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前 정치인. 1989년 YS의 통일민주당에서 보좌관으로 정계 입문한 이후 노무현 의원의 최측근이 되어 '노무현의 왼팔', '노무현의 좌희정 & 우광재' 심지어 '노무현의 정치적 동업자'라고까지 불리며, 정치인 노무현의 행보 및 정책적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자타가 공인하는 참여정부 성립 일등 공신이었으나, 2002년 대선 직후 선거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받게 되어 참여정부에서 요직을 맡지 못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을 대신해서 감옥을 갔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여전히 친노에서 영향력은 여전했다. 이후 정치적 자립을 시도하여 2010년 고향에서 충청남도지사에 당선되었다. 이후 연임에 성공하며 안정적인 도정 활동을 바탕으로 더불어민주당의 차기 대권주자로 부각, 지지율 선두권을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2018년 안희정 성폭력 사건으로 제37대(민선 6기) 충청남도지사를 사퇴하고 정치 활동을 전면 중단하였다. 그리고 2018년 3월 6일 더불어민주당 윤리위원회에서 전원 일치로 제명 및 출당 조치되었다. 소명 기회를 주었으나 안희정이 스스로 소명 기회를 포기했다고 한다. 이후 2018년 8월 14일 1심 재판에서 무죄를 판결받았으나, 2019년 2월 1일 2심 재판에서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아 법정 구속되었고 2019년 9월 9일 대법원에서도 2심 판결이 확정되며 정치생명이 완전히 끊어져버렸다.
안희정 고향 학력 이력 나이 부인 민주원 이혼 프로필
안희정
安熙正 | An Hee-jung
출생
1964년 12월 1일 (57세)
충청남도 논산군 연무읍 마산리
(現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마산리)
현재지
경기도 여주시 신해리 여주교도소
신분
기결수 (2019년 2월 1일 ~ 2022년 8월 1일)
본관
순흥 안씨 1파 양공공파
재임기간
제36·37대 충청남도지사
2010년 7월 1일 ~ 2018년 3월 6일
부모
아버지 안동근, 어머니 국중례
형제자매
형 안희돈, 누나 안향미
배우자
민주원
자녀
장남 안정균, 차남 안형균
학력
구자곡공립국민학교 (졸업 / 45회)
연무중학교 (졸업 / 18회)
남대전고등학교 (제적)
성남고등학교 (중퇴)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합격)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철학 / 학사)
병역
면제 (수형)
신체
175cm, A형
약력
김덕룡 비서관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 비서
자치경영연구원 사무국장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원
참여정부평가포럼 상임집행위원장
민주당 최고위원
제36~37대 충청남도지사
안희정 일생 고향 학력 이력
학창 시절
1965년 5월 1일에 2남 3녀 중 셋째(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충청남도 논산군 출신이다.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름인 '희정'.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매우 좋아하던 아버지가 희자 돌림의 항렬자를 쓰고 박 전 대통령의 이름인 정희(正熙)를 뒤집어 희정(熙正)으로 지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본인을 박정희 유겐트로 표현하며 꿈도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역시 어린 시절의 안희정이 체격도 좋고 어릴 적부터 탁구, 야구 등 운동에 재능이 있는 것을 보며 육군사관학교에 가길 원했다고 한다.
당시 배경 없는 소시민이 출세하는 방법 중 대표적인 수단으로 사관학교 진학을 통한 출세가 선호된 점도 있다. 지금이야 고시 폐지가 '사다리 걷어차기' 논란까지 빚지만, 당시로선 고시도 우골탑 소리를 듣는 대학을 나와서 또 몇 년을 공부해야하니 소시민들로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었다. 그에 반해 사관학교는 일절 학비 부담도 없고, 재깍 장교로 취업까지 시켜주는 데다 장교에 대한 대우도 좋았고, 장교로 있다가 진급이 잘 안 되어 포기하고 중년에 전역을 하게 되어도 그 후에도 장교출신들은 일반회사 취업에서조차 다른 중년남성들보다 사회적으로 훨씬 더 선호되었다.
중학교 때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 러시아 혁명사를 읽고 감명을 받은 것과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5.18 민주화운동을 보고 큰 정신적 충격을 받은 뒤 학생 운동에 뛰어들었다.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결심을 한 것은 장폴 사르트르의 책 구절 중 '지식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창녀다'를 읽고 나서였다고 한다. 학력 과정이 묘한데, 고등학교 1학년 때 학도호국단 연대장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충남대 재학생들과 같이 학생운동을 하다 잡혀서 몽둥이 찜질당하기도 했다 한다. 학교가 문제 학생들을 삼청교육대에 보내도록 하라고 지시를 받았으나 교장에게 "문제학생을 학교가 교화시켜야지, 왜 삼청교육대에 보내는가?"라고 항의하다 위의 불온 서적 문제까지 겹쳐서 제적 처분을 받았다고. 고등학교 1학년 때 교과서를 전부 팔아버리고 사상계 등의 잡지와 사회과학 서적만을 읽었다고 한다.
이후 고향에 내려가 농사일이나 돕고 있었는데, 가을 추수가 한창일 때 아버지가 갑자기 '너 고등학교 안 가면 내가 죽겠다.'는 식으로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안희정의 집안 분위기가 상당히 보수적이었고,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한 안희정 본인도 전통적인 효(孝)를 중요시하는 사상이 뿌리깊게 자리잡았던 터라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아버지에 뜻에 순순히 따라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에 위치한 성남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학교에 입학한 지 채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부모님을 집요하게 설득하여 결국 얼마 가지않아 다시 자퇴하고 만다. 고등학교를 자퇴한 뒤 안희정은 본인의 누나가 야학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었던 제일교회의 '형제야햑'에서 청계피복 노동자들과 교류를 하기 시작했는데, 혁명을 하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있을 뿐 학생도, 노동자도 아닌, 말 그대로 백수나 다름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조바심을 느끼게 되었다.
일단 혁명은 해야겠으니 혁명 서클에 가입을 하려고 했지만, 당시 혁명 서클은 대부분 대학생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도 못한 17살 청소년을 받아주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고 한다. 이에 안희정은 독특하게도 학생 운동을 하겠다는 목적으로 검정고시를 통해 1983년 고려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고대에 간 이유도 학생운동을 더 열심히 하기 위해서라고. 처음에는 재수종합반을 다니다가 3개월 다니고 때려치우고 국영수에서 150점 만점, 암기과목 170점에서 반 정도 맞고 체력장에서 20점 만점을 받으면 고려대 정도는 갈 수 있겠지 싶어서 독학했다고 한다. 당시 암기과목이 4개라 사회경제, 한국지리는 자신있는 과목이라 열심히 풀고 나머지 두 과목은 한 번호로 밀었다고.. 수학은 다른 거 안 하고 정석만 2번 팠다고 한다.
시간도 많이 없고 하여 7달 중 2달 가량 밤을 새가며 국영수만 팠다고 한다. 결과는 대입시험에서 만점 340점 중 270점을 맞으며 고려대 철학과 합격.
하지만 어디까지나 학생 운동만을 위해 입학한 대학교였으니 학부 과정을 충실히 공부했을리 만무하고, 오로지 지하 서클 활동에만 전념하는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후 운동권 생활을 이어가다 1987년, 1988년 반미청년회 사건으로 수감되면서 제적되었고, 출소 이후 정치에 입문하면서 대학은 계속 쉬게 되었다. 그리고 1988년에 두번째로 수감되어 악명높은 남산 안기부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게 되면서 안희정의 인생에 크나큰 변화가 생기게 된다. 물론 육체적인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로웠지만, 청년 안희정을 무엇보다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고문 경찰의 심문이었다. 취조실에서 안희정에게 "그래, 네가 혁명 해서 권력 잡았다고 치자, 그럼 너 농업정책 어떻게 할 건데? 외교정책은?" 하는 식으로 팩폭국정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질문을 낱낱이 던졌는데, 안희정은 저런 기초적인 질문에 변변한 답변도 하지 못했고, 본인이 가지고 사상이라는 것은 그저 '전두환', '파쇼', '반미' 라는 세 가지 단어밖에 없다는 사실만을 뼈저리게 느끼고 만다.
