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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야기/정치 / / 2022. 8. 21. 19:18

이석현 나이 고향 학력 이력 프로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부의장 역임)


대한민국의 제19대 전반기 국회부의장.

 

이석현 나이 고향 학력 이력 프로필

 

이석현 프로필
이석현

 

이석현

李錫玄 | Lee Seok-hyun

 

출생

1951년 3월 16일 (71세)

전라북도 익산군

(現 전라북도 익산시)

 

사저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평촌동

 

본관

전주 이씨

 

 

재임기간

제19대 후반기 국회부의장

2014년 5월 29일 ~ 2016년 5월 29일

제19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2021년 9월 1일 ~ 2022년 8월 18일

 

형제자매

2남 1녀 중 장남

 

학력

남성고등학교 (졸업 / 19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병역

대한민국 육군 상병 만기전역

 

종교

천주교 (세례명: 임마누엘)

 

신체

A형

 

경력

제14,15,17~20대 국회의원

제19대 후반기 국회부의장

환경관리공단 이사장

더불어민주당 한반도경제통일특별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이석현 생애 고향 학력 이력

익산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모두 졸업하고, 남성고등학교(19회)를 졸업했다. 본인의 증언으로는 당시 특별한 집안 형편은 아니었다고 하는데, 평범한 농부였지만 동네 사람들의 인심을 얻어 면의원을 하던 아버지의 '너는 커서 무조건 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기대와 그에 따른 영향으로 2남 1녀 중 장남으로서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우면서도, 학창시절 내내 전교 1등을 거의 놓친 적이 없다고 하며, 1등을 한번만 놓쳐도 항상 마음이 불편했다고 한다. 중학교 때는 아이큐 147이 나와서 학교에서 별명이 이천재였다고 하는데, 사실은 원래 중학교에 못 갈 뻔했다고 한다.

 

 

중학교 학비를 받아 쓰기엔 집안 형편이 빠듯해서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1등을 해서 전액 장학금을 타고자 공부를 했는데 2등을 하는 바람에 반액 장학금만 나오게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이던 분이 입학등록금 절반을 내 줘서 갈 수 있었다. 그래서 이후 학창시절 내내 전액 장학금을 받기 위해 더더욱 항상 1등을 해야 한다는 마음이 커졌다고 한다. 고교시절에는 한시를 공부하기도 하여 성인이 된 지금도 한자실력이 뛰어나서 국회에 써 있는 한문들은 전부 다 읽고 해석이 가능하다고 하며, 문학에 대한 관심으로 동화책도 출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석현 수석부의장

 

중고교 시절 계속 전교 1등을 유지한 관계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들어갔다가, 학생운동에 뜻을 두고 민중을 돕기 위해 법을 공부하겠다며 학교를 그만두고 재수를 하여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고, 사회과학연구회라는 모임과 가톨릭학생회라는 모임을 통해 운동권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지하신문 횃불을 발행하며 이후락을 비판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재학 중 교련 반대와 징집 거부로 기소된 적이 있었다. 그의 경우에는 특별히 운좋게 은사 양승규 교수(서울대 법대)가 그의 사건 담당 검사와 판사의 대학교 은사이기도 해서 그들을 설득하여 징역형을 받지 않도록 하고, 선고유예 겸 군입대로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군입대를 통해 후일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는 건 막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군대를 갔다와서 대학을 졸업하고 보험회사에 들어가서 나름 편안한 생활을 잠깐 하려 하던 중 운동권 시절 선배와 동료들이 찾아와 "지금 편안하게 살 상황이 아니다"라며 설득하여 운동권 생활을 병행하게 된다.

배기선, 문희상 등과 함께 13인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민주연합청년동지회, 즉 연청회를 만들어 1980년 시국사건에 연루되게 된다. 체포 후 보안사에서 고문을 당했으나 다행히 구속은 되지 않고 풀려나게 된다. 운동권으로 쫓기고 고문받는 생활에 질리기도 하며, 자신이 장남이라는 것 때문에 가족을 돌보는 안정된 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는, 다시 회사생활로 복귀하여 살고 있었으나, 대학선배 겸 고향선배였던 이협 전 의원이 그를 다시 설득하게 되었고, 일주일간의 고민 후 1984년 회사를 아예 그만두고 운동권의 길로 완전히 뛰어들어, 민주화 추진 협의회(민추협)을 만들고 온전한 운동권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 문희상 프로필 보러가기

 

그리하여 그 후 1년간은 수입이 없어 배고픈 생활을 했다고 한다. 운동권 선배들이 쥐어주는 뒷돈으로 겨우 먹고 살았다고.

