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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야기/정치 / / 2022. 11. 30. 15:42

정치인 박찬종 나이 고향 학력 이력 프로필 (법조인 출신 전 국회의원)


대한민국의 법조인이자 정치인.

 

정치인 박찬종 나이 고향 학력 이력 프로필 (법조인 출신 전 국회의원)

 

박찬종 프로필
박찬종

 

박찬종

朴燦鍾 | Park Chan-jong

 

출생

1939년 4월 19일 (83세)

경상남도 김해군 주촌면 선지리

(現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선지리)

 

본관

밀양 박씨

 

우당(尤堂)

 

 

배우자

정기호

 

자녀

1남 2녀

 

학력

부산대신국민학교 (졸업)

경남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54회)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 (학사)

국방대학교 (행정학 /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 석사)

 

병역

대한민국 해군 대위 만기전역 (군법무관)

 

종교

가톨릭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신체

172cm, 74kg, B형

 

약력

제12회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

제13회 고등고시 행정과 합격

제8회 계리사시험 합격

한국공인회계사회 회장

민주화추진협의회 인권옹호위원회 위원장

신한민주당 상임위원

신한민주당 전임위원

신한민주당 인권옹호위원회 위원장

통일민주당 전임위원

통일민주당 정책위원회 위원장

신정치개혁당 총재 겸 최고위원

신민당 최고위원 겸 원내총무

신한국당 상임고문

신한국당 전임고문 겸 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

한나라당 법률행정특임촉탁위원

국민신당 전임고문 겸 최고위원

국민신당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홍익대학교 초빙교수

 

 


박찬종 생애 고향 학력 이력

정계에 입문하기까지

1939년 4월 19일, 경상남도 김해에서 출생하였다. 경남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1958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진학하였다.

대학에 재학중이던 1960년 제1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였고, 이듬해인 1961년 제13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한 후 1962년 제8회 계리사시험까지 합격하였다.

군법무관(해군 대위)으로 병역을 마치고 1971년까지 검사로 근무하다가,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의 공천을 받아 부산직할시 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당 김영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박찬종 정치활동박찬종 정치이력

 

신선한 이미지로 돌풍을 일으키다

1973년에 유신헌법으로 치뤄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민주공화당 후보로 부산직할시 서구-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김영삼 후보와 동반 당선,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9년 10.26 후 공화당이 야당할 각오로 국민 앞에 사죄하고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풍운동을 일으켰으나, 결국 이듬해 4월 공화당에서 제명당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부산직할시 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군사정권의 강압에 의해 강제 사퇴당했다. 이후 그는 유신 정권에 가담했던 과거를 참회하는 저서 <부끄러운 이야기>를 내며 정치적으로 전향하였다.

민주화추진협의회 인권옹호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김민석, 허인회, 송영길 등 많은 학생운동가들을 변론하였다. 1985년 1월 신한민주당 창당 작업에 창당준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부산직할시 중구-동구-영도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합동연설회장에서 "전두환은 광주에서 양민 2,000명 이상을 학살하고 정권을 잡았다." 고 사자후를 토하는 결기를 보이면서 민주한국당 김정길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당시 이 선거에서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은 중선거구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산 12개 의석 중 겨우 3석을 얻는 대참패를 하였다.

 

1987년 김영삼과 김대중이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자 이에 동참하여 정책위원회 의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양김이 분열하자, 이철, 조순형, 홍사덕, 장기욱, 허경구 등과 함께 끝까지 후보단일화를 주장하면서 양김씨의 통합을 촉구하는 삭발시위를 하기도 했다. 단일화가 실패하자 통일민주당을 탈당하고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서초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3당 합당 이후 꼬마민주당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1991년 이기택 중심으로 꼬마민주당이 돌아가는 것에 불만을 가져 탈당하였다. 이듬해 1월 김동길과 함께 새한당 창당준비위원회를 설립하려 했으나 이탈하였고 본인의 신당을 창당하기로 결정한다.

1992년 신정치개혁당을 창당하고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6.4%의 득표율로 4위를 기록하였다. 언뜻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양김과 정주영이 출마한 선거에서 그만한 조직이나 자금 없이 올린 오직 박찬종 개인의 인기에 따른 득표율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대단한 것이다. 대권 경쟁자가 지금과는 비교하기 마땅치 않을 정도로 강력했는데, 사실상 민주진영을 대표했던 거물 두 명과 흙수저 신화를 쓰며 성공한 대표 경제인이 각축을 벌이는 와중에 얻은 결과. 이때의 인기 덕분에 그는 남양유업의 신제품 브랜드 우유 '다우'의 TV광고모델로 등장하기까지 한다. 이때 남양유업에서 내세운 슬로건 '무균질(無菌質) 우유'에 빗대어 '무균질 정치인'으로 자신을 홍보한 것이 꽤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켰다.

