근혜의 복심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여파로 당대표에서 사임 후 2017년 1월 16일 새누리당을 탈당하였다. 2022년 2월 9일 약 5년 만에 복당하여 현재는 국민의힘 소속이다. 한때는 거대 보수정당의 대표이자 김부겸, 정운천과 함께 지역주의 타파의 아이콘 중 하나였으나, 주군의 몰락과 함께 산화해 버린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2021년 경부터 친윤으로 일요서울TV, 고성국TV 등에서 활약 중이다. 보수정당의 불모지인 호남에서의 2선, 새누리당 당대표 등 엄청난 커리어를 가졌던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보수정당 지지층 사이에서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는 인물이다.

 

 

이정현

李貞鉉 | Lee Jung-hyun

 

출생

1958년 9월 1일 (63세)

전라남도 곡성군 목사동면

 

본관

성주 이씨 문열공파 27세손

 

재임기간

박근혜 정부 초대 정무수석비서관

2013년 2월 25일 ~ 2013년 6월 3일

박근혜 정부 제2대 홍보수석비서관

2013년 6월 3일 ~ 2014년 6월 7일

 

 

부모

아버지 이재주, 어머니 장귀옥

 

형제자매

슬하 3남 1녀 중 장남

 

배우자

김민경

 

자녀

딸 이소정, 아들 이곤요

 

학력

목사동국민학교 (졸업)

순천주암중학교 (졸업)

살레시오고등학교 (졸업)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 / 학사)

 

병역

대한민국 육군기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전역

 

종교

개신교 (예장통합)

 

신체

165cm

 

 

약력

전라남도지사 비서실장

민주정의당 정책위원회 홍보담당특별위원

국회 정책연구위원

한나라당 정책기획팀장

한나라당 수석부대변인

제18대 국회의원 (비례대표 / 한나라당)

제18대 국회 전반기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위원

제18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제18대 국회 후반기 법제사법위원회 위원

제18대 국회 2012 여수 세계박람회 지원특별위원회 위원

새누리당 새만금특별위원회 위원

2015 광주 하계 유니버시아드 유치위원회 위원

새누리당 인재영입위원회 위원

새누리당 정치선진화특별위원회 위원

새누리당 쇄신특별위원회 위원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겸임교수

새누리당 제18대 대통령 선거 선거대책위원회 공보단장

새누리당 최고위원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비서실 정무팀장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

대통령비서실 홍보수석비서관

제19대 국회의원 (전남 순천시·곡성군 / 새누리당)

새누리당 최고위원

제19대 국회 후반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제19대 국회 후반기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위원

제20대 국회의원 (전남 순천시 / 새누리당)

제20대 국회 전반기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

제20대 국회 전반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새누리당 대표

제20대 국회 전반기 국방위원회 위원

20 국회 후반기 외교통일위원회 위원

 

 


국민의힘 이정현 고향 재산 부인 자녀 학력 프로필 (전남지사 후보)

 

이정현 일생 고향 학력 정치 이력

정치 입문 전

1958년 9월 1일 전라남도 곡성군 목사동면 동암리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 그나마도 13가구가 떨어져 사는 두메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이정현의 부모님은 아들에게 특별히 간섭을 하지는 않았지만, 큰 목소리로 국어책을 반복적으로 읽는 것을 숙제로 시키고, 잡지와 신문을 정기 구독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곡성 목사동초등학교, 순천주암중학교, 광주 살레시오고등학교(16회)를 졸업하였다.

국민학교 3학년 때 양회수 전 국회의원 등 정치인 합동유세 현장 보고 정치인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국민학교 5학년 시절,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곡성군 목사동면 주민들의 가장 큰 소원은, 전기가 들어오는 것"이라는 손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대통령비서실에서 이 편지를 받아보고 전남교육청을 통해서 목사동초등학교 교장에게 "뭔가 다른 아이니 잘 키우라"는 격려를 했다는 일화가 있다.

고등학교 때 광주로 오면서 성적도 중하위에 머물렀고, 목욕탕에 가는 것을 비롯해 아무도 없는 공중전화박스에서 수화기에 대고 혼자서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문화적 충격이었다고 회고한다. 웅변학원을 다녔고, 전국 웅변대회에서 고교부 최우수상을 받았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정치 관련된 기사를 꾸준히 봤다고 한다.

육군사관학교를 지원했는데, 1차 시험에서는 합격했으나 2차 신체검사에서 시력이 나빠서 낙방했다. 그 뒤 재수를 한 끝에 권노갑, 김동영, 최형우, 황명수 전 의원 등 정치인들을 배출한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했다. 1980년 군대에 입대하여 대한민국 육군 포병 병장으로 만기전역하였다. 근무지는 육군 제3야전군사령부 제1포병여단 355포병대대이다.

 

 

 

정치 입문 후

동국대학교 4학년 때인 1985년, 광주시장과 전남부지사를 역임했던 구용상이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담양군-곡성군-화순군에 출마하자 '정치 좀 똑바로 하라’는 6장짜리 손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초선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구용상 의원이 이정현에게 "나를 도와주지 않겠느냐?"고 설득하여 보좌관으로 영입하게 된다.

