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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배 고향 나이 학력 프로필 (+목포 3대 천재)

대한민국의 법조인이자 정치인. 제15대에서 20대까지 6선을 지낸 중진 국회의원이며, 참여정부 시절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다른 3대 천재(김지하, 조훈현) 프로필 링크는 포스팅 하단에 있습니다.*

 

천정배

千正培 | Chun Jung-bae

 

출생

1954년 12월 12일 (67세)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면 신석리 구석마을

(現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신석리 구석마을)

 

거주지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힐스테이트상도프레스티지

 

 

본관

영양 천씨

 

현직

가천대학교 법학과 석좌교수

사단법인 한국-이란 협회 이사장

사단법인 동북아전략연구원 이사장

호남100년살림민심센터 이사장

 

재임기간

제57대 법무부 장관

2005년 6월 29일 ~ 2006년 7월 26일

 

부모

아버지 천득린

 

형제자매

2남 3녀 중 장남

 

배우자

서의숙

 

자녀

딸 천지성, 천미성

 

 

학력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원 (법학 / 석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육학 / 학사)

 

병역

대한민국 공군 대위 만기전역

 

경력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민변국제인권위원장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특별보좌관
제15대 국회의원(경기 안산시 을)
제16대 국회의원(경기 안산시 을)
새천년민주당 정책위원회 부의장
제17대 국회의원(경기 안산시 단원구 갑)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제17대 국회 전반기 국회운영위원회 위원장
제57대 법무부장관
제18대 국회의원(경기 안산시 단원구 갑)
민주당 최고위원
성남시 고문변호사
제19대 국회의원(광주 서구 을)
국민의당 공동대표
제20대 국회의원(광주 서구 을)
국민의당 선대위 공동위원장
대안신당 인재영입위원장

 

 


천정배 고향 나이 학력 프로필 (+목포 3대 천재)

 

천정배 생애 고향 가족관계

정계 입문 전

1954년 12월 12일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신석리 구석마을에서 천득린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목포시의 공무원이었기에, 초등학교 시절까지는 전남 신안의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다.

그러다가 목포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목포시에서 부모와 살게 됐다. 목포중학교 재학 중에 전라남도 학술 경시 대회에서 1등을 하는 등 일찍부터 공부에 소질을 보였다. 중학교 졸업 후 명문 목포고등학교(21회)에 수석 입학, 수석 졸업하였다.그리고 그해 대학예비고사에서 인문계 전국 수석을 차지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하는 등 이때부터 '목포 3대 천재' 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재학 중인 1976년 제18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그 뒤 사법연수원을 3등으로 수료하였으며, 군 복무는 공군 군법무관으로 대위로 전역하였다. 통상적으로는 판검사를 받을 수 있는 성적이었지만, 군 복무 중 5.18 민주화운동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전두환 정권하에서 법관 임용을 거부하고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변호사 활동

대표적인 인권변호사 중 1인으로 활동하였다. 1993년 법무법인 해마루를 설립했고, 거기에 노무현과 전해철 등을 참여시켰다. 그 후 법조계에서 인권문제와 노동문제 등에 관해 두각을 나타냈다.

또한 음반 사전심의제를 위헌이라 규정한 94헌가6 재판의 담당변호사로 활약한 전적이 있다.

전 법무부장관인 조국이 사노맹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조국의 변호인을 맡은 바 있다. 

 

 

천정배 정치 활동

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 시절

김대중의 권유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본격적인 정계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경기도 안산시 을 지역구로 당선되었고 이래 같은 지역구(안산시 을, 안산시 단원구 갑)로 4선을 기록하였다. 정동영, 신기남과 더불어 새천년민주당 정풍운동을 주도, 정권 실세였던 권노갑의 2선 후퇴를 주장하는 등, 당내 소장파 의원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국민의 정부와 핵심 지지층이 갖고 있던 고민 중 하나가 마땅한 후계자가 없다는 것이었고,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호남 출신 대권 주자가 부재하다는 것이었는데, 정동영, 신기남 등과 더불어 지금 당장의 중량감은 떨어지더라도 잘 성장하면 호남권 대권 주자, 즉 뉴 DJ가 될 수 있으리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정치 개혁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젊은 지지층에 천정배가 갖고 있던 스마트하면서도 강력한 개혁적 성향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온 면이 있다.

