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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와이프 자녀 고향 재산 나이 프로필

손학규 와이프 자녀 고향 재산 나이 프로필

 

손학규

孫鶴圭 | Sohn Hak-kyu

 

출생

1947년 11월 22일 (74세)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

(現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자택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본관

밀양 손씨

 

재임기간

제33대 보건복지부 장관

1996년 11월 13일 ~ 1997년 8월 5일

제31대 경기도지사

2002년 7월 1일 ~ 2006년 6월 30일

 

부모

아버지 손병화, 어머니 양현자

 

형제자매

형 손홍규, 손덕규, 손상규
누나 손명규, 손복규, 손정규

 

배우자

이윤영

 

자녀

장녀 손원정, 차녀 손원평

 

학력

서울매동국민학교 (졸업)
경기중학교(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 61회)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학 / 학사)
옥스퍼드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 석사·박사)

 

병역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전역

 

종교

개신교 (기장)

 

신체

170cm, 67kg, AB형

 

경력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제14대 국회의원(경기 광명)
제15대 국회의원(경기 광명 을)
보건복지부 장관
제16대 국회의원(경기 광명)
제31대 경기도지사
대통합민주신당 대표
통합민주당 대표
민주당 대표
제18대 국회의원(경기 성남 분당 을)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
국민의당 상임고문
국민주권회의 의장
바른미래당 대표
민생당 상임선거대책위원장

 


대한민국의 노동·민주운동가, 학자 출신 정치인.

 

제33대 보건복지부 장관과 제31대 경기도지사를 지냈고, 옛 민주당, 바른미래당 대표를 역임하기도 한 거물급 정치인이다. 사실상 대통령, 국무총리 빼고 어지간한 자리는 다 해봤다. YS 키즈의 일원.

17대 대선, 18대 대선 모두 민주당계 정당의 유력 후보였으나 두 차례 모두 당내 경선 패배(2위)로 후보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19대 대선에서 당적을 변경하여 대선후보 경선에 나갔지만 탈락하면서, 대선 주요 후보로 거론된 11년, 3회의 대선 동안 한 번도 후보조차 되지 못한 정치가가 되었다. 유례 없는 기록이다. 1997년 15대 대선 이래 야당 인생만 20년에 또 5년을 추가하게 되었다.

2014년 재보궐선거에서 낙선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전남 강진군 만덕산에서 은둔하며 지냈으나, 꾸준히 복귀설이 흘러나왔다. 덕분에 붙여진 별명이 '만덕산'이다.

2016년 4월 20대 총선 직전 더불어민주당에서 복귀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이를 거부했고 결국 복귀 타이밍을 놓쳤다. 민주당이 총선에서 패배하면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문재인과 안철수가 사퇴할 테니 그 빈 공간을 자신이 채우면 된다는 작전이었던 것 같으나 민주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행보가 꼬였다. 결국 19대 대선에서도 안철수에 밀려 국민의당 경선 패배(2위).

이후로 국민의당이 바른정당과 합당한 바른미래당 대표(합당 후 민생당 선대위원장)를 지냈으나 21대 총선에서 0석으로 패배하였다.

갈지자 행보로 비판받기는 해도, 인성이나 능력면에서는 반대편 진영에서도 인정할 정도다. 거꾸로 말하면 큰 인성 결함이나 논란이 될 사건이 없고 정책 수행능력이 좋은데도 어느 순간부터 정치인으로서 매력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나마의 인망도 바른미래당 말기의 독선적 행보로 결함이 생기게 된다.

 

 

손학규 생애 고향 학력 가족관계 부인 자녀 프로필

정치 투신 이전

1947년 11월 22일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 (현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에서 아버지 손병화(孫炳華)와 어머니 양현자(梁顯子)의 4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나 그 곳에서 자라다가 초등학생 때 서울 사대문 안으로 이사갔다. 시흥군 서면(현 광명시)에서 교편을 잡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어렵게 자랐으나, 우수한 학업성적으로 경기중고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하였다. 참고로 경기고등학교에 재학중이던 시절에 6.3 항쟁에 참여했다가 구속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했던 이력도 있다.

이후 '65학번 삼총사'로 불리우게 되는 대학 동기 친구들 김근태, 조영래 등과 함께 민주화운동 및 다양한 사회운동에 참여하다가 정학을 당하기도 했고, 특히 사카린 밀수 사건을 극렬 비판하다가 경찰의 추격을 받아 정선 함백역 일대의 탄광촌에서 광산노동자로 숨어 지내기도 했다.

