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정치인, 기업인, 스포츠기관인. 정주영 현대그룹 초대 회장의 6남으로, 현 현대중공업그룹의 총수. 그리고 전직 7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또한 축구행정가로서 한국 축구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FIFA 부회장(4선, 현 명예 부회장), 대한축구협회장, 한국프로축구연맹 총재를 역임했다.
여담으로 과거 언론 등에서 국회의원들의 재산 조사를 하면 항상 정몽준의 조 단위의 재산 때문에 평균치가 급격히 오르는 탓에 자료가 곡해될 수 있어서, 그는 빼고 조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는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들에서 신흥부자들이 워낙 많이 떠올랐기에 그 정도는 아니지만 오래 전까지만 해도 삼성의 이건희 회장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부자로 언급되기도 했다.
현대 정몽준 프로필 나이 재산 학력 이력 가족관계 (아산재단 이사장)
정몽준
鄭夢準 | Chung Mong-joon
출생
1951년 10월 17일
경상남도 부산시 동구 범일동
(현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거주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국적
대한민국
본관
하동 정씨
직업
기업인, 정치인, 스포츠기관인
현직
현대중공업그룹 총수
아산재단 이사장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
정몽준 생애 고향 학력 이력
정치인이 되기 전
서울장충국민학교, 중앙중학교,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진학한다.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해 나름 학력 콤플렉스를 가졌던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은, 정몽준이 서울대 상대에 들어가자 다른 재벌 총수들을 만나면 그렇게 아들 자랑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사실 고학벌이 즐비한 재벌들 사이에서도 정몽준의 학벌은 당대 최고 수준이다. 정몽준 이외에도 서울대를 졸업한 재벌로는 범삼성가의 이재용, 정용진(중퇴) 등이 있지만, 이 둘은 각각 인문대학의 동양사학과, 서양사학과 출신이고, 정몽준은 서울법대와 함께 문과 학벌의 정점으로 간주되었던 서울상대 출신이다. 여담으로 정몽준의 자녀들 중 정기선, 정예선, 정남이는 모두 연세대학교 출신이다. 어쨌든 정주영의 총애를 받은 아들로서, 형제들 중에서 가장 빠른 31세에 사장이 되었고, 부친인 정주영과 술집에 가서 자신이 외상으로 달아놓은 술값을 그 천하의 정주영한테 덤태기 씌우는 용자짓도 했다고 한다. 정주영 본인도 어이없어 했다고.
정주영은 정몽준이 머리가 좋다보니 현대그룹을 물려줄 생각도 해봤으나 정몽준 본인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정치자금 겸 현대중공업과 산하 계열사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정치란게 정치자금이 있어야 돌아가는 법이기도 하고, 본인도 대선에 출마한 적이 있으니 아들의 꿈을 어느정도 이해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대통령의 꿈을 아들이 이루어주길 바랬던 측면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국 못 이뤘다.
군 전역 이후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에 진학했다 MIT로 옮겨 졸업했고 이후 현대중공업에 입사했다.
병역
정치인·재벌가 사람들 중 병역문제에서 깨끗한 몇 안 되는 인물이다. 대학 재학중 대한민국 육군 ROTC로 입단, 후보생 시절 동기들의 단가방을 자비로 다 갈아치우기도 했다. 대한민국 육군 중위로 만기 전역했다.
사실 범 현대가에는 남자는 대체로 꼼수 쓰지 않고 군대는 가는 전통이 있다고 하는데, 이 전통은 정주영 때문에 생겼다. 뭔 소린고 하면, 정주영은 평소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고 싶어했고 그래서 실제 대선 출마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회창의 예가 있듯이 자식들의 병역에 문제가 발생하면 대선에 출마해서 당선되기 힘들다는 걸 알 수 있다. 투표가 가능한 국민의 거의 절반 가까이가 예비역 병장에 장교 및 부사관 출신이니... 때문에 정주영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서 일족들의 병역부터 제대로 관리해왔다는 후문.
정몽준의 장남(정기선)도 육군 학군사관(ROTC)으로 병역을 마쳤으며, 1군단 701특공연대에서 소대장과 연대 작전장교로 군생활을 마쳤다. 당시 아들이 복무하는 부대를 방문하여 모든 병사들에게 피자 한 판 & 치킨 한 마리씩을 돌렸으며, 낙후한 시설을 보고 사비로 군 시설을 개선해주고 싶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후자는 당시 지휘관에게 거절당했다고 한다. 아마 선거법상 문제의 소지가 있었던 것 같다.
정몽준 정치인으로서의 행보
2002년 이전까지
현대중공업 회장을 하고 있던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울산 동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1990년 3당 합당을 전후로 해서 민주자유당에 입당했지만, 1992년 초에 아버지 정주영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면서 당연히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통일국민당에 합류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통일국민당 소속으로 재선되었고 당 대변인, 정책위원회 의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아버지를 도왔다. 대선 직전 초원복집 사건을 기획했으나, 지역감정 역풍으로 아버지의 득표를 오히려 까먹었고 본인은 대선 후 범인도피죄로 기소되는 흑역사를 찍기도 했다. 그나마 항소심에서 선고유예를 받아 의원직 상실은 면했다.
