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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야기/정치 / / 2022. 7. 17. 23:43

김두관 의원 나이 학력 이력 재산 고향 프로필


대한민국의 정치인. 이장에서 시작해 군수를 거쳐 행정자치부 장관과 경상남도 도지사 그리고 국회의원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의 인물로, 노무현 정부 시절 초대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임명돼 친노 정치인으로 분류되는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며,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는 무소속 신분으로 경남지사 선거에 출마해 53.5%의 득표율로 당선되는 기염을 토해 예전에는 민주당의 대선 주자감으로 거론되던 사람이었다.

 

김두관 의원 나이 학력 이력 재산 고향 프로필

 

김두관 프로필
김두관

 

김두관

金斗官 | Kim Doo-kwan

 

출생

1959년 4월 10일 (63세)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

 

거주지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풍무자이

경상남도 양산시 삼호동 웅상신도시 푸르지오

 

본관

경주 김씨

 

재임기간

제38-39대 경상남도 남해군수

1995년 7월 1일 ~ 2002년 6월 30일

제5대 행정자치부 장관

2003년 2월 27일 ~ 2003년 9월 18일

제34대 경상남도지사

2010년 7월 1일 ~ 2012년 7월 6일

 

 


2012년 18대 대선 경선에 출마하려고 경남지사직을 내던지는 정치적 자살 행위이자 경남도정을 저버리는 타살 행위를 저지른 데다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문재인 당시 후보와 경쟁할 때 보인 일방적 비방에 가까운 그의 행보가 두 사람 간의 아름다운 경쟁을 기대했던 친노 성향 지지자들로부터 큰 실망을 사면서 정치적 고난기를 겪어야 했다.

 

김두관 의원

 

그 뒤 지난 2014년 7.30 재보선에서 도전했다가 떨어졌던 곳인 경기도 김포시에서 20대 총선 때 재도전해 당선되면서 가까스로 재기의 기회를 잡았다. 그 덕에 대한민국의 제20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또한, 21대 총선에서 당의 요청이자 자신의 선택으로 김포를 버리면서 양산시 을 선거구에 도전하였고, 당선되어 재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2021년 더불어민주당 제20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하고 있었다가, 2021년 9월 26일에 경선후보를 사퇴하며 이재명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김두관 생애 고향 학력 이력

유년기 ~ 이어리 이장에서 남해군수가 되다.

1959년 4월 10일,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에서 가난한 어부의 5남 1녀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해외로 돈벌이를 나간 형들을 대신해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하는 등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남해종합고등학교(현 남해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국민대학교 어문계열에 합격했으나 등록금 문제 때문에 진학을 포기했고, 이 후 경북전문대학교 행정과를 거쳐 동아대학교 정치외교학과로 편입해 졸업한다. 대학 시절 동생 김두수와 함께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고향 남해로 낙향해 민중의당 후보로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경남 남해군-하동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5%도 채 되지 않는 득표율로 민주정의당 박희태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이 후 고향 이어리의 이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여러가지 활동을 통해 기반을 쌓아나갔고, <남해신문>이라는 지역 신문사를 설립해 운영하며 신망을 쌓았다. 1995년 치러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남해군수로 당선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당시 만 36세로 전국 최연소 지방자치단체장이었으며, 지금까지도 선거로 선출된 지방자치단체장으로는 최연소 기록이 깨지지 않는 중이다.

이후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국민승리21의 지원을 받는 무소속 후보로 출마해 당선에 성공하여 재선 남해군수를 지냈다.

영화 이장과 군수가 실제로 이어리 이장을 거쳐 남해군수가 된 김두관을 모티브로 했다는 설이 있다.

 

국회의원 김두관

 

재야 탈출기

민선 2기 남해군수 임기가 끝나갈 무렵인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경상남도지사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노무현을 만난 후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했다. 새천년민주당 소속이었던 상태에서 지역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났고 결국 17%의 저조한 득표율로 낙선했다. 상대 후보였던 한나라당의 김혁규가 넘사벽이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당시 김혁규는 무려 74% 이상의 득표율로 김두관을 개박살냈다.