육체에 이어 정신까지 철저하게 패배한 안희정은 결국 함께 학생 운동을 하던 동료들의 이름을 자백할 정도로 무너져 내렸지만,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면서도 1년간의 수감생활 동안 자신의 이상을 끝없이 돌아보며 공부 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현재까지도 극단적인 수단을 고수하는 NL계열 인사들과는 달리 젊은 나이임에도 원숙한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때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정계에서 손을 뗀 이후 잠깐 출판사에서 영업 일을 하다 정계에 복귀를 하기 위해 복학하여 학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정치 초년생
1989년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측근인 김덕룡 국회의원실에서 일하게 된 것을 계기로 정계에 입문, 초기에는 주로 국회의원의 비서로 일했다. 1990년 3당 합당에 반발하여 꼬마민주당에 참가하며 버티려 하다가 당시 정치 현실에 환멸을 느끼자 견디지 못하고, 1992년 정계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2년 정도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대학도 복학하여 졸업했다고 한다.
당시 서른을 앞두고 대학을 다시 다니면서 친구나 지인들이 별로 없던 교정의 벤치에 앉아 쓸쓸한 기분을 느끼면서 사색을 많이 하고는 했다. 3당 합당 때, 노무현도 3당 합당에 크게 반발하면서 김영삼과 결별했다. 즉, 이 시점에서 노무현과 안희정은 같은 길을 걸었다. 따라서, 노무현과 거의 처음부터 행적을 동반한 몇 안 되는 인물이다. 안희정 말고도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시절부터 노무현과 같이 한 인사들도 있었으나, 2017년 9월 기준으로 현재는 안희정을 제외하면 상당수가 정계에서 은퇴를 했다.
이후 2001년 당시 노무현의 보좌관을 맡으면서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와 함께 좌희정 & 우광재라고 불릴 만큼 노무현을 최측근에서 보좌했었지만 정작 참여정부 하에서는 별다른 공직을 맡지 못했다. 2002년 대선 관련 선거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아서 공직을 맡을 상황이 아니었다. 이후 노무현은 안희정의 출판기념회 축사 영상을 찍으면서 "내 대신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다 했죠. 나는 뭐 엄청난 빚을 진 것입니다."라고 언급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노무현의 지시로 대선자금을 총대맸다지만 어쨌든 1심에서 징역 2년 6월 및 추징금 13억 1천만 원이 선고됐으며 2심에서 징역 1년 및 추징금 4억 9천만 원으로 감형되었고 대법원이 이를 확정하면서 실형을 살게 되었다.
당시 재판이 인상적인데, 최후 진술의 경우 보통 감형을 위한 변명으로 일관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안희정은 "자신을 엄벌에 처해서 승자도 처벌받는다는 교훈을 남게 해달라."라고 상상을 뛰어넘는 최후진술을 남겼다. 또한, 감형도 없이 형기를 채우고 만기출소했다.
출소 직후인 2005년 모교인 고려대학교 산하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연구위원직을 역임했다. 2006년 노무현에 의해 복권되었으며, 2007년 참여정부평가포럼 상입집행위원장직을 맡아, 참여정부 재평가 작업을 수행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의 충남 논산시-계룡시-금산군 지역구에 공천을 신청했으나, 상술한 선거법 위반 전력이 발목을 잡아 낙천됐다.
2008년 7월 통합민주당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009년 노무현을 수사하면서 출소한 직후에도 박연차로부터 백화점 상품권 5천만 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노무현이 자살하면서 수사가 종결되면서 유야무야 되기도 했다.
민선 5기 충청남도지사
36대 (민선 5기) 충남지사를 역임했다.
선거과정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충남지사에 당선되어 고향에 금의환향하였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선거결과는 상당히 접전이었는데 한나라당, 민주당, 자유선진당의 삼자구도로 진행되었고, 2위를 기록한 자유선진당의 박상돈 후보와 고작 20,023표 차이(2.30%)였다.
안희정 지사의 고향인 논산에서 박상돈 후보를 22,497표 차이로 이겨서 당선될 수 있었다.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과정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 연설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주요공약
6대 정책과제
3대혁신
일 잘하는 지방정부로 가는 「행정혁신」
주민이 주인 되는 「자치혁신」
농어촌에 희망 주는 「3농혁신」
3대 행복과제
자영업에서 기업까지 「행복한 성장」
아이에서 어르신까지 「행복할 권리」
도랑에서 서해까지 「행복한 환경」
직무수행
민선 5기 4년간 내내 안희정 지사가 도민에게 약속한 공약 이행도에 대한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평가결과 전국 최우수 등급인 ‘SA’를 획득했다고 밝혔다.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 새누리당의 후보였던 정진석 후보에게 잘한 게 없다는 비난을 받자 말 그대로 '잘한 것으로 인정 받은 것(사례)'를 제시하였다.
2012년 1월 8일 SBS 신년특집 만사소통, 2부 '계급장을 떼라'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는데, 금산군의 한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충남도지사의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상황에서 안희정 본인이 일일 이장으로 온 자원봉사자 행세를 하며 하루 동안 민심을 들었다. 당연히 주민들은 그냥 봉사활동을 하러 온 사람인 걸로 여기고 이것저것 도움을 받았는데 나중에 도지사라는 것을 알게 된 뒤의 반응이 압권. 주민들이 다소 과하게 당황하는 것 아닌가 의아할 수도 있는데, 사실 민주화, 특히 지방자치제가 시행된 오늘날 시점으로야 도지사 또한 (조금 급수가 높은) 한 명의 선출된 '공무원' 혹은 '도민의 대표'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버스도 제대로 다니지 않는, 동영상 나레이터의 말마따나 시골 오지 마을에서 민주주의가 이룩되기도 전에 태어나서 생활하는 노인들의 시점으로는 도지사 정도면 거의 봉건영주나 다름없다. 오늘날의 도지사에 해당하는 조선시대의 감사(관찰사)가 고전문학에서는 어떤 대우를 받는지 생각해 보자. 노인들이 저렇게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실, 지금도 그렇긴 하다. 도지사까지 갈 것도 없이 군수 정도만 돼도 목에 힘 좀 들어가는 자리다.
민선 6기 충청남도지사
선거 과정
도지사 재선 의사를 밝히고, 새누리당의 정진석 후보와 경쟁하였다. 선거 전 여론조사에서는 10% 이상의 꽤 큰 차이로 새누리당의 정진석 후보를 앞섰다. 선거 직후 출구조사에서 오차범위 내 접전으로 나와 지지자들을 긴장하게 했으나, 개표가 시작되고 투표함을 연 후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고, 정진석 후보를 약 8.26%(73,679표)차로 이기고 재선에 성공하였다.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선거와 비교해 충남 모든 기초자치단체 지역에서 득표율이 올랐으나, 공교롭게도 고향인 논산 지역에서만 근소하게 득표율이 감소했다. 이는 제5회 지방선거에서 선거가 삼자구도로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논산 사람들이 논산이 고향인 당시 안희정 후보를 압도적으로 지지(삼자구도임에도 득표율 60%이상)했던 결과 나타난 현상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물론 논산의 인구가 6회 지방선거 때 5회 지방선거 때보다 근소하게 감소한 영향도 있다.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비해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약 10만 표 정도 더 득표했고 득표율도 10% 정도 올랐다. 5회 지방선거는 삼자구도로 진행되었고 이번 6회 지방선거는 양자구도로 선거가 진행됐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5회 지방선거에서 보수계라고 분류할 수 있는 한나라당, 자유선진당과 진보계로 분류할 수 있는 민주당의 득표비는 약 5 : 4 정도로 보수계 정당의 득표를 단순 합산하면 보수세가 우세하였다.