통일국민당이 와해된 후로는 당적을 갖지 않고 2007년까지 무려 15년 동안 무소속, 1인정당 소속으로 독고다이 행보를 보인다. 그래도 1998년 정권이 교체된 후로는, 한나라당 강세 지역인 울산에서 기반을 다진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여당 쪽의 손을 들어주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화려했던 전성기 그리고
상기했듯 정몽준은 국회의원까진 몰라도 대통령과는 인연이 멀어보였는데, 2002년 그에게 천운이 다가온다. 바로 한일 월드컵을 유치하는데 그가 큰 힘을 썼기 때문. 게다가 이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기적적인 4강에 오르자, 축구협회장으로서 한국 축구를 적극 후원한 그의 입지 역시 급격히 올라가 몇개월만에 대선 후보 지지율 1위에 등극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한때 여론조사에서는 당시 유력대권주자였던 노무현을 제치고 이회창을 위협하기도 했을 정도.
이에 정몽준은 대선 출마를 결심하고 국민통합21을 창당한다. 처음에는 당시 이회창에 반발해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한국미래연합을 만들었다 자신처럼 붕 떠버린 동병상련 박근혜와 힘을 합쳐보려 했으나, 식사 자리에서 박근혜로부터 다짜고짜 김재규를 변호한 변호사 강신옥을 내치라는 요구를 받았고, 이에 결국 측근이던 강신옥이 곁을 떠났으나 그 과정이 매끄럽지 않은 것도 있고 애초에 정몽준과 박근혜는 성향이나 결이 좀 달랐던 것도 있어서 박근혜는 한나라당이 콜하자 다시 복당해 버린다.
그 후 후단협의 압박 등으로 새천년민주당 후보 노무현과 여론조사 방식에 따른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으나, 여론조사 결과 간발의 차로 패하고 만다. 단일화 후 이에 승복하여 대선에서 노무현 선거 운동에 나섰으나, 선거일 전날 밤 지지를 철회했다. 지지 철회 이유로는 외교 정책상의 이견, 차기대권주자로서 인정받지 못한 소외감 등이 거론된다. 특히 대선 전날 극단적으로 지지를 철회한 것은 감정 문제가 컸다.
김민석의 증언에 따르면 기존 단일화 합의는 모든 유세장에 단일후보 둘만 오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명동 유세에서 당 관계자의 실수로 노 후보 진영 인물 대다수가 단상에 오르게 된다. 김민석은 사고를 직감했고, 종로에서 분위기가 이상해지면 본인이 커버를 칠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어찌하다 종로 유세에서 서갑원의 지시로 또 다시 모든 인물이 단상에 오르게 된다. 게다가 직후 정몽준 진영에서 어떤 사람이 '차기는 정몽준!'이라 적힌 피켓을 보이자 노무현 후보가 '너무 속도위반하지 말자. 정동영, 추미애 최고위원도 있다.'고 한 것이 결정적으로 정몽준의 심기를 건드리게 된다. 이후 이동하게 된 냉면집에서 정몽준은 화가 나 소주만 마시고 있고 당직자들은 가만히 냉면만 먹는 분위기 속에서 정몽준 측근인 김흥국이 열이 뻗쳐 막 떠드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리고 직후 정몽준은 지지철회 오더를 내린다. 그리고 이 날 밤 집에 찾아온 노무현에게 문도 열어주지 않은 채 밖에 세워두다 돌려보내면서 정몽준과 노무현은 정치적으로 결별하게 된다.
하지만, 제16대 대통령 선거 결과 노무현이 극적으로 당선되면서, 결과적으로 하루만 더 참았으면 얻을 수 있었던 국무총리직을 스스로 날려먹은 셈이 되었다. 참여정부에서 국무총리를 하면서 후일을 준비했다면 미래가 어찌 됐을진 아무도 알 수 없는 일.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그 이상 못가고 정계 은퇴를 한 지금에 와서 보면 여러모로 기회를 놓친 행보긴 하다. 어쨌든 서로 간의 감정을 정산하는 문제는 이긴 뒤에 해도 늦지 않은데 굳이 선거 전날에 판를 깨야 되겠냐는 비판이 거세지면서 뭔가 쪼잔한 인간처럼 되어버려 정계에서의 입지도 확 줄어버리고 만다. 여기엔 후술되어있듯 버스비 발언 등 본인의 실언도 한몫했다.
이렇게 월드컵으로 얻은 정치적 위상 및 입지를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신기루처럼 흩어보낸 후, 국민통합21을 이끌고 17대 총선에 나섰으나 본인 1명만 당선된다. 결국 국민통합21을 해체하고 다시 무소속으로 있다가, 2007년 이명박 지지를 선언하면서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한나라당 입당 이후
한나라당 입당 후엔 계파색이 뚜렷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범친이계로 분류되었고, 2008년 4월 18대 총선에서는 기존 지역구인 울산 동구를 측근인 안효대에게 넘기고 서울특별시 동작구 을로 지역구를 옮겨 당시까지만 해도 민주당 거물이었던 정동영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동작구을 지역구는 당시 최대 격전지로 보도되었으나 투표함을 까고 보니 생각보다 쉽게 정몽준이 승리했다.
