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정치인.
정치인 임채정 나이 고향 학력 이력 프로필 (제17대 후반기 국회의장)
임채정
林采正 | Lim Chae-jung
출생
1941년 5월 14일 (81세)
전라남도 나주군 다시면 신풍리
(現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본관
나주 임씨
현직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한국기원 총재
제21대 국회 국민통합위원회 공동위원장
재임기간
제17대 후반기 국회의장
2006년 6월 19일 ~ 2008년 5월 29일
부모
아버지 임광택, 어머니 양경자
형제자매
3남 2녀 중 장남
배우자
기영남
자녀
슬하 2남
학력
광주제일고등학교 (졸업 / 34회)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약력
동아일보 기자
새정치국민회의 정책위원회 의장
새천년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
제17대 국회 전반기 통일외교통상위원장
제16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
열린우리당 열린정책연구원 원장
열린우리당 임시집행위원장
제17대 후반기 국회의장
임채정 생애 고향 학력 이력
1941년 5월 14일 전라남도 나주군 다시면 신풍리(현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에서 전남대학교 법과대학장을 지낸 아버지 임광택(林光澤)과 어머니 제주 양씨 양경자(梁敬子)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광주제일고등학교(34회),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이후 1969년부터 1975년까지 동아일보 기자로 근무하였다. 1975년 박정희 정권의 동아일보 광고 탄압에 대항하여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상임위원으로 활동하다 해직당하였다.
1979년 YWCA 위장결혼식 사건에 참석하였다가 국군보안사령부에 끌려가 고문당하였다. 이후로도 재야에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다.
1988년 다른 재야인사인 박영숙, 문동환 등과 평화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그리고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노원구 을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주공화당 김용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다. 처음에는 낙선으로 개표되었으나 소송을 제기하였고 재검표 끝에 민주자유당 김용채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당시 중앙일보 기사를 보면 임채정의 표 100표를 통째로 김용채 후보의 표로 집계했다고 한다.
이후 같은 지역구에서 제15대, 16대, 17대 국회의원(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대통합민주신당, 민주당)으로 더 당선되었다.
제17대 국회 전반기인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5년 열린우리당 당의장을 역임하였다.
제17대 국회 후반기인 2006년부터 2008년까지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재야출신으로서 첫 입법부 수장이 되었으며, 역대 의장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낮은 4선이라는 선수(選數)에도 불구, 열린우리당 내 지지에 힘입어 국회의원으로서는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는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노원(병) 선거구에는 한나라당 홍정욱과 진보신당 노회찬이 출마하여 대결하였는데, 한나라당 홍정욱이 승리하여 임채정의 후임자가 되었다.
2019년 5월 27일에 한국기원 총재로 추대되어 29일에 취임했다. 아마 5단으로 바둑에 대해 굉장히 관심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채정 정치 활동
동아일보 해직 기자 출신으로 재야운동에 매진했다.
1975년 자유언론수호투쟁으로 해직된 이후 민통련 사무처장 등 재야운동에 투신했다가, 13대 대선 당시 김대중(金大中)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 입장을 표명하면서 평화민주당에 입당했다.
당내 실세그룹인 동교동계와 소원해 당직 운이 그다지 없었지만, 1997년 탁월한 정세판단 감각을 인정받아 국민회의 정세분석위원장을 맡으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후 2000년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장,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민주당 정책선거특별본부장 등 요직을 섭렵했다. 2002년 대선 이후에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참여정부 각종 정책의 기틀을 마련하는 산파역을 맡기도 했다.
열린우리당이 계파대립 등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당의 `부름'을 받고 위기관리에 나서 '구원투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재야에 뿌리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성과 실용주의를 적절히 가미한 `합리적' 리더십이 당내의 폭넓은 신망을 얻게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2005년 1월 당 지도부가 4대 개혁입법의 국회 통과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사퇴했을 때 거의 모든 계파의 추대를 받아 임시의장직을 맡다가 후반기 국회의장을 맡은 것은 그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2005년 열린우리당 기획전략자문위원장과 열린정책연구원장 등 기획 및 정책분야에서 주로 활약했다.
임채정 여담 일화
머리가 좋고, 정세 판단과 정책 개발을 잘 했으며, 선거 전략을 아주 잘 짰다고 한다. 열린우리당 내에서 이해찬 의원과 더불어 최고의 전략가로 꼽혔는데, 임채정 의원과 이해찬 의원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바둑이나 장기를 두고 있을 때면, 마치 제갈량과 방통이 마주 앉아 있는 듯한 포스를 풍겼다고 한다.
나이에 비해 목소리가 상당히 젊다.
임채정 선거 이력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노원 을
30,346 (29.99%) 낙선 (2위)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노원 을
40,601 (32.96%) 당선(1위)
초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노원 을
41,615 (33.25%) 당선(1위)
재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노원 을
47,815 (41.11%) 당선(1위)
3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노원 병
44,923 (45.21%) 당선(1위)
4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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