처음에는 구용상 의원의 전화받는 비서, 부인 수행비서에서부터 출발하였다.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은 지역구, 서울 비서관을 따로 두는 것이 상례인데, 이정현은 항상 구용상 의원을 따라다니면서 비서관 역할을 했고, 구 의원 집에서 잠을 자는 일도 자주 있었다고 한다. 때로는 구용상 의원에게 인간적으로 모욕적인 얘기를 들으면서까지 혼이 나서 화장실에서 하루에 3번 운 적도 있었다고 토로한다. 억울해서 화장실에서 울다가도 세수를 하고 기어코 돌아갔다고 한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때, 호남에서 평화민주당의 돌풍으로 구용상 의원이 낙선하자, 이정현은 민주정의당 특채로 입사했다. 당직자 최말단인 간사 ‘병’으로 당직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강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공채들 사이에서는 전라도 출신이라고 근본 없는 놈이라는 눈초리를 받으면서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애초부터 경상도가 기반인 정당에서 전라도 출신이었던 그는 미운 오리 새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당 출입기자들에게조차 반말을 들으면서 심부름까지 했다고 한다. 

당시 집안에 대해 제대로 신경도 쓰지 못해서 지하 셋방과 옥탑방을 전전하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이후 정당에서도 위치가 승진하면서 살만해졌지만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아내의 몸이 상당히 상했다고 한다.

 

이런 천대에 오기가 발동한 이정현은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것은 물론 주말도 평일과 똑같이 일하는 습관을 무려 15년간 했다고 한다. 이정현은 매일 출근길에 신문과 라디오의 기사와 뉴스를 꼼꼼히 파악한 다음 그것을 정리해서 분석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늘상 정치 사례들을 분석, 정리했고, 그런 사례들을 정리하고 분석한 경험을 토대로 현실 정치에 다시 적용해서 분석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1997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와 서청원 대표에게 매일 3장짜리 정세 분석 및 전략기획 보고서를 전달했고, 그 분석 자료 때문에 지도부 사람들이 너도 나도 할 것이 보내달라고 해서 당의 고위직 사람들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결과 한 단계 한 단계씩 승진하면서 전략기획, 정세분석, 대변인실, 여의도연구소 기획팀장까지 역임하게 된다.

그리고 암흑기를 겪다가 2004년에 당대표가 된 박근혜의 눈에 들었고, 친박 정치인이 된다.

그 시절 이정현의 위치를 잘 알 수 있는 사진 중 하나. 왼쪽 구석에 깨알같이 등장한다. 박근혜 대표 왼쪽의 인물은 바로 임두성으로, 이 사진이 찍힌 2007년 5월에서 1년이 지난 2008년의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 22번을 받았다. 이정현이 그 선거에서 비례 22번으로 초선 국회의원으로 발돋움한 걸 고려하면 저렇게 찍힐 정도로 박근혜의 지근거리에 있었으니까 비례 22번이라도 받은 게 다행일 정도였다.

 

 

국회 입성기

당에서는 호남 출신이라는 이유로, 고향인 호남에서는 5.18 유혈진압을 일으키고 호남을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고립시키는 타도할 ‘민정당’ '민자당'출신이라는 이유로 손가락질을 받아야만 했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광주광역시의회 의원 후보로 출마했지만 깔끔하게 떨어졌다. 명함을 받자마자 면전에서 찢어버리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 처음으로 출마하여 한나라당 소속으로 광주 서구 을에 출마하였으나, 당시에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로 한나라당의 인기가 바닥을 기는 상황이었는지라 1.05%(720표)라는 저조한 득표를 기록하며 열린우리당 정동채 후보에 밀려 혹독하게 패했다. 다른 전라도 지역이나 경상도 지역에서는 그나마 각각 한나라당이나 민주당계 후보들이 당선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특히 광주는 5.18 민주화운동에서 신군부가 저지른 학살과 그 이후에 단행된 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이 자행한 호남 고립 정책의 영향으로, 민주정의당의 후신 보수정당인 새누리당-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국민의힘이 깃발을 꽂기가 어렵다.

당시 이정현이 출마 원서를 냈을 때도, 당에서는 이정현이 나가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이 무렵 박근혜가 당 대표 시절이었는데, 이정현의 연설을 관청한 것을 계기로 인연을 맺게 된다. 박근혜는 이정현에게 2차례 전화를 걸어서 낙선을 위로하며 밥을 사겠다고 했고, 총선이 끝나고 1달 뒤, 여의도에서 만나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이 위기에 처했던 무렵인지라, 당 내에서는 어차피 후보를 내더라도 되지도 않는 호남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될 만한 곳(수도권, 영남)에 당의 지원과 유세를 총집중시키자는 얘기가 나돌던 때였다. 이정현은 당 대표인 박근혜를 만난 자리에서 작심하고 "당의 호남 포기 전략을 포기해 주십시오." 라면서 열변을 토했는데, 박근혜가 "어쩜 그리 말씀을 잘 하세요?" 라고 하면서 그를 마음에 들어했고, 곧 당 수석부대변인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제17대 대통령 선거 경선에서 박근혜 캠프에 합류, 대변인과 특보를 지냈다. 소위 '원조 친박'으로 분류되었다. 제17대 대통령 선거 한나라당 경선에서 박근혜가 패하고 난 뒤 많은 이들이 박근혜의 곁을 떠났지만, 이정현은 계파를 바꾸지 않았다. 당시 이명박 후보 측으로부터 선대위 고위직을, 김문수 경기도지사 측으로부터 경기도 정무부지사직을 제의받기도 했으나, 모두 고사했다.

당시 경기도 정무부지사는 후단협 활동덕에 철새 이미지가 박혀 17대 총선에서 낙선한 원유철이었는데, 18대 총선을 앞두고 원 지역구인 평택시 갑에 출마하면서 사직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경기 부지사 자리는 공석이었다. 심지어 이를 보다 못한 박근혜가 "경기도 정무부지사쯤은 한 번 해보는 게 괜찮지 않겠느냐"고 설득하자, "자꾸 그런 말씀하시면 정치를 그만두겠습니다."면서 단호한 반응을 보여서 박근혜도 더 이상 말을 안 꺼냈다고 한다. 하긴 아웃사이더같은 자신에게 손을 뻗어 준 단 한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근혜였으니, 충성심이 대단했을 것이다.