2008년 8월에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2위로 최고위원에 당선되었고, 2010년 박희태 대표가 사퇴하면서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직도 승계하였다. 다만 이 시기 후술된 버스비 사건으로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대권 욕심도 여전히 있었는지 당내 유력 대선 주자인 박근혜와 대립했는데, 박근혜가 2011년 포린어페어스에 기고한 기고문에 대해 "내가 잘 아는 교수가 대필한 것이다"라고 깎아내리거나, "식자층에선 박 위원장이 대통령이 되면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수 있다고 걱정한다", "당이 유신(독재)의 그림자에 덮여있다" 등 독설에 가까운 멘트를 날려 친박 세력에 제대로 찍히기도 했다. 허나 당시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고, 경선에서도 큰 바람은 일으키지 못하고 물러나고 만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는 동작 을에 출마해 당선되는데, 재미있게도 당시 상대 후보는 17대 국회 당시에 이 지역구의 의원이었던 현대자동차 사장/현대카드 회장 출신의 이계안 전 의원이었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의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나섰다. 당초에는 출마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으나, 마땅한 후보가 없던 새누리당의 강력한 요청과 함께 당시 안철수의 신당 창당 활동으로 야당 표가 갈릴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는지 입장을 바꿨다. 같은 당의 김황식, 이혜훈 후보와 경선을 치러 5월 13일에 최종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되었으며, 후보 등록과 함께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그러나, 선거 결과 현직 시장 박원순에게 큰 표차로 참패하면서 낙선하고 만다. 당시 모든 선거는 민주당의 압승이었고, 정몽준도 피해갈 수 없었다. 정치 인생 최초의 낙선이라 더더욱 뼈 아팠을 듯 하다. 더군다나 대선을 제외하고 보면 한국에서 가장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는 직 중 하나인 서울시장 선거였으니..
패배한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후보자 토론에서의 발언 문제, 그리고 당 차원에서 너무나 어설펐던 네거티브 전략 등이 있다. 박원순이 포스터에서 정면이 아닌 측면 사진을 쓴 건 떳떳하지 못해서라고 하는가 하면, 박원순 부인 잠적설을 꺼내는 등, 안하느니만 못한 무리수같은 네거티브였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뼈아픈 건 아래의 논란에서도 설명하는 가족들의 팀킬이었을 것이다.
2016년 20대 총선에는 아예 불출마했다. 대신 이런 글을 블로그에 올려 안효대를 공개적으로 지지했으나, 안효대는 선거에서 진보 성향의 울산연합 계파인 김종훈에게 패배하여 낙선하고 만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분당 사태까지 벌어진 2016년 12월 29일 새누리당을 전격 탈당했다. 개혁보수신당으로의 합류는 부인했으며, 이후 별다른 정치 활동이 없는 상황. 이제는 나이도 70이 다 되어가는 만큼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한 것으로 여겨진다.
2020년 박원순 사망 당시 조문을 하면서 오랜만에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다.
국제정치학 박사
1993년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교 국제대학원(SAIS)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본인의 프로필에도 '국제정치학 박사'임을 자주 강조하고 있다. 이 점은 본인의 주도로 설립된 아산정책연구원은 국내 유수의 국제정치 연구기관, 싱크탱크로 성장하고, 자신이 주장하는 핵무장론이 국내외의 주목을 이끌어내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단 정몽준의 박사 논문 주제인 "일본의 정부-기업간 관계: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원제: The government-business relationship of Japan : a case study of the Japanese automobile industry)는 외교, 국제분쟁과 같은 일반적인 국제정치보다는 특정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비교정치, 정치경제 부문에 더 가깝다. 하지만 학문적으로 국제정치는 이런 지역정치학 역시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기 때문에 납득의 여지는 있는 편이다.
전공이 국제정치학인데다가 오랜 국회의원 경력과 피파부회장 경력 때문에 글로벌인맥을 따라올 사람이 없다. 헨리 키신저와 매우가깝고 마이클 블룸버그와도 교분이 있다. 조바이든, 푸틴, 시진핑을 위시해서 전세계 거물들과도 교류한다. 한국사에 이 정도 인맥이 또 있을까.... 2011년에 『세상을 움직이는 리더와의 소통』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쓴 책이 아니고 대담집이다. 키신저를 포함해서 마이클 샌델, 기 소르망, 도널드 럼스펠드 같은 유명 인물들과 대화한 내용을 정리했다. 헤리티지재단 회장 에드윈 풀너도 있다.
국제적 활동의 베이스는 아산정책연구원이다. 매년 아산플래넘이라는 컨퍼런스를 개최하는데 거의 800명 가까운 국내외 인사들이 참여한다. 단순히 국제 인맥교류가 아니고 콘텐츠 기반으로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비중을 확보하는데 기여한다고 보면 된다. 한승주 전 외무부 장관이 이사장인데 자문위원단 면면이 화려하다. 전 세계은행 총재 폴 월포위츠, 전 브루킹스연구소 소장 마이클 아마코스트도 있다.
