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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야기/정치 / / 2022. 6. 3. 18:11

정두언 사망 나이 고향 학력 이력 프로필


한국의 전 정치인 겸 방송인. 그 외에도 공무원, 자영업자, 아마추어 가수 등 다양한 이력을 남겼다. 제17-19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지역구는 서울 서대문구 을 지역이었다.

꽤 다사다난한 인생을 보내 “정치계의 풍운아”로 불리기도 했다. 2000년대 한때는 대표적인 친이명박계 인사로 꼽혔으며, MB정부의 개국공신으로 소위 왕의 남자로 불리며 당내 소장파를 대표하던, MB정부의 3축(이재오, 이상득, 정두언) 중 한명이었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이명박의 친형 이상득 전 의원의 2선 후퇴를 강력하게 요구하다가 결국 이명박 정부에 찍혀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 그렇게 정권 실세에서 한순간에 친이도 친박도 아닌 당 내 비주류 인사가 되어 2010년대엔 의원직만 유지하는 신세가 된다.

 

그래도 박근혜 정부 들어선 비박계 인사로 촌철살인도 하며 나름 존재감을 보였지만, 2016년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참패와 함께 낙선하면서 정계를 사실상 은퇴했고, 그 뒤로는 여러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나름 활발한 시사 평론가의 길을 걷기도 했다. 허나 2019년 7월 16일, 좀 뜬금없다면 뜬금없게도 자택에 유서를 남기고 고향인 서울시 서대문구 홍은동 북한산 자락길 부근 산 속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경찰 조사 결과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발표되었다.  이렇게 그는 향년 62세의 일기를 끝으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하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머물게 되었다.  생전에 진영논리와 패거리정치 어디에도 스스로를 가두지 않았던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던 그는 다른 세상으로 떠나게 되었다. 

사상적으로는 자유주의 우파로, 독재를 혐오하고 한국 보수가 과거의 군사정권과의 연결고리를 끊고 제대로 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위해 거듭나야 한다는 쓴소리를 아끼지 않은 인물이었다. 덕분에 민주 진영에서도 어느 정도 괜찮게 평가받는 인물이었으며, 박근혜를 위시한 친박계랑도 많이 대립했다. '독재가 보수, 친북이 진보인 기괴한 나라'라는 말에서 그의 가치관을 대략 엿볼 수 있다. 특정 이념에 휘둘리지 않고 합리적인 편이라 진보 진영에서도 호감을 갖는 인물이 상당히 많았다.

 

정두언 사망 나이 고향 학력 이력 프로필

 

정두언 프로필
정두언

 

정두언

鄭斗彦 | Chung Doo-un

 

본관

하동 정씨

 

출생

1957년 3월 6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동

 

사망

2019년 7월 16일 (향년 62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동 인근 야산

 

거주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동

 

학력

서울창서초등학교 (졸업)

배문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 71회)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무역학 / 학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영어영문학 / 학사)

조지타운 대학교 (정책학 / 석사)

국민대학교 (행정학 / 박사)

 

부인

전처 이화익

후처 구윤승

 

자녀

딸 정호희, 아들 정호찬

 

병역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제대

 

종교

개신교(예장통합)

 

약력

제24회 행정고시 합격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

한나라당 최고위원

제15대 여의도연구소 소장

 

 


정두언 생애 고향 학력 이력

초년시절

1957년 3월 6일 서울에서 4남 1녀 중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군수를 지냈지만 병으로 가산을 탕진했고, 집안이 몰락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만주로 건너가 갖은 고생을 다 하다가 고향인 광주로 돌아왔고, 결혼 후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정성태 전 국회부의장의 운전기사로 일했고, 어머니는 모래내시장에 좌판을 펴서 5남매를 교육시켰다.

삼청국민학교를 다녔는데 경비가 강화되면서 무허가 건물이었던 집이 헐리게 돼, 그 후 몇 달 동안 그 자리에서 천막을 치고 버티다가 결국은 신촌으로 이사를 하게 됐다. 신촌으로 이사를 하면서 주위의 도움을 받아 지금의 현대백화점 맞은 편에서 당구장을 하며 살게 됐다고 한다.

