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기업인. 미래에셋금융그룹 회장.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 재산 학력 이력 고향 나이 프로필
박현주
朴炫柱 | Park Hyeon-joo
출생
1958년 10월 17일 (63세)
전라남도 광산군 평동면
(現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동)
거주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
국적
대한민국
본관
충주 박씨
직업
기업인
현직
미래에셋금융그룹 Founder & GISO
(Gobal Investment Strategy Officer)
학력
광주제일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경영학 · 교육학 / 학사)
배우자
김미경
자녀
장녀 박하민
차녀 박은민
장남 박준범
신체
170cm, O형
병역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전역
재산
15억 달러 (한화 약 1조 6,700억 원)
박현주 생애 고향 학력
1958년 10월 17일, 전라남도 광산군 평동면(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박현주가 고등학교 합격 통지를 받던 날 돌아가셨고, 이로 인해 방황하던 그는 신뢰, 성실, 정직을 강조하는 어머니의 가르침 덕에 바로설 수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돈을 꿔달라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자기 것를 나눠줄 정도로 인정이 많았지만, 박현주가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할 때는 1년에 한번씩만 용돈을 줘서 돈을 계획적 쓰고 관리하는 습관을 키워줬다고 한다. 여담으로 박현주가 어릴 때 어머니가 광주에서 사주를 잘본다는 사람에게 사주를 봤었는데, "이 아이는 큰 부자가 될 사주"라고 했다고 한다.
고려대학교 재학 시절 “ 자본시장의 발전 없이 자본주의는 발전할 수 없다” 는 말을 들은 이후, 증권 시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대학 2학년 부터 어머니가 보내준 생활비로 주식 투자를 시작해 당시의 대한민국 증권 1번지인 명동에서 주식투자를 잘하는 청년으로 이름을 알렸다고 한다. 이때의 투자경험은 이후 박현주의 투자 철학을 형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때의 경험을 통해 박현주는 우량주에 장기투자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는 다는 믿음 갖게 되었고, 가치투자에 대한 기본 개념을 정리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명동의 큰 손인 투자자 백희엽씨에게 주식을 배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학 시절부터 경영자가 돼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리더십 관련 공부를 열심히 했다. 경영학 이외의 책도 많이 읽었는데,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은 무려 19번을 읽었다고 한다.
박현주 경력 사항
증권사 근무
스물 일곱의 나이에 투자 회사를 설립해 운영하다가, 1986년도에 동양증권에 입사하였다. 1988년부터 한신증권에서 금융상품 운용을 담당했고, 이후 32세에 전국 최연소 지점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듬해 대한민국 증권사 지점 중 1위의 영업실적을 달성하였고, 곧이어 임원으로 승진하며 샐러리맨으로서의 성공가도를 달렸다.
이때의 조직관리 경험은 그에게 조직 구성원 개개인의 역량을 믿고 지지해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했고, 이는 훗날 미래에셋 경영의 토대가 되었다.
그가 지점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지점훈은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은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였다.
다른 회사로부터 고액연봉과 승진을 제시하며 스카웃제의를 여러 번 받았으나 오래도록 간직한 꿈과 신념이 있어 이를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미래에셋 창업
1997년 6월 회사를 나와 미래에셋벤처캐피탈과 국내최초 전문 자산운용회사 미래에셋투자자문을 설립했다. 창업 후 6개월 만에 외환위기를 겪었으나, 소수의 시각에서 투자를 바라보고자 하는 그의 남다른 인사이트와 한국 경제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투자 성과를 이끌었다. 강남 본부장으로 승진하는 등 잘 나가던 도중 같은 강남 지역 본부의 젊은 지점장들(최현만, 구재상)과 함께 독립했다. 1997년에 미래에셋벤쳐캐피털과 미래에셋투자자문을 시초로 1998년 미래에셋자산운용, 1999년 사이버증권사 E*미래에셋증권를 각각 설립했다. 벤처캐피털 시절 외환위기가 닥치자 가격이 급락한 채권에 투자해서 대박을 쳤고, 1998년 '박현주펀드'로 알려진 뮤추얼펀드를 출시하면서 수익률 90% 이상을 기록한 후 99년 '바이코리아펀드'가 시중에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자 증시로 돈이 흘러들어 먼저 나왔던 펀드가 수익률이 올라가는 혜택도 봤다.