 

 

18대 총선 당시 비례대표로 국회에 처음 입성했다. 당시 한나라당 내에서 친박계에 대한 공천 학살 논란이 불거졌음에도 불구하고 비례대표 후보 22번으로 공천되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 박근혜가 평의원이던 시절 비공식 대변인 역할을 하면서 '박근혜의 입', '박근혜의 복심', '박근혜의 그림자'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현재까지도 친박 타이틀을 유지한 채 박근혜의 측근으로 지내는 중이다.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광주 서구 을 선거구에 다시 출마했다. 비록 또 다시 통합진보당 오병윤 후보에 밀려 낙선했지만, 39.7%라는 고무적인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를 계기로 일명 '총선 스타'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고, 비슷한 맥락으로 민주통합당 신분으로 새누리당의 철옹성이나 다름없는 대구에 도전장을 내밀었다가 낙선한 김부겸과 함께 지역주의 타파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이후 청와대의 정무수석으로 근무했으나 2013년 초에 윤창중 대변인이 해외순방에서 대형사고를 치고 비서실장, 홍보수석이 모두 사직하자 홍보수석으로 자리를 옮겼고, 1년 뒤 2014년 재보궐선거 출마를 위해 물러났다.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유세하는 모습. 사진 속에서 이정현이 입은 복장은 폐백 옷이라고 한다.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순천 시민 여러분! 저 이정현 손 한 번만 잡아주십시오!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당시 이정현식 스킨십을 대표한 자전거 유세

 

참고로 이때는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비를 맞아가며 자전거를 타고 유세하고 있는 것이다.

존경하는 순천시민 여러분, 그리고 곡성군민 여러분. 저 이정현 손 한 번만 잡아주십시오. 이번 보궐선거 1년 10개월 정도 임기에 기왕 버린 거 없다 셈 치고 저 이정현 손 한 번만 잡아주십시오! 정말 저 미치도록 일하고 싶습니다! 고향을 위해서 저 미치도록 정말 일하고 싶습니다! 부려먹다가, 정말 죽도록 부려먹다가 못하면 그 때 쓰레기통에 다시 넣으시더라도 이번 한 번만큼은 제 손 한 번 잡아 주십시오!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국회의원 후보자 토론회에서 마무리 발언

 

 

선거가 진행되는 중에는 여당인 새누리당에 대한 반감을 고려하여 중앙당 차원의 지원사격을 전혀 받지 않았으며, 자전거로 시내를 누비는 소탈한 콘셉트으로 바꿨다. 위에 있는 광주 서구 을 선거유세 당시와의 차이점에 주목.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순천시-곡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새정치민주연합의 서갑원 후보를 꺾고 당선되는 파란을 일으켰다. 고향인 곡성군에서는 70%의 몰표를 얻고 순천시에서도 선전하면서 본인으로선 4번의 선거 끝에 당선되었고, 1988년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광주·전남 지역에서 당선된 새누리당 계열 소속의 첫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 와중에 언론에서는 '박빙의 승부', '지역주의를 타파할 것인가?'로 포장하고 있었지만, 서갑원 개인 차원의 역량 논란과 새정치민주연합의 공천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으로 인해 지역의 민심은 애초부터 이정현에게 기울고 있던 참이었다. 지역 사정을 잘 알지 못한 채 '전남에서 새누리당이 당선'이라는 타이틀에 집착한 나머지 전국 언론과 지역 여론에 괴리감이 생기는 현상이 발생했다. 정작 지역 주민은 예상보다 적은 표차에 더 놀랐을 정도였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보궐선거와 순천시/정치 항목 참조.