2001년 7월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한 해 앞둔 시점에서 노무현에 대한 깜짝 지지 의사를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민주당 내에서 노무현을 지지하는 현역 국회의원은 천정배 의원 외에 아무도 없었는데, 얼마 안 가서 노무현이 급격히 세를 불려가며 민주당 대선후보로 지명되고, 대선 승리까지 이루어내자, 그의 혜안을 많은 사람들이 다시 보게 되었다. 2002년 중반에는 노무현이 민주당 내에서 사실상 지도력을 상실하고 후단협에 의해 흔들리는 등 위기를 겪었지만, 그때에도 조금의 흔들림조차 없이 노무현을 계속 도와줘서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에 크게 기여하였다.

2003년 새천년민주당 분당 국면에서는 기존의 지역구도를 타파하고 전국 정당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열린우리당 창당에 앞장섰다.] 민주당 내에서 지역구도에 기생하며 점차 보수화, 기득권화하고 있는 동교동계에 맞서서 새로운 세력을 중심으로 깨끗한 진보정치를 실현하겠다는 그의 구상은 진보층의 지지를 얻었다.

 

 

열린우리당 시절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탄핵열풍을 타고 국회에서 단독 과반을 차지하자, 천정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지역구인 안산시 단원구 갑에서 3선에 성공했고,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경선에서 5선의 이해찬 의원을 꺾고 승리하며 17대 국회 첫 열린우리당 원내대표가 되었다. 단독 과반을 차지한 집권여당 원내대표가 된 이 시절이 천정배 정치인생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천정배는 이 시점에서 정치인으로서의 역량에 한계를 드러내며 급격히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제17대 국회가 시작하자마자 국가보안법 폐지, 사학법 개정, 과거사청산법 제정, 언론개혁법 제정을 밀어붙인 것이 여론의 역풍을 맞았다. 당시 한나라당은 4대 개혁 입법을 가리켜 4대 국론 분열법으로 규정하고 격렬하게 저항했으며, 조중동을 비롯한 언론들도 비난을 퍼부었다. 열린우리당 내에서도 군 출신, 관료 출신의 보수성향 인사들이 4대 개혁입법에 협조해주지 않는 등 자중지란 콩가루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4대 개혁 입법은 실패했다. 예를 들어 시장 지배적 사업자에 대한 공정거래법상 규제를 도입하는 것을 뼈대로 한 신문법은 1개 일간지의 시장점유율이 30% 이상이거나 3개 일간지의 점유율이 60%를 초과할 경우 규제한다는 규정], 신문지면에서 광고 비율이 50%를 넘지 않도록 규제한다는 규정이 삭제된 채 통과되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언론개혁은 좌절된 것이나 마찬가지. 국가보안법은 독소조항만 제거하는 식으로 적당히 타협하는 게 좋았을 텐데, 강성 의원들]이 "완전 폐지가 안 될 바엔 차라리 그냥 두는 게 낫다"고 주장하여 그대로 존치해버리고 말았다. 과거사청산법의 통과도 무산되었다.

4대 개혁입법 실패로 당내 리더십을 상실하자, 2005년 1월 1일 원내대표 직에서 사퇴하였다. 열린우리당이 보수층에서 비판을 받는 것 이외에 진보층과 중도층에서도 지지를 상실하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이때쯤부터였다.

2005년 6월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2005년 10월에 동국대학교 강정구 교수의 국가보안법 위반 수사를 두고 검찰과 대립한다. 강정구가 한국전쟁을 통일전쟁으로 표현한 것과 관련해 검찰이 구속수사를 시도하자 천정배는 헌정사상 최초로 검찰청법 8조에 근거해 수사지휘권을 행사하여 불구속수사 지시를 내렸다.] 김종빈 검찰총장은 수사지휘권 행사에 항의하여 총장직을 사퇴했다. 보수층을 중심으로 민심 또한 급격하게 악화됐다. 과거 검찰의 독립을 위해 법무부장관의 검찰에 대한 지휘권을 삭제하는 내용의 검찰청법 개정안을 제안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정작 자기가 법무부 장관이 되자 소신이 바뀌었다는 비판을 들었다. 다만 천정배는 법리상 구속수사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검찰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김종빈과 합의 하에 수사지휘권을 행사했는데, 돌연 검찰이 조직적으로 저항했다고 주장했다.

