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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야기/정치 / / 2022. 3. 31. 23:30

김한길 아내 자녀 고향 재산 프로필 - 유력한 국무총리 후보


김한길 아내 자녀 고향 재산 프로필 - 유력한 국무총리 후보

 

김한길

金한길 | Kim Han-gil

 

출생

1952년 9월 17일 (69세)

일본 도쿄도

 

본관

김녕 김씨

 

현직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국민통합위원장

 

재임기간

제37대 문화관광부 장관

2000년 9월 20일 ~ 2001년 9월 18일

 

 

부모

아버지 김철 , 어머니 윤초옥

 

형제자매

형 김밝힘 (1948~2016)
남동생 김누리

 

배우자

최명길

 

자녀

장남 김유진 (1981~2007)
차남 김어진 (1998년생)
삼남 김무진 (2001년생)

 

학력

서울덕수국민학교(졸업)
대광중학교 (졸업)
이화여자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졸업)
건국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 / 학사)

 

병역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전역

 

신체

168cm

 

경력

중앙일보 샌프란시스코 지사장
제15대 국회의원(전국구 6번)
대통령비서실 정책기획수석비서관
새천년민주당 총재 비서실장
제16대 국회의원(전국구 13번)
제37대 문화관광부 장관
제17대 국회의원(서울 구로구 을)
제17대 국회 건설교통위원회 위원장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제17대 국회 국회운영위원회 위원장
제19대 국회의원(서울 광진구 갑)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국민의당 전임고문
살리는 선대위 새시대준비위원회 위원장

 


대한민국의 제15대~17대, 19대 국회의원과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정치인이자 소설가.

2대째 정치인이지만 온건 사회민주주의 성향인 아버지 김철과 달리 보수자유주의 성향을 가졌다. 김대중 대통령과 민주당계 정당에 몸담는다.

잘 나가는 베스트셀러 소설가로 이름을 건 방송 프로그램도 있었고 톱스타 최명길의 남편으로 술은 거의 못 섭취한 반면 담배는 하루 4갑까지 피워본 적이 있을 정도로 헤비 스모커다. 이 때문에 한 때 폐암으로 투병한 적도 있었다.

 

김한길 생애 고향 나이 학력 프로필 가족관계 아내 자녀

정치인이 되기 전

한국사회당, 통일사회당 당수를 지낸 혁신계 정치인 김철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친은 부친의 옥바라지, 야당 탄압 등을 온몸으로 받아냈지만, 세 아들이 같은 고생을 하지 않길 바라는 평범한 어머니였다고.

1952년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유치원까지 일본에서 다녔다. 귀국하는 선친을 따라 한국에 와서 사전을 펼치고 한글을 공부했다. 선친 김철은 1960년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 다시 일본으로 6년간 망명을 떠나 헤어져 살았다. 선친은 다시 귀국했지만 진보 정치인으로서 온갖 고초를 당했고 가족들도 어려운 삶을 살아야 했다. 김한길은 무뚝뚝한 아버지의 평화 통일,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이란 구호가 어린 마음에 별로 와닿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중앙여고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가, 1981년에 소설 '바람과 박제'가 문학사상에서 소설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했다. 그 해 이민아와 결혼한 직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82년 아들 유진을 얻었다. 김한길은 로스쿨 공부를 하는 아내를 외조하며 한국일보 미주지사에 기자로 취직했고 중앙일보 미주지사장까지 지낸다. 이민 생활을 1984년 '미국일기'로 써내기도 했다.

그러나 1986년 부부는 이혼한다. 김한길 본인은 이에 대해 '그때 그때의 작은 기쁨과 값싼 행복을 무시해 버린 대가'라고 회고했다.

이혼 후 귀국해 소설가, 기자, 방송인 등으로 활동했다. 특히 10년 가까이 작품 활동을 하지 못 한 한풀이를 하듯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1991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여자의 남자'는 총 300만 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였다.