'다음커뮤니케이션' 투자인데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테크버블이 불면서 24억을 투자한 '다음' 주식에서만 1000억원을 벌면서 초대박. 2000년대 초반 그 유명한 '디스커버리', '인디펜던스' 펀드를 출시한다. 그전까지의 펀드들은 폐쇄형 스팟형이라고 해서 몇명 돈많은 사람들한테서 돈을 모은 후 주식에 투자하고 일정 수익이 되면 환매하는 구조였다. 구조상 단기투자나 작전이 횡행했는데 펀드 환매일 근처가 되면 미리 알던 기관이나 외국인들이 시장을 폭락시키는 사태까지 벌어지곤 했다. 디스커버리 인디펜던스는 공모형 개방형으로 누구나 투자할 수 있고 따로 환매일이 정해지지 않아 그 전 펀드들과는 차별점이 있었다. 이 펀드들을 계기로 소위 간접투자, 펀드열풍이 불기 시작했고 때마침 외환위기 졸업, 테크버블, 중국성장 등 테크트리를 제대로 타면서 2007년 호황시절에는 수익률이 1,000퍼센트에 육박한다. 적립식펀드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소액장기투자를 권장했고 이맘때 쯤 나온 펀드가 3억 만들기 시리즈. 은행들이 판매에 가세하면서 엄청난 히트를 기록한다. 국민은행에서만 단일 펀드시리즈가 판매잔고 1조 수준에 육박할 정도. 당시 증권사와 은행 지점들은 '우리도 미래에셋펀드 팔아요'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영업하는 등 웃지 못할 광경이 연출되기도 한다.
당시만 해도 '펀드는 미래에셋'이라는 공식이 성립할 정도였는데 문제는 이 미래에셋이 증권인지 운용인지 생명인지 일반인들은 잘 구분하지 못했고 생명사 가서 펀드에 가입하거나 보험 상품 클레임을 걸기 위해 증권사 지점을 방문하는 등의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때까지는 증권사의 존재감이 떨어지는 편으로 펀드 판매창구로서의 역할일 뿐 실질적인 주도권은 운용사에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미래에셋 디스커버리, 인디펜던스, 3억만들기 시리즈 성공 이후 중국 증시가 엄청난 폭등을 기록하면서 미래에셋차이나솔로몬을 위시한 중국 펀드들도 엄청난 수익을 기록한다. 이후 출시된 인사이트 펀드는 투자 대상이 따로 정해지지 않은 당시로선 특이한 형태의 펀드였는데 말하자면 주식, 채권, 원자재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투자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서 잘하면 대박, 못하면 쪽박을 찰 수 있는 구조였다. 아무튼 이게 '박현주 펀드'로 마케팅되면서 시중자금을 단 3주 만에 4조 원 흡수하며 전무후무한 히트를 기록했다.
그러나 2008년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면서 글로벌금융위기가 터지자 이러한 성공신화는 한순간에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일단 미국을 위시한 글로벌 증시가 그야말로 반토막이 났고 미래에셋이 자랑하던 펀드들의 수익률도 급전직하. 중국펀드는 고점에 물린 사람들은 단기간에 수익률이 -70% 정도까지 폭락하면서 증권사는 수익에 타격을 받게 된다. 가뜩이나 위탁 수익이 작던 상태라 펀드잔고 급감은 여러모로 악영향. 05년도에 50~60개 정도였던 미래에셋증권의 지점 수는 08년 초에 200개에 육박할 정도로 늘어났었는데 늘어난 지점수만큼 직원들도 많아졌던 상황. 소규모였던 회사가 단기간에 급성장하기위해선 외부 인재 영입이 필수였던 관계로 활황장에서 높은 연봉에 많은 직원들을 영입한 것이 부담이 되게 된다. 단적으로 영업이익은 06회계년도 1,599억, 2007년 3,686억이었으나 08년도에는 2,019억으로 급감. 반면 직원 수는 1,186명, 2,304명, 2,170명으로 1년만에 두 배가 된 후 유지. 2011년 8월 폭락장에서 신용융자를 금지해 버렸다. 하지만 곧 코스피는 회복세로 접어들었다. 이에 많은 개인투자자들은 자유시장경제의 총아인 주식을 위탁매매하는 증권사가 반시장주의적 정책을 사용했다며 힐책하는 경우도 있었다.