정몽준 재산
2015년 현역 국회의원 당시, 재산 1위를 항상 고수했다. 알려진 재산 총액은 2조원대다. 대선 출마 경력까지 생각하면 사실 한국의 도널드 트럼프가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인물. 바로 아래(?)에 있는 김세연(정치인), 안철수, 박덕흠도 어디가도 꿀리지 않을 자산가지만 엄연한 재벌인 정몽준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난다. 워낙 혼자서 튀는 수치라서 국회의원들의 평균 재산액이 언론에 보도될 때, 정몽준 재산은 반드시 빼고 평균을 계산하는 것이 거의 불문율이다. 정몽준을 제외한 국회의원 총 재산 평균은 대충 30억 원 정도 하는데, 정몽준을 평균에 포함시키면 거의 100억원으로 3배(!)나 증가한다. 2조 원을 국회의원 총 인원인 대략 300으로 나누면 67억 원이다. 그러니까 다른 국회의원 299명의 재산을 다 합쳐도 정몽준의 반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재산 때문에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주로 활동했다. 공직자들은 자신이 맡은 직무와 주식 및 해당 기업이 전혀 무관함을 입증하지 못하면 관련 주식을 비롯한 자산을 3,000만원만 남긴 채 모두 처분하거나 금융기관에 신탁 처분해야 한다. 이를 주식백지신탁제도라고 한다. 처분이라 해서 나머지 재산을 버리라는 건 아니고 주식을 매각해서 현금으로 바꾸거나 직무와 관련없는 분야의 주식으로 바꾸거나 하면 된다만, 정몽준이 가진 정도의 자산이면 변환 과정의 번거로움과 손실을 고려했을 때 그냥 안하는 게 낫다는 것. 그래서 현대중공업과 무관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박사 전공 국제정치학도 살릴 수 있는 외교, 통일 분야에서 활동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거시적인 외교정책을 다루는 외통위는 대표적인 거물들의 상임위, 말년병장 상임위로 꼽히기에 국회의원 재직 당시 다른 의원들이 고개도 못 들 정도의 거물이었던 정몽준이 가기에 적합했다.
이 때문에 현역 국회의원이던 시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사람은 뇌물 받을 일이 없다'는 평가 내지는 농담이 정치 성향을 막론하고 사람들 사이에 종종 나돌았다. 거기에 주변인 취업 청탁을 할 일도 없다.
참고로 재산 꼴찌는 성완종으로 나와있는데, 성완종 게이트 당시에 그가 전달한 뇌물의 액수나 경남기업 회장을 지냈다는 점 등을 생각해보면 순 뻥이다.
국내 축구계의 초거물 정몽준
한국 축구 역사에서 정몽준의 공로는 빠지면 섭하다. 정몽준은 1994~98년 동안 한국프로축구연맹 1-4대 총재를 맡았고, 1993년부터 2009년까지 16년간 47-50대 대한축구협회장을 역임했는데, 특히 2002년 월드컵 유치전 당시 활약상이 많이 회자되는 편이다. 당시 한국은 일본보다 5년이나 늦게 유치 준비를 시작한데다, FIFA 회장 주앙 아벨란제는 대놓고 일빠였다. 하지만 사실상 패배나 다름없는 상황 속에서 정몽준은 치열한 축구 외교전을 벌였고 현대그룹의 재력과 경험을 총동원하여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레전드인 디에고 마라도나를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등의 성과를 쌓아가며 기적적으로 공동개최안을 성사시킨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생각해보면 대부분 태극전사가 이룬 “4강 신화”를 먼저 떠올릴 테지만, 공동개최를 이끌어 낸 정몽준이나 기타 관련자들이 없었다면 당시 성적과 무관하게 국내에서 치러지는 월드컵의 감동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비단 월드컵 개최에 성공한 것 뿐만 아니라 정몽준은 한국 축구계의 인프라 개선에 자신의 사비까지 써가며 앞장섰고, 그 결과 한국도 축구 선진국 못지 않은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평도 있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 이후 더 커진 국민적 관심 고조와 인프라 개선 등의 영향인지 이전까진 주구장창 조별리그 탈락만 하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박지성이 이끌던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원정 최초 16강 진출의 쾌거를 이루기도 한다.
대한축구협회 일선에서 물러난 지금도 한국 축구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일단 울산 현대 대주주로서 표면적으론 팀을 운영하고 있으며, 실질적으론 2011년부터 2016년까지 그룹 산하 현대오일뱅크가 K-리그 타이틀 스폰서로 연간 35억원씩 후원하기도 했다.
FIFA 회장이나 AFC 회장직도 노렸으나 모두 실패했다. 제프 블라터와 반목했었고 반블라터파 렌나르트 요한손 전 UEFA 회장을 지지하며 그의 FIFA 회장 선거를 열심히 도왔으나 완패를 당했고, 이후 요한손이 블라터 지지를 얻은 미셸 플라티니에게 UEFA 회장 재선에 실패하면서 피파 내에서 블라터파에게 많은 견제를 받아야 했다. 결국 2011년 정몽준은 FIFA 부회장 5선을 노렸으나 블라터의 지지를 받은 알리 빈 알 후세인 요르단 왕자에게 패하여 떨어지고 명예 부회장이 됐다. 하지만 말 그대로 명예직이라 아무런 권한이 없기에 더 이상 FIFA에서는 아무런 영향력을 가지진 못한다.
그의 몰락은 한국 축구 국제 외교력의 몰락이라는 말도 있으나 김운용과 마찬가지로 후계자를 전혀 만들지 않고 자신의 집권에만 신경썼다는 지적도 있다.
주앙 아벨란제 전 FIFA 회장의 심복이 바로 제프 블라터였다. 덕분에 아벨란제가 물러난 뒤로 터진 그의 비리혐의를 죄다 블라터가 쉴드쳐주거나 덮어버려서 그 어떤 수사도 조사도 이뤄지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IOC 위원장 자크 로게는 전 위원장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의 심복으로 역시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공교롭게도 이 두 조직 부회장, 부위원장인 정몽준, 김운용은 전혀 후계자 및 지지 후임자가 전무했다.