과연 이정현 의원의 당선이 정당 지역주의 타파인가 하는 점에 대해선 논란이 조금 있다. 이정현은 정당 대결이 아닌 지역인재론+고향인물로 경쟁하여 당선된 것이기에 이것을 지역주의 타파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견해도 있다. 당장 소개에 적혀 있지만 한 선거구인 곡성군 목사동면이 고향이고, 여기는 순천시 주암면이 코앞인 곳이다. 이와 함께 선거구 당시 지역선거 유세 사진을 보면 다른 선거와는 달리 새누리당이란 당명은 구석에 작게 써놓고 빨간 배경에 이정현이라고 큼직하게 새겨놓기도 했었다. 바로 2014년 재보궐선거 당시 사진처럼 자신의 홍보 조끼의 구성을 보면 빨간색 조끼에 하얀색으로 이름 이정현만 큼직하게 붙이고 선거유세를 했다. 이를 고려하면 2014년 당시 선거구도는 곡성군 목사동면 출신의 이정현 개인 VS 새정치민주연합 구도였기 때문에 이 것을 지역주의 타파로 보기 어렵다는 점이 존재한다. 즉, 이정현의 손을 들어준 것이지 새누리당의 손을 들어준 것이 아니란 것이다. 물론 지역의 정치색이 변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이 이정현 의원이 순천과 곡성에서 선거유세를 할 당시 새누리당 중앙당과 당시 김무성 신임 대표의 지원을 거듭 거절했다.(이는 20대 총선 때의 김부겸도 마찬가지) 당연한 말이지만 이정현 개인으로 지지세를 잘 잡았다가 전남 동부권에서 반 새누리당 분위기가 가장 결집된 곳에서 새누리당이 더 커다랗게 강조되면 그야말로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는 형국이 될 수 있었기에, 당시 새누리당을 숨기고 이정현 개인을 내세운 것이 좋은 선택이었다고 선거 후 정계분석에서 평가한 반응이 꽤 많았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뿌리내린 정당색 지역주의가 쉽게 타파되기는 어려운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여러 번의 도전으로 이러한 결과를 냈다는 것은 어쨌든 지역주의를 약화시켰다고 볼 수 있으며, 그렇게 보는 견해가 중론이다. 한국정치에서 지역주의란 "특정 지역에서 특정 정당에 대한 몰표행태"를 의미하는 것이지 지역구의 읍면동이나 시군구에서의 소지역주의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실제로 소지역주의는 광역단체장 선거나(안희정이 논산시 출신이라 논산에서 몰표가 나온다거나) 영호남을 제외한 타 지역에서도 일상으로 일어난다. 가령 서천군과 보령시가 한 지역구라면 후보자의 출신지에 따라 표가 왕창 쏠린다거나 이정현이 새누리 당색을 빼고 임했다 하더라도 새누리당 후보인 건 지울 수 없는 사실이고, 지역주의 투표가 이루어졌다면 인물과 상관없이 정당투표로 어김없이 패배했을 것이다. 지역주의 투표라는 게 인물이 아니라 정당만 보고 찍는 투표행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역주의 타파란 해당 지역의 배타적 지배권을 가지고 있는 정당이 아닌 상대 정당의 후보가 당선되는 것이고 필연적으로 당 지지율보다 높은 득표를 보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당이 아닌 인물을 보고 뽑았다고 지역주의 타파가 아니라고 할 수 없고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지역주의 타파라고 볼 수 있는것이다. 애당초 완전한 무연고에 반지지정당이 뽑히는 것은 특히 지역색이 강하고 각 당 텃밭의 성지로 볼 수 있는 전라도와 TK에서는 사실 0%에 가깝다. 비슷한 포지션으로, 민주당 출신으로 대구에 계속 도전한 김부겸 의원도 고향은 TK니까 지지율을 높게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받는 거지 다른 지역 출신이라면 장담을 하기 어렵다. 물론 지역주의가 더욱 해소된다면 고향 관계 없이 반 지지정당도 인물론으로 뽑힐 기반이 생기겠지만, 첫 술에는 배부를 수 없다. 조금씩 나아질 수밖에 없다는 걸 고려하면 이러한 도전이 점점 지역을 불문하고 열매를 맺을수록 우리나라 정치에 분명 더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러나 한계점으로 이정현 의원에게는 박근혜와의 관계에 대해 문제점이 있다고 보는 사람이 있고, 5.18 민주화운동 과 관련하여 논란이 있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재보궐선거에서 승리하고 국회의원이 된 이정현은 2014년 8월 11일 당시 선거 이전에 당 대표였던 김무성이 "당선되면 업어드린다"라고 말해서 당 최고회의에서 약속대로 업혀드렸다. 그런데 표정이 가관이다. 그 후에 익살스러운 표정은 이정현을 까고 박근혜의 연인 등 좋은 패러디 요소가 되었다고 한다.

 

 

 

3선 성공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를 통해 19대 국회의원으로 당선이 된 것을 계기로 본인은 다음 총선에서도 출마할 의지를 보이고 있다. 성실한 지역관리와 2014년을 기점으로 호남에 퍼져 있는 새정치민주연합에 대한 불신을 바탕으로 나름 건재한 지지율을 지키고 있는 중이다. 여론조사에서 3명의 예비후보들과 1:1로 맞붙었을 때, 오차범위 이상으로 앞설 정도로 꽤나 강세를 보이는 중. 새정치민주연합의 후신인 더불어민주당에서는 노관규 전 순천시장이 공천되었다.

하지만 이와 함께 큰 변수가 생겼는데 순천시-곡성군 선거구의 개편여부다. 자세한 내용은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선거구 획정에서 전라남도 문서와 순천시/정치 참조. 헌법재판소 판결로 인해 선거구 분할 기준선이 바뀌어서 순천시-곡성군 선거구가 인구를 초과하여 선거구 변동 대상지역이 되었다. 순천시를 따로 독립하고 곡성군을 다른 지역과 묶는 방안과 자치시/군의 경계를 만지지 않는다는 원칙을 예외로 하여 순천-곡성을 묶은 채 갑과 을로 2명을 선출하는 방안이 거론되는 중이다. 후자의 경우 순천시 신도심에 속하는 왕조1동/2동+덕연동+해룡면(금당지구+신대지구)을 강력한 진출기반으로 삼은 야권 후보와 구도심-농어촌-곡성군에서 유력한 이정현이 서로 윈윈(?)하는 결과를 부를 수 있지만, 전자의 경우는 이정현의 선거구 여부가 다소 묘연해질 수 있다. 하지만 일부 관측에서는 순천시의 선거구가 1개로 된다 하더라도 이정현 의원이 순천시에 출마해서 승산이 있도록 공을 들이고 있다는 분석이 있다. 곡성군 목사동면이 도농통합 이전에는 승주군 생활권이었다는 점도 작용하고, 순천지역 농어촌과 구도심 지역에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20대 총선 순천, 곡성 지역 여론조사 결과는 이정현 후보가 상대적으로 앞서는 상황이다. 

 

20대 총선의 선거구 분구로 곡성군은 광양시, 구례군과 묶이게 되었다. 외지인구 유입이 많은 광양시는 새누리당 지지율도 상대적으로 높고 순천과 곡성의 영향을 받은 구례군에서도 이정현의 지지율이 꽤 높은 편이라서 유리할 수 있다는 해석도 있었다. 하지만 곡성 쪽 몰표는 기대하기 어려운 대신 순천에서도 지지율 관리를 꽤 한 만큼 순천시로 나가는 것으로 정해졌다.