정성태 전 국회부의장은 그의 먼 당숙뻘이었는데, 그의 아버지를 각별히 아꼈고 일자리를 준 것이었다. 어쨌든 그 덕분에 정두언은 서울창서초등학교와 배문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가정 형편은 넉넉하지 않은 편이었다고 한다. 단칸방에서 5형제가 함께 살다가, 외삼촌 집에 가서 지내기도 했다.  가정형편도 어려웠지만 상당히 우울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늘 밖으로 돌았고 수시로 어머니를 구타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으로 내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이 너무 두렵고 싫어서 자기애 또는 자존심을 드러냈다”는 고백을 하기도 했다.

배문중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그는 팝송을 많이 불렀는데, 화장실에서 30분에서 1시간 정도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노래만 잘 하는 게 아니라 공부 역시 아주 잘 해서, 1973년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경기고를 졸업한 뒤 1977년에 서울대학교 사회계열에 합격했고 서울대 2학년에 올라가면서 경제학을 선택했다.

 

정두언 인터뷰
정두언 인터뷰

 

서울대 재학 시절에는 'Spirit of 1999'라는 록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원래부터 엔터테이너 기질이 있어서 중, 고등학생 시절에도 오락부장이나 소풍 등에서의 사회를 도맡았다. 대학생 시절이나 사회생활 할 때도 술자리나 회식 또는 연수회를 가면 언제나 사회를 맡았고 분위기를 주도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도 고시 공부를 열심히 하여 서울대학교 무역학과 재학 중에 제24회 행정고시에 합격하였다. 그런데 우수한 고시 합격 성적에도 불구하고 연수 실습 점수가 0점이어서 공무원 임용이 취소될 처지에 놓이기도 했다. 그와 시비가 붙은 구청 인사 담당자가 앙심을 품고 0점 처리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재능을 알아본 다른 인사 담당자가 그를 수료시켰고, 공직에 입문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뒤 행정고시 합격자들에게 부여되는 특혜인 장교 복무 대신 사병으로 자원 입대하여 강원도 양구군에서 복무하고 육군병장으로 만기 전역하였다. 전역 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행정 사무관시보에 임용되었다.

 

관료시절

행정사무관시보 임용 후 정무 제2장관실에 배속되었다. 원래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경제부처로 가고 싶었지만, 군대를 아직 다녀오지 않아서 지원 순위에 밀렸다고 한다. 노태우 정무제2장관을 보좌한 것을 시작으로 노태우가 정무제2장관에서 문화체육부장관으로 발령나자 그를 따라 문화체육부에 배속되어 서울 올림픽 개최 지원업무를 담당하였다. 군에서 전역한 이후 이후 20여 년간 문화체육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 국무총리비서실 등을 거쳤다.

(고시 합격 후) 공직 생활 중에 군대를 다녀오면 장교로 복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이왕 군대에 가서 고생할 거면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겪는 길로 가자는 생각에서 병사로 입대하였다.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수료를 하고, 강원도 양구군에서 힘든 군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육군 병장 만기 전역 후에 체육부로 복귀해 올림픽지원총괄업무를 맡다가 1985년 1월에는 국무총리실로 발령이 나서, 청소년대책반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 비서관으로 있을 때에는 상사의 순직을 보기도 했다.

1987년 4월, 대규모 민주화시위가 일어났을 때는 4.13 호헌조치 결사 반대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그 해 일주일간 휴가를 내고 KBS 탤런트 공채시험에 지원하기도 했는데, 4단계 최종 시험까지 합격했지만 아내와 가족들의 만류로 인해 스스로 포기하고 만다.

1991년 미국으로 특별 유학, 2년간의 연수를 받았으며 이 기간 중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유학하면서 정책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국무총리 비서실로 옮겨 국무총리실 정무 비서관, 정보 비서관, 공보 비서관 등을 지냈다.

 

정두언 국회활동
정두언 국회활동

 

정두언 정치 활동

2000년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권유로 국무총리실에 사표를 제출하고 정계에 입문했다.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새천년민주당 장재식 후보에 4%차로 석패하였다. 이 때의 패배로 상심이 커서 그는 우울증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2개월간 병상에 입원했다. 그러던 그에게 국회의원 이명박이 찾아와 서울특별시장 선거캠프 합류를 권했다. "이명박의 컨셉이 시대정신에 부합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승낙한 다음 이명박의 서울시장 출마를 거의 혼자서 준비하다시피했다. 그 결과 이명박은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다.

그 후 이명박 서울시장 시장 재임 시절,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일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후보로 서대문구 을에 출마하여 이번에는 당선되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한나라당 대한민국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친이계의 핵심으로 이명박 캠프에서 활동했었다. 당내 경선 과정에서 상대한 박근혜 후보의 검증에 나서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를 낱낱이 밝히면 박근혜 좋아하시는 분들은 밥도 못 먹게 될 것이라는 폭로성 발언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9년 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드러나며 재조명받기도 했다.