이때 쯤 조영남이 부른 화개장터를 작사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화제가 됐다. 작곡 작사를 모두 조영남으로 협회에 등록하는 바람에 저작권료는 한 푼도 받지 못 했다. 그러나 조영남이 김한길 작사라고 본인 입으로 공식적으로 말한 적이 있다.

 

정치 입문

1991년 꼬마 민주당에서 서울 동작구 을 지구당 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신민주연합당과의 합당 후 14대 총선에 같은 지역구의 현역이었던 박실 의원에게 공천에서 밀렸고, 공천에 불복해 바로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에서 출마를 강행했으나 21.8%의 득표율(3등)로 낙선했다.

1993년 MBC <김한길과 사람들>이라는 토크쇼의 진행자로 인기를 끌었고 1995년에 톱스타 최명길과 재혼에도 성공했다.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게 된 그가 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신한국당(지금의 국민의힘)에 분당 지역구 공천을 신청했다는 설도 있으나 본인은 신청한 적이 없다고 한다. 때마침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로부터전국구를 제안받는다. 김대중 총재는 71년 대선 때 김철이 혁신, 진보계 표를 몰아줬던 인연이 있었다.

그러나 모친과 아내가 손사래를 쳤다. 특히 평생을 고생한 어머니는 아들이 남편처럼 야당 정치인이 된다는 사실에 몸서리를 쳤다고. 결국은 두 사람을 설득해 김대중 총재와 손잡고 전국구 공천을 받는다. 후보 6번으로 당선권이었고 그대로 당선됐다.

 

여당 시절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후보의 TV 방송 분야를 담당해 승리에 기여했다. 그는 대통령의 부름으로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 정책기획수석비서관을 맡으면서 전국구 의원을 사퇴한다. 최명길과 사이에서 첫 득남을 하는 경사도 있었다.

2000년 9월 박지원 전 장관의 뒤를 이어 문화관광부장관을 지냈다. 이어 둘째 득남을 하는 겹경사였다. 다만 이 해에 한솔그룹 조동만 부회장으로부터 1억 원의 불법 정치 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있었지만, 결국 여론조사에 활용한 바 있다. 2001년 3월, 북한을 방문하여 북한 문화상 강능수와 회담한 적이 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는 열린우리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구로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7대 국회 전반기 건설교통위원장직에 선출되어 활동했다. 이후 당 내에서 주승용, 강봉균 등의 보수성향 의원들과 같이 활동하면서 김한길계를 구성하게 되었다.

2006년 1월 정세균 원내대표의 산업자원부장관 입각으로 치뤄진 원내대표 선거에서 보수성향 의원들의 지지를 받아 원내대표에 당선되었다.

원내대표 취임시 사학법 재개정 양보 의사를 밝혔으나 당내 반발을 맞아 물러서게 된다. 그러나 당시 한나라당과의 교착 상태에서 국정 운영의 어려움에 봉착한 노무현 대통령이 당시 여야 원내대표였던 김한길, 이재오를 청와대로 불러 관련 여당의 양보를 권유하면서 어려움에 빠졌다. 김한길 원내대표는 당의 반발을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며 불만을 드러냈지만 결국 승낙했다. 시간이 흘러 2012년 18대 대선을 앞두고 열린 민주통합당 전당대회에서 이해찬 의원과 당대표 경선에 나섰을 때 사학법을 양보해준 건 김한길이라는 공세에 처했다. 김한길로선 억울한 측면이 있는 편.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를 지내며 참여정부의 2006년 지방선거를 주도했지만 실패했다.

 

다시 야당으로

2007년 17대 대선을 앞두고 여권이 매우 혼란스럽던 상황에서 뜻을 같이하는 의원들과 함께 열린우리당을 떠나 중도개혁통합신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다시 민주당과 합쳐 '중도통합민주당'의 공동대표가 되었지만 중도개혁통합신당계를 이끌고 대통합민주신당에 합류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다시 민주당이 떨어져 나간 것이 여러모로 대선에서 발목을 잡히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명문 버클리 대학을 졸업한 첫째 유진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돌연사하는 비극이 겹쳤다. 2008년 1월 6일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불출마와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4년 뒤인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광진구로 지역구를 옮겨 당선되었다. 그 직후 민주통합당 2대 당대표 경선에서는 이해찬 의원에게 지역별 대의원 선거에서는 이겼으나 모바일 투표 및 현장 투표에서 2위로 밀려 낙선했다.이해찬 의원은 친노결집 모바일투표(1637표차)로 승리했다는...

