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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야기/정치 / / 2022. 12. 2. 14:01

정치인 최병렬 사망 나이 고향 학력 이력 프로필 (제8대 노동부장관)


대한민국의 언론인(기자), 정치인, 관료.

 

정치인 최병렬 사망 나이 고향 학력 이력 프로필 (제8대 노동부장관)

 

최병렬 프로필
최병렬

 

최병렬

崔秉烈 | Choi Byung-ryul

 

출생

1938년 9월 16일

경상남도 산청군 차황면

 

사망

2022년 12월 2일 (향년 84세)

 

본관

화순 최씨

 

 

재임기간

노태우 정부 초대 정무수석비서관

1988년 2월 25일 ~ 1988년 12월 5일

제28대 문화공보부장관

1988년 12월 5일 ~ 1989년 12월 27일

초대 공보처장관

1989년 12월 28일 ~ 1990년 12월 20일

제8대 노동부장관

1990년 12월 27일 ~ 1992년 6월 25일

제29대 서울특별시장

1994년 11월 3일 ~ 1995년 6월 30일

 

아내

백영자

 

자녀

2남 1녀

 

학력

진주중안국민학교 (졸업)

진주중학교 (졸업)

부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 / 학사)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언론학 / 석사)

 

종교

천주교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병역

대한민국 육군 상병 만기전역

 

신체

171cm, 71kg

 

약력

한국일보 기자

조선일보 정치부장

조선일보 편집국장

조선일보 이사

제12대 국회의원 (전국구 34번 / 민주정의당)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 (노태우 정부)

제18대 문화공보부장관 (노태우 정부)

초대 공보처장관 (노태우 정부)

제8대 노동부장관 (노태우 정부)

제14대 국회의원 (전국구 10번 / 민주자유당)

제29대 서울특별시장 (관선)

제15대 국회의원 (서울 서초구 갑 / 신한국당)

신한국당 당무위원

한나라당 부총재

제16대 국회의원 (서울 강남구 갑 / 한나라당)

한나라당 대표

국민의힘 상임고문

 

 


최병렬 생애 고향 학력 이력

1938년 경상남도 산청군에서 태어났다. 진주중안국민학교, 부산고등학교(10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1959년 한국일보 기자로 있다가 1963년 조선일보로 옮겼다. 이후 1980년 편집국장이 되었고 1983년 이사에 선임되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하였다. 민주정의당 정책연구소 정세분석실장을 지내면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는 데 기여하였다.

 

최병렬 한나라당정치인 최병렬

 

1988년 2월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할 무렵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면서 5공 청산을 주도하여서 전두환 전 대통령 및 그의 측근들과는 사이가 매우 불편해졌다.  같은 해인 1988년 12월 문화공보부장관이 되었고, 1990년 1월 초대 공보처(후일 국정홍보처)장관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12월 노동부장관이 되어 1992년 6월까지 재직하였다. 노태우 정부 5년 중 3년 반을 장관, 그중에도 요직인 공보부-공보처에서 2년 장관을 지낸 셈.

 

 

1992년 4월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김영삼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의 후보로 지지하였다. 이른바 '신민주계'. 문민정부에서도 관운이 좋아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 이후 서울특별시장을 지냈다. 본래 우명규 경상북도지사가 28대 서울시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성수대교 시공 당시 서울시 책임자임이 알려지면서 한 달도 되지 않아 자진사퇴했다. 그래서 후임으로 최병렬이 그것도 서울특별시의 마지막 관선시장으로 온 것이다.

그러나 퇴임 전날인 6월 29일에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겪었는데, 사고현장에 도착해서 그 참상을 보자 기가 막혀서 말 한마디 못하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후술하다시피 최병렬은 업무 스타일이 강하게 밀어붙이는 저돌적인 타입으로 강골에 속하는 인물. 그런 그조차 눈물을 흘릴만도 한 것이 서울 한복판에 있는 한강 다리가 붕괴된 직후 기껏 8개월 남짓 근무했건만, 퇴임 전날에 또 대형사고가 터졌으니... 심지어 둘 다 안전불감증으로 인한 부실공사 때문에 벌어진 참사이니 눈물을 흘리는 것이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서초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관선 서울특별시장이었던 경력을 토대로 한나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새정치국민회의 고건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강남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4694표, 18.26%의 득표로 2위에 그쳤다. 그러나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의 낙선과 정계은퇴 이후 2003년 전임 대표였던 서청원 후보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한나라당 대표에 선출되었다. 이는 구심점을 잃은 한나라당을 중흥시켜야 할 포스트 이회창과 제1야당 단일지도체제의 대표라는 막중한 지위였다.

임기 초에는 공백을 잘 극복하는 듯 했으나, 2003년 10월 2002년 한나라당 불법 대선자금 전달사건, 일명 차떼기 사건이 불거지면서 한나라당은 다시 총체적 위기에 빠졌다. 최병렬은 이회창 책임론으로 혼란을 타개꼬리 자르기하려 했으나 서청원 등 과거 이회창을 지지했던 비주류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여 입지는 더 위태로워졌다.