이석현의 본격적 정치입문은 김대중의 동교동계 생활로부터 시작되었다. 1980년 연청회 시절에 잠깐 봤던 게 다였고 제대로 대화도 못해봤던 김대중이 1985년 미국에서 돌아온 지 몇달 안 된 어느 날 이석현을 동교동 자택으로 불렀고 단 둘이 식사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저런 사회 얘기를 하다가 "내가 미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며, "자네가 앞으로 내가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사회 각 부분에 대해서 일주일 동안 보고서를 써서 정리해 오게."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 민주화의 거성이던 김대중 선생의 요구였으니, 이석현은 당연히 정성껏 일주일 동안 자필로 언론환경, 노동권, 재벌, 군부, 정당 등에 대한 상황과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보고서로 작성해서 제출했다고 한다. 그러자 3일 뒤 김대중이 그를 비서로 채용했다고 한다.

그렇게 1985년에 김대중의 비서가 되어 동교동계 막내로 정치인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3년간의 비서 생활 끝에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평화민주당 후보로 출마하며 첫 공식 정치행보를 하게 된다. 당시 평민당이 87년 대선 이후 김대중-김영삼 단일화 실패에 대한 비난으로 홀대받던 시절이라 출마하려던 사람들이 적어서 40살도 안 된 정치신인이던 그도 공천을 받을 수 있었다. 사실 당시 공천담당자가 김영배 사무총장이었는데 나이 어린 이석현의 공천신청을 탐탁치 않아해서 다른 후보 공천신청을 기다리던 입장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 달 넘게 계속 공천을 안 해주는 것에 화가 난 이석현이 찾아가서 "사무총장님 저 공천 안 받을랍니다. 안양에 평민당이 요즘 인기가 없으니, 차라리 무소속으로 나가는 게 낫겠습니다. 나가서 구호도 '이당 저당 볼 것 없다. 사람보고 찍어주자'로 하렵니다."고 불만을 표출하자, 김영배 총장이 깜짝 놀라서 달랜 뒤, 바로 다음 날 공천을 해줬다고 한다. 그후 기호 3번으로 선거나갔는데, 결과적으로 낙선한다. 그러나 사실 그가 나간 안양시 을 지역이 가능성 없다고 생각해 포기한 평민당에서 그에게 별로 지원도 안 해주었는데, 그랬던 것에 비해 그가 높은 득표율을 얻고 기호 2번 통일민주당 신하철 후보에 이어 2위를 한 것에 대해 공을 인정받아 평화민주당 부대변인이 되어 당내 주요직을 맡게 된다. 당시 신하철과 표차이가 3천 표도 나지 않았고, 심지어 정치신인이던 그가 기호 1번이던 민주정의당 김일주 후보를 2천여 표 차이로 이겨 3위로 밀어냈다는 부분이 평민당 내에서는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낙선 직후 평민당 부총재가 "아이고 이 동지, 하마터면 당선될 뻔 했어. 좀 더 당에서 지원하면 좋았을 뻔 했네."라며 아쉬워 하면서도 격려해줬다고 한다. 이석현 본인은 이 얘기를 듣고 속으로 "아니 당선되면 좋은 건데, '하마터면 당선'될 뻔 했다는 게 무슨 말씀이지?"라고 좀 어이없는 느낌도 받았다고 한다. 그가 30년 가까이 이 말을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당시 부총재가 실제로 '하마터면'이라는 말을 쓴 게 사실인 듯. 그래도 그 부총재가 자신을 부대변인으로 적극 추천해줘서 처음으로 주요 당직을 맡은 거라 이석현 입장에서는 감사했다고 한다. 말투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이 에피소드의 부총재는 여성이었다. 당시에 50대 후반으로 나이가 있던 편이라 그런 말투를 쓴 듯.

그 뒤로, 안양시 지역구 관리를 꾸준히 하여 지지율을 올렸고, 1992년 총선에서 당시, 3당 합당으로 괴물당으로 불리던 민주자유당의 폭발적인 의석 독점에도, 안양에서만큼은 그가 어렵지 않게 큰 득표 차이로 당선될 수 있었다. 그렇게 하여 그의 국회의원 인생이 시작되었다.