이 때문에 각종 여론조사에서 1:1 구도는 물론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후보와 3자 구도에서도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역의 경선이 끝나고 후보가 확정된 시점에서는 여론조사에서 3자 대결에도 불구하고 1위 노관규에게 8% 뒤지는 표차를 허용하며 불안한 출발을 보였다. 다만 19대 총선에서만 봐도 노관규 후보가 초반 여론조사는 박빙 내지 우세로 출발했던 것과 달리 실제 결과는 통합진보당 김선동의 압승으로 끝났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뚜껑을 열어 봐야 정확히 알 수 있을 듯하다. 특히 순천시의 복잡한 최근 정세를 생각한다면 더더욱.

결국 2016년 4월 13일에 실시된 20대 총선에서 순천시 선거구에 당선되며, 1988년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보수정당 소속 정치인으로서는 최초로 호남 지역구에서 국회의원 2선에 성공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20대 총선에서 텃밭이 제대로 털린 새누리당에게는 전주시 을 선거구에서 당선된 정운천과 함께 그나마 위안이었다. 이 같은 성과를 낼 수 있던 건 보궐 선거 당선 이래로 매주 지역구를 방문해 자전거를 타고 곳곳을 돌아다니며 인사는 물론 설명회를 열고는 주민들의 애로사항을 접수, 직접 수첩에 받아적어서 이를 해결해줬을 뿐만 아니라 주말이면 마을회관에서 파전과 막걸리 파티를 하고 심지어는 마을회관에서 숙박까지 하는 등, 주민밀착 스킨쉽과 예산증액 공약라고 한다. 한 여름에는 땀에 흠뻑 젖은 채로 혼자 자전거를 타고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선거 후에도 새누리당의 당권을 두고 여러가지 의미로 중요한 위치가 되었다. 호남의 유일한 새누리당 재선 의원이란 큰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대표적인 친박계 인사로서 지독한 친박-비박 계파 갈등이 일어난 새누리당 내에서 그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기 때문. 예상대로 탈당한 유승민 및 당내외의 비박계 인사에 대해 매우 강경한 발언들을 내며 존재감을 확장하고 있다.

 

 

새누리당 대표 선출

2016년 7월 새누리당의 대표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8월 9일 전당대회에서 당초 주호영 비박단일후보와 접전을 벌일 것이다는 예상과 달리, 꽤 큰 표차로 승리하며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의 당 대표 선출은 대한민국 정당 역사상 최초의 당직자 출신+최초의 호남 출신 보수 정당 대표라는 점에서 의의를 가지고 있다. 그 이전에 비영남 출신 보수 정당 대표로는 충청+황해도출신인 이회창이 있었지만 호남 출신 보수 정당 대표로는 이정현이 처음이다.

그러나 드라마 같은 인생승리+친박이란 딱지를 갖고도 많은 이에게 호평받던 그의 커리어가 여기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

 

대표 선출 후 9월 6일 경기도 파주시의 대한민국 육군 제1포병여단 산하 포병대대를 1박 2일 일정으로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했다. 1포병여단은 이정현 본인이 대한민국 육군 병으로 3년간 복무했던 부대다.

그러나 이 방문은 '민폐'였는데, 사병들부터 시작해서 간부들까지 높으신 분 온다고 온갖 준비를 다해야 하므로, 그에 따르는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정현 본인이 장병들을 "다 내 아들뻘이야"라며 격려했다. 특히 육군 현역병으로 만기전역한 이정현이 이걸 모를 리가 없다.

당장 위 이미지에서 이정현이 한 말도 "니들 나 오는거때문에 고생했을텐데 왜 말을 안하니?"라고 무시하는 말투다. 참고로 같은 현역 병사이자 육군 상병으로 만기전역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군부대에 자주 가는 것은 장병들에게 민폐"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다만, 당 대표까지 올라간 정치인으로서 안보에 관심을 가져야한다는 이미지와 사병들을 챙겨줘야 한다는 모습을 언론과 대중에 보여줘야 하기에 알면서도 갔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이런 대표활동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여파로 친박의 당내 퇴진론이 당내외에서 비상하고 당이 분당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 오자 여러 번 대표직 사퇴 의사를 말하다가 12월 15일 친박 의원인 조원진 최고의원이 지도부 동반 사퇴 의사를 외부에 표명한 후 결국 16일, 당 대표직을 최고위원들과 함께 사퇴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결국 터질 게 터지고 말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피의자인 국정농단과 정경유착 비리사건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JTBC에 의해 까발려진 것. 민심은 완전히 대통령에게서 등을 돌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정현은 친박의 수장답게 박근혜 대통령을 계속 두둔해왔다.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직후에 야당이 주장했던 2선 후퇴 및 거국중립내각에 관하여 박근혜 대통령에게 직언을 하였다면 최소한 탄핵이라는 최악의 상황은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골수 친박의 의견만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고하였고,  상황은 점점 파국으로 향하게 하였다. 어찌 보면 박근혜 탄핵의 숨은 조력자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을 악화시키는 데 일조한 인물이다.

결국 탄핵이 가결될 경우 손에 장을 지진다는 배수진을 치는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가 가결되었다. 당연히 여론은 '빨리 장을 지져라'는 반응을 보내고 있다. 탄핵 소추 투표 결과를 보면 총 300명 의원 중 234명이 찬성했는데, 야당 의원 전부가 탄핵에 찬성했다 가정해도, 새누리당 의원수 중 과반이 탄핵에 찬성했다는 결과가 나온다. 즉, 친박계 일부도 이미 등을 돌렸단 이야기. 친박의 수장인 이정현의 정치인생도 앞날도 이제 깜깜해졌다. 결국 비박계가 주도하는 비상시국회의에서 최순실 8적 중 1명으로 지목되어 탈당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만, 결국은 비박들이 먼저 뛰쳐 나갔다.