한편 4학년 재학 중인 1969년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하여 1972년 병장으로 만기 전역했다. 

졸업 이후에는 노동운동에 참여하다가 박정희 정부의 탄압을 받았고 1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특히 유신 정권하에서는 늘상 수배중이었던 상태여서 결국 1978년 어머니의 장례식에 몰래 참석하려다가 붙잡혀 또 다시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1979년 부마민주항쟁 진상 조사를 위해 활동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해 죽기 직전까지 갔으나, 박정희가 저격당하면서 가까스로 풀려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980년 그의 노동운동을 후원하던 NCCK의 도움을 받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로 유학을 떠나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87년 귀국하여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 원장이 되어 시민사회운동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1988년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1990년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되었다. 이 시기 최장집 교수 등의 진보적 소장학자들과 교류하며 명성을 쌓았다.

보다시피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학계를 모두 경험했다는 게 그의 강점이다.

종교는 개신교(장로회)이며, NCCK 계열의 운동에 투신한 전력을 미루어 보아 장로회 중에서도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 출신으로 보인다.

 

정치인 경력

민주자유당 - 신한국당 - 한나라당

1993년, 김영삼의 제안으로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고, 1993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광명시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발을 들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광명시 을 선거구에서 재선되었고, 같은 해 11월에 보건복지부 장관이 되었다. 1998년에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경기도지사 후보로 출마했으나, 새정치국민회의 임창열 후보에게 패배했다. 손학규가 떠난 광명시 국회의원직은 재보궐선거를 통해 새천년민주당 조세형이 승계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현직이었던 조세형 후보를 꺾고 3선에 성공, 광명시 국회의원직을 탈환했다. 하지만 복귀 2년 만인 2002년에 국회의원직을 또 사퇴하고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출마하여, 이번에는 경기도지사로 당선되었다.

참고로 이 노무현 정부 시절 당시, 한나라당의 3인방으로 불리던 인물이 이명박, 손학규, 박근혜이다. 이들에 이어 이명박, 손학규와 친한 이재오도 언급되기도 했다. 2006년 김문수에게 경기도지사 자리를 넘겨주고, 이명박, 박근혜와의 대선 후보 경쟁에 뛰어들었다. 200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표어가 "'경제 대통령' 이명박, '민생 총리' 손학규, '책임 당대표' 박근혜"였을 정도로 당내에서 대중적 지명도는 높은 상태였다. 그러나 상도동계 인사 대부분+한나라당 內 수도권/PK계 중도보수 인사들 및 소장파 인사들이 이명박을 지지하면서, 손학규의 경선 승리는 일찌감치 물건너갔다. 실제 손학규의 탈당 시 동반 탈당자는 많지 않았다.

도지사 출신 유력 정치인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딜레마인데, 잘 수행하면 국정 운영 능력이 검증됐다고 평가받지만, 당내 기반은 약해진다. 때마침 김근태 등 과거 민주화 운동의 동지들은 민주화 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던 손학규에게 함께 분열로 자멸해가던 여권을 재편하자고 요청했다. 김대중 역시 자신의 햇볕정책을 추종하는 행보를 보였던 손학규가 참여하는 여권 재편을 지지했다. 결국 손학규는 과거 민주화 운동의 동지들과 함께 여권 재편에 나서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이에 이명박은 손학규에 대해 "안에 남아도 시베리아에 있는 것이지만, 나가도 추운 데 나가는 것”이라면서 “정치판이 원래 시베리아 벌판이고 나도 바람을 많이 맞고 있지 않나”고 말했고, 손학규의 탈당 가능성에 대해서는 “나간다, 나간다 하는 사람은 결국 나가지 않는다. 정말 나가려는 사람은 가만히 있는 법”이라 답했다. 이에 손학규 측에서는 “우리는 ‘나간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남의 어려운 처지를 빗대서 너무 쉽게 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손학규가 한나라당에 남았더라면 자연스레 현 시점의 대권 후보로 각광받지 않았을까 전망하는 시각이 있었는데, 사실 친이계한테 지지세에서 열세로 돌아섰고 친박계에게도 밀려난 '적대' 당한 손학규가 한나라당에서 버티는 선택을 했더라도 홍준표처럼 범친이계로 편입하지 않는 이상 버티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을 거란 추측이 더 합리적이다. 변절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꽤 보수화됐다고 평가받는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의 새누리당 내 입지가 어떤가 봐도 대충 답이 나온다. 전향한 케이스가 아니라도 원희룡 같은 경우 커리어상 한나라당 대선 후보군에 들만 했으나 당내에서 전혀 힘을 못 쓰고 있다. 손학규와 이명박, 이재오는 6.3 항쟁에서 같이 한 전력이 있다고 하나, 당시 손학규와 이명박은 어디까지나 대등한 각 파벌의 영수였기 때문에 손학규가 친이계라는 이명박 밑으로 들어가기는 어려웠다. 이명박의 시베리아 발언만 봐도 알수 있듯이 당시에 이명박 계파의 손학규에 대한 견제는 심했다.