반면 블라터에 맞서다가 지금은 야인이 된 렌나르트 요한손 전 UEFA 회장은 후임을 여럿 둬서 이들이 현재도 UEFA 고위직으로 남아서 플라티니의 경쟁 후보로 남아있다. 그래서 블라터와 플라티니가 요한손 전회장에 대한 문제를 언급할 때 이들이 똑같이 막아버린 거와 달리 김운용, 정몽준은 그러질 못했다. 파벌까지 뿌리뽑고 IOC에서 어떤 명예직도 없고 축출당한 김운용과 달리 그나마 정몽준이야 비리적 혐의가 드러나지 않았기에 명예부회장이라는 이름만 그럴듯한 걸 내주긴 했지만.
그의 몰락에 대하여 IOC가 안타까워했다는 후문이 있다.
그러나 제프 블래터가 회장직을 사임함에 따라 FIFA 회장 출마여부를 국제 축구 인사계들을 만나 경청한 후 좀 더 차분히 결정할 것이라는 발언을 한 바 있다.
하지만 결국 6월말 들어서 FIFA 회장에 도전한다고 뜻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정몽준의 FIFA 회장 당선에 대해서는 그리 밝아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아프리카 및 아시아 쪽 상당수 FIFA 임원들이 블라터를 지지하며, 다른 경쟁자들도 무시할 수가 없다. 그 중에서도 아시아 축구 연맹을 좌우하고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는 아랍 측에서도 정몽준을 견제해오는 게 사실. 위에 서술한 대로 정몽준을 그동안 FIFA 부회장이나 AFC에서도 견제하고자 블라터가 지지하던 게 아랍 측 인사였듯이. 게다가 블라터 반대파가 가장 많은 유럽 쪽도 유럽파 후보를 지지할게 뻔하다.
2015년 7월 23일에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8월에 공식 출마 선언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당선 가능성이 그렇게 높지 않지만, 출마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8월 들어서 강력하게 어필하고 개혁을 촉구하면서 강력한 후보인 플라티니 유럽축구연맹 회장을 블래터 전 국제축구연맹 회장과 아들과 아버지라고 비난하면서 나서고 있다. 문제는 2015년 들어서 터진 현대중공업 비리 문제로 반대 후보들이 기업 하나 감당못하는 주제에 어디서 FIFA 개혁을 외치냐고 맞설 거리를 만들어버린 셈. 게다가 더더욱 문제는 AFC 안에서조차 정몽준 지지세는 그리 없다는 점. 사실상 정몽준이 승리보단 정치적인 홍보로 이미지를 남기고자 크게 나선다는 반응이다. 이런 가운데 정몽준 사촌동생인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이 지지를 표명하며 FIFA 내에서 정몽준 입지를 보여주고자 2005년 8월 이후 끊긴 남북친선 평화축구 부활을 부르짖었으나... DMZ 목함지뢰 매설 사건, 서부전선 포격 사건이 터지는 통에 이건 가망이 없게 되었다.
정몽준 본인도 승산이 없다는 걸 아는지 2015년 9월, AFC가 블래터의 똘마니라는 듯한 발언을 하며 하고픈 말을 다했다. 당연히 AFC에서는 분노했다.
시사저널에서도 사실상 정몽준이 회장이 될 가능성은 없다고 기사로 분석한 바 있다. 유럽에서는 플라티니를 비난하면서도 사실상 그가 된거나 다름없다고 본다고 독일 및 여러 유럽 나라 언론을 보도하고, 남미, 아프리카는 플라티니 절대 지지세, 북중미도 미국 빼고 플라티니 지지세, 오세아니아랑 아시아도 마찬가지라면서...정몽준이 안된다는 글은 없으나 해외 5대륙 반응, 외신 보도로 보면 딱히 가망이 없어보인다.
여기에 FIFA 윤리위원회에서 2022 월드컵 대회 유치과정에서 한국 유치위원회의 국제축구발전기금 조성안 계획을 각국 집행위원들에게 전달했다는 이유로 자격정지 15년, 윤리위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명예훼손 혐의로 4년을 구형받았다. 김 이에 한국의 법률회사인 '김앤장'이 정몽준을 변호하기 위해 나섰다는 기사가 떴다. 다만 정몽준 자신은 이에 대해 자신이 개혁세력인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꿈보다 해몽'급 해석을 시전했다. 결국 2015년 10월 8일에 FIFA로부터 6년간의 자격정지를 받았다.
이에 항소했지만 기각당해 사실상 FIFA 회장에 도전조차 못하게 되었다. 사실 FIFA 회장은 너무나도 가망이 없었고, 차라리 부회장 선거를 나가고 강력한 회장 후보를 지지했다면 어떨까하는 아쉬움도 있다. 물론 플라티니가 너무나도 굳세 다른 후보로도 도저히 가망이 없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이전에 요한손을 이렇게 밀어줬다가 참패하고 자신도 부회장에서 오래가지 못했던 일이 있었기에 이것도 어렵다는 분석도 많았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이후 플라티니와 블래터도 정몽준과 같이 징계 및 처벌을 받아 FIFA에서 사실상 매장되었다. 그리고 FIFA 회장은 잔니 인판티노가 새롭게 취임했다.