 

이정현은 당대표를 내려오고 인명진 목사를 비대위원장으로 하는 비대위 체제로 들어갔다. 그리고 인명진 목사는 "인적청산이 필요하다. 1월 6일까지 친박 핵심의원은 자진 탈당하라."고 요구하였다. 특별히 거론한 의원이 많지는 않지만, 저 핵심 멤버에 이정현 전 대표가 들어가는 것은 자명하다.

2017년에 새누리당을 탈당하였다. 자신의 탈당으로 친박 탈당 요구를 멈춰줬으면 하다고 했는데 여러 행보들로 이정현이 친박의 대명사가 되긴 했으나 이정현은 친박에서 비주류로 이정현이 책임을 떠안고 탈당한 것 아니냔 의견이 있다. 서청원이나 최경환 같은 친박 핵심 세력들은 탈당을 거부했다. 실질적으로 탈당한 친박 의원은 이정현 외에 친박 핵심도 아닌 정갑윤만이 유일했다. 그나마 정갑윤도 4월 8일에 다시 자유한국당에 복당하였다.

다른 핵심 친박과는 달리 탈당을 수락한 것은 이정현이 새누리당에서 무소속이 되더라도 가장 경쟁력 있는 의원이란 점이 작용한 듯 하다. 지역구인 순천시에서 새누리당 간판은 없는 것이 더 당선 가능성이 높기 때문. 하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새누리당보다 더 비토 가능성이 높은 친박이란 간판을 가지게 됐는데, 과연 또 당선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또한 최악의 사건에서도 최악의 상황에 이르기까지 여당 대표로서 오직 박근혜 바라기 모습만 보였기에 재기 못할 가능성도 있다. 이정현이 호남에서 당선할 수 있던 이유 중 하나가 유세할 때 새누리당의 색깔을 최대한 지웠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탈당 후

탈당 이후에는 갑자기 활동이 뜸해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무소속 정치인으로서 이미지 관리를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전까지는 박근혜의 최측근으로서 간도 쓸개도 다 빼줄 것 같은 모습을 보이며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던 사람이 탈당하자마자 언론 노출이 갑자기 뜸해진 부분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 골수 친박들이 늘상 참여하는 탄핵 반대 집회에도 참석하지 않고 있고, 탄핵 인용 후에도 부친상을 이유로 친박들이 포진하고 있는 사저에도 찾아가지 않으면서 박사모 등 박근혜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이정현에 대한 여론이 급격히 추락하고 있으며, 심지어 좌파 진영에서 심어놓은 프락치가 아니었냐는 음모론까지 돌고 있다. 다만, 이정현의 행보를 자세히 보면 말이 안 된다.

친박 진영에 있었기 때문에 당 대표라는 중책을 맡았을 때도 서청원, 최경환, 윤상현, 김태흠 등의 친박 실세들에게 근본없다는 이유로 얕잡아 보였으며 새누리당 대표로 선출된 모양새와는 다르게 처음부터 친박 중진들에게는 고개를 90도로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사람이었다. 출당 이후의 이정현은 정치적 유기견으로 평을 받기도 한다. 지역구 내 여론은 부정적인데다 친박으로 찍히기까지 했기 때문에 현 상태로는 정치적 재기가 매우 어렵다. 20대 국회의원직의 임기를 끝까지 채울 수 있을지조차도 미지수이다. 게다가 친박 핵심 인사 중 한 명으로 이미 낙인찍혔지, 지역구가 그나마 지지층을 유지하고 있는 TK라면 모를까, 지역구조차도 구 민정당계 및 친박에게 가장 강력한 적대감을 나타내는 호남이다. 탈당한 지금도 이미 이정현을 받아 줄 정당이 있을 리 만무하며, 자유한국당에 계속 잔류했다 쳐도 지역 주민들에게 현 상황을 초월하는 비토를 받았을 것이므로, 어떤 길로 갔어도 향후 이정현의 정치적 재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기에 지역구인 순천시는 19대 대선에서 시군구 단위 기준으로 문재인의 득표율이 전국에서 가장 높게 나온 반면 홍준표의 지지율이 고작 2.5%에 머물면서 이정현이 순천시에 발을 붙일 수 있는 마지막 조건마저 사라졌음을 증명했다.

더군다나, 친박 이미지 탓에 여론이 급격히 나빠져서 지역구 사무실 간판도 내렸으며,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며 예전처럼 예산을 따올 수도 없는 상황이다보니 지지율도 바닥을 쳤다. 더군다나 2017년 3월 6일에 부친상을 당했고, 장례를 마무리 짓자 마자 주군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파면 당하면서 겹악재가 터졌다. 사실상 이정현의 정치생명은 여기서 완전히 끝났다.

다만, 홍준표 후보가 대권 후보라는 명목으로 바른정당 탈당파와 정갑윤 의원 등 쫓겨난 친박을 불러오는 와중에도 합류를 거부하고 무소속으로 남았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보는 듯. 이미 박근혜가 파면당해 구속당한 데다 이정현 자체도 친박 핵심으로 찍혔고 자유한국당 자체가 이미 친박당으로 찍힌 마당이다. 이정현이 재입당을 하면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격인 게 매우 뻔한지라 재입당을 거부하고 그나마 정치 명줄이 아직 붙어있는 임기 내라도 조용히 지내려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무소속으로 지내면서 친박 이미지를 세탁하고, 순천시민들 사이에서 평가가 나쁘지만 민주당 내에서 조직력은 강해서 경선을 통과하고 컷오프 당하더라도 탈당 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표를 분산시킬 수 있는 서갑원이나 노관규가 21대 총선에서 또 후보로 나오면 인물론으로 충분히 재선할 수 있다는 계산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친박이미지가 강하게 찍혀버린 탓에 이정현의 순천시 내부의 이미지가 개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나와봐야 1자리수 득표율이나 올리고 낙선할 가능성이 높다.