이후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후 정권 초대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취임했다. 43세로 민주화 이후 최연소 장관이었다. 문재인의 저서인 '문재인의 운명'에 따르면 당시 장관직 수행평가에서 1위를 여러차례 차지할 만큼 장관직 수행을 잘 했다고. 그러나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그의 장관직 수행에 대해 크게 부정적이었으며, 한총련이 미군기지에 침투하여 불법시위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국회에서 해임건의안을 제출했고, 결국 해임건의안이 통과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해임건의안을 거부하고 그의 장관직을 지킬 것이라고 했으나, 계속 논란이 되자 그는 스스로 사의를 제출하면서 결국 장관직에서 퇴임하였다. 사실, 그동안 국회에서 해임건의안이 통과된 경우는 여야를 불문하고 스스로 사임해야되는 것이 관례다. 승복하지 않으면 역풍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불명예스럽게 퇴임한 셈이 되었으나, 민주당계에서는 그는 한나라당의 딴지로 인해 피해를 본 것이라는 시각이 강해지면서 차츰 민주당계에서는 떠오르는 정치인으로 올라섰고, 열린우리당이 생기자 바로 합류했다. 그리고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의 공천을 받아 남해군-하동군 지역구로 출마하였고, 당시 탄핵 논란으로 열린우리당에 상당히 유리하다는 평이 있어 어느때보다 당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선거운동 초반 여론조사에서도 20% 가까운 우위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정동영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이 보도된 이후 샤이보수 층이 결집하면서 끝내 한나라당 박희태 후보에게 약 7000표 차이로 석패했다. 2년 뒤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경남지사에 다시 도전했으나, 한나라당의 김태호 도지사에게 압도적으로 밀리며 낙선. 2년 뒤에는 지역주의를 의식했는지 무소속으로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같은 지역구로 출마했지만 마찬가지로 한나라당의 여상규 후보에게 밀리며 40%의 득표율로 낙선하였다.

이로서 2년 주기로 걸친 4번의 선거에서 연속으로 2위로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3수 끝의 경상남도지사 당선

그러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마찬가지로 경상남도지사에 도전했고, 무소속 신분이었던 그는 민주당,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후보와 단일화되어 대통합 야권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53% 득표율을 얻으며 당선에 이달곤 후보를 꺾고 성공했다. 본인으로선 도지사 선거만 3번의 도전 끝에 당선되었다. 중앙에서 활동하던 이달곤에 비해 오랫동안 PK에 몸담아온 김두관이었기에 지역밀착형 후보라는 태그가 승리의 큰 요인이라는 분석이다. 더욱이 2006년을 기점으로 세를 보이기 시작한 PK의 진보층도 큰 활약을 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인권변호사였던 문재인이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경남 전역을 누비며 김두관이 당선될 수 있도록 총력지원을 해준 것도 당선의 원동력이었다. 이로써 지역주의 타파의 아이콘이 되면서 거물급 정치인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문재인과 강기갑 등 여러 야권 명망가들의 격려를 받으며 2010년 7월 1일 경상남도 도지사로 취임한 김두관은 자신과 야권단일후보를 놓고 경쟁했던 민주노동당 소속의 강병기를 정무부지사로 임명하며 협치 행정을 실천하였다. 또한, 2012년에는 새누리당 허남식 부산시장과 일일 교환근무를 하기도 했다. 이어 4대강 사업을 선명하게 반대하며 이명박 정부와 각을 세웠고, 무상급식을 통과시켰다.

 

김두관 정치 활동

 

무리수였던 대통령 도전

이후 다시 민주당에 입당하여 무난히 도정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재임 2년차인 2012년 경남지사직을 뜬금없이 돌연 사퇴하고 제18대 대통령 선거 경선에 출마하였다. 이로 인해 경상남도 진보층 사이에서는 배신감이 쌓이게 되었다.