다만 손학규가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을 끝까지 완주하여 이명박과 손학규, 박근혜가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맞붙었다면, 수도권에서 이명박이 얻었던 지지를 상당 부분 잠식하면서 TK보수층과 민정공화계의 콘크리트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는 박근혜가 경선에서 승리하고 제1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어쩌면 알려지지 않은 이명박 당선의 일등 공신일지도...

 

민주당 - 새정치민주연합

결국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2007년 3월 19일 한나라당을 탈당한 후, 대통합민주신당 창당을 주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대중과의 교감이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정계 입문도 원래 김대중의 민주당으로 하려고 했으나, 김대중이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가면서 어쩔 수 없이 3당합당의 주역이긴 하나 김대중과 함께 반독재 항쟁을 주도했던 김영삼의 당에서 정계에 데뷔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막상 대통합민주신당에서는 당내 경쟁자들로부터 출신을 이유로 공격받았다. 사실 이는 지금까지도 손학규를 공격하는 레퍼토리 중 하나다. 정작 민주당계 대선후보들은 그를 처음부터 별로 반기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

결국 대권 후보 경선에서 정동영에게 패배했다. 손학규는 정치 커리어 내내 지지기반이 될만한 지역이 없다는 점이 치명적이었다. 사실 지지율을 10프로도 벗어나기 힘들어 했다. 그가 인기가 좋았던 건 오로지 인간적으로 잘 알던 이너서클에 한정되었다. 이와 같은 경력은 야권 정치인 손학규에게 굴레가 되어 내내 그의 발목을 잡게 된다.

이후 통합민주당의 초대 당대표가 되었으나,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치 1번지' 종로에서 출마했다가 종로에서만 3선에 성공한 한나라당 박진 의원에게 패배하고, 당 또한 선거에서 참패하면서 책임을 지고 물러나 강원도 춘천시의 모처에서 칩거했다. 손학규가 정계를 떠나 있던 기간은 민주당이 '뉴 민주당 플랜'을 위시해 정책상으로는 상대적으로 우경화가 진행되는 시기이지만 무상급식 전면화, 대학등록금 인하, 남북평화협정 전환, 생활형 밀착정책을 내새워 2010년 지방선거는 승리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은 자만에 빠져 제대로 포지셔닝을 하지 못했고 2010년 7월28일 재보궐선거에서 참패를 당한다.

이에 2년만에 칩거를 깨고 2010년 10월 인천에서 열린 전당 대회에서 다시 당대표로 선출되어 보편적 복지, 공동체주의에 기반한 진보적 자유주의를 내세우면서 정계에 복귀한다. 정계 복귀 이전 100일간의 '희망 대장정'에 나서서 전국 방방곡곡의 민심을 둘러봤는데, 이때 손학규가 만들어낸 몇몇 재미있는 짤방들이 '손학규의 대모험'이라는 시리즈로 묶이며 화제거리가 되기도 했다. 손학규 대표 취임 이후 무상복지 3+1(무상급식, 무상의료, 무상보육, 반값등록금)을 내세우는 등 민주당계 정당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색채를 보였다. 오히려 민주자유당 출신이라는 과거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더욱 진보적인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손학규 대표 당시 민주당이 모델로 삼은 건 영국의 노동당이었다.