박현주 가족 관계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농부였다. 고등학교 시절 갑작스런 아버지의 사망이 그의 가치관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어머니는 부지런하고 인정 많고 정확했다. 부인 김미경과 결혼해 하민, 은민, 준범을 1남 2녀로 두고 있다. 부인은 6살 연하이고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출신으로 박 회장과는 연애 결혼했다. 김씨가 박 회장을 부모님께 소개했을 때 장인과 장모는 박 회장이 증권회사에 다니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당시 금융업계에서는 은행이 최고 직장이었고, 증권사는 ‘한탕주의가 판치는 곳’ 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 회장이 처음 본 김씨의 아버지에게 향후 증권업의 발전 방향에 대해 두 시간 동안 달변으로 ‘사활을 건 브리핑’ 을 해 가까스로 결혼 승낙을 얻어냈다고 한다.
은퇴 뒤 경영권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고 전문 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길 예정이라고 말했으며, 박현주는 2세 경영설을 부정하고 있다.
장녀 박하민 (1989)은 미국 코넬 대학교 인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한 뒤 맥킨지 서울사무소에서 1년, 해외부동산 투자자문사인 CBRE에서 1년 일했다. 2013년 8월 미래에셋운용 홍콩법인 해외부동산투자본부에 입사했다.
차녀 박은민(1992)은 미국 듀크 대학교에서 유학 후 전략컨설팅펌 BCG 한국 지사에서 일했다.
장남인 박준범(1993)은 미국 세인트루이스 워싱턴 대학교에서 유학했다.
박현주가 세운 최초의 기록들
1997.08 대한 최초 전문 자산운용회사 미래에셋투자자문 설립
1998.12 대한민국 최초 뮤츄얼펀드 박현주1호 출시
2001.02 대한민국 최초 개방형 뮤츄얼펀드 출시
2001.02 미래에셋증권 대한민국 최초 랩어카운트 상품 판매
2003.12 대한민국 최초 해외 운용 법인 미래에셋자산운용(홍콩) 설립
2004.03 미래에셋증권 대한민국 최초 적립식펀드 출시
2004.06 미래에셋증권 대한민국 최초 부동산펀드 출시
2004.12 미래에셋자산운용 국내 최초 사모투자펀드(PEF) 출시
2006.05 대한민국 최초 중국 본토 빌딩 투자_미래에셋상해타워
2008.07 미래에셋자산운용 대한민국 최초 중국 증권감독위원회로부터 적격외국인투자자(QFII)인증
2010.04 미래에셋자산운용 국내 최초 SICAV 펀드 국내 출시
2011.01 미래에셋자산운용(홍콩), 국내 최초 홍콩증권거래소에 ETF 직접 상장
2012.07 대한민국 최초 중국 합작운용사 (미래에셋화신자산운용) 출범
2013.06 호라이즌 ETFs 국내 계열 운용사 첫 미국시장 ETF 상장
2014.03 호라이즌 ETFs 아시아 자산운용사 최초 미국시장 KOSPI200ETF 상장
2014.09 TIGER ETF, 세계 최초 중국 본토 레버리지 ETF 상장
2014.10 미래에셋자산운용(홍콩), 국내 최초 첫 RQFII 활용 ETF 상장
2016.12 미래에셋생명, 국내 최초 모바일 금융오픈마켓 iAll(아이올) 오픈
2018.11 미래에셋자산운용 국내 최초 중국 사모펀드 자격 획득
박현주가 성공시킨 주요 M&A 이력
박현주는 그의 확고한 투자철학과 인사이트를 바탕으로 다수의 M&A를 성공시키며 미래에셋을 국내 굴지의 금융투자전문그룹으로 성장 시켰다.
2004.02 SK그룹 계열 SK투자신탁 인수
2005.06 SK그룹 계열 SK생명보험 인수
2011.11 캐나다 선두 ETF 운용사 호라이즌 ETFs 인수
2011.11 호주 선두 ETF 운용사 BetaShares 인수
2016.12 대우증권 인수 후 미래에셋증권 합병
2016.12 산업은행 계열 KDB자산운용사 인수
2017.07 베트남 프레보아 생명 인수
2017.12 PCA 생명(한국) 인수
2018.07 미국 ETF 운용사 글로벌X 인수
박현주 해외 진출 활동
박현주는 미래에셋 창업초기부터 해외진출을 염두에 두고 시장조사를 진행했고 현재 대한민국 금융투자 업계에서는 해외진출의 선두주자로 평가받고 있다.