경선 결과, 손학규에게도 밀리며 14%의 득표율로 3위라는 초라한 성적을 받아야 했다. 자세한 경선 과정은 여기로. 같은 PK를 기반으로 하는 문재인 후보가 월등히 지지율이 높은 상태라 후보로 선출될 가능성이 애초에 높지 않았는데, 도지사직을 뛰쳐나와 무리하게 경선에 참여하여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꼴이 되어버렸다는 비난을 받았고, 결국 대선과 병행하여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의 홍준표가 당선되면서 어렵게 얻은 경남지사 자리를 다시 새누리당 쪽에 헌납한 꼴이 되어버려, 야권 지지자들에서까지 평생까임권을 얻게 되었다. 그의 이름을 거꾸로 나열한 '관두김', 사퇴하고 도망쳤다고 '런두관'이라는 불명예스런 별명까지 생긴 것은 덤이다.

경선에 참여하는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 치고 왜 경남지사직을 사퇴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사실 안철수의 국회의원 사퇴도 그렇고 대선후보 또는 경선후보 역할과 국회의원, 도지사직을 동시에 수행하면 한 쪽에 소홀하게 된다는 나름의 명분이 있기는 하다. 실제로 안희정, 남경필 등이 대권도전으로 인한 도정소홀 문제로 약간 논란이 있기도 했다. 문제는 그러한 명분보다 도지사를 다시 뽑는데 드는 시간과 비용, 그리고 자신을 뽑아준 도민들에 대한 신의 문제가 더 크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두관 이후로는 한동안 경선출마를 이유로 시/도지사, 넓게는 기초단체장직이나 지방의회 의원직을 사퇴하는 사례가 없었는데, 2020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서 정의당 소속 구의원이던 임한솔이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구의원직을 사퇴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키워준 정의당마저 탈당해 버렸다. 물론 임한솔의 경우는 경선출마가 아닌 국회의원 선거 출마가 목적이었지만, 정작 자신이 새롭게 둥지를 튼 민생당에서조차 비례대표 후보 공천을 받지 못해 임한솔의 무리수는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홍준표, 안희정, 이재명 등이 다 경선단계에서 단체장직을 유지했다. 이후 2021년 8월 2일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국민의힘 대선후보 경선 참여를 위해 제주도지사직을 사퇴했는데 김두관에 비해서는 비판 여론이 크지는 않다. 임기가 1년 남짓 남은 시점이라 재보궐선거를 굳이 치루지 않아도 되기도 하고 이미 도지사직을 7년 가량 수행한 이후이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무리수를 뒀던 이유에 대해 당시 여러 말이 나오기도 했다. 그 중 하나는 정치환경적인 문제. 당시 경남의 각종 단체들의 심각한 알력, 도의회, 공무원 등의 비협조적 태도, 이명박 정부의 지나친 견제 등 여러 이유로 인해 그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도정을 수행할 여건이 아니었다. 즉 이래저래 끌려다녀 성과 안 나올게 뻔한 도지사직을 계속 하는 건 본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판단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때마침 대통령 후보경선이 있었고 이를 명분삼아 도지사직을 사퇴함으로써 추후를 도모하고자 했다는 것.

 

또 다른 설로는 프레임에 말려 들었다는것. 2010년도 이후부터 일부 매체들을 통해 특정 정치평론가, 혹은 여권의 유력한 관계자라는 불분명한 출처를 통해 김두관이 야권의 차기 대권주자(일 지도 모른다)라는 말이 계속해서 흘러 나왔었는데, 이를 근거로 그의 뜬금없는 “대권도전” 선언이 여권 혹은 그 쪽과 가까운 정치평론가들의 지속적인 프레임 설계였으며 여기에 제대로 낚인 것이다는 추측이다.