하지만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이 합당하여 새누리당이라는 거대여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6회 지방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과의 득표비는 4 : 5 정도로 오히려 새정치민주연합의 안희정 후보가 우세하였다. 지역에서 정당 지지율은 새누리당이 크게 앞서는 걸 생각하면 충남에서 안희정 지사의 개인경쟁력을 알 수 있게 된 선거라는 평가가 있다. 이 때문에 충청권의 대표주자로 일컫어지게 된 면도 있다. 5회 지방선거에서 자유선진당의 박상돈 후보를 선택했던 유권자의 30% 정도가 6회 지방선거에선 안희정을 선택했다는 분석이 있다.
고향인 논산에선 제5회 지방선거에 이어 2회 연속 60%이상의 득표(60.21% - 36,205표)를 했다.
제6회 지방선거 과정, 정진석 후보와의 TV토론에선 충청 대망론을 언급하며 충청도 출신의 대통령이 나오기를 바라는 지역 사람들의 열망을 자극하기도 하였다. 토론 내용을 언급하자면 정진석 후보는 안희정 지사를 깎아내리는 데 급급했지만, 안희정 지사는 이러한 공격에 대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지역주민들과 이야기하는 식으로 맞받아쳤다.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쪽과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 중 누가 더 끌렸겠는가?
직무 수행
안철수 의원이 2014년 7.30 재보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직에서 사퇴하였을 때, '안철수 대표는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갖던 세력이 다시 정치에 관심을 갖게 큰 공을 세웠다' 변호하기도 하고, 역시 문재인 대표가 2015년 4.29 재보선 이후 사퇴 등 여러 압박에 시달리고 있을 때도 그래도 당의 맏이는 당대표이므로 힘을 실어줘야한다고 발언하기도 하였다.
충청남도에서 의료 사각지대에 있는 향촌 사회에까지 의료 긴급 시스템을 확장하여 시행하였고, 대형 병원을 시골에까지 유치하기 어려운 만큼 닥터헬기 등을 통해 골든 타임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성과를 이루었다는 말을 김어준과의 대화에서 밝혔다.
메르스 사태 당시 충남 이내에서의 확산을 방지, 통제하는 데 성과를 거두어 위기 대응 능력에서도 긍정적인 점수를 받았다. 의료인들을 응원하자는 페이스북 글도 시의적절했다는 평가.
임기 중, 충청남도(공주, 부여 등), 전라북도(익산 등)에 위치한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안희정 지사가 민선 5기부터 역점을 두고 추진하는 '3농 혁신'이 가시적 성과를 보이고 있다는 긍정적 기사가 나왔다.
2015년 8월 15일, 광복 70년을 맞은 광복절 축사에서 광복절을 '승리의 날'으로 부르자, 안중근의사의 영향을 받은 '아시아 평화 공동체'라는 구상이 포함되어 있는 등, 자신의 비전을 제시하였다. 연설 도중 마지막으로 발언한 하늘에 계신 애국열사, 애국선열들이시여. 우리들의 이 길을 굽어 살펴 주소서.가 인상깊었다는 평이 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안희정 법(지방재정법 개정안)'이 2015년 11월부터 전국에서 시행될 것으로 보인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한경수 프로듀서 등 12명의 영화인이 내포신도시에 다큐마을을 만들어 정착한다고 한다.
2015년 국정감사에서는 충청남도의 낮은 공무원 청렴도와 평균이하 재정자립도, 아직 성과가 나오지 않는 3농혁신이 문제로 거론되었다.
민선 6기 충남지사로서 시도지사 직무평가에서도 꾸준히 상위권을 달리고 있으며, 2016년 4월~2017년 3월에는 12개월 연속 전체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심지어 2017년 3월에는 긍정평가 비율이 80%를 넘어서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19대 대선의 주요 후보였기에 이득을 본 것도 있지만, 상위권 단골인 김기현 울산시장, 김관용 경북지사, 이낙연 전 전남지사, 최문순 강원지사도 55%~60%가량에 머무르는 것을 보면 혼자서 따로 노는 수준.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자신의 영향력을 보여주고 도정을 잘 운영하여 '스스로가 언급한 대로 (대권을 노리는) 충청권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자신의 SNS에서 “김대중 노무현의 못 다 이룬 역사를 완성하고자 노력할 것”이라며 대선 도전을 사실상 선언했다.
그리고, 김문수 前 경기지사가 그랬던 것처럼 지사직을 그대로 유지한 채 대권 경선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19대 대선 이후에도 안희정 지사에 대한 지지도는 압도적이다. 심지어는 한국갤럽에서 실시한 민선6기 광역단체장 직무 수행평가에서 14년 하반기~16년 하반기까지 단 한 번도 1위를 내려놓지 않았던 김기현 울산시장을 넘어서 직무 수행 긍정평가 1위에 올랐다. 그것도 2012년 조사 실시 이후 역대 최고수치인 79%로. (여당 프리미엄+차기 대권주자) 안희정 지사 + (자유한국당 당적을 유지+울산의 주력 산업 불황) 김기현 시장이라는 요인이 있던 덕분이지만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부정 평가 역시 9%로 매우 적은 편이다.
제19대 대통령 선거
2017년 1월 22일 대학로 한 소극장에서 360명의 방청객들 앞에서 공식 출마 선언을 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5시간 동안 사람들과 즉문즉답 시간을 가졌다는 게 인상적이었다는 평이 많았다. 또한 저녁 8시 망치부인 방송에 참여하여 직업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비전을 얘기하기도 했다. 이런 활동으로 네이버 종합 검색어 1위가 되기도 했다. 박수현 전 공주시 국회의원을 비롯한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행사를 진행하였고 직업적인 행사 진행자들이 아니라 약간 행사가 매끄럽게 돌아가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자원봉사자들이 진행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는 평이다.
출마 선언 이후 이재명 성남시장의 기본소득 정책과 문재인 전 대표의 군 복무 1년 단축 주장은 현실성이 없다고 비판하는 등 서서히 대선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나, 차근차근 정책을 선보이며 준비해 나가는 문재인 상임고문이나,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방식으로 대선에 임하는 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성남시장 등의 다른 주자들에 비해 비교적 조용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선언 직후 문재인 고문을 향한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기는 했으나 "형제를 때리는 정치는 하지 않는다."라며 타 후보들에 대한 견제보다는 자신의 강점을 내세워 대중에 접근하는 것은 물론 현 정국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가감없이 밝히며 자신을 어필하는 데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때문에 그가 코앞으로 다가온 2017 대선보다는 2022 대선을 겨냥하고 장기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냔 전망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이러한 '차차기 준비 프레임'을 달가워하지 않는 모양. 여권의 남경필 지사와의 합동 인터뷰에서 이러한 프레임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것 같다고 토로한 바가 있다. 사실 안희정이 정말로 차차기를 겨냥했다고 해도 이를 대놓고 드러내기는 어렵다. 차차기를 위해서라면 19대 대선 때 인지도 및 지지도를 끌어 모으는 게 중요한데 '저는 이번엔 참가하는 것에 의의를 둡니다'라고 대놓고 말하면 당연히 대중들의 지지를 모으는 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어찌되었든 19대 대선 자체에 열중한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역설이 성립된다.
경제 정책 관련해서는 역대 제6공화국 대통령들의 경제 정책을 확 바꾸지 않겠다고 했고 국민은 공짜 밥을 원하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비정규직 노동유연화는 시대 흐름상 어쩔 수 없다고 발언했다.