2003.12 미래에셋자산운용(홍콩) 설립
2006.09 미래에셋자산운용 베트남 하노이사무소 설립
2006.11 미래에셋자산운용(인도) 설립
2007.01 미래에셋증권(홍콩) 설립
2007.03 미래에셋자산운용(영국) 설립
2007.07 미래에셋증권(북경) 설립
2007.12 미래에셋증권(베트남) 설립
2008.02 미래에셋익재투자자문(중국) 설립
2008.04 미래에셋자산운용(미국) 설립
2008.04 미래에셋자산운용(브라질) 설립
2008.08 미래에셋증권(미국) 설립
2008.08 미래에셋명승투자자문(중국) 설립
2010.08 미래에셋증권(브라질) 설립
2012.10 호라이즌ETFs (LatAM) 설립
2016.01 미래에셋자산운용(호주) 설립
2017.10 미래에셋증권(인도) 설립
글로벌 주요 투자현황
2009.08 호주 담수화시설물 투자
2011.08 세계1위 골프용품 브랜드 타이틀리스트 인수
2011.10 호주 빅토리아주 이스트링크 사업 투자
2013.09 세계적인 호텔 브랜드 “포시즌스 호텔 시드니” 인수
2014.12 미국 워싱턴Dc 오피스빌딩 1801k 인수 (미국 연방준비위원회 입주)
2015.05 하와이 리조트 호텔 ‘페어몬트 오키드’인수
2015.12 미국 샌프란시스코 랜드마크호텔 ‘페어몬트 샌프란시스코’ 인수
2016.07 미국 아마존 본사 Phase VIII 빌딩 인수
2016.08 서부간선지하도로 사업투자
2016.09 하얏트 리젠시 와이키키 비치 리조트 & 스파 인수
박현주 사회공헌 활동
미래에셋박현주재단
그는 해마다 미래에셋에서 받는 배당금 전액을 미래에셋박현주재단에 기부하고 있다.
박현주는 ‘배려가 있는 자본주의’라는 사회공헌 철학을 실천하기 위해 1998년 미래에셋육영재단을 세우고 2000년에 미래에셋박현주재단을 설립했다. 박현주는 평소에도 “한국 최고의 부자가 되기보다 최고의 기부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라며 “미래의 인재에게 투자하는 것이 미래에셋이 고객과 사회로부터 얻은 것을 환원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바 있다.
미래에셋박현주 재단은 설립 이후 18년 동안 269,476명의 젊은이들에게 장학금과 해외체험 및 경제교육의 기회를 제공해 왔으며 세부사항은 다음과 같다. (2019년 2월말 기준)
미래에셋 국내장학생 연간 대학학비 전액지원 : 3,391명
미래에셋 해외교환장학생 학업장려비 지원 : 5,117명
미래에셋 글로벌투자전문가 학사/석사과정 학비지원 / 인턴십프로그램참여 : 122명
미래에셋 우리아이글로벌리더 대장정 어린이펀드가입자중 상해캠프지원 : 12,700명
미래에셋 글로벌문화체험단 해외체험의 기회가 적은 아동, 청소년에게 상해캠프지원 : 1,839명
미래에셋 경제/진로교육 우리아이 경제교실, 스쿨투어, 금융캠퍼스, 청소년 금융진로교육 등 : 246,307명 (2019년 2월말 기준)
배당금 전액기부
2000년 그가 75억원의 사재를 털어 설립한 비영리 사회복지재단 미래에셋박현주재단의 장학프로그램은 국내 최대 규모로 성장했다.
박현주는 해마다 미래에셋에서 받는 배당금 전액을 기부하고 있다.
2015년에는 청년 일자리 해결을 위한 '청년희망펀드' 조성 사업에 사재 20억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매경 2017년
박 회장은 `바르게 벌어야 바르게 쓴다`는 원칙의 소유자다. 최고의 부자가 되기보다는 최고의 기부자가 되는 게 꿈이다. 돈에 대한 철학도 확고하다. 10년 전 펴낸 자서전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에서 박 회장은 "꽃이 진정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꽃이 진 뒤 씨앗을 만들고 다시 수많은 꽃을 피우는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라며 "돈도 꽃처럼 돌고 돌아 씨를 만들고 열매를 맺어 이 땅의 젊은이들을 위해, 건강한 사회를 위해 아름다운 꽃이 되어야 한다"고 썼다.
박현주 수상 실적
2008년 제40회 한국능률협회 한국의 경영자상을 수상했다.
2009년 언스트앤영 최우수 기업가상 마스터상을 수상했다.
2011년 제1회 한국금융투자협회 금융투자인상 대상을 수상했다.
2013년 10월 제1회 매일경제 기업인상을 수상했다.
2015년 제17회 경영관련학회 통합학술대회 최우량기업상을 수상했다. 한국경영학회 특별강연
2017년 제26회 다산금융상 대상을 수상했다. 제26회 다산금융상 대상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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