물론 이제는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일이기도 하고 PK에서 화려하게 복귀한 마당에 굳이 도지사직 사퇴의 진짜 이유가 밝혀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 김두관 본인이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하지 않는이상 이 사안이 크게 불거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 만약 이 사안이 다시 불거진다면 추후 정치적인 일정자체가 꼬일 수 있다. 전자가 사실이라면 고작 지역 수준에서의 알력 여소야대 국면도 이겨내지 못하고 뛰쳐나간 사람이 되고, 후자가 사실이라면 고작 정치평론가들이 하는 평론정도에 휘둘려서 사리분별도 못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재야로

졸지에 다시 재야가 되어버린 그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초청으로 독일에서 1년 간 연수를 받은 뒤, 2014년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하지만, 지역구는 당초 활동했던 PK가 아닌 경기도 김포시로 정해졌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지역으로 나서자 낙하산이나 뜨내기라는 비판이 생겨났지만, 본인으로선 대권 도전을 위해서는 수도권에 힘을 뻗어야 한다는 정치적 계산이 들어간 수였다.

거주지도 김포로 완전히 옮기고 본인은 분투를 했지만, 지역 토박이들은 PK 그 자체라 볼 수 있는 그를 좋게 볼 리가 없었고 그나마 지역 정체성이 덜한 신도시 지역에 승부수를 둬야 했는데, 그것마저도 승리 여부에 의문을 둬야 했다. 결국 경쟁상대인 새누리당의 홍철호 후보에게 밀리며 4년만에 낙선의 쓴맛을 맛봐야 했다. 예상대로 농촌지역에선 홍철호에게 몰표가 쏟아졌고, 신도시에서도 패배하여 40% 득표율로 선거를 마감했다. 경남지사 당선 배경에는 PK 지역밀착형 후보였던 점이 상당히 먹혔던 것에 비해 이번 선거에서는 오히려 그 점이 낙선의 큰 요인이 되어버리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김두관 정치 인생

 

20대 총선: 두 번째 재기에 성공하다

이후로도 경남으로 주소를 옮기지 않고 계속 김포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다. 점점 김포사람으로 되어가는 중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포에서 출마하기 위해 준비해오고 있는 듯 했다. 마침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김포시 선거구가 갑/을로 분리되면서 자리가 하나 더 늘었고, 김포시 갑 선거구 공천을 받아 출마하게 되었다. 새누리당 측의 상대는 김동식 전 김포시장. 더불어민주당에서는 PK 출마를 기대했지만, 본인은 대권도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김두관 본인 말로는 경남지사 자리에서 중도 하차해 다시 보수정당의 홍준표에게 헌납한 그 원죄 때문에 못 내려가고 있다고 한다.

현재까지 나온 관련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새누리당의 김동식 후보보다 5~10% 안팎의 우위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포시(갑)이 도시 인구가 많아 야권세가 상대적으로 강하다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하는 듯. 결과를 두고 볼 일이지만, 일단 2014년 재보궐 선거 때보다는 해볼만한 승부로 여겨진다. 김동식 후보는 김두관에 비해 무게감이 떨어지는데다 김포시장 시절 권력형 비리(!)로 처벌받은 전과가 있다.

여담으로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 지역 출마자 중 91년 이후 역대 공직선거 출마횟수가 8회로 가장 많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포함하면 9회이며,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마치면 10회가 된다.

제19대 대통령 선거 선거운동기간에 경남에 내려가서 똑같은 내용으로 고해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대충의 내용은 '죄송하다 내 잘못이다'로 시작해서 '중도사퇴는 잘못됐다' → '내가 관둬서 홍이 됐다' → '나는 준비가 미흡했다' 라는 순서로 갔다. 그 다음 문재인 후보를 지지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마무리. 여기에 홍준표를 벌해달라는 말은 덤. 전형적인 사과문의 한 사례이다.