그러나 2013년 5월 4일 당대표 경선에서는 친노계 이용섭 의원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며 민주통합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후 당명을 민주당으로, 당의 상징 색을 파란색으로 바꾸었다.

2014년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의 분열이 예견되던 상황에서 안철수와 '제3지대에서 통합 신당을 창당한다'는 의견에 합의해 새정치민주연합을 출범시킨 뒤 안철수와 공동대표에 취임했다.

이 사건이 김한길이 주도적으로 정개 개편에 뛰어든 여러 사건 가운데 가장 성공한 사건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당시 후일의 20대 총선과 같은 3자 구도가 가시화 되던 상황에서 깜짝 합당을 선언한 셈이라 정국은 급변했다. 밖으로는 새누리당의 선거전략이, 안으로는 친노 주류의 주도권 확보가 흔들린 셈이었다. 일종의 친위 쿠데타였던 셈인데, 일단 선거가 급했던 만큼 문재인 전 후보 등의 추인을 받아 순조롭게 합당은 진행되었다.

그러나 합당의 명분이었던 기초공천 무공천에서 '회군'해야했고, 세월호 대참사 정국에서 열린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광주광역시장 전략공천 문제로 호남의 상당한 비토를 받아야 했다. 결국 세월호 참사 정국에서 치러진 지방선거였는데도, 광역단체장에서만 가까스로 9:8로 이기고, 기초단체장에서는 새누리 117: 새정치 80으로 패배하여 사실상 무승부를 결과로 받아들었다.

그러나 잠시 안정된 입지는 역대 최대 규모의 재보궐선거 2014년 7.30 재보궐선거에서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 문제로 뜨거웠던 정국에서 치러진 이 선거는, 선거 전략의 부재와 잘못된 전략공천 때문에 새정치민주연합이 새누리당에 11:4로 완패하는 것으로 끝났다. 특히 비리로 구속된데다가 자기 지역 예산을 스스로 깎어서 평이 나빴던 서갑원을 원 지역구인 순천-곡성에 그대로 공천시켰다가, 새누리당 이정현을 당선시켰다.

결국 재보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안철수 공동대표와 함께 당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이 때 김한길 대표는 안철수 공동대표는 대표직에 남겨두려고 했었지만 안철수 대표도 물러났다고 전해진다.

7.30 재보선 참패 이후 한동안 뉴스에 오르지 않다가, 성완종 리스트 사건 당시 자살한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아 검찰의 수사선상에 올라가는 바람에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김 의원은 성완종 리스트에 올라 있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검찰은 거의 모든 인간관계를 돈으로 다루었고, 여야 인사 모두에게 뇌물을 줬다는 의혹을 받았던 성 회장이 자살하기 전 날 제1야당 대표이기도 했던 김한길 의원을 냉면집에서 불러내 만날 만큼 서로 친한 사이었으니 당연히 검은 돈도 오갔을 거라 본 듯하다. 그러나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있는 정권 실세 인사들에 대한 수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야권의 대표적 인사에 대해서는 의혹 수준에 머무른 이야기를 통해 무리한 수사를 진행하려 한 것은 야권 탄압의 일환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립서비스 발언'에 대해 립서비스는 박 대통령을 따라올 자가 없다며 일침을 가했다.

2015년 문재인 대표가 취임한 후 친문, 친노계와 갈등을 겪은 끝에 2016년 1월 3일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였다.

1월 7일 안철수 의원과의 연대를 선언하고, 2월 2일 국민의당 상임 선거대책위원장이 되었다.