 

 

여담으로 당적이 없어진 후부터는 자유한국당의 표결 불참여부와 관계없이 국회 본회의에서 조용히 자기 소신껏 투표하고 있다. 덕분에 기권·반대표로 눈에 띌 때가 많다. 이후 KTX 직선화와 세종역 신설을 요구하는 의원모임에 동참했다. 지역구인 순천의 순천역은 KTX를 포함한 전라선 모든 열차가 필수적으로 정차하기에 직접 나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거 홍보수석비서관이었던 시절 KBS에 세월호 관련 보도를 바꿔달라고 압력을 넣었던 혐의로 검찰에 기소당하여 1년 구형을 받았다. 그리고 2018년 12월 14일 1심 판결에서 의원직 상실에 해당하는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 받았다(서울중앙지법 2017고단8762). 대법에서 의원직 상실형이 확정되면 이미 식물인간 상태의 정치인생은 확인사살이 되어 완전히 끝장났으며 이후 2019년 10월 28일 2심 판결에서는 1심보다 감형된 1,000만원으로 줄어들었다(같은 법원 2019노50). 다만 방송법으로 기소된 만큼 2심 판결이 그대로 확정되어도 의원직은 상실되지 않는다. 벌금형의 경우 공직선거법이나 정치자금법에서 100만원 이상을 받아야 상실 사유가 되기 때문. 이 의원은 대법원에 상고했고 대법원은 2020년 1월 16일 상고를 기각하여 2심 판결을 확정했다(2019도16319).

최근 전임자였던 김선동 전 의원과 지역현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포착됐다. 적어도 자신의 지역구를 위해서 최소한의 일을 한다는 자세를 보이는 듯 하다. 

 

21대 총선에 출마한다고 밝혔다. 소속은 무소속으로 출마하며, 40세 이하의 젊은 사람들을 영입하여 내년초 신당 창당에 앞선다고 한다. 출마 선언, 신당창당. 순천에서는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대신 수도권 출마를 선언했다.

원래 서울 종로구에 출마한다고 밝혔으나,  출마 의사를 번복한 후 같은 지역구에 도전장을 낸 미래통합당 황교안 대표 지지를 선언했다.  그 후 영등포구 을 지역에 출마신청을 했지만, 이미 친박 이미지로 평판이 추락한데다 미래통합당에서 박용찬 후보를 냈기 때문에 보수 단일화를 하지 않는 이상 수도권에서의 당선은 쉽지 않아 보였으며, 예상대로 21대 총선에서 낙선하면서 4선 도전에 실패했다.

과거 언론사의 인터뷰에서 본인을 썩은 국 안의 건더기로 표현할 정도로 정치 세력의 세대교체의 필요성을 강하게 언급했었다. 그러면서 자신 또한 투표로 심판을 받되 새로운 인물들을 뒤에서 지원하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실제로도 이정현의 지역구였던 순천에 21대 총선 미래통합당 후보로 천하람이 출마했었는데 30대의 젊은 청년 후보였다. 이정현이 천하람에게 순천 지역구를 추천했다고 한다. 물론 21대 총선에서 패배함으로서 사실상 정치적으로는 사망선고를 받은 셈이지만,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정계 은퇴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직접적인 정치참여보다는 인터뷰에서 말한대로 세대교체를 위해 뒤에서 지원하는 방향으로 정치활동을 펼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누구처럼 그당으로 가진 않았기에 입당 가능성도 있긴하다. 이후 유튜브 채널 일요서울에서 '이정현의 정문일침'이라는 코너를 진행하고 있다.

국민의힘 대선 후보인 최재형 전 감사원장의 물밑 조력자 역할로 나선다고 한다. 최 전 원장의 호남 지역 영향력 확보를 위해 조력할 예정이라고 한다.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지역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 전라남도지사에 출마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국민의힘 복당 및 8회 지선 전남지사 출마

2022년 2월 9일 대선을 한 달 앞두고 국민의힘에 복당하였다. 2월 28일 20대 대선 방송연설을 하였다.

2022년 3월 28일,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중 전라남도지사 출마를 공식화하였다.

당에서도 4 12, 이정현 대표를 전라남도지사 선거 후보로 확정지었다.

 

 

 

 

이정현 기타 일화 여담 인간관계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시대에도 2G폰을 계속 쓰면서 휴대전화를 처음 개통했을 때의 018 번호를 그대로 유지해 왔다. 인맥 관리 차원에서 과거 번호를 계속 유지해오고 있다는데, 실제로 2G폰이 도청, 감청이나 해킹당할 위험이 낮아 정치인을 비롯한 국가 고위 공직자 또는 정보기관 직원들은 상당수가 아직도 2G폰을 쓴다. 그러다가 충성문자 사건 때문에 결국 전화번호를 바꿨다. 단, 기존에도 스마트폰을 쓰던 과거 기사 사진이 있었기 때문에 2G폰만 쭉 썼던 건 아니다. 사실 국회의원들은 바쁘고 연락하거나 올 곳이 많은 날이 자주 있는 여건상, 일반적으로 핸드폰을 목적에 따라 2대 이상 쓰는 경우가 꽤 있다.