 

> 서청원 프로필 보러가기

 

최병렬 정치 활동

 

한편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에서 가결된 측근 비리 의혹 관련 특검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데 대한 항의의 표시로 2003년 11월 26일부터 단식투쟁을 벌였다. 이 여파로 노무현 대통령이 재의를 요청했고 12월 4일 대통령 측근비리 의혹 규명을 위한 특검법안을 국회에서 재의결, 이후 가결되자 12월 5일 단식을 중단했다. 최병렬의 농성은 대통령과 여당에 승리하는 제1야당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으나 차떼기당 이미지를 탈피하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었다. 별개로 당시의 단식투쟁 사진은 나라를 구하겠습니다라는 구호의 현수막과 최병렬의 모습이 잘 어우러져 여러 커뮤니티 등지에서 개그와 합성요소로 사용되었다. 특히 일반적인 단식과 다르게 쌀뜨물을 마셔왔다는게 들통나 한동안 조롱을 당하기도 했다.

 

2004년 2월 9일, 한화그룹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 수감된 서청원의 석방결의안이 한나라당 주도로 가결되었다. 이 사태로 남원정 등 한나라당 소장파를 필두로 퇴진론이 불거졌고 자신이 임명한 김문수 공천심사위원장에게도 총선 불출마 권고를 받자 이후 최병렬은 조기 전당대회 후 대표직 사퇴와 총선 불출마를 약속했다.

설상가상으로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때 탄핵소추안을 제출하여 가결된 이후 거세게 불어온 탄핵 역풍은 한나라당을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빠뜨렸고 이 여파로 최병렬은 재기할 기회마저도 잃어 2004년 3월 23일 임시 전당대회 직후 대표직 사퇴와 동시에 정계에서 은퇴해야 했다. 이후 최병렬을 이어 난파에 봉착한 한나라당의 키를 잡을 선장으로 박근혜가 선출되었고 한나라당의 천막당사가 시작되었다.

한때 '포스트 이회창'을 꿈꿨고 2002년 경선에서 2위였기에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으나, 자신이 주도한 탄핵의 역풍 속에 정계은퇴를 피할 수 없었던 인물이었다. 이후 박근혜 정부 시절 현경대, 김용갑, 강창희와 더불어 대통령이 신임하는 보수원로들의 모임인 7인회 구성원 중 하나로 다시 입에 오르내렸고 사망 전까지 국민의힘 상임고문직을 역임하였다.

2022년 12월 2일 별세하였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이다. 

 

최병렬 노동부장관최병렬 정치

 

최병렬 여담 일화

정치인 시절에는 자신의 노선을 강경하게 밀어붙이는 게 마치 독재자 히틀러를 연상시킨다 하여 최틀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의 장남 최희준 역시 언론계에 종사하였다. SBS 1기 기자로 입사(특채입사)하여 뉴욕 특파원, SBS CNBC 보도본부장을 거쳐서 TV조선 앵커, 편성본부장을 역임하였다. 한찬식 변호사(연수원 21기)가 사위이고, 최재경 변호사(연수원 17기)는 조카. 그의 조카(동생의 아들)는 천정배 의원의 장녀와 결혼하여 성향이 다른 정치인 가문간의 사돈관계로 화제가 되었다.

 

> 천정배 프로필 보러가기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재학 중 연극배우로 잠시 활동했던 적이 있는데, 이 때 최영한이라는 예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의 예명과 겹친다는 이유로 최불암이 본명을 사용하지 못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2003년 당시 정부 여당에 항의해 단식을 했는데 여당 지지자들에게 '웰빙단식'이니 '단식다이어트'니 하는 비난을 받았다. 정치인의 단식에 대해 웰빙이니 다이어트니 하는 조소가 시작된 것은 최병렬 당시 대표의 단식이 최초였다.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야인시대의 이석재로 유명한 배우인 손호균이 맡았는데, 해당 배우가 풍채가 좋은 인상파여서 선 굵은 역할을 많이 맡은 터라 실제 최병렬과는 그다지 닮지 않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박근혜 정부 당시 포스코 회장으로 거론되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 이미 정계은퇴에서 10년이 지난 터라 보은 낙하산으로 밖에는 해석이 불가능한 건이었기 때문이다. 친정인 조선일보의 취재에 따르면, 측근이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역정을 냈다고 한다 머니투데이 취재에서는 본인이 직접 전화통화를 하고는 "소설 같은 이야기"라고 회신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전에 이미 상황을 어느정도 알고 있었고, 대통령과 김기춘 비서실장을 포함한 청와대 사정을 매우 비판적으로 보고 있었다. '7인회'의 일원 치고는 이례적인 직언이었는데, 2014년의 코멘트가 특히 압권으로 훗날 국정논란이 터진 뒤에 보면 구구절절하게 옳은 말들이었다.

노태우의 가신이었던 만큼, 해당 기사에서는 노태우에 대해서 칭찬 일색의 평가를 내렸다. "특별히 문제가 없으면 모든 사람을 편하게 해줬어요. 아랫사람을 보면 어깨를 툭 치며 격려했어요. 가끔 용돈도 주고. 조금만 노력하면 주위 사람들을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가 있어요. 대통령이 좀 따뜻하면 좋지 않을까." 물론 박근혜에 대한 애정 섞인 비판 와중의 맥락이긴 했다.

 

최병렬 사망

 

최병렬 선거 이력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7,040,811 (35.25%) 당선 (34번)

초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7,923,718 (38.49%) 당선 (10번)

재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서초 갑

40,191 (48.56%) 당선 (1위)

3선

 

1998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1,512,854 (43.99%) 낙선 (2위)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강남 갑

62,489 (56.46%) 당선 (1위)

4

 

> 서청원 프로필 보러가기

> 천정배 프로필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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