 

이석현 정치활동

 

이석현 국회의원 경력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도 안양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통일민주당 신하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다시 같은 상대였던 신하철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당선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97년 이른바 명함 파문에 휘말린다. 당시 이석현은 외국인용으로 7개 국어로 적힌 명함을 쓰고 있었는데 중국어로 자신의 국적을 韩国(南朝鮮)으로 표기했다. 중국과 수교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한국이란 국명 옆에 괄호를 치고 그 안에 익숙한 '남조선'이란 명칭을 사용한 것이다. 문제는 그해 8월 15일 이석현이 참석한 로스앤젤레스의 한 출판기념회에서 국가안전기획부 직원이 그 명함을 입수하면서 비롯됐다. 그때 이석현은 미국에서는 중국어 표기가 의미가 없기에 '남조선'이란 글자를 먹선으로 지우고 명함을 나눠줬으나 그 직원은 그 명함의 내용을 안기부장 권영해에게 보고했다. 권영해는 여당인 신한국당 사무총장 강삼재와 정치적 활용 방안을 논의했다. 8월 20일 신한국당 대변인 이사철은 이석현의 명함 내용을 공개하며 색깔론을 제기했다. 조선일보 등 보수 언론도 이석현과 야당을 강력하게 공격했다.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눈 앞에 둔 야당에게는 위기였다. 새정치국민회의 창당발기인이자 고문을 맡았던 오익제가 월북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색깔론은 더욱 증폭됐다. 결국 이석현은 새정치국민회의를 탈당하고 계룡산 대성암에서 근신한다.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당선되자 1998년 2월 여당에 복당하였다. 같은 해 안기부와 검찰은 명함 파문이 북풍 공작의 일환이었다고 발표한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심재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06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4년부터 제19대 국회 후반기 국회부의장을 역임하고 있다.

 

 

경선 탈락 이후

2020년 민주당 경선에서 민병덕 후보에게 밀리며 경선에 탈락했다. 이렇게 현직 국회의원 생활을 마무리지었으나, 정계를 은퇴한 것은 아니다. 관양사거리에 있는 본인의 지역구 사무실도 간판을 바꿔달고 유지중이고, 트위터 활동도 하고 있으며 , 더 라이브에 박지원 의원에 이어 여당측 패널로 출연하면서 지속적으로 얼굴을 내비치고 있다.

한편 민병덕 측이 총선 당시 부정 경선을 저지른 혐의에 대해 1심부터 유죄 선고가 나오고, 민병덕 본인의 불기소가 봐주기라는 의혹까지 일고 있어서 민병덕의 다음 총선 출마 가능성이 불투명해졌다.

2021년 8월 27일 문재인 대통령에 의해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으로 위촉되었다.

이후 2022년 8월 18일, 대통령실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 민병덕 프로필 보러가기

 

이석현 정치경력

 

이석현 비판

종교인 과세

2015년 12월 1일 국회에서 종교인 과세에 대해 "재벌에 대해서는 법인세를 감세해주는 정부가 신앙인이 하느님과 부처님께 바친 돈에까지 세금을 물린다면 저승에서 무슨 낯으로 그분들을 뵐 것이냐"라고 발언하는 등 종교 편향적 발언을 여러 차례 하였고 그리하여 종교자유정책연구원에서 20대 총선 낙천요구대상자로 발표하기도 하였다.

 

세월호 천안함 잠수함 음모론

자로의 세월X를 언급하며 해군은 해당 지역의 수심이 37m에 불과하여 잠항이 불가능하다고 밝힌 데에 대하여 북한잠수함 활동 공격했다는 천안함과 배치되는 주장이라고 발언하였다. “해경, ‘세월호 침몰’ 수심 37m라 잠수함 못 다녀? 천안함 침몰수심은 8.6m” 하지만 천안함을 어뢰로 침몰시킨 북한 연어급은 130t급이며 한국 잠수함은 1300t급이란 체급 차이를 생각해보면 잠수함 체급에 따른 작전 안전 수심이 다른 것을 외면한 시류에 편승한 전형적인 음모론이다. 게다가 천안함은 어뢰로 공격당했으며 자로는 잠수함이 들이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을 같다고 생각하는, 매우 경솔한 발언이다.