2017년 1월 31일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안희정을 만나 여야를 넘어서 돌풍을 일으키자며, 사실상 탈당을 권유했다는 보도가 올라왔다. 그러나 김종인 전 위원장은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으며 , 안 지사의 대변인격인 박수현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또한 사실무근임을 밝혔다. 안희정 지사는 "어째서 이런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때 문재인 후보마저 위협하며 인기몰이를 했던 이재명 후보의 지지율이 잦아들고 안희정 후보와 비슷한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던 박원순 후보가 불출마 선언을 하여 유망한 대선주자로 조명받던 중, 2017년 2월 1일 반기문 후보가 돌연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순식간에 지지율 2위권으로 성큼 뛰어 오르게 되었다.
2월 8일 바둑 기사 이세돌과 바둑을 두며, 그를 '국민 후원회장'으로 영입했다.
2월 13일 SBS 프로그램 '대선주자 국민면접'에 출연했다.
2월 16일 상술한 이세돌을 비롯한 선거캠프 후원회장 15명을 발표했다.
노무현 대통령처럼 전작권 환수를 주장했다.
민주당 이철희 , 기동민 , 어기구 등이 안희정을 지지하면서 캠프에 합류했다.
10년 일했으면 1년은 유급휴가를 하는 '안식년 제도'와 '일자리 나누기' 정책을 주장했다.
제19대 대선 이후의 행보
광화문 치맥파티를 마지막으로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적은 편이다. 2017년 살충제 계란 파동으로 인하여 충남도청에서 도민들에게 긴급재난문자를 발송한 바 있으나 정부의 대응을 우선시 하고 있다.
태안 유류 피해 극복 10주년 기념식에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해 오랜만에 언론에 같이 있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촛불혁명의 기적, 시민이 주권인 나라, 살아있는 민주주의 상징인 문 대통령님을 모시고 행사를 치러서 더없이 영광"이라며 "꼭 모시고 싶었다"고 인사말을 하며 대통령에 대한 강한 애정을 보였다. 태안 유류 피해 사건이 참여 정부 시절에 발생하기도 했고 국민적 협력을 통해 극복했다는 점에서 작년과 올해의 촛불 정국을 비슷한 상징성이 있어 안 지사가 문재인 대통령 섭외에 굉장히 공을 들였다고 한다.
차기 대권 주자라는 위치에서 충남과 안 지사 본인의 위상이 많이 올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 계획에 충남도에서 제안한 과제가 다수 포함되고 일선 공무원들이 중앙 정부와 만날 때 야당 때와 대접이 다르다고 말할 정도.
사실상 경기지사 출마를 공언한 이재명 성남시장이나 3선 도전이 유력시 되는 박원순 시장과 달리 중앙 진출을 노릴 것이라는 이야기만 돌 뿐 내년 행보에 대한 별다른 소스가 없었는데 돌연 9월 27일 서울 노원구를 찾아 강연을 해 이목을 끌었다. 서울 노원구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지역구로 안 대표가 의원직을 사퇴한 지금 재보궐 선거 대상이다. 안 지사는 노원구청장과 인연이 있어 강연했을 뿐 별 다른 의미가 없다며 중앙 진출에 대해서는 선을 긋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민주당 지지자들은 노원 병 출마를 거의 기정 사실화 하고 노원보다는 자유한국당 박찬우의원의 벌금형으로 재보궐 선거 대상인 천안 갑 출마를 요구 하고 있다.
언론의 별다른 주목 받는 일 없이 도정과 외부 일정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11월 28일, 강연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자들에게 이른바 '쓴소리'를 해 많은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안희정 지사는 이 강연에서 "이견의 논쟁을 거부하지 마라.", "우리 이니가 그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다." 라고 발언했는데 안 그래도 '선의', '대연정' 발언으로 회색분자 의심을 받고 있는 안 지사가 이런 말을 하자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자, 그중에서 강성 지지자들이 적폐청산에 초 치는 소리 하지 말라며 극렬하게 반발했고, 민주당 차기 당대표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안 지사가 당 내 대주주라고 할 수 있는 친문 성향 당원들의 행동을 비판하자 언론 역시 이에 주목했다. 이후 강연에서 자신은 문재인 정부가 성공 해야 한다는 사실에 어떤 이견도 없다고 수습하는 모양새를 보여주었는데 일각에서는 차기 당대표 행보를 위한 몸풀기 발언 아니었냐고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더불어민주당에서 내년 지방선거를 위해 현직 지자체장들을 상대로 연 자체 평가에 본인이 출석 하지 않고 대리인을 보내 이미 중앙 정계 진출에 마음을 굳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본인은 일정에 바빠 대리인을 보냈을 뿐이라고 확대 해석하는 것을 경계 했으나 불출석 할 경우 페널티가 있다고 사전에 공지 했고 박원순 시장을 비롯해 평창 올림픽 준비를 바쁜 최문순 강원도지사도 출석했는데 홀로 출석하지 않아 쉽게 이런 해석이 가라앉고 있지 않다.
12월 18일, 충남지사 3선 불출마를 공식 발표했다. 오늘 기자회견을 열고 “이제 새로운 도전자들한테 기회를 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며 “3선에는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시에 열리는 내년 재보궐선거 도전도 현재로서는 염두해 두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언론들은 안희정이 도지사 임기를 마친 후 2018년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직에 도전하거나, 정치적 휴식기를 가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해외로 유학도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더불어민주당 제19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문재인에게 크게 패한 이유 중 하나가 더불어민주당 내 지지 기반의 차이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안희정 지지자는 당권 도전을 바라고 있는 느낌이다. 다음 경선 유력 후보인 박원순, 이재명은 국회 경력이 있지 않다. 그래서 안희정은 당 대표 경력을 가지는 것을 바란다.
충남지사 사퇴 및 정치활동 중단
그러나 2018년 3월 5일 JTBC 뉴스룸에 안희정 충남지사의 성폭행 혐의를 고발하는 폭로가 보도되었다. 이 주장의 당사자는 정무비서 김지은으로, 그의 주장에 따르면 안 지사로부터 8개월째 4차례의 성폭행과 수시로 성추행을 당했고 다음 날 고소를 할 예정이라 밝혔다. 반면 안 지사 비서실의 해명은 "부적절한 관계임은 이해하지만 합의한 관계이며 강압이 없었다"고 밝혀 최소한 성관계 여부는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이후 안 지사는 자신의 페이스북 명의로 비서실의 해명은 거짓이라며 합의하 성관계가 아니었음을 시인했다.
JTBC 보도 직후 열린 민주당 긴급 최고위원회의에서 출당 및 제명조치가 진행되었으며, 3월 6일 새벽 본인의 페이스북에 사과문을 발표하고 입장을 표명했다. "합의에 의한 관계라는 비서실의 입장은 잘못이었다"며 "도지사직을 사퇴하고 일체의 정치 활동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2018년 3월 6일 공식적으로 더불어민주당에서 제명 및 출당 조치 되었다.
정치활동 중단 이후
2018년 8월 14일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2019년 2월 1일 2심 재판부는 1심 재판을 뒤집고 징역 3년 6월을 선고하여 안희정은 법정구속되었다. 이후 상고하였지만 2019년 9월 9일 대법원에서도 징역 3년 6월 실형을 확정하여 성범죄자가 되었다. 이로써 정치계에서는 완전히 퇴출되었다.
2020년 7월 4일 모친상을 당했다. 특별귀휴를 통해 상을 치르러 나갈수 있긴 하나 코로나-19 상황이기 때문에 귀휴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결국 형집행정지로 일시 석방되었다. 더불어민주당 안팎의 전현직 정치인들이 대거 조문을 오고 문재인 대통령도 조화를 장례식장에 보내 추모했다. 그러나 '어려운 사정'이나, '자기도 옥중에서 아버지를 잃었다'이라는 일부 인사들의 발언, 그리고 '내일의 성범죄자에게 용기를 주지 않겠다'던 추미애 법무부장관의 조문은 정의당과 래디컬 페미니스트의 많은 반발을 샀다.