그 후 참여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과 염증이 가속화되고, 열린우리당 역시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참패하며 호남에서조차 비토되는 상황에 이르자, 2007년 1월 열린우리당 탈당을 선언하였다. 탈당 후에는 몇 개월간 무소속으로 당적을 갖지 않았고, 김근태와 더불어 한미 FTA 반대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법무장관 시절에는 FTA 비준 합동담화문에 서명한 적이 있어, 이후 2011년 FTA 정국에서 한나라당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대통합민주신당~민주통합당 시절

이후 2007년 8월 대통합민주신당이 출범해 입당하였고,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으나 컷오프 되었다. 대선 과정에서는 문국현과의 정책 연대를 구상하는 등, 반한나라당 통합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열린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의 열풍에도 불구하고 통합민주당 소속으로 안산시 단원구 갑 선거구에 출마, 한나라당의 허숭 후보를 꺾고 4선에 성공, 주로 이명박 정부의 언론 정책에 반대하는 활동을 펼쳤다.

2009년 미디어법이 한나라당에 의해 날치기로 강행 처리되자, 장외 활동에 앞장 섰다. 이 기간에 쌓인 1억 2천만 원의 세비 수령을 미련 없이 거절하여,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 후 2010년 민주당 전당대회 지도부 경선에서 5위를 차지, 최고위원이 되었다.

2011년 오세훈 서울특별시장이 무상급식 찬반 주민투표의 결과로 사퇴, 서울시장이 공석이 되자 후보 경선에 출마했다. 그러나 박영선 의원에게 패하며 후보가 되진 못했다.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기존에 지켜오던 안산시 단원구 갑 지역구 대신 서울특별시 송파구 을로 지역구를 옮겨 출마했으나, 단 3% 차이로 낙선하며 정치 커리어 최초로 낙선을 기록하게 되었다. 사실 천정배는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 당시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출마하면서 차기 총선은 안산에서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한 상태였으며, 그래서 서울시장 경선에서 탈락한 이후 당시 정몽준이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있었던 동작구 을에 출마하려 했었다. 하지만 동작구 을에서 개인적으로 가까운 이계안 전 의원이 출마를 하려 하자 출마를 포기하고 지도부에 거취를 일임한 끝에 새누리당이 강세인 송파구 을 지역으로 전략공천된 것이다., 민주당 지도부에서도 박근혜 후보에게 70%를 준 문정2동이 송파구 을 지역구에 속해있는 만큼 중량감 있는 의원을 전략공천해 열세를 뒤집으려 한 것. 다만 보수정당 지지세가 강함에도 생각보다 새누리당 후보와 격차가 적었던 이유는 박계동이 국민생각 후보로 출마해서 여권 표가 어느 정도 분산되었기 때문도 있었다.

 

 

성남시 변호사 활동 및 호남정치의 복원작업

19대 총선 낙선 이후 잠시 야인으로 지냈고, 그러면서 이재명 시정 하 성남시의 고문변호사로 활동했다. 2011년에서 2015년까지 18건을 수임해 2억여 원을 수임료로 받았다. 

이후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광주 광산구 을 지역구에 출마를 희망했으나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에서 권은희를 전략공천하는 바람에 출마의 뜻을 접었다.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는 광주 서구 을에 출마하려 했으나, 당시 문재인 대표 체제 지도부의 공천 결과에 불복해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 무소속으로 출마해 새정치민주연합 조영택 후보를 꺾고 당선되며 3년 만에 원내로 복귀했다.

탈당 후 천정배가 내세우는 것을 요약한다면 야권 내 '영남패권주의' 타파를 통한 '호남정치의 복원'인데, 이 '호남정치'의 파괴 원인으로 지목 받는 게 천정배가 주도한 바 있는 열린우리당 창당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부분이 있다. 또한 이를 두고 호남 지역주의로 비판하는 시각이 있기도 한 상태. 현실론적 시각에서 이전에 비해 호남권의 인구가 충청권보다 적어진 현실에서 호남으로 영남을 견제한다는 논리가 성립 가능한가 하는 비판도 있다.