이후 이명박 후보 캠프의 선대위 기획본부장과 전략기획 총괄 팀장으로 활동하면서 이명박의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다. 2007년 12월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대통령 당선자 보좌역이 되었다. 당시 언론에선 이명박 당선인을 따르는 친이계는 이명박의 친형이자 포항에서 내리 당선되면서 영남을 대표하는 이상득계, 이명박의 6.3 항쟁 동기이자 과거 민주화운동 경력이 화려했던 이재오계, 서울시장 시절부터 함께 하면서 당내 소장파를 이끄는 정두언계로 나뉘어져 있다고 분석할 정도로 그야말로 MB 정권의 핵심 실세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초기에 남경필 등 소장파 의원들과 함께 이명박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에게 정권을 위해 2008년 총선에 불출마하라고 요구했고, 그 후로도 이상득 및 그 측근들(임태희, 박영준 등)의 권력사유화를 계속 비판하다가 결국 권력 핵심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이명박 당선의 1등 공신임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권 내내 변방에서 돌았으며 심지어는 남경필, 정태근과 같이 이상득이 배후조종한 것으로 의심되는 불법사찰까지 당했다.

이때 야당 쪽에 영포목우회 관련 정보를 넘겼다는 의혹을 받고 여권에서 융단폭격하자 눈물의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많은 언론에서는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고 '권력 투쟁'이라는 프레임으로 보도해서 너무 가슴 아팠다고 말하기도 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로 서울 서대문구 을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0년 한나라당 전당대회에 출마하여 최고위원을 역임했다. 그 후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을 역임하였다. 2010년 전교조 회원명단 무단공개로 물의를 빚은 조전혁 의원 콘서트에서 조촐하게 노래를 불렀다.

 

정두언 강연
정두언 강연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하지만 같은 해 솔로몬저축은행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이상득과 함께 기소되었다가 2014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정두언은 이 때문에 2013년 1월 23일 1심에서 징역 1년에 법정구속 판결을 받아 구속되어 10개월간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2014년 대법원 무죄 확정 후 6,500만 원가량의 형사보상금을 받았으나 전액 기부하였다고 한다.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서울 동작구 을에 출마한 나경원 후보 캠프의 고문을 맡았고 사실상 총괄선대본부장 역할로 선거를 지휘하여 나경원 의원이 당선하는데 기여하였다. 나중에 나경원은 2019년 7월 17일 정두언 전 의원의 장례식에 조문을 마치고 난 뒤, “전적으로 제 선거를 다 맡아 도와주셨던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정두언 전 의원 역시도 2018년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선거에 출마한 나경원에 대해 나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늘 자신과 같은 '비주류'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2015년 중소가맹점들에 대한 카드수수료를 획기적으로 낮추는 법안을 발의하였다. 신용카드 거래로 생긴 채권을 신용카드업자 외에 은행과 증권, 보험사도 매입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되었으며, 카드 수수료율 인하 경쟁을 통해 중소 상공인의 수수료 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여신전문금융업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2015년 7월 24일 대한민국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국방위원장 시절 박근혜 정부의 한국형 전투기(KF-X) 개발사업에 대한 전면적인 감사원 감사를 요청하면서, KF-X 사업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사업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국방위원회 소속 유승민 의원과 함께 KF-X 사업 추진에 대한 재고를 주장했다.  그리고 KF-X 사업 재검토할 것을 박근혜 대통령에게 요청하는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했다.

2015년 10월 25일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에 대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에 역행한다는 이율배반적인 자기 모순이고, 전략적으로도 큰 실책”이라고 비판했다. 2015년 11월 13일에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박근혜와 그 추종자들을 비판하며, "나라가 군정 종식은 됐어도 왕정 종식은 못 했다"라는 발언을 하여 주목받았다. 그리고 여당의 ‘친박 TK 패권주의’를 비판하며,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확고부동하다. 이들이 당을 주도하니 당이 수도권에 관심이 없고 민심을 알지도 못한다.", "그러니 수도권 의원들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불평하기도 하였다.