박근혜 탄핵 소추 표결을 위해 국회로 입장할 때 장미꽃을 쿨하게 거절하는 장면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가 당대표가 되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전만 해도, 정계에선 인생의 승리자의 예시로 쓰일 만한 정치인으로 남을 뻔했다. 노력이란 개념을 초월한 도전정신도 그렇고, 비주류 중에서도 비주류인 호남 출신의 영남+보수 기반 정당의 당 대표라는 점도 그렇고 고령층 중에선 이런 사태가 일어나자 그에 대해 인간적인 동정을 느끼는 사람도 소수지만 있다. 단순히 그가 그녀를 잘못 본 것인지, 아니면 그의 인생의 도전이 정말 큰 뜻이 있는 게 아니라 사심 가득한 야망이었던 건지는 진실은 저 너머에. 전라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대우도 못 받고 빌빌대고 있을 때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박근혜였던지라 박근혜에게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결국 부역자라는 오명을 벗을 수는 없다.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후 처음으로 제출한 법안이 "공직인사 지역차별금지법" 이정현 개인으로서도 성과를 보지 않고 단지 개인의 지역 출신에 따른 차별에 한을 크게 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논란이 많은 인물이라서 그렇지 차별을 금지하자는 해당 법의 취지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선거 전략이 굉장히 집중적이었다. 유세를 하면 적어도 마을에서 몇시간씩 머물렀으며 잠도 사람들과 같이 자고 식사도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제공해 준 식사를 마을 사람들과 함께 먹으며 소통 했다고 한다.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익명을 요청한 더불어민주당 소속 인물도 새누리당 지지율이 고작 9%(비례대표)에 불과한 순천 지역에서 스스로 44.5%의 득표를 일궈낸 것은 오랫동안 노력해온 이정현 본인의 노력과 성과에 대한 지역의 지지가 맞다고 답변하였다. 도시와 시골의 선거 전략은 상당히 다른데 이정현은 시골 지역에서 어떻게 선거를 해야 할 지에 대한 전략에 대해 아주 제대로 이해했다고 평가받는다. 실제로 이후 패배한 더불어민주당에서도 해당 분석을 했다.

초기에 선거는 아주 어려웠는데 선거 명함을 받으면 그 자리에서 갈기갈기 찢어서 면전 앞에다가 뿌려버렸다고 한다.

보수정당 소속이고 친박이지만,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 긍정적인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 새누리당 당대표 경선에서 "공수부대 앞에, 탱크 앞에 1만 명도 아니고 10만 명도 아니고 수십만명이 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불의에 대한 항거도 있었지만 인사에, 지역 발전에, 많은 것에 소외 받고 있는 (광주) 사람들의 가슴속에 많은 것들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니 어느 순간 탱크도 무섭지 않게 (돼) 그 앞에 서는 비극이 있었던 것"이라고 말해 비판을 조금 받기는 했지만. 같은 당 소속이었던 김무성도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 그리고 이정현의 고향이 전라남도인 데다가 고등학교를 광주광역시에서 다녔기 때문에 5.18을 인정하는 것이 이상한 이야기도 아니다.

 

 

지금도 적지 않은 수의 정치 관계자들 공무원들 사이에서도 이정현 의원이 논란을 많이 야기한 것은 맞지만 지역을 위해 했던 노력만큼은 컸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본인 소속구뿐 아니라 주변 지역 예산 감축에 굉장히 민감했다고 한다. 때문에 당시 친이계와 고성이 자주 오갔는데, 이정현의 태도가 워낙 강경해서 친이계에서 본인 선거구와 인지도를 챙기려고 한다고 비아냥 거리면서도 마지못해 물러났다고 한다. 아예 주변 지역 시장과 군수들도 예산에서 충돌이나 감축이 생길 경우 이정현을 찾아갔을 정도였다.

자신이 옛날에 복무했던 군부대를 방문했는데, 저녁에 정신교육 일환으로 강당에서 해당 장병들에게 연설을 했다. 이때 해당 장병들에게 "내가 와서 싫었다는 사람들은 솔직하게 손 들어!"라고 말했지만, 정작 장병들이 손을 들었다간 엄청난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을 우려해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짜증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왜 이렇게 용기가 없어!"라고 병사들에게 일갈한 게 논란이 되었다.

2020년, 지역구와 고향이 있는 순천시와 곡성군을 버리고 서울특별시로의 무소속 출마를 내비쳤다. 주변 반응은 당선 안 될 거 같아 도망간다는 분위기지만, 상대할 더불어민주당 예비후보들이 자신이 큰 표차로 꺾었던 서갑원, 노관규이기 때문에 딱히 피한다는 것도 아닌 듯 하다. 다만 둘 다 컷오프되고 결국 소병철이 전략공천되었다.

거위의 꿈 인순이 버전을 컬러링으로 사용했다. 호남 출신인 데다가 오랜 세월을 비주류로 살아왔던 그의 정치 인생을 살펴보면 짠한 부분이긴 한데, 하필 이상한 줄을 타면서 제대로 빛이 바랬다.

목소리가 상당히 굵고 좋은 편이다.

탈모가 상당히 심해졌다.

 

 

 

 

이정현 선거 이력

1995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광주시의회 광산 2

2,686 (10.05%) 낙선 (2위)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광주 서 을

720 (1.03%) 낙선 (5위)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6,421,727 (37.48%) 당선 (22번)

초선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광주 서 을

28,314 (39.70%) 낙선 (2위)

 

2014

상반기 재보궐선거

전남 순천·곡성

60,815 (49.43%) 당선 (1위)

재선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순천

66,981 (44.54%) 당선 (1위)

3선

 

2020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영등포 을

무소속

3,311 (3.53%) 낙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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