이후 국민회의를 창당했고, 국민의당과 합당하며 손을 잡았다. 국민의당 창당대회에서 안철수와 함께 공동대표에 취임했다.

 

국민의당 시절

2016년 2월 1일 국민의당 공동대표로 선임되었다. 3월 더불어민주당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야권 표 분산으로 새누리당이 어부지리를 얻어 20대 총선에서 압승하는 일이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 '야권 통합론'을 제시하자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안철수 상임대표가 야권 통합에 완강한 반대 의사를 보이자 잠시 안 대표의 뜻에 따라가는 듯한 모습을 보이다가 다시 현 야권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했다. 3월 10일에는 야권 연대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는다면 '중대 결심'을 내리겠다며 국민의당 탈당을 불사할 뜻도 있다는 생각을 드러내 배수진을 쳤다.

그렇게 한동안 당무를 거부하기까지 하면서 안철수 상임대표와 줄다리기를 하다가 결국에는 뜻을 접고 안철수와 손을 잡았다. 이에 천정배 의원이 창당했었던 국민회의의 탄생에 적극 일조했었던 천 의원의 외곽 조직인 '새로운 길'은 천정배 의원과 결별하겠다고 선언했다.

4월 13일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양향자의 강력한 도전을 뿌리치고 광주 서구 을에서 무난히 당선되었다.

6월 29일 안철수 공동대표와 함께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김수민·박선숙 의원과 왕주현 사무부총장 등이 연루된 20대 총선 홍보비 리베이트 수수 의혹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이다. 그의 대표직 사퇴는 사실 대단히 큰 결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철수에 비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해 안습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국민의당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천정배 의원이 장관까지 지낸 중진급의 정치인인데도 불구하고 안철수 대표에게 눌려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걸 두고 '국민의당 대표는 안철수 한 명 아니냐', '안철수 옆에 앉아 있는 건 천정배가 아니라 천정배 모양으로 깎은 나무 토막 아니냐'며 조롱하기도 했다.

2016년 12월 27일 19대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당내 경선이 안철수 전 대표와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를 중심으로 돌아가자 2017년 3월 14일 불출마로 결정했다. 

국민의당이 대선에서 패배하고, 대선 공작 사건으로 심각한 치명상을 입은 가운데, 7월 12일 국민의당 당대표 경선에 출마하기로 마음을 굳혔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8월 1일 대전광역시 충무체육관에서 정식으로 당대표 경선 출마 선언을 했다.  그러나 8월 27일 전당대회에서 16.60%를 득표해 3위에 그쳤다.

 

 

민주평화당 ~ 민생당

민주평화당 창당 이후 원내대표로 유력하게 거론되었으나 고사했다. 결국 원내대표는 유성엽 의원으로 결정.

2019년 8월 12일, 대안정치연대 구성을 명분으로 민주평화당을 탈당하였다.

2019년 9월 18일, 외교관 딸에게 "국정감사 때, 가까운 친구가 있으면 도와주겠다" 라고 문자를 보낸 것이 논란이 되고 있다. 

2019년 연말, 4+1 회담에 대안신당 협상 대표로 참여하였는데, 검사 사위의 로비 때문에 검찰 개혁 법안을 반대한다는 음모론이 돌았다.본인은 적극적으로 부정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부분 도입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에 대해서는 당내에서 유일하게 기권표를 던졌으나, 정의당 윤소하 의원이 발의한 공수처법 개정안에 대해서는 찬성표를 던졌다.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광주 서구 을 민생당 후보로 출마하여 7선을 노렸으나, 19.5% 라는 저조한 득표율에 그치며 75.8%를 얻은 더불어민주당 양향자 후보에게 거의 쿼드러플 스코어로(...) 대패하며 낙선했다. 함께 낙선한 정동영, 박지원 의원 등이 30%대 득표율을 올린 것과 비교해도 참담한 결과인데, 원래 경기도 안산시에서만 4선을 한 정치인이고 학연도 없는 편이라] 지역기반이 부족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2020년 6월 20일, 국회 마지막 급여 850만원을 서구에 기탁했다.