2015년 11월 14일에는 자신의 블로그에 ‘친박·TK’ 출신의 장차관과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에 대해 이들이 전략 공천이니 TK 물갈이니 하며 평지풍파를 일으키며 내년 총선에서 영남과 서울 강남 지역구에 뻔뻔하게 무혈입성하려 하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고관으로 임명돼 부귀영화를 누리던 사람들이 다시 국회의원으로 ‘임명’돼 그 부귀영화를 이어가겠다는 것"이니 이것은 불공정하다고 한마디 한 것.

다만 과연 이러고서도 친박이 당권을 쥔 새누리당에서 공천받을 수 있을지 많은 사람들의 걱정을 불러일으켰는데, 정작 본인은 자신의 지역구가 야당 강세 지역이라 공천을 신청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3번 연속 당선된 본인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공천 경쟁을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2016년 친박 주도의 공천 과정에서 비박계인 김무성 대표에게 이른바 비박 살생부 명단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언론에 터뜨려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 때 시사예능프로 썰전에서 유시민은 정두언이 살생부 명단이 있다고 폭로함으로써 정작 그 자신은 공천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분석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저런 잡음이 터졌지만, 비박계가 대거 공천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결국 새누리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하게 된다.

 

 

문제는 그렇게 같은 지역에 출마한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출구조사에서 2위로 뒤졌다는 것. 17대와 19대 총선에서는 두 번 다 출구조사에서 낙선하는 걸로 나왔는데 정작 개표해 보니 당선이 된 적도 있던 터라 희망을 잃지 않는 듯했으나 결국 33,852표(39.9% 2위)를 얻어 낙선했다. 안그래도 서대문구와 마포구는 더불어민주당 강세인 곳이라 새누리당 입장에서는 정두언 의원이 마지막 서대문의 보루격이었는데, 20대 총선에서 정두언이 낙선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이재오마저도 은평구 을에서 낙선하면서 서울 7권역은 싹 다 더불어민주당이 장악했다.

20대 총선 낙선 후 극심한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가죽벨트로 목을 맸는데 제법 튼튼한 벨트로 목을 매었다고 여겼는데 벨트가 끊어져 자살에 실패했다고 말했다. 그 뒤에 그래도 삶에 대한 의지를 잃지 않기 위해서, 인터넷 강의로 독학하여 심리상담사와 분노조절장애 상담사 자격을 취득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낙선하고도 새누리당 까기에 여념이 없는데, 2016년 5월 한 인터뷰에선 새누리당이 20대 총선에서 참패한 이유를 들며 "(지금) 새누리당의 정체성이 독재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보수가 떠난 거다. 보수의 정체성이 독재·권위주의는 아니지 않나. 지금의 새누리당은 거의 권위주의가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분위기로 가고 있다"며 "그러니까 당연히 중도 신당도 필요없고 제대로 된 보수정당, 제대로 된 우파 정당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정두언 사망

2019년 7월 16일 자택에 유서를 써 놓고 나간 것을 부인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과 소방당국은 드론과 구조견 등을 동원해 수색한 끝에, 오후 4시 25분 경 서대문구 홍은동 북한산 자락길 부근 산 속 나무에 넥타이로 목을 매 숨진 정 전 의원을 발견했다. 오후 2시 30분 홍은동의 한 아파트 인근 북한산 자락 산책로까지 운전기사가 운전하는 차량으로 이동 후 내렸다고 한다. 

그는 사망 당일 오전 11시 30분부터 30여 분간 평소처럼 SBS 정치쇼 화요일 4부 코너 보수의 품격 코너에 정태근 전 의원과 함께 고정 방송 출연을 했었기에 당황스럽다는 반응이 많다.  과거 2017년 TV조선 방송 강적들에 출연해 박근혜 5촌 살인사건을 주제로 이야기하는 도중에 이슈가 된 사건들 말고도 의문사가 더 있으며 자신도 해당이 될까 봐 두렵다라고 발언하였던 것이 재조명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일부 커뮤니티 및 네티즌들은 기사 댓글로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와 절친한 관계인 정태근 전 의원은 "(정두언 전 의원이) 오늘 밥 먹자고 했는데 내가 어머니께 간장게장 사줘야 해서 가야 된다고, 연락하겠다고 한 게 마지막 대화가 됐다"며 "그렇게 힘들면 밥 먹자고 하지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점심 먹었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하다"며 울먹였다. 그와 가까운 사이였던 김용태 전 의원도 "지난 주에 안부 전화를 할 때만 해도 극단적 선택을 하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정두언 전 의원이 부인과 함께 운영하던 일식집은 한동안 영업을 중지하기도 했다. 