정의당에서는 이런 행태를 두고 "민주당 대표, 원내대표, 대통령이라는 직책을 걸고 조화를 보낸 행동이 정말 책임을 통감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며 "오늘과 같은 행태가 피해자에게, 한국 사회에 '성폭력에도 지지 않는 정치권의 연대'로 비치진 않을지 우려스럽다"고 비판했다. 국회 페미니스트 노동자 모임 국회페미에서는 '오랫동안 함께 일한 동료의 모친상을 개인적으로 찾아 슬픔을 나누는 것은 당연한 도리'라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도, 정치인들이 보낸 조화의 비용을 국민의 혈세가 아닌 개인 비용으로 처리할 것을 주장했다.
이와 같은 조문 관련 공격에 대해 '그럼 지인 부모상인데 조문도 못 가느냐?' '안희정 본인상도 아니고 그 어머니가 죄 지은게 아니지 않느냐?' 등 싸늘한 시선의 반박도 나왔으며, 포털 댓글들 역시 정의당을 비난하는 기류가 강했다. 정치권에서도 정의당 외의 다른 정당들은 아무런 입장도 내지 않았다. 실제로 민주당이 아닌 제1야당 국민의힘 하태경 의원은 “철천지원수 간에도 상을 당하면 조의를 표하는데 안 지사 모친상에 조화 보냈다고 비난하는 건 너무 가혹하다”라며, 특히 과거에 심상정 정의당 대표가 김정일 조문을 주장했던 것을 꼬집어 “수십만 북한 주민을 정치범수용소에 가둬 죽이고 연평도 포격과 천안함 폭침으로 우리 국민과 청년 장병들의 목숨까지 빼앗아 간 반인륜 범죄자의 죽음에는 애도를 주장하고 안 전 지사 모친상에는 조화도 못 보내게 하는 건 도대체 무슨 기준인가”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서는 기성세대와 2030세대 간의 '인륜'에 대한 시각차, 가치관 차도 있다는 분석도 잇따랐다. 즉, 86세대 등의 기성세대에게는 죄인 여부를 떠나서 지인의 부모상을 참석하는 것이 인륜이고 몇몇 조문 참석 정치인들의 표현을 빌면 유불리를 넘은 '의리'이기까지 하지만, 2030세대는 그런 과거 유교시대의 가치관이 희석되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2020년 3월에 출간되었던 안희정의 성폭력을 고발한 김지은의 수기인 '김지은입니다'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진입하였다. 또한 뒤이어서 같은 해 7월의 박원순 자살 사건과 이은 박원순 성추행 사건에서 정의당 류호정, 장혜영 의원의 '조문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한편, 판결 이후 2년여의 시점이 흐른 2022년 1월 16일, MBC 방송을 통해 국민의힘 윤석열 대통령후보의 배우자 김건희가 안희정을 옹호하는 발언이 전파를 타게 되었다. 김건희는 "난 안희정이 불쌍하더만. 둘이 좋아서 한 거를. 얘(안희정 전 지사)가 강간한 것도 아니고"라고 사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며 "김지은이 웃긴 애 아니야? 지가 (성폭력이 일어났을 때) 소리를 질렀어? 뭐했어? 둘이 합의하에 했으면서"라고 성폭력 사건의 실체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특히 김씨는 "안희정을 문빠가 죽인 거지", "(안희정을) 대통령 후보(에서) 아예 잘라 버리려고 문빠에서 죽인 거지" , "보수에서 죽인 게 아니라 지그들 내부에서 싸워서 (안희정을) 내친 거야"라고 주장하며 해당사건이 정치공작일 가능성을 재기했다. 한편, 김씨는 "나랑 우리 아저씨(윤석열 후보)는 지금도 안희정편이야"라고 발언하였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윤석열 후보 역시 안희정을 무고한 희생자로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22년 3월 8일, 부친 역시 노환으로 별세하면서 수감 중에 양친을 모두 여의게 되었다. 당일 오후 10시 40분에 여주교도소를 출발했다고 한다. 이번에도 부친상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는데 이번엔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조화를 두고 정의당 내 페미니스트들뿐만 아니라 이탄희, 박지현을 필두로 한 민주당에서도 반발하는 구도가 되기도 했다.
정치인 안희정
친노의 적장자
“안희정씨는 나의 최측근이 맞다. 안희정씨는 오래 전부터 나의 동업자이자, 동지였다. 나를 위해 일했고 나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있다.”
2003년 5월 1일, 대선자금 수사 정국 당시 MBC 100분 토론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
"내가 대통령이 되고 난 뒤에도 안희정 씨가 나 대신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나는 엄청난 빚을 진 것입니다."
2008년 1월 8일, 안희정 출판기념회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축하메시지
친노 중에서도 가히 지존, 최고존엄의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노무현이 본인 다음으로 가장 신뢰했던 인물로서, '노무현의 왼팔', 그리고 이광재와 더불어 '좌희정-우광재'라 불리었는데, 당연히 우의정보다 좌의정이 높은 것처럼 노무현에게 있어서 오른팔로 불렸던 이광재보다도 확실히 한 단계를 더 뛰어넘는 긴밀한 관계, 최측근 중에서도 노무현 바로 옆에 있었던 심복이 안희정이었다.
안희정과 노무현의 관계가 어느정도였냐면 심지어 '노무현의 정치적 동업자'로 불렸을 정도. 이것은 단지 언론에서 붙인 별명이 아니라 노무현 본인이 현직 대통령 시절을 안희정을 자신과 동업자이자 동지였다라고 발언했을 정도였다. 노무현이 계속해서 낙선하던 시절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각종 사업을 시작했을 당시 모든 실무와 자금을 담당해 온 것은 안희정이었고, 93년 8월 설립한 지방자치실무연구소의 실무를 담당하던 것도 안희정이었기 때문에 노무현의 안희정에 대한 신뢰는 다른 친노 인사들에 비해 유달리 남달랐을 사연이 있었다.
위와 같은 사연으로 안희정 또한 노무현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여기 계시는 노무현과 저는 정치적 동업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할 정도였다. 안희정은 이광재와 함께 노무현이 꼬마 민주당에서 거의 정치 세력 없이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부터 노무현에게 인생을 걸고 같이 했던 몇 안되는 정치적 동반자, 동지였고, 따라서 친노 성골 중 차기 왕위계승권 서열 1위에 해당한다 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다.
하지만 노무현 당선 직후 선거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받고 수감되면서 오히려 노무현 정권 내내 요직을 맡지 못했다. 이에 대해서는 노무현 대신 감방에 갔다는 인식이 당시에 퍼졌고, 심지어 노무현 본인도 "안희정이 저를 대신해 희생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노무현이 언더독에서 극적인 역전승으로 대선에 당선된 이후 그동안 노무현을 거들떠 보지 않았던 수많은 날파리들이 몰려들면서, 심지어 노무현 탄핵에 앞장섰던 인물들 조차 나중에 친노를 자처하는 현실 속에서 친노 중에서도 지존의 위치에 있었던 안희정의 위치는 서서히 잊혀진 감이 있다. 안희정 본인 또한 노무현 자살 이후 스스로 정치적 자립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입혀진 친노의 적장자라는 이미지를 어느정도 희석시키려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친노 중에서도 안희정보다 노무현과 가까웠던 사람은 없었다.
참여정부 말기, 모두가 노무현에게서 등을 돌릴 때에도 '참여정부 평가표'와 참여정부평가포럼을 만들어 끝까지 노무현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했다. 노무현의 사망 직후엔 유시민과 함께 장례식장에서 상주노릇을 자처하며 조문객들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러나 임기 말 좋지 못한 범여권의 정치적 사정으로 인해 정권을 한나라당에게 내주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을 함축해서 친노 진영을 '폐족'이라고 지칭한 바 있었다. 친노의 대표 인사로 분류되는 인물이 친노 진영을 향해 자조했던 발언이었던 만큼 당시에는 친노 정치세력의 패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로 해석되었다.