3월 11일, 민주당의 새로운 수장이 된 김종인 대표가 새누리당에 맞서서 현 야권이 모두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야권 통합론'을 제시하자 여기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때문에 안철수 상임대표와 심한 갈등을 겪고 급기야는 선거대책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강수를 뒀다.

3월 15일 안철수 상임대표가 더불어민주당과 손을 잡지 않을 경우 탈당하겠다는 기사가 떴다. 이어 3월 17일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런데 2016년 4.13 총선에서 국민의당이 민주당과 연대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38석을 얻어내는 성과를 거두는 바람에] 민주당과 손을 잡지 않는다면 필패한다고 역설한 그의 입지가 많이 좁아졌다. 무엇보다, 이 때 안철수 대표 측과도 많이 멀어졌다고 전해진다.

2016년 8월 24일, 김한길 전 의원의 형인 김밝힘 씨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안철수 의원이 빈소를 방문해 김한길 전 의원과 오랜만에 대면했다고 한다. 분위기는 많이 어색했었다고 전해진다. 민감한 정치 이야기는 삼가고 그냥 짧게 근황 이야기와 건강 관리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만남은 10분을 넘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를 겨냥하며 패권주의를 비판하였다.

19대 대선 정국 막바지에 안철수 후보의 지원 유세에 합류했다. 대선 후 2017년 8월 27일에 개최된 국민의당 전당대회에서 당대표 후보로 나설 것이 예상되었으나 출마하지 않았다.

 

폐암 투병

국민의당이 바른정당과 합당하면서 바른미래당에 합류한 것 처럼 보이나, 정작 본인은 폐암투병으로 인해 당적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고.. 2018년 10월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동안 폐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담배를 하루에 서너갑씩 태우는 골초였다고. 다행히 항암 치료가 잘 되고 있다고 한다.

2019년 11월 25일 채널A ‘어바웃 해피&길길이 다시 산다’에 부인 최명길과 함께 출연하였다. 폐 한 쪽을 절제해 일상 생활에도 지장이 컸다는 사실과 수술 당시 2주 간 의식 불명 상태였음을 고백했다. 치료도 잘 되고 운신도 할 수 있게 된 모든 공을 아내에게 돌렸다. 입원 기간동안 간병인 침대에서 간호했음은 물론, 퇴원 후에도 아내 덕분에 투병 생활을 할 수 견딜 수 있었다고.

 

정계 복귀

한동안 소식이 뜸했으나 2021년 3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총장직에서 사퇴하기 전 김한길, 정대철 등 옛 민주당의 유력 정치인들과 만나 조언을 받은 것으로 밝혀져 물밑에서 윤석열 전 총장의 정계 진출을 지원하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돌고 있다. 조수진은 아예 윤석열이 정동영, 김한길 등과 접촉하고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2021년 11월 21일 윤석열 캠프의 새시대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정계에 복귀했다.  중원을 향해 몽골 기병처럼 진격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러나 선거국면에서 지지율 20프로를 까먹는 기행을 보이며 2022년 1월 3일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다. 이후에는 선거 과정에서 전면에서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윤 후보의 TV 토론 준비 등 배후에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2022년 3월 9일 열린 대선에서 승리하고 당선되자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국민통합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윤 당선인이 김한길 위원장을 '한길이 형'이라 부르며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는 것으로 전해진다. 흥미롭게도 인수위원장으로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임명되면서 과거 새정치민주연합을 이끌었던 두 대표가 인수위에서 또 만나게 됐다.