 

 

21대 총선: PK에서의 신승

머니투데이 기사에 따르면 민주당 지도부에서 PK 지지율이 안 좋아지니까 21대 총선에서 다시 PK로 차출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 양산 갑/을 중에 차출될 구상이었는데, 김두관 본인은 김포시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고사했다.  하지만 계속된 당 지도부 및 친문 그룹의 설득과 권유로 양산 갑/을 중 하나로 다시 PK로 돌아가는 것으로 마음을 정했다고 한다. 

2020년 1월 23일, 양산시 을 출마를 결심하였다. 현역 서형수 의원이 불출마 선언을 한 곳이다.

2월 17일, 양산시 을 전략공천이 공식적으로 확정되었다. 이후 20일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부산·울산·경남 지역 선거를 지휘할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21일에는 양산시 을 선거구에 더불어민주당 예비후보로 등록했던 임재춘, 박대조 예비후보가 김두관 지지를 선언했다.

한편,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PK 수비대장을 자처하며 양산 을에 출마하겠다고 나서면서 전직 경남도지사 간의 빅매치가 성사될 것으로 보였으나, 홍준표가 미래통합당 공천에서 컷오프당한 후 대구광역시 수성구 을에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 그 홍준표 대신 김두관의 선거 상대로 나온 적수는 나동연 前 양산시장이었다.

한 마디로 체급이 센 홍준표가 아닌 나동연이 나온 덕분에 선거가 조금 수월해졌다. 실제로도 나동연은 웅상지역에서 민심이반을 당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기는 과정이 결코 수월하지 않았다. 웅상지역에서 반쯤 이기고 양주동에서 적은 표차로 이기면서 겨우 당선되었다. 만약 홍준표와 맞붙었더라면 낙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홍준표 예비후보가 과거 경남지사 시절의 마이웨이 행보로 인해 지역에서 안티가 꽤나 많았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완전히 불리한 싸움은 아니었다. 홍준표 후보가 고향 출마가 아닌 대구 출마를 선택한 이유도 경남에서는 썩 유리하다고는 볼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치열한 접전끝에 경남 양산시 을에서 미래통합당 나동연 전 시장을 꺾고 당선되며 8년 만에 돌아온 격전지 경상남도에서 재선 국회의원이 되는 데 성공했다. 본인이 민주당 선거를 지휘했던 PK 지역에서 민주당 의석이 10석에서 7석으로 줄었지만, 2019년을 기점으로 민주당에 싸늘해졌던 지역 민심을 생각하면 낙동강 벨트를 접전 끝에 수성하면서 선방했다는 평가. 아울러 그의 정치 커리어 최초로 민주당 당적을 갖고 경남에서 당선되는 기쁨을 누렸다.

총선 직후 오거돈 부산시장이 성추문으로 사퇴하는 일이 벌어지자, 민주당 내에서 내년 있을 보궐 선거에서 후보를 낼 것이냐, 내지 않을 것이냐를 가지고 격론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심판을 받더라도 잘못했으면 잘못한 대로, 잘했으면 잘한 대로, 선거로 심판받는 것이 민주주의라면서 후보를 공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선 성공 이후 이용수 할머니의 폭로에 의해 촉발된 윤미향 당선인 및 정의연에 대한 의혹공세,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논란, 부산시장 재보궐선거 무공천 여부, 북한에 대한 전단살포, 윤석열 검찰총장의 거취와 관련해 강경한 입장을 내고 있다. 특히 윤미향 당선인 및 정의연 관련 의혹 제기에 대해 "친일, 반인권, 반평화 세력이 최후의 공세를 하고 있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 한 시민단체가 나서서 고발하고, 검찰이 수사하고, 언론은 검찰의 입을 빌려 밝혀지지 않은 의혹을 단독이라 연일 보도할 것이다.", "윤미향 향한 비판은 보수 망나니의 칼춤이다."와 같은 반응을 내놓으며 윤 당선인을 강력히 옹호하고 이런 의혹은 모두 토착왜구의 저열한 공격이라고 일축했다. 이러한 논란 전체를 '윤 당선자 길들이기'로 정의하기도 했다. 윤미향과 김두관은 같은 남해군 출신 동향인이기도 하다.