충남도지사
대통령의 측근이나 징역살이로 그럴듯한 정치적 커리어도 없고 친노진영도 몰락하게 되면서 안희정도 정치 생명을 연장하기 글렀다는 평가가 많았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에 사분오열 되는 와중에도 항상 민주당을 지켰고 노무현의 비극적인 최후로 뭉쳐진 추모 여론, 정권 교체 이후 이명박 정부의 연속적 실정에 따른 지지율 하락과 이로 인한 참여 정부에 대한 재평가 등의 반사효과가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노무현에 대한 진실한 마음을 보이며 다소 보수색이 강하기로 알려져 있는 충청남도의 도정을 맡기에 이른다. 이로써 이렇다 할 정치적 커리어 없던 안희정은 광역자치단체의 행정가로 화려하게 거듭났다.
이명박이 이때의 선거 패배 때 왜 여권에는 이광재, 안희정 같은 사람이 없냐며 아쉬워했을 정도로 친노인사치고 보수진영 인사들에게도 호평받는 편. 아무래도 친노진영으로 분류되는 정치인 중엔 그나마 온건파적 성향인 것도 한 몫한다. 이러한 중도적인 성향을 통해 진보나 보수언론을 가리지 않고 광폭 행보를 보이며 중도층에게도 큰 호감을 얻었으며,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의 충남도지사 재선을 계기로 더이상 '친노'라는 수식어 없이도, 자기 능력을 바탕으로 정치 세력화를 얼마든지 추구할 수 있음을 입증해보였다. 일부 민주당 강경 지지자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온건파적인 면모 때문에 약간의 비토 정서를 보이고 하지만 적어도 그 능력은 탁월하다고 인정할 정도이다.
중도적이고 새로운 정치를 강조하는 인물인 만큼 안철수와 간혹 비교되기도 하는데 약간 중도보수에 가까운 안철수와 달리 자신은 스스로 '진보' 정치인이라며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있어 중도에서도 진보에 가깝다. 또 자신은 김대중-노무현을 잇는 장자가 되고 싶다고 말할 정도. 물론 이뤄지지는 않았다. 안희정이 말하는 새정치는 새로운 진보와 보수의 틀을 만들자는거지 안철수처럼 그 제3지대를 구축하겠다는게 아니라며 선을 긋고 있다.
출중한 행정 능력과 대한민국 정치계의 메인 스트림으로 부활한 친노의 적통이고, 여야 동년배 정치인에 비해 돋보이는 수려한 외모, 준수한 화술과 논리력, 인생역정은 연설이나 토론, 방송, 유세 등에서 대중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플러스적 요소를 갖추고 있지만, 19대 대선에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날리기 전에는 대중적 인지도를 갖추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워 본인의 말처럼 '지방 사또' 정도의 정치인으로 남아있었다. 대중적 인지도가 높다 할 수는 없었어도 전국적으로 상당히 주목받던 차세대 정치인임은 사실이며, 충청 대망론의 대표주자로 미는 분위기도 있었다. 실제 충남지역에서는 행정가로서 보여준 탁월한 행정능력과 사람을 가리지 않는 인품에 대해 세대를 막론하고 안희정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는 여론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충청 민심을 증명하듯 2015년 9월에 충청인이 선호하는 '충청권' 정치인에 차기 대권주자로 꼽혔던 반기문(2위 - 11.4%)을 제치고 1위 - 26.6%를 기록했다. 도지사로 재임하고 있는 충남지역(39.6%)에선 무려 10명중 4명이나 안희정을 선호했다. 그 외에 대전(23.8%), 세종(34.8%)로 각각 지역에서 1위이다. 한편으로 충북에선 상대적으로 약세였는데 10.8%로 반기문, 이시종에 이어 3위에 올랐다. 고무적인 것은 민주당의 취약점인 55세 이상의 장년층에서도 22.9%로 1위를 차지했다는 것과, 선거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30~54세의 선호도가 30.3%를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19~29세에선 18.4%의 선호도를 보였고 전체적으로 남녀간 지지차이(남성 26.4%, 여성 27.0%)는 미미했다. 이 여론조사를 통해 안희정이 '충청대망론'의 선두주자임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권 단일화 실패에도 불구하고 더불어민주당이 대전광역시-충청남도-세종특별자치시 지역에서 집권 새누리당과 무승부를 기록했고, 아울러 그를 최측근에서 보좌했던 김종민 전 정무부지사(충남 논산-계룡-금산), 조승래 전 비서실장(대전 유성 갑), 정재호 전 정책특보(경기 고양 을)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안희정 마케팅'이 더민주 지지층에게 상당한 호소력이 있다는 점까지 입증했다. 이 중에서 김종민 후보는 그 피닉제의 독주를 꺾으면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는 그 특유의 안정감으로 반기문 전 사무총장의 불출마 선언과 사분오열된 보수 정당으로 길 잃은 중도 ~ 중도 보수 지지층들이 안 지사에게 몰려 중도 - 보수 외연 확장성을 보여주며 대선 후보 선호도 2위까지 치고 올라갔었다.
유력 정치인들의 연령대에 비해서는 상당히 젊은편인 만큼 지금처럼 계속해서 순탄한 행보와 결정적인 성과 몇 가지를 내준다면 충분히 2022년 대권주자로 떠오를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잘생긴 얼굴로 인해 당대의 인기 아이돌 EXO에 비견되어 충남 엑소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신년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여권 지지자들이 차기 대통령으로 적합한 인물로 안희정이 꼭 거론될 정도였다.
앞서 말했다시피 비록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으나 비서 성폭행으로 그가 바라던 대통령의 꿈과 정치 인생이 한 줌의 먼지가 되고 말았다.
2019년 2월 1일 이뤄진 2심에서 10개의 혐의 중 9개가 인정되면서 징역 3년 6월을 받고 법정 구속되었다. 이후 같은 해 9월 9일 상고심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성향
오랜기간 민주당계 정당에서 헌신한 정치인이지만, 현재 민주당의 주류와 거리가 있는 정치 성향을 가지고 있다. 친문으로 대표되는 민주당 주류는 가능한한 직접민주주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경향이 강하고, 의회를 다소 불신하여 의원 내각제와 같은 분권형 정치 체계에 회의감을 가지고 있으며 대통령 중심의 확고한 체계를 선호한다. 하지만 안희정은 직업으로서의 정치인을 자주 강조하며 전문적인 정치인들을 통한 의회민주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또한 대한민국의 대통령제는 대통령 개인에게 모든 책임이 달려있는 것이 문제라고 발언하며 과도하게 권력이 집중된 구조를 벗어나 대통령과 의회가 권력을 나누어 갖는 이원집정부제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적폐청산이 주요 쟁점 중 하나였던 19대 대선에서 민주당 핵심 지지층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안희정이 다소 뜨뜻미지근한 평가를 받은 것도, 전당 대회를 통해 선출된 원내대표, 당대표가 있기 때문에 탄핵국면에서 전락지침은 그분들이 나서야하며 대통령 후보는 선출된 공식적인 공직이 아니기 때문에 나서서 발언하는게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상황에 맞춰 철새처럼 정당을 바꾸는 정치인들을 매우 싫어하며,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그대로인데 정당 간판만 바꿔서 이미지를 새롭게 하려는 정당들의 자세도 '회사가 물건 잘 안팔린다고 회사 이름 바꾸는 것 보았냐'는 비유를 들며 강하게 비판한다. 즉, 안희정이 보는 바람직한 정치는 정당이 회사와 같이 이른바 '정책 생산자'로서 정책을 구상하면, 국민은 '정책 소비자'로서 마음에 드는 정당을 지지하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실현되기 위해서 정당은 신뢰가 가는 회사가 되기 위해 뚜렷한 정치철학을 가지고 일관된 정책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전제를 강조하며 민주당을 향해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소신을 보여주고 있다.