 

김한길 선거 이력 경력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동작 을

22,424 (21.81%) 낙선 (3위)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4,971,961 (25.3%) 당선 (6번)

초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6,780,359 (35.9%) 당선 (13번)

재선

 

2001

하반기 재보궐선거

서울 구로 을

23,411 (42.74%) 낙선 (2위)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48,673 (54.02%) 당선 (1위)

3선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광진 갑

44,334 (52.11%) 4

 

 

김한길 방송

BBS 라디오 김한길과 아침저널

MBC 라디오 김한길과 초대석

MBC 김한길과 사람들

채널A 어바웃 해피&길길이 다시 산다

 

 

김한길 저서 책

2006년 《눈뜨면 없어라》 수필

2000년 《김한길의 희망일기》 수필

1996년 《아침은 얻어먹고 사십니까》 칼럼

1995년 《거기 그녀가 서 있는 걸 보았네》 소설

1993년 《눈뜨면 없어라》 수필

1991년 《여자의 남자》 장편소설, 영화로 제작

1989년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장편소설, 영화로 제작

1988년 《현대조선역사》

1984년 《미국일기》 수필

1981년 《바람과 박제》 소설

1981년 《세네카의 죽음》 소설

1980년 《대학일기》 수필

1978년 《병정일기》 수필

 

 

김한길 비판 논란 사건 사고 인간관계 인맥

노무현 대통령의 인기가 바닥을 치던 참여정부 말기부터 청와대와 각을 세우기 시작했고, 노무현 대통령 사망 이후에는 당내 친노 진영을 일컬어 "밀실에서 당권을 나누는 반칙 정치", "오만과 독선의 노무현 프레임" 같은 발언으로 표현하는 등 친노 진영과의 갈등을 지속해왔다. 그래서 친노 성향 지지자들에게 평이 좋지 않다. 정동영과 함께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일조를 한 경력이 있음에도 이제는 비노계의 수장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 아이러니가 있다.

한 때 열린우리당에 몸담았을 때 정동영을 도와 정동영계를 열린우리당의 최대 계파로 키우는 일에 기여했고, 2013년에 민주당의 새 당대표를 뽑는 선거에서는 61.7%의 득표율로 압승을 거두는 등 당내 싸움에서는 승률이 좋은 면모를 보여준다.

그가 민주당 당대표가 되고 처음으로 치렀던 선거인 2013년 4.24 재보선에서 민주당은 새누리에게 패했다. 이 때야 박근혜 정부가 갓 출범했던 시기라 정부 여당 모두 분위기가 좋았던 때였고, 또 국회의원 재보선을 치르기로 한 지역구가 거의 다 새누리 지지세가 강한 곳이었으니까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새누리가 세월호 참사라는 역대급 악재 속에서 치렀던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은 새누리를 상대로 무승부를 냈다.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는 117 : 80으로 새정치연합이 새누리에게 완패했지만 광역단체장 선거에서는 새누리에게 9 : 8로 백중세를 이뤘고, 또 교육감 선거에서는 진보 진영이 완승한 덕분에 대표직 사퇴까지는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6.4 지방선거가 끝나고 약 한 달 뒤에 치른 2014년 7.30 재보선에서 새정치연합은 새누리에게 무려 11 : 4로 참패하고 말았고, 이 때 당을 이끌었던 김한길과 안철수는 결국 당대표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이 때 새정치연합은 김두관, 손학규 등 묵직한 중량급 정치인들까지 출마시키는 등 이 재보선에 나름대로 사활을 걸었다. 그러나 그 때 국민들은 '세월호 참사'에 상당한 피로감을 느끼던 상태였고, 따라서 세월호 참사에 근거했던 새정치민주연합의 '정권 심판론'도 국민들에게 별로 설득력을 얻어내지 못 했다. 게다가 김한길 & 안철수 지도부가 주도했던 전략공천의 실패로, 수원시 병 선거구에 전략공천을 받아 출마했던 손학규가 새누리의 신인인 김용남에게 패해 떨어지는 등 '지역 일꾼론'을 내세우며 각 재보선 실시 지역과 연고가 있는 신인들을 주로 내보낸 새누리에게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박근혜의 호위무사를 자처했던 이정현이 보수 정당 역사상 처음으로 호남 입성에 성공했던 선거가 바로 이 7.30 재보선이었다.

민주당과 국민의당의 야권 연대를 놓고 그동안 동지 관계를 유지해 왔던 안철수와 갈등을 빚었고, 20대 총선을 앞둔 상태에서 선거대책위원장직까지 내려놓게 된다, 그러나 국민의당이 민주당과 당 대 당 차원의 야권 연대를 하지 않고도 총선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덕분에 김한길은 머쓱한 입장이 되긴했다.