 

김두관 대통령 도전

 

두번째 대통령 도전

그러던 중 2021년 초 갑작스럽게 대권후보로 청와대가 낙점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하지만 민주당의 부울경 지역 의원들의 의견은 그냥 가담항설. 쉽게 말해, 그냥 썰이 아니냐는 추측 또는 경우의 수를 넓혀보자는 의미라고 하는 듯. 무엇보다 또다시 대선 출마를 준비하려면 어렵게 당선된 국회의원직을 내려놔야 하는데 이미 과거 도지사직을 사퇴해 꽤 오랜 기간 고생했던 것을 감안해보면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아보인다. 만약 이번에도 도중 사퇴를 선택했다가 경선에서 패한다면 정치적인 생명이 사실상 끝장 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4월 26일, 정말로 대선 도전을 공식화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작년 가을부터 대선 출마의 생각을 굳히고 준비하고 있었다면서 오는 6월에 출마 선언을 하겠다고 밝혔다 과거의 경험으로인해 사퇴는 하지 않고 출마했다.

6월 12일에 출판기념회를 열면서 문재인 대통령을 큰형님이라고 호칭하면서 2012년 대선 경선과정에서 문재인 당시 후보를 공격했던 일을 사과한다고 발언했다. 이번 대선에서 친문세력을 자기쪽으로 끌어오려는 시도로 보인다.

 

7월 11일, 제20대 대통령 선거 더불어민주당 후보 예비경선 결과가 발표되었다. 6명으로 컷오프되어 남은 사람만 본경선에 진출하는데, 지지율이 극히 낮은 양승조와 최문순이 컷오프되며 이재명, 정세균, 이낙연, 박용진, 추미애와 함께 본경선에 진출하였다.

7월 19일에 국립 5·18 민주묘지를 방문해서 전날 윤석열이 참배하며 만지고 간 묘비를 더럽혔다며 손수건으로 닦는 기행을 보였다.

9월 4일부터 더불어민주당의 본경선이 시작되었는데, 모두의 예상과 같이 여권의 강력 대권 주자로 꼽히는 이재명의 1위 독주, 이를 추격하는 이낙연의 존재로 인해 인지도가 낮은 박용진과 함께 득표율 하위권을 달리고 있다. 심지어 박용진에게도 밀리며 꾸준히 최하위였는데, 박용진이 민주당에서의 커리어가 1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정치인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꽤나 자존심 구기는 결과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두 사람의 득표율이 거기서 거기긴 한데 대통령 도전은 이번에도 무리수였던 것이다. 본인으로서는 부울경의 지지를 바랐겠지만 부울경 역시 이재명 후보의 손을 들어주면서 크게 도움을 받지 못했다.

결국, 2021년 9월 26일에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며 경선에서 하차하였다.

 

 

제20대 대통령 선거 이후

이재명 후보 지지선언 이후에는 이재명 후보의 대선 캠프에 합류한것 말고는 별다른 움직임은 없다. 현재는 국회의원 3선을 노리는 것인지 지역 현안에 좀 더 치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선이 이재명 후보의 패배로 끝난 뒤, 3월 11일 본인의 페이스북에 이재명 후보를 비대위원장에 올려야한다고 주장하며 문재인 정부와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지 않았던 민주당 권리당원들을 거세게 비난했다.