복지정책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개인주의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데, 안희정 본인의 비유에 따르면 밥을 먹을 때 진수성찬이 없더라도 김치에 국만 한 그릇 있으면 맛있게 밥을 먹을 수 있듯이, 복지정책도 이것저것 쓸데없이 많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국민연금, 4대보험과 같이 사람이 일자리를 잃었거나 질병에 걸렸을 때 인간답게, 어느정도 존엄성을 지키며 살 수 있는 핵심적인 제도만 튼튼하게 가지고 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대선시즌 당시 이재명의 기본소득제를 비판하고 공방을 벌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민주당 내에서도 진보적 성향을 강력하게 보여주는 이재명 지사와 거의 대척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더불어민주당 제19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도 복지 분야를 두고 여러차례 충돌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안희정 여담 일화
유죄판결이 선고되었기 때문에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의 성범죄자 이용 불가 규정에 따라 소유하고 있던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계정이 비활성화 되었으며 평생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2013년 시사저널에서 선정한 차세대 리더 100인 '정치인 분야'에서 1위를 기록하였다.
2014년 2년 연속으로, 시사저널에서 선정한 차세대 리더 100인 '정치인 분야'에서 1위를 기록하였다. 종합순위는 4위.
2015년 3년 연속으로, 시사저널에서 선정한 차세대 리더 100인 '정치인 분야'에서 1위를 기록하였다. 종합 순위에서는 이재용에 밀려 2위.
2016년 4년 연속으로, 시사저널에서 선정한 차세대 리더 100인 '정치인 분야 1위를 기록하였다. 게다가 종합 순위도 1위를 기록하였다!
노무현이 선거법 위반으로 2007년 6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게 경고를 받자 나라의 왕인 대통령이 경고를 받았다면서 선출직 공무원만이 권력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고 독재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한 임명직이 권력을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발언한 바 있다.
노무현 사망 당시 분노에 찬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평소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다르게, 당시 노무현 사망에 관한 의견과 감정을 매우 격하게 표현하였다. 그 이후 김영삼이 이명박에게 노무현을 국민장으로 치뤄 준 것은 큰 실수고, 가족장으로 충분했다며 노무현은 내가 정치에 입문시켰건만 의리가 없다고 폄하하자, 김영삼에게 "노무현 대통령님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빚진 것이 전혀 없습니다. 김영삼씨가 노무현 대통령께 빚을 진 것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사과하십시오." 라고 하면서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충남도청이 대전광역시에 있을 시절에 민선 5기 이자 36대 충남도지사로 선거에 당선되었으므로 역대 충남도지사 중 마지막으로 대전에서 근무했던 지사이다. 당연히, 내포신도시에서 근무하는 첫 번째 지사이기도 했다.
지역 농민과의 대화 같은 자리에서 도지사석만 가죽이 입혀진 나무 의자가 놓여진 일이 있었는데, 도지사 의전실에서 사전 점검을 와서는 전부 치우게 하고 다른 의자와 같은 접이식 철제 의자를 놓았다. 아마도 본인의 적은 나이 때문에 이런 부분에 있어서 특별히 더 조심하는 듯 하다.
병역은 이행하지 않았는데 병역 비리로 이행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젊은 시절 학생 운동 중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옥살이를 했기 때문이었다. 80년대 중후반에는 20대들 중에서 사상범으로 감옥살이를 한 사람은 병역 대상이 아니었다. 사상범을 군대에 보내면 오히려 더 위험한 인물이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1984년까지 80년대 초반에는 녹화사업이라는 명분으로 운동권 학생들을 강제 징집시켰는데 문서에 적혀있는 대로, 그야말로 사람을 죽이려고 군대에 가둬놓는 방식이라 그에 따른 문제가 심각했다. 심지어, 공식으로 확인된 녹화 사업 관련 의문사 피해자만 무려 6명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 녹화 사업의 대표적인 피해자였다. 그 엄혹한 전두환 정권에서도 이 강제 입대와 녹화 사업을 1984년 9월에 폐지했을 정도다. 그 이후부터는 안희정의 사례처럼, 감옥으로 보내서 군대에 아예 못 가도록 막았다.
노무현 2000년 16대 총선 다큐 미공개 영상(8분49초) 에서 안희정의 젊은 시절을 볼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차기 대권 잠룡으로 손꼽히는 박원순, 손학규가 대선 출마를 고려하고 있다는 듯한 발언을 하며 관심을 모으던 와중에 같은 대권 잠룡이기도 한 안희정도 '불펜투수로서 몸을 풀겠다'며 대권에 도전할 뜻이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다. 안희정의 이러한 말에 당시 더불어민주당 최강의 실세였던 문재인은 "안희정 지사 같은 훌륭한 후배와 경쟁할 수 있게 된다는 건 영광스런 일이다"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대선의 승리는 대통령 개인의 승리가 아닌 정당의 승리가 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국민의 승리가 되어야 하는 점을 강조한다. 한국 정치에서 정당들이 불리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정당명 바꾸기를 밥 먹듯이 하는 점을 지적하고, 아직 정당 정치가 뿌리 내리지 못한 점을 강연 때마다 언급하고 비판한다. 미국의 뿌리 깊은 의회 정당 정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2016년 5월 25일, 헌정 팟캐스트가 생겼다.
2016년 11월 4일, 팬들이 운영하는 안희정 News 텔레그램 채널이 열렸다.
팬이 운영하는 안희정의 잘생긴 모험이라는 트위터가 있었다. 안희정의 사진으로 적절히 드립을 치는데 주로 사진과 함께"~하는 잘생긴 안희정"이라고 트윗이 올라왔다. 트윗 모음 심지어 안희정 본인이 팔로우하고 있다. 그러나 성폭행 폭로 이후에는 안욕정의 이쁜이 모험이라는 계정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상술했듯이 부친의 영향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존경한 적도 있었다는데 현재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와 함께 친노무현계의 대표적인 대권 잠룡이 된 것을 생각해보면 인생사란 참 알 수 없는 것이란 생각이 들게 한다.
사드 배치 논란에 대해서는 배치 반대 쪽이지만 이미 합의한 내용을 차기 정권이라고 해서 파기하기는 어렵고 다만 미국한테서 한일관계 관련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손학규 동아시아미래재단 상임고문을 보고 "진심으로 부탁드린다. 정치 일선에서 은퇴해달라"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본인이 먼저 은퇴했다 민주주의의 근본 중 하나인 정당 정치 원칙을 훼손했다는 점을 지적하여 비판했다. 매번 대선 때마다 동지가 바뀌고 하는 떴다방식 정치를 그만두고 젊은 후배 정치인에게 다음을 맡겨 달라고 했다.
의외로 보수 정당에 속한 남경필, 원희룡과도 막역한 사이이다. 특히 동갑내기인 남경필과 절친으로 유명한데, 이 두 사람이 공동 정책과 공약도 내놓았을 정도로 친했다. 어느 정도로 친하냐 하면 양세형의 숏터뷰에서 남경필이 유승민과 안희정 중 누구를 선택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잠시 고민하다 안희정을 고를 정도다. 과거 2015년 메르스 사태가 터졌을 때 경기도와 충청남도의 공조가 매우 빨랐던 이유로 꼽히기도 한다. 당시 두 사람이 각각 도정을 맡고 있었기 때문. 이러한 관계로 향후 두 사람 중 한 명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면, 다른 한 사람은 국무총리 겸 정부 수반이 되는 것 아니냐는 농담도 있었다. 실제 남경필은 공약으로 대통령이 되면 안희정을 책임 총리에 임명해 내치를 맡기겠다고 내세웠었기 때문.