 

박찬종 활동박찬종 대선 출마

 

몰락

1994년 통일국민당 잔류파와 합당하여 신민당(1994년)을 창당하였으나, 각목 전당대회 파문으로 이미지에 상처만 남긴 채 탈당하였다. 1995년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초반에는 압도적으로 높은 인지도를 앞세워 지지율 1위를 달렸으나,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과 자유민주연합의 암묵적인 지원을 얻은 조순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이 당시 신민당에서 각목 전당대회로 앙금이 쌓여있던 김동길은 오로지 박찬종을 떨어뜨리기 위해 조순 선거운동에 가담했다며 박찬종을 가리켜 "무균질 인간? 웃기지 말라고 그래요. 뱃속에 병균이 와글와글해요"라는 비난까지 쏟아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에 전격 입당하여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이때 통영시 유세에서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처벌하지 않았다면 전라도 데모대들이 국가를 위기로 빠트렸을 것"이라는 지역감정 조장 발언으로 큰 비난을 받았다. 파문이 일자 박찬종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최대 피해자가 전라도 사람들이기 때문에 한 표현이었을 뿐"라고 해명했으나, 지역감정을 조장한 상식 이하의 발언으로 비난을 받았고 당시 5.18 민주화운동시민연합은 대국민 사과를 요구하는등 지탄을 받았다. 신한국당이 예상보다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전국구 의석을 18석 확보하는 데에 그쳐 21번으로 등록했던 박찬종이 낙선한 것은 덤.

1997년 신한국당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에 참여하였으나 중도에 경선을 포기하고 탈당했는데, 당시 대선 1년 전에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19.6%로 19.9% 였던 김대중 다음가는 지지도를 확보하고 있었으나 당내 기반이 전무했던 탓에 사퇴를 해야 했다. 이후 국민신당에 입당하여 이인제를 지지하였다. 1998년 7월 재보선에서 자신의 지역구였던 서울 서초갑에 출마하였으나 3파전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무색하게 8.7%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4위에 그쳤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의 창당에 참여하여 부산광역시 중구-동구 선거구에서 출마했으나, 한나라당 정의화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2년에는 이회창과 화해하고 이회창 후보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캠페인을 도왔으나, 이회창은 낙선하였다.

2002년 부로 독도의 주권이 일본에 넘어간다는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등 또다시 구설수로 잠시 주목을 받은적이 있다.

2004년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 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유기준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 후로는 사실상 정계를 떠나 본업인 변호사 활동을 하고 있다. BBK 주가조작 사건, 판사 석궁 테러 사건, 미네르바 사건, 동방신기 노예계약 사건, 주한일본대사습격사건 등을 담당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2013년 아시아경제연구원 이사장, 그리고 한국자산관리방송 회장으로도 취임했다.

2018년 7월 자유한국당의 비상대책위원장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2019년 유튜브에 '박찬종TV'를 개설하고 초반에는 당시 자유한국당에 비판도 했으나 현재는 양비론보다는 문재인 정부를 저격하는 영상만을 올리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을 김정은 추종세력이라고 몰아가는 수준.

2020년과 2021년에는 전광훈의 이른바 아스팔트 기독교 우파 무리와 어울리면서 전광훈이 창당 준비 중인 국민혁명당(가칭) 고문으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 전광훈 프로필 보러가기

 

박찬종 대통령 선거

 

박찬종 평가

1990년대 초~중반을 기점으로 대선후보로 나가 3김의 뒤를 잇는 정치인이라는 유망한 평가를 받으며 대중들에게 인지도를 얻는 등 전성기를 달렸으나 1994년 김동길과의 당권 싸움으로 인한 각목 테러 사건과 이듬해인 1995년 서울시장 선거에서의 낙선 이후로 점점 하락세를 겪었고 말년에는 이당 저당 돌아다니며 지역주의를 내세우는 그저그런 정치인으로 몰락해버렸다.

그래도 대선과 1998년 재보궐 선거를 제외하면 선거비 전액 보전에 해당하는 15% 이상은 항상 넘겼으며 이는 개인의 인기에서 오는 고정 지지층은 나름대로 건재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안철수와의 비교

"안철수 열풍의 1990년대 버전을 보여준 정치인"이라는 평가가 있다. 물론, 두 사람은 거대 양당 체제 속의 인물이 아니면서 신선하고 깨끗한 이미지로 돌풍을 일으켰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또 거대한 조직력이 미비하고 개인의 인기만으로 유력한 대통령 후보에까지 올랐으며, 양당체제 속에서 핍박을 받았다는 점에서도 비슷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정치활동과 방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분명히 있다. 박찬종은 33세에 국회의원 선거에 처음 출마했고, 35세에 국회의원에 당선했다. 그 뒤로도 정계은퇴하기 전까지 줄곧 정치활동을 했던 사람이라는 점에서, 의사-대학교수-기업인으로 크게 성공한 뒤에 정치에 입문한 안철수와는 차이가 있다.

또한 두 사람의 화법에도 차이가 있다. 박찬종은 직설적이고 돌직구 스타일의 화법으로 유명하지만, 안철수는 좋게 말하자면 조심스럽고, 나쁘게 말하자면 모호한 화법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정치인 박찬종

 

박찬종 선거 이력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3

41,128 (34.83%) 낙선 (2위)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2

72,999 (35.24%) 당선 (2위)

초선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2

85,439 (33.33%) 당선 (2위)

재선

 

1981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2

후보 사퇴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1

83,463 (31.97%) 당선 (2위)

3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서초 갑

27,584 (30.46%) 당선 (1위)

4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서초 갑

37,172 (38.68%) 당선 (1위)

5선

 

제14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1,516,047 (6.37%) 낙선 (4위)

 

1995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1,623,356 (33.51%) 낙선 (2위)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6,783,730 (34.51%) 낙선 (21번)

 

1998

7월 재보궐선거

서울 서초 갑

4,600 (8.71%) 낙선 (4위)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중·동

26,881 (31.71%) 낙선 (2위)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서

무소속

12,731 (18.76%) 낙선 (3)

 

> 전광훈 프로필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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