정몽준은 2017년 3월 항소위원회로부터 결정 이유를 통보받고 바로 4월에 스위스 로잔에 있는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FIFA를 제소했다. CAS는 2018년 2월 정몽준에 대한 FIFA의 제재를 대부분 무효로 하는 판정을 내렸다. 징계가 취소됐다. 그의 징계 취소 후 첫 행보는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1차전 한국-스웨덴 경기 관람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FIFA에서 아무런 영향력이 없으며, 국내에서도 정치인으로만 활동하고 있지만, 그래도 한국 축구계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우선 정몽준 본인이 울산 현대 대주주이며, 그의 조카 정의선이 전북 현대 모터스 구단주다. 사촌동생 정몽규는 대한축구협회장 겸 부산 아이파크 구단주다.
정몽준 사회복지활동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이다. 이 재단은 1977년에 정주영이 현대건설 주식 50%를 내놓아 만든 것인데 세간에서는 서울아산병원재단으로 통한다. 당시 현대건설은 석유공사 다음으로 큰 국내 2위 기업이었다. 그 지분 50%는 거액이다. 정부 복지 예산의 3배쯤이었다는 말도 있다.
아산재단 사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 서울아산병원이다. 미국 뉴스위크가 한국 1위로 평가한 적도 있을 정도로 수위권의 대형병원이다. 3개 과목에서는 글로벌 4~7위에 드는 기염을 토했다. 원래 병원은 대학이든 재단이든 별 비중을 두지 않는 곳인데, 아산병원은 정몽준이 지원을 잘해서 의사들의 연구, 진료 환경도 괜찮은 편이라고 한다.
2011년에 정주영 10주기 기념으로 아산나눔재단을 설립했다. 정몽준이 2천억 원을 냈고 범현대 회사들이 낸 기금을 합쳐서 2021년 현재 5,870억 원이다. 주로 청년창업 지원 사업을 한다.
물론 이 공익재단들은 현대중공업지주를 비롯한 현대중공업그룹 계열사들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경영승계에 이용할 가능성이 없진 않다.
정몽준 논란
여기자 성희롱 논란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기간이던 2008년 4월 2일, 한나라당 동작구 을 후보로 출마했던 당시 서울 동작구 사당동에서 거리유세를 마친 뒤 MBC 보도국 김모 기자의 "뉴타운 개발 거짓말 논란"에 대한 질문에 "다음에 하자"며 30대 중반인 김 기자의 볼을 만지듯이 손으로 2번 톡톡 쳐 성희롱 논란을 낳았다. 정몽준은 당사자를 직접 찾아가서 사과하고 오해를 풀었지만 선거기간 내내 야권과 여성단체의 항의가 끊이지 않았다.
버스 요금 70원 발언
그야말로 재벌스러운(?) 흑역사. 2008년 6월 27일 KBS1라디오의 전당대회 출마 후보간 생방송 토론에서 공성진 후보로부터 요즘 버스비가 얼마냐는 질문이 있었다. 이에 정몽준 후보는 답변을 안하다가 상대의 계속된 추궁에 뭐 그런걸 물어보냐는 듯 호탕하게 "카드로 타는데... 한 70원 하나요?" 라는 전설의 멘트를 날렸다. 이 70원 소리를 듣고 공성진 후보가 말을 이어나가지 못할 정도로 굉장히 충격을 받았으며, 이어 정몽준 후보도 "요즘 버스비는 천원" 이란 소리를 듣고 역시 굉장히 충격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2008년 당시 서울 기준 지간선 버스의 요금은 성인 기준 현금 1,000원, 카드 900원. 타지역도 그 값에서 대동소이했다. 1979년에 일반 버스 요금이 60원, 1980년에 일반 버스 요금 80원이였다. 당시 정몽준이 다른 후보들에게 집중견제를 받으면서 인신공격을 받는 등 엄청난 공세에 시달려 순간 헛말이 나온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여하튼 설상가상으로, 그 이후 여론이 악화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교통카드를 보이며 교통요금을 잘 안다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는데 하필 그 카드가 청소년 교통카드였다. 그 이후 정몽준 하면 70원 드립이 항상 따라다니게 되었으며, 발언 후 6년이나 지나서 2014년 서울시장 후보로 나왔을 때도 '공약으로 버스비 70원 해 주나요?'라는 드립이 나왔을 정도. 자꾸 열받게 하면 버스회사 사버려서 요금 70원으로 만들어버린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이 사건 후 정몽준은 아예 각종 생활 물가를 미리 준비해다녔다고 한다. 2014년 4월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들이 TV토론을 하는데 정몽준의 자료집에 돼지고기 한 근 가격 등이 적혀있었다고.
사실 버스 요금을 정확히는 모를 수도 있다. 재벌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이런저런 이유로 대중교통을 오래 이용하지 않으면 충분히 까먹을 수 있다. 발언 당시의 정몽준과 비슷한 연배의 중장년층 중에는 자가용을 주로 이용하면서 수 년간 대중교통은 거의 이용하지 않아 요금을 잘 모르는 사람도 상당히 많다. 다른 예를 들면 지하철이 없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지하철 요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오차도 오차 나름이지, 현행 요금에 비해 터무니 없이 낮은 70원으로 대답한 것은 시장 물가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다고 인증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70원이란 금액은 버스 요금을 비롯해 그 어떤 것도 제대로 구매하기 힘든, 너무나 적은 돈이다. 하다못해 문구점에서 막과자 하나도 못 사먹으며, 오락실에서 게임 한 판 하는 것도 불가능한 돈이다. 즉 70원이란 돈으로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대부분의 서민 유권자와는 완전히 판단 기준 자체가 다르다고 드러난 것이다. 정몽준은 표심을 얻기 위해 자신은 재벌이지만 서민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공언하기까지 했기에 이 발언은 유권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서민 입장에서는 밉상으로 보일 여지도 있었다.