발음이 좀 꼬이고 버벅거리는데 5.18 민주화운동 이후 전개되었던 학생 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을 때 자살하려고 혀를 깨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운동권에 있었기 때문인지 이미지와는 다르게 비속어도 꽤 유창하게 사용하는데 노무현입니다에서 했던 인터뷰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공부의 신 강성태의 아프리카 방송에 참여했다.
최근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하는 고지용이 안희정을 닮았다. 중안부가 긴 얼굴형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견자단과 닮았다하여 야갤 등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견자단이라고도 불린다.
주갤에 인증을 했다.
2017년 1월 19일과 26일, SBS 웹예능 양세형의 숏터뷰에 출연했다.
만약 당선된다면 어떤 대통령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청와대에 농구 코트를 만들어 청와대 근무자들과 농구를 하고 싶다고 했다. 대한민국에 활력을 불어넣고 싶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농구광인 미국 대통령이 있기도 했다.
2017년 1월 23일 대선 출마 기자회견 자리에서 홍석천과 함께 성 소수자 차별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그들의 인권을 지지하겠다는 발언을 하여 화제를 모았다. 이에 앞선 1월 18일에는 팟캐스트 "이이제이"에 출연하여 받은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종교적인 교리이든 이념이든 우리가 상식적으로, 현실적으로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손가락질을 할 권리가 없다", "종교, 이념, 국가 그 어떤 논리로도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정체성과 그들의 개성에 대해 재단하거나 뭐라고 할 권리가 없다. 그 문제에 대해 나는 철저히 리버럴"이라는 답변을 한 바 있는데 그에 관하여 홍석천이 표 계산에서 전혀 유리할 것 없으니 입 다물어도 이해하겠다는 말을 하자 다시 확고한 지지 의사를, 그것도 젠더 이분법 같은 이반 커뮤니티에서도 소수자 담론에 그치는 소재까지 끌어와서 강조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차별금지법 관련 논란에 대한 제정 지지 여부를 묻는 질문에 반대 의사를 표함으로써 그에게 감동했던 성 소수자들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덕분에 2월 16일 문재인이 연설 중 고성을 지르며 거세게 항의했던 성 소수자들이 그보다 몇 시간 전에 더불어민주당 중앙당사 앞에서 가진 차별금지법 반대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에서도 문재인과 함께 쌍으로 까였다. 근데 이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성 소수자의 의견을 대표하는 집단이 아니라 파장은 크지 않았다.
안희정의 아들 안정균은 19대 대선때 더불어민주당의 청년유세단에서 활동했으며, 언론에도 자주 노출되었다. 이후 아버지의 성폭력 사건 때에 SNS에서 경솔한 발언을 해 지탄과 비난을 받았고, 피해자 김지은에게 직접 전화를 걸려고 시도했던 것으로 드러나 상당히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한일관계에 대해서 투트랙 전략을 허락해 달라고 국민에게 호소했다.
나이에 비해 밥을 많이 먹는다.
집사인 것으로 밝혀졌다. 러시안 블루 품종의 고양이 하늘이를 키우고 있다.
19대 대통령 선거가 문재인의 승리로 돌아가자 5월 10일 새벽 광화문에서 문재인의 볼에 기습키스를 해서 화제가 되었다(...). 이후 자신의 발언 차례가 오자 발음이 꼬이면서도 마이크를 놓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가는 행동이 전형적인 주사를 연상시키면서 충남주사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리고 10일 낮 트위터에 이불킥을 언급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사진이 문재인의 대통령 당선 확정 때 사진이라 한국 언론은 물론 외신들도 이 사진을 싣기 시작해 월스트리트 저널과 뉴욕타임즈가 신문 1면에다 실어버리며 삽시간에 월드스타가 되었다. 결국 안희정도 포기했는지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다. 어쨌든 이 주사는 경선 과정에서 있었던 문재인과 안희정 간의 앙금을 깔끔히 털어냈음과 동시에 노무현 이후 정권 재창출을 갈망해온 친노의 승리를 상징하는 장면이다. 현재는 이런 반응을 즐기고 있는지 페이스북에 팬아트까지 올렸다! 아울러 인터뷰에서도 "국민에게 웃음을 줬으니 그걸로 된 거다."란 말을 남겼다. 사실 정치적으로도 안희정에게 신의 한 수가 됐던 게 경선 과정에서 생겼던 친문과 안희정의 거리감을 뽀뽀 한 방으로 해소해 버린 셈이다. 김어준의 파파 이스 145화에서 김어준이 밝힌 바에 의하면 저날 안희정 지사 본인은 치맥하다가 불려 나갔다고 한다. 결국 몇몇 네티즌들이 술 취한 거 아니냐고 했던 것이 현실인 셈이다.
도깨비(드라마) 패러디를 한 적이 있다.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아내와 함께 도깨비에서 유명한 장면을 따라하고 안유라고 해시태그까지 붙인 적이 있었다.
빌 클린턴과 비슷한 점이 많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명문대를 졸업 후 정계 활동에 투신했으며,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점과 젊은 나이에 자신의 고향이 속한 최고행정구역의 장(도지사/주지사)를 맡으며 보수적 성향이 강한 지역에서 매우 높은 인기를 얻고 있었다는 점, 세부적으로 표방하는 정치 이념이 제3의 길이라는 것까지 동일하며, 재직 중 터진 성추문으로 정치 인생에 큰 타격을 받았다는 점까지 비슷하다. 하지만 안희정은 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결국 몰락한 반면, 빌 클린턴은 간신히 탄핵을 면하는 데 성공해 둘의 운명은 갈리게 된다.
2021년 재보궐선거의 서울특별시장 선거와 관련하여 4월 5일에 열린 후보 토론회 중, 국민의힘의 오세훈 후보가 돌아가신 안희정 지사라고 말실수를 범했는데, 듣고 있던 더불어민주당의 박영선 후보도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서(...) 시청자들이 안희정이 언제 죽었냐며 당황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그만큼 국민의힘 심지어 민주당에게로부터 잊혀진 정치인이 되었다는 반증을 한 셈이다. 단순 헤프닝 정도로 끝났고 인과응보 말고는 설명 할 수 밖에 없다.
2022년 안희정과 그의 부인 민주원씨가 옥중 합의 이혼 한 것으로 보도됐다. 이혼은 지난해 9월 협의했다고 한다.
안희정 약력 이력
1989년 통일민주당 김덕룡 비서관
1990년 민주당 이철 사무총장 비서관
1994년 민주당 이수인 비서관
1997년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 비서
1998년 자치경영연구원 사무국 국장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대통령후보 비서실 정무팀장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노무현 대통령당선자 비서실 정무팀장
2003년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
2003년 열린우리당 논산계룡금산지구당 창당준비위원장
2005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원
2007년 참여정부평가포럼 상임집행위원장
2008년 민주당 논산계룡금산 지역위원장
2008년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소장
2008년 민주당 최고위원
2010년 민주당 행복도시원안사수특별위원회 공동위원장
2010년 제36대 충청남도지사
2014년 제37대 충청남도지사
2015년 제9대 전국시도지사협의회 감사
안희정 선거 이력
2010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충청남도지사
367,288 (42.25%) 당선 (1위)
초선
2014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충청남도지사
460,691 (52.21%) 당선 (1위)
재선
안희정 저서
『담금질 : 안희정의 새로운 시작』, 나남, 2008년 1월 4일
『247명의 대통령』, 나남, 2010년 3월 1일
『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 안희정의 진심』, 위즈덤하우스, 2013년 11월 13일
『콜라보네이션 : 시민X안희정, 경험한 적 없는 나라』, 스리체어스, 2016년 10월 25일
『안희정의 함께, 혁명』, 웅진지식하우스, 2016년 11월 18일
『안희정의 길』, 한길사, 2017년 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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