위에 서술되어 있지만, 2016년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면서 김한길의 잦은 당적 변경 이력이 화제가 되었다. 피닉제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이인제의 경우 소속되어 있던 정당이 당명 교체 및 합당 등과 같이 타의적 당적 변경이 아닌 자의적 당적 변경(탈당 및 당 대표인 상황에서 합당을 결행)만 셌을 경우 8회(무소속 포함)이고 같은 기준을 적용했을 경우 김한길 의원 역시 8회이다

물론 진보 정당을 제외한 모든 당에 소속된 적이 있는 이인제와는 달리 김한길은 제3지대 정당과 민주당계 정당 범위 밖으로 나간 적은 없지만, 그 복잡한 민주당계 정당 계보에 들어가는 거의 모든 당에 몸담은 적이 있고, 특히 그 자신이 민주당계 정당들의 이합집산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은 점으로 인해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비판을 받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이인제가 당을 계속 옮겨다녔다면, 김한길은 민주당계 정당을 계속 분열시켰다. 이인제의 경우 대통령이 되고 싶어서 당을 옮겨다녔다는 그럴싸한 이유라도 있고 반대로 그 노골적인 행보 때문에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나름 자신이 있었던 정당 중 새천년민주당이 여당이 되도록 공헌한 적도 있고 무엇보다 대결 상대가 김대중, 이회창, 노무현 등 거물 정치인들이었던, 분명히 잘 나갔던 유력 대권주자였다. 반면 김한길의 경우 특이하게도 대권을 시사한 적은 한 번도 없고, 짧지 않은 정치 경력 동안 민주당계 정당 내에서 계파를 만든 뒤 계파 간 갈등을 심화시켜 당 지도부를 흔들어 대고 당을 쪼개버리며 당권을 차지하는 일에만 골몰했다.

허나 정작 당권을 잡고 나선 한결같이 무능하고 중도를 표방하나 그마저도 어설픈 모습만 보이면서 민주당계 정당을 패배의 구렁텅이에 빠뜨리곤 했다. 보수 정당에서 보낸 프락치가 아니냐는 소리가 괜히 나왔던 게 아니었던 것. 결국 20대 대선에서 김한길이 윤석열 캠프에 합류하게 되면서 이 말은 사실 아닌 사실이 되었다.

 

김한길이 당을 옮긴 이력은 다음과 같다. 

1

꼬마민주당 → 민주당

1991.9.16.

신민주연합당과 합당

 

2

민주당 → 통일국민당

1992

총선 공천 탈락 불복

 

3

통일국민당 → 무소속

1994

자의적인지 불분명한 탈당

정계 은퇴 및 방송활동 시작

 

4

무소속 → 새정치국민회의

1996.1.23.

전국구 제안에 의한 입당

정계 재입문

 

5

새정치국민회의 → 새천년민주당

2000.1.20.

새정치국민회의의 확대 개편 창당

 

6

새천년민주당 → 열린우리당

2003.11.

새천년민주당 분당

 

7

열린우리당 → 무소속

2007.2.6.

김한길계 집단 탈당

 

8

무소속 → 중도개혁통합신당

2007.5.7.

김한길계 신당 창당

 

9

중도개혁통합신당 → 중도통합민주당

2007.6.29.

민주당과 합당

 

10

중도통합민주당 → 대통합민주신당

2007.8.3.(탈당)

2007.8.5.(입당)

김한길계 집단 탈당

2008.1.6. 정계 은퇴 선언

 

11

대통합민주신당 → 통합민주당

2008.2.17.

민주당과 합당

 

12

통합민주당 → 민주당

2008.7.6.

당명 변경

 

13

민주당 → 민주통합당

2011.12.16.

시민통합당과 합당

2012년 초, 정계 재복귀

 

14

민주통합당 → 민주당

2013.5.4.