 

21대 총선 낙선 이후

조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한국-이란 관계가 다시 화해 무드에 들어가게 되면서 출범한 한국-이란 협회의 이사장을 맡았다.

2021 11 26 이재명 후보로부터 더불어민주당 복당을 제안받았다. 2021 12 29 유성엽 의원과 함께 더불어민주당 복당이 확정되면서 6 만에 복당하게 되었다.  광주 정가에서는 사촌동생의 성비위 금품살포 묵인 의혹으로 당을 떠난 양향자 의원 대신 민주당 서구 지역위원장에 임명될지 여부가 주목되고 있다.

 

 

천정배 여담 인간관계 인맥 활동 경력 이력

안철수 전 공동대표와 함께 공동대표 시절에 공군 10전투비행단을 방문한 적이 있다. 천정배는 이 부대에서 군법무관으로 복무했었다.

현역 정치인들 중 유일하게 김재규의 명예회복을 주장했다. 

조국 전 법무부장관과의 인연이 남다른데, 과거 조국의 사노맹 사건 변호인이었으며, 노무현 정권 시기 법무부장관을 맡아 검찰개혁을 추진한 바 있다. 그러나 조국 사태 발생 이후, "사법개혁의 적임자라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고 평가하였다. 검찰 사무의 최고 감독자이자 인사권을 들고 있는 사람이 한편으로는 수사를 받는 상황이 '이해관계 충돌'에 해당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조국 수사를 '정치 보복, 모욕 주기식'이라며 노무현 수사와 연결짓는 여당 측 주장에 대해, 조국 수사와 노무현 수사는 다르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청와대와 정부, 여당의 핵심인사들이 검찰을 극단적 표현으로 비난한다"며 "개혁의 진정성을 국민에게 인정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소설가 천승세와는 9촌관계이다.

본격 시사인 만화에서 자바 더 헛을 패러디해서 정배 더 천으로 표현되었다.

 

 

 

천정배 가족관계 부인 딸 자녀

슬하에 딸만 둘을 두었다. 아들은 없다. 첫째 딸 천지성(1978년생: 아래 사진 왼쪽) 씨는 대원외고 -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2003년 제 45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현재 서울중앙지법에 근무하고 있으며,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의 조카인 최재만 검사와 결혼하였다고 한다.] 둘째 딸 천미성(1980년생: 아래 사진 오른쪽) 씨는 서울과학고 -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현재 주 이란 한국 대사관에서 근무 중이다. 공부 실력 하나는 타고난 집안인 듯.

남동생 천방훈씨는 삼성전자 전무이사로 재직 중이며, 여동생 천진희씨는 목포마리아회고등학교 한국사 교사로 재직 중이다. 사촌동생은 천경배인데, 이 사람은 사촌형과 달리 더불어민주당에 잔류하여 당직자로 일하다가, 신안군수 공천을 받아 출마했지만 무소속 박우량 전 군수에게 패해서 낙선했다. 그것도 민주당적으로 고작 14%(...)밖에 못 받아 선거비용도 반밖에 못 받은 초라한 성적으로.

 

 

천정배 선거 이력 경력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산 을

36,902 (38.80%) 당선 (1위)

초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37,523 (49.45%) 재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산 단원 갑

32,094 (58.21%) 3선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23,044 (49.12%) 4선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송파 을

46,010 (46.02%) 낙선 (2위)

 

2015

상반기 재보궐선거

광주 서 을 무소속

26,256 (52.37%) 당선 (1위)

5선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42,599 (54.52%) 6선

 

2020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15,754 (19.49%) 낙선 (2위)

 

의외로 선거의 달인인데 안산시에서 내리 4선을 하고, 19 총선에서 보수세가 강한(그나마 강남3구에서는 캐스팅보드 성향인 송파구이지만) 송파구 을에서 석패를 했으며, 광주에 연고가 없음에도 2015 재보궐선거, 20 총선에서 재선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6선에 성공했다. 비록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에 대한 호남지역의 지지세가 강해진 21 총선에서는 참패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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