 

 

남조선 명함 사용

1997년 해외용 명함에 한자로 '남조선(南朝鮮)'이라고 표기했다가 북한식 표기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행사 참석차 미국 LA를 방문한 이석현 의원으로부터 명함을 건네받은 재미교포가 이를 알리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이학영은 명함의 앞면에는 그의 얼굴 컬러사진과 함께 영문, 러시아어, 아랍어, 한자 등으로 적혀 있는데 그중 하나가 '韓國(南朝鮮) 國會議員 李錫玄'이라고 해명했다. "해외에 나가 여러 나라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경우 영문 명함만으로 한계를 느껴 14대 때인 94년부터 7개 국어를 동시에 넣어 새겼다"고 해명했다. 

 

 

이석현 여담 일화

의외로 아직도 싱글이다. 것도 통상적인 의미의 노총각 정도도 아니고, 2016년 부로 딱 만 65세가 된 그러니까 법적으로 '노인'이다. 오죽하면 이석현을 두고 VS 놀이를 벌이는 네티즌들도 몇몇 있었을 정도다. 보통 정계은퇴가 빠를 것인가 VS 결혼이 빠를 것인가 식으로...사실 본인이 방송이나 언론에서 했던 인터뷰에 의하면 상술된 대로 젊었을 때 연애하던 여성들이 없었던 게 아니었으나, 30대에 다시 민주화운동에 투신하기로 작정하면서 가정에 책임질 수 없다는 압박감에 결혼까지 가는 깊은 관계로 가는 것을 포기한 적이 많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헌정 사상 미혼 남성으로 최다선 의원, 미혼 남성으로 국회 부의장, 미혼 남성으로 최고령 국회의원이라는 3개의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어느 위키 유저의 농담이 아니라 언론 기사로까지 인증되었다. 

20대 총선에서도 원내에 진입하면서 6선으로 더불어민주당 내의 최다선 의원이 되었는데 더불어민주당이 예상치 않은 원내 1당이 되면서 (개원일까지 더불어민주당이 원내 1당을 유지한다면) 20대 국회의 유력한 국회의장 후보 중 하나로 꼽혔었다.

2009년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떡볶이집 방문을 두고 국회에서 비난한 것 때문에 사찰을 당했었다. "서민 경제에 대한 대통령의 근원적 처방이 이미지 관리인가? 떡볶이 집에 가지 마시라. 그 집 손님 안 온다. 아이들 들어 올리지 마시라. 아이들 경기한다."고 발언했던 것인데 모 매체에서 이를 '이석현 의원이 이명박 대통령이 간 떡볶이집이 망할 거라고 했다'고 왜곡보도하여 여러 매체에서 '이석현 의원 서민 저주 발언'이라며 비난기사가 나오고 한나라당 의원들까지 나서서 이석현 의원을 비난하게 한 사건인데, 추후 국무총리실 소속 공직윤리지원관실 민간인 사찰 수사사건에서 이석현에 대한 사찰을 지시한 메모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이석현 사찰'에 대한 내용을 보도한 게 조선일보였다고 한다.

김어준의 파파이스에서 필리버스터 뒷이야기를 얘기하는 회차에서 말하기를 국회부의장이 되기까지 번듯한 당직 하나 못 맡아 봤다고 한다. 본인의 계파색과는 별개로 당에 쓴소리를 많이 해서 그 흔하디 흔한 원내부대표마저도 못 맡아 봤다고. 한 번도 당직도 맡아보지 않고, 계파색도 옅었던 그가 부의장이 될 수 있었던 건 역발상으로 그가 친노, 비노 그룹에게 자신이 중립 성향임을 잘 어필했기 때문이라고.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유세 현장에서 유세 요원들과 함께 붐바스틱을 시전했다. 

 

이석현 민주평통 부의장

 

이석현 선거 이력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양 을

18,990 (21.76%) 낙선 (2위)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양 을

39,146 (36.74%) 당선 (1위)

초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양 동안 을

27,330 (42.34%) 당선 (1위)

재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양 동안

61,239 (48.43%) 낙선 (2위)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양 동안 갑

41,913 (51.55%) 당선 (1위)

3선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양 동안 갑

30,852 (47.87%) 당선 (1위)

4선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양 동안 갑

43,869 (54.85%) 당선 (1위)

5선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양 동안 갑

45,680 (50.05%) 당선 (1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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