당명 변경

 

15

민주당 → 새정치민주연합

2014.3.26.

흡수 합당

 

16

새정치민주연합 → 더불어민주당

2015.12.28.

당명 변경

 

17

더불어민주당 → 국민의당

2016.1.3.(탈당)

2016.2.2.(입당)

새정치민주연합 분당의 여파로 탈당

 

18

국민의당 → 바른미래당

2018.2.13.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합당

2019년 말 바른미래당 탈당

 

19

바른미래당 → 민생당

2020.2.24.

민주평화당, 대안신당과의 합당

 

같은 합당에 의한 당적 변경이여도 1번, 11번, 13번, 18번의 경우 소속 당원이었기에 합당에 끌려 가는 종속관계여서 자의적 변경에서 제외했고, 9번, 15번처럼 자신이 당대표인 상황에서 합당을 결행한 경우에는 자의적 변경에 포함시켰다. 그 덕에 공동대표 직함을 2번이나 했다.

다만 3번처럼 불분명한 탈당 1건이 있다. 통일국민당이 제14대 대선에서 패배한 이후에 당수인 정주영이 김영삼에게 정치 보복을 당하자 정주영은 의원직을 사퇴했고, 소속 의원들도 민주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기는 등 당세가 약화되어서 사실상 당이 공중분해가 됐기 때문이다.] 이후 김한길은 당적 초기화가 됐고, 1996년에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기 전까지 정치 활동 없이 당적을 갖지 않은 채로 방송인 활동을 했다.

7~8번 사이에 무소속 기간은 국회의원 활동 중, 정당 소속 없이 무소속 신분이었지만 자신과 함께 탈당한 김한길계 20여 명이 '중도개혁통합신당추진모임'이라는 원내교섭단체를 만들어 정치 활동을 했기 때문에 당적 변경 카운팅으로 치지만, 3~4번 사이 무소속으로 남아있던 기간은 정치 활동을 안 했기 때문에 카운팅에 포함시키진 않는다.

명확한 탈당이 6회, 당대표로서 합당을 결행한 경우는 2회가 있다. 총 8번의 자의적 당적 변경이 있다. 3번처럼 불분명한 탈당도 카운팅을 한다면 총 9번.

특히 2007년 열린우리당 대붕괴 시기 6개월 간 총 4개의 당적(열린우리당(2007년 2월 탈당) - '중도개혁통합신당'(2007년 5월 창당, 6월 합당) - '중도통합민주당'(2007년 6월 합당, 8월 탈당) - 대통합민주신당(2007년 8월 입당))을 보유했던 것과, 2015년 말에 1주일 채 안 되는 더불어민주당의 당적을 유지한 것이 이인제와 타이 기록을 이루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정계 은퇴도 2번을 하였고 2번 복귀를 하였는데, 두 번째 정계 은퇴 선언하고 정계 복귀 전까지의 기간(2008~2012년)엔 탈당이나 입당 소식이 없는 것을 보아 평당원으로 남아 있었는 듯하다.

더불어민주당 탈당 이후 국민의당에 합류하면서 당적이 16개로 늘어났다. 원래는 이인제가 16개로 가장 당적이 복잡했는데, 국민의당이 결성된 뒤부터 이인제와 동일한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이 바른미래당을 결성하면서, 당적이 다시 늘어났다. 이제 김한길이 거친 당적은 17개로 또 늘었다. 이후 2020년 말 민생당으로 신설 합당하면서 당적이 또다시 늘어났다. 이와중에 피닉제도 합당 및 당명 변경으로 인해 미래통합당, 국민의힘 당적이 추가로 생겨났다. 정계복귀 후 국민의힘 윤석열 선대위에서 직책을 맡으며 민생당 소속이지만 국민의힘 측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의힘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윤석열의 외곽조직 새시대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신당이 창당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이준석 당대표도 "창당을 노리고 있는 세력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는 발언을 하며 결국 정당 분쇄기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심지어 조선일보에서도 새시대준비위원회를 두고 '국회 친위대'라는 평가를 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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