다만, 생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4선 도전에서 낙선하고 아내와 이혼을 했고, 낙선의 아픔 등으로 인해 우울증을 앓았으며 자살시도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측근에 따르면 우울증 극복을 위해서 몇 시간씩 산행을 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었다고 한다. 

 

정두언 빈소
정두언 빈소

 

정두언 전 의원 측근인 김용태 전 의원이나 정태근 전 의원, 그리고 정치계에선 라이벌이었지만 이후 방송 활동 등을 통해서 친해진 정청래 전 의원도 현장에 찾아가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정청래와 함께 판도라에 자주 (반고정으로) 출연했고 정두언의 고등학교 동창 절친이자 대학교때까지 친구였던 탁석산 박사는 다음 판도라 방송에 출연해서 10대 시절부터 정치인이 되기까지 정두언을 추모하는 이야기를 했다.

SBS 정치쇼 프로듀서겸 DJ이기도 한 이재익 프로듀서는 2019년 7월 17일 방송 전 오프닝을 통해 어제 방송의 추억을 되새기며 애도를 표했으며 이재익 프로듀서는 이날 울음을 꾹 참고 진행을 계속 이어가면서 방송 이후 신촌세브란스 병원에 찾아갈 예정이라고 한다.

여야 정치권도 한목소리로 애도를 표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유서의 전체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김용태 전 의원에 따르면, 유서에는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고 한다. 타살의 흔적이 전혀 없기에 유족의 요청에 따라서 부검 없이 장례 절차를 밟을 거라고 한다.  유서에 대한 내용이 언론에 좀 더 공개됐는데, 가족에게 미안하고 사랑하며 장례식은 조용하게 치르고 돌아가신 어머니 곁에 화장해서 묻어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사족으로 진보층에서는 노회찬 전 의원의 1주기가 정확히 1주 남은 날에 타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동기는 달랐고 당도 달랐지만, 좌우 불문하고 훌륭한 정책들로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두 정치인이 모두 생을 자살로서 안타깝게 마감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함을 느낀 사람들이 꽤 많았다.

 

 

신촌에 있는 세브란스병원에 빈소가 차려졌다. 각계 인사들과 사람들의 조문이 끊이질 않았다. 생전에 그와 가까웠던 정태근, 남경필, 김용태 등이 조문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손학규 전 대표를 비롯해 유승민, 정병국, 이혜훈, 오신환, 김관영, 하태경, 지상욱, 유의동, 이태규 등 바른미래당 의원들도 조문했다. 여권에서도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전 원내대표, 이종걸, 우상호, 김부겸 등 많은 의원들이 조문했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김병준 전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 정몽준 전 의원, 나경원, 김성태, 장제원 의원도 조문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노영민 전 대통령비서실장, 강기정 전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도 조문했다. 조국 민정수석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한때 같은 친이계였던 친이계 좌장 이재오 자유한국당 상임고문도 빈소를 찾아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가 출연했었던 MBN 시사교양 프로그램인 판도라에서 MC를 맡고 있는 배우 김승우도 빈소를 찾아 조문하면서 끝내 눈물을 터트리기도 했다. 또한 같이 단짝처럼 방송에 같이 출현했었던 정청래 전 의원은 장례기간 내 빈소를 찾았고, 본인의 SNS에 정두언 전 의원을 위한 헌시를 남겼고, 상심이 컸던 탓인지 발인이 끝날 때까지 모든 방송출연을 불참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이재오 전 의원과 자신의 변호사를 통해 고인의 죽음에 대해서 안타깝다는 심경을 밝혔다. 정두언 전 의원과 다시 만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안타깝다고 했다. 이 전 대통령은 현재 조건부 보석 상태이기 때문에 조문은 못하는 대신 근조 화환을 빈소에 보냈고, 유족들은 이 전 대통령의 화환을 영정 옆에 놓았다. 이 전 대통령 뿐만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화환 또한 영정사진 옆에 놓였다. 

2019년 7월 19일 오전 발인이 엄수되었으며, 화장 후 유해는 오후 1시 성남시 분당구 분당메모리얼파크에 안장되었다.

 

 

정두언 선거 이력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서대문 을

31,304 (42.68%) 낙선 (2위)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39,734 (45.59%) 당선 (1위)

초선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36,931 (59.07%) 당선 (1위)

재선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35,380 (49.39%) 당선 (1위)

3선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33,852 (39.87%) 낙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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