사실 그의 아버지 정주영은 개구리 올챙이 적을 잊지 않았는지, 아들을 선민사상에 찌들어 일반인과 동떨어진 천룡인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최소한 학창시절에라도 버스로 통학하게 하고, 보통 수준의 용돈을 지급하면서 서민 혹은 일반인 친구들과 함께 지내고 같이 공부하도록 했으며, 부자가 되었다고 쓸데없이 돈을 낭비하는 인물도 아니었다. 범 현대가는 재벌가 중에서는 이런 쪽으로 상당히 신경쓰는 집안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이후 정몽준이 성인이 되면서 자연스레 대중교통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며 알지 못하게 된 것이다. 정몽준이 버스를 타고 다녔을 법한 시절인 1965년에서 발언을 한 당시인 2008년까지 물가가 약 31배 올랐는데, 당시 버스요금이 8원이었다. 즉 어찌보면 정몽준도 자신이 버스를 타던 시절의 금액에서 '이만큼 올랐겠지?'하고 어림짐작으로 최대한 열심히 계산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변명을 들어주는 서민은 없었기에, 결과적으로 재벌 이미지가 너무 강해지고 대중 정치가의 꿈은 꺾여버렸다.
가족들의 발언 논란
2014년 당시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한 정몽준 후보의 막내 아들이 페이스북에서 세월호 사건과 관련하여 고위 공직자에게 물을 뿌리는 유족들을 향해 '시민의식이 미개해서 국가가 미개하다'라는 뉘앙스의 발언을 하여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정몽준은 논란이 커지자 "자식 잃은 부모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 아들의 불찰이다."면서 즉각 사과하고 진화에 나섰지만, 결국 이 사건은 그의 지지율을 떨어뜨리는데 한 몫 했고, 역전의 발판을 만들어도 모자라던 판에 필화를 입은 탓에 결국 서울시장 선거에서 낙선하고 만다. 이후 정치적 재기가 어려울 정도로 몰락했다. 서울시장 선거는 대통령으로 가는 발판 중 하나로 취급될 정도로 중요한 선거니...
이후 정몽준의 부인이 "아들의 발언은 크게 문제가 없었지만, 시기상 좋지 않았다"고 발언해 또 구설수에 휩싸이기도 했다.
여담으로 이 발언이 있은 후 정몽준은 떨어진 지지율을 만회해 보고자 한 고시원을 방문했는데, 이때 정 후보의 문화충격을 받은 듯한 리얼한 표정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몽준 여담 일화
오른쪽 눈이 약간 사시인 듯 하다.
2002년 대선 정국 당시 정몽준의 생모 문제가 본격적으로 떠들썩해지기도 했다. 호적상의 어머니는 변중석이지만, 실제 정몽준을 실제 낳아 준 생모는 따로 있다는 것. 당시 정몽준의 해명은 "미국 뉴욕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서울에서 '어떤 분이 어머니'라는 편지가 왔다. 그해 여름에 서울에 가서 강남의 한 아파트에 찾아갔더니 어느 아주머니가 자신이 어머니라고 말했다. 20분 정도 말씀을 듣고 나왔다. 다음날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다소 당황해하는 것 같았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그 일은 너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 뒤로 다시 만난 적이 없고 제가 그 분을 찾아간 적도 없다."였다. 실제 정몽준이 변중석의 소생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오랫동안 정재계에서 정설처럼 여겨졌다고 한다. 일례로 아버지 정주영이 1992년 대선에 출마 했을 때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슬하의 8남 1녀 중 여섯째 아들부터는 변씨 소생이 아니잖으냐?"는 질문을 받고 "막내인 정몽일 씨만 변씨 소생이 아니다"고 답변한 적도 있었는데, 바로 이 여섯째 아들이 정몽준이다. 결국 진실은 저 너머에..
글씨체가 좋게 말하자면 심플하고 나쁘게 말하자면 잼민이 같다. 다행히도 어맹뿌 같은 사태가 일어날 일은 없는 알아보기 쉬운 글씨체라는게 그나마 다행일지도. 안철수 글씨체와 상당히 유사한데 가장 큰 차이를 하나 꼽자면 정몽준은 글씨를 상당히 큼직하게 쓴다. 방명록을 쓸 때 남들은 종이의 절반을 채울까 말까 할 때 몇 자 안되는 글로 종이를 가득 메워버리는걸 보면..... 그리고 본인은 이에 썩 개의치 않는것 같은데 이렇게 대놓고 자신의 글씨를 내세우는데 거리낌이 없다.
프로필상 키가 182cm다. 지금 기준으로도 어지간한 젊은이보다 키가 크다. 부인도 키가 큰 편인데, 무려 175cm라고 한다. 지금 기준으로도 굉장히 큰 키인데 옛날에는 가히 거인 수준이었다고. 그래서 정몽준의 부인은 정몽준과 결혼한 것을 행복하게 여긴다고 한다. 정몽준도 상당한 애처가라고 한다.