하지만 윤호중 비대위가 예정대로 출범하자 한발 더나가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공개 저격하면서 이재명 비대위 구성을 위한 서명 운동을 진행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재명 전 지사의 측근들까지 이재명 조기 등판론에 부정적인 의사를 나타내고 있는데, 한 측근 의원은 "이재명 전 후보의 체력이 완전히 방전됐다"며 "가까운 인사들과의 만남도 이번 주 들어 재개할 듯하다"고 했다고 하며 민주당 의원들의 채팅방에선 '이재명 비대위 체제'를 주장하는 김 의원에게 "지나치다"는 의견을 공개적으로 개진한 의원도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당내 일부 반발에 본인 페이스북을 통해 의견을 굽히는 했더니, 오히려 3 19일에는 주장을 강화해 이재명 후보를 1971 대선에 나섰던 당시 신민당 김대중 후보에 비교하면서 조기 등판을 촉구하고 사퇴 요구를 거부한 윤호중 비대위원장을 거세게 비난했다.

 

김두관 여담

 

김두관 여담 일화

통영시 출신인 前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인 김호가 대표적인 지지자인데,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선거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었다.

영화 이장과 군수의 두 인물이 그의 행적을 모델로 만들어졌다.

제21대 국회의 장신 의원으로는 180cm인 박용진, 홍문표,기동민 181cm인 김두관, 이형석 182cm인 송영길,소병훈 183cm인 곽상도,이상헌 184cm인 윤영석, 장철민, 정진석, 185cm 한준호, 186cm 김태호와 김홍걸, 최장신인 187cm 김웅이 있다.

1999년 MBC의 성공시대에도 출연했는데 재연 부분을 연기한 배우가 다름 아닌 배도환. 실제 나이는 김두관 본인이 5살이나 더 많지만 외모가 가히 도플갱어 직전 수준으로 나왔다.

야당에게 미국 관련 인맥이 있으니 백신을 구해오라고 하기도 했다.

MBTI ESFJ라고 한다. 

 

 

김두관 재산

2021년 3월 기준으로 5억 6325만 6천원을 신고했다. 이는 작년 대비 2천만원 가량 증가한 금액이다.

 

김두관 재산
김두관 재산

 

김두관 선거 이력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남해·하동

9,783 (3.22%) 낙선 (3위)

 

1995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남 남해군수

무소속

21,605 (55.61%) 당선 (1위)

초선

 

1998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남 남해군수

18,612 (53.73%) 당선 (1위)

재선

 

2002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상남도지사

315,008 (16.88%) 낙선 (2위)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남해·하동

26,747 (41.96%) 낙선 (2위)

 

2006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상남도지사

343,137 (25.41%) 낙선 (2위)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남해·하동

무소속

24,966 (40.61%) 낙선 (2위)

 

2010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상남도지사

807,698 (53.54%) 당선 (1위)

초선

 

2014

상반기 재보궐선거

경기 김포

38,858 (43.10%) 낙선 (2위)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김포 갑

49,758 (59.30%) 당선 (1위)

초선

 

2020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양산 을

44,218 (48.94%) 당선 (1위)

재선

 

 

경남에서 당선될 때는 무조건 무소속이었다. 경남, 그것도 무려 서부 경남에서 민주당계 정당 하기 참 힘들다는 반증인데 사실 고향인 남해군에서는 군수 시절 주민들과의 소통이 잘되었던 덕분에 지지세가 상당했다. 실제로 2002년 지방선거 이후에도 낙선한 선거에서 전부 선거비용 보전선인 15%를 훌쩍 넘겼을 정도. 특히 남해 지역 한정으로 2006년과 2010년 지방선거 때는 무려 각각 58.9% / 66.2%, 2008년 총선에서는 67.7%를 얻었다.

 

그러다가 경남을 탈출하고 나서야 비로소 2016년 총선에서 당적을 가지고서 당선되었다. 그리고 21대 총선에 경남으로 돌아와서 처음으로 민주당 당적으로 출마해 양산시 을 지역구에서 승리, 재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행운이 따랐는데 미래통합당에서는 과거 양산시장이었으나 양산시장 치세기간동안 구 웅상읍 지역의 주민들에게 영 좋지 않은 대우를 받아온 나동연을 넣은 덕분에 이 정도로 더불어민주당의 험지에서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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