현대학원 이사장 시절 졸업식 같은 주요 행사에 많이 참석하는 편이었는데, 당시 한 재학생은 실제 정몽준을 보고서 키도 훤칠한데다가 젠틀하고 멋있는 이미지(?)라는 평을 하기도 했다.
좌우명은 '君子 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이라고 한다. 뜻은 군자는 남들과 조화롭게 잘 어울리지만, 남들과 같아지려 하지는 않는다. 소인은 남들과 같아지려고만 할 뿐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회고록을 쓰기도 했는데, 이중 2002년 방북해 김정일과 회담하고 돌아온 박근혜 관련 일화가 2010년대 정계에서 주목받기도 했다. 요는 박근혜 방북 이후 남북간 친선축구경기를 주최했는데, 거기서 박근혜가 태극기 대신 한반도기로, '대~한민국' 대신 '통~일조국'으로 구호를 부르기로 북과 합의를 봤는데 실제 경기에서 응원단들이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당시 축구협회장인 정몽준에게 화를 냈다고 적혀있었기 때문.
울산 동구 지역 문화 시설을 방문하면 정몽준의 이름이 많이 걸려있는 편이다. 지역에서 국회의원을 내리 5선을 했고, 이후에도 현대중공업의 실질적 소유주로서 영향력이 컸기 때문인 듯.
거물 정치인이자 동시에 현대 그룹의 오너 일가, 현직 대기업 대주주라는 현대판 귀족 비슷한 스펙으로 같은 국회의원들에게도 많은 대접을 받은 듯하다. 강용석이 썰전에서 나와 이야기하기를 언젠가 정몽준과 골프를 치고 식사를 하는데 정몽준이 못 보던 와인을 마셔서 무엇이냐 물었는데 미국 가서 먹어보니 맛있어서 수입한다고 답했다 한다. 또 정몽준이 다른 국회의원들과 사적으로 식사하러 가면 정몽준이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하는데, 1인당 10만원이 넘는 비싼 밥을 먹어도 국회의원들이 농담 삼아(?) 더 비싸고 맛있는 거로 먹자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윗 문단에도 적혀있듯 정몽준이 국회의원이던 시절엔 정몽준은 빼고 평균 재산을 계산한다고 한 것도 강용석이 썰전에서 다시 부각시킨 것. 정몽준을 빼는 이유는 정몽준이 포함되면 국회의원 평균 재산이 몇백 억이 넘어가기 때문이라고..
2012년 7월 2일 19대 국회가 진통 끝에 원 구성을 마치고 늑장 개원을 했는데 당시 최다선(7선) 의원으로서 국회의장 직무대리를 맡아 국회의장 및 부의장단을 뽑는 첫 회의를 주재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이 회의에서 강창희가 국회의장으로 당선되었다.
대한축구협회장 당시 연예인으로선 유일하게 자비를 들여 원정 응원을 다녔던 김흥국과 연을 맺어 지금도 절친인 건 공공연한 사실. 그래서 매번 선거철만 되면 기자들이 김흥국에게 들러붙어서 출마할 거냐고 물어보는 게 관례였는데, 이에 김흥국이 총선 출마 포기 선언을 한 일이 있다. 그리고 김흥국이 출마를 못 하는 이유를 라디오 스타에 나와서 직접 밝혔는데 그 말이 걸작. "공천을 줘야 출마를 하지!"
잘 안 알려진 사실이지만 대한양궁협회 초대 회장이기도 하다. 현재야 뭐 정몽구와 정의선이 하고 있어서 모르는 사실이지만 대한양궁협회 역대 회장 명단에 들어가 있다.
청소년 시절, 경기중학교 시험에 낙방 후 중앙중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중앙중학교 동기들 중 공부 잘하는 애들은 경기고등학교나 서울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정주영도 정몽준이 경기고에 진학하기를 바랐으나 정몽준은 중앙고에 가겠다고 하자 '공부를 안 했으면 안 했다고 솔직하게 이야기 하지'라고 하면서도 중앙고 진학을 허락했다고 한다. 이후 중앙고에 3등으로 입학했다.
현실주의 FPS 게임인 Squad의 냉전 버전 Escalation 1985의 냉전과 관련된 명언 목록 중에 자신이 했던 발언인 "냉전을 억제시킨 유일한 억제제는 핵무기였다"란 말이 명언으로 올라왔다. 해외 게임에 한국인의 발언이 격언으로 소개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고 특수한 일이나 게임이 비주류 마이너 게임이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다만 정작 본인은 그 발언을 70원 발언과 함께 흑역사로 여긴다카더라. 사실 이 발언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좀 씁쓸한 게, 해당 발언 자체는 일리가 있으나 북한이 핵 포기 안하는 이유랍시고 주장하는게 딱 그 꼴이라...
정몽준 선거 이력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울산 동
무소속
40,253 (54.35%) 당선 (1위)
초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울산 동
61,263 (71.14%) 당선 (1위)
재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울산 동
무소속
55,697 (71.00%) 당선 (1위)
3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울산 동
51,346 (61.48%) 당선 (1위)
4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울산 동
56,851 (65.22%) 당선 (1위)
5선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동작 을
47,521 (54.41%) 당선 (1위)
6선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동작 을
46,480 (50.80%) 당선 (1위)
7선
2014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2,109,869 (43.03%) 낙선 (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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