201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을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해당 지역구는 '경기도의 강남'으로 불리는 보수정당의 강세 지역으로, 민주당에는 거의 사지로 분류되던 곳이었기 때문에 이른바 '분당대첩'으로 불리면서 화제가 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오세응 후보가 당선된 이후 20년간 한나라당계 정당이 의석을 독주하던 곳인데다가, 상대 후보도 유력 정치인이었던 강재섭 한나라당 전 대표였다. 결국, 강재섭은 이 패배를 계기로 정계은퇴를 하게 되었다.

거의 반강제로 출마했으나, 기적적으로 당선되었는데 이를 두고 손학규의 영향력 약화를 위해서 정동영계에서 사지로 밀었다가 당선되면서 영향력만 늘었다는 평가들이 많이 나왔다. 야권 차기 대선 후보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등, 이 때까지가 민주당 대표 손학규의 리즈 시절이자 황금기였다.

오세훈 서울특별시장이 무상급식 시행을 두고 실시했던 주민 투표가 개표되지 못하며 사임하면서 서울특별시장 보궐 선거가 이뤄지게 되었다. 무소속의 안철수, 민주당의 박영선의 대결 구도로 보였던 야권 단일화 구도는 안철수가 박원순에게 후보직을 양보하며 요동쳤다. 이후 벌어진 단일화 투표에서 박영선이 패배, 서울시장 선거에 민주당 간판이 보이지 않게 되자 대표인 손학규의 책임을 묻는 당내 여론이 제기되었다. 손학규는 열심히 박원순의 선거운동을 도왔고 선거 결과는 박원순의 승리로 끝났으나, 안철수라는 강력한 후보자가 야권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결국 민주당은 문재인을 중심으로 한 시민통합당과 합당하면서 민주통합당이 출범하였고, 손학규는 당대표직을 사임한다.

민주당 내 반대 인사들을 누르고 야권통합을 강경하게 밀어붙인 인물이 바로 손학규였다. 다만 통합하면서 통합 지분을 시민통합당 측에 거의 퍼주다시피 하면서 범친노세력이 매우 강성해졌고 이후 전당대회 등을 거치며 본인의 영향력은 쪼그라들다시피 했다.

2012년의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구호를 앞세워 다시 민주통합당의 대선 후보에 도전장을 내었지만, 손학규는 정책이나 슬로건이 좋다는 평만 들은 채 문재인 후보에게 패하고 2위로 경선을 마무리했다. 자세한 사항은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경선 문서 참조. 이후 슬로건을 양보하기도 했지만 막상 쓰이지는 못했다.

 

2014년 재보선 낙선과 정계 은퇴

대선 직후 독일 사회민주당의 초청을 받아 독일로 건너갔다가 2013년 9월 귀국했다. 독일에서 온 손학규 대표의 편지. 이때 2013년 하반기 재보궐 선거 일정과 맞물렸기 때문에 출마 가능성이 점쳐졌으나, 출마하지 않았다.

2014년 7.30 재보선에 또다시 '지도부 책임론'의 일환으로 경기도 수원시 병 지역구(수원시 팔달구+권선구 서둔동)에 전략공천을 받아 출마했으나.......

이 지역은 무려 50여년 간 새누리당계 정당의 텃밭으로, 전임인 남평우 - 남경필 부자가 2대 24년에 걸쳐 뿌리내린 곳이었다. 분당 저리가라 해야 할 정도의 험지였던 셈. 더군다나, 당에서 너무 대놓고 전략공천을 했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 입장에서는 다소 뜬금포로 출마했다는 인식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45%의 득표율을 기록해 52.8%의 득표율을 기록한 새누리당 김용남 후보에게 패해 낙선하였다. 그리고 이튿날인 2014년 7월 31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전라남도 강진군 만덕산에 칩거했다.

 

정계 복귀 관련 설왕설래

"은퇴하신 게 아니라니까요! 정치를 은퇴했으면 저처럼 아파트에 살아요. 왜냐하면, 정치를 은퇴했기 때문에 이제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야 된다든가 이런 거 할 필요가 없잖아. 그냥 평범한 시민으로서 자유롭게 편하게 살면 돼. 와이프한테 잘 해 주면서." - 유시민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이 4.29 재보궐 선거에서 전패해 문재인 당시 대표의 지도력이 손상되자, 친노무현계에 대응하는 야권 리더로서 차기 대선 주자로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안철수 의원 등 비노계의 여러 의원들이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하면서 야권 재편이 가시화되자, 야권 대선 주자로 평가받는 손학규의 행보에도 관심이 쏠렸다. 정작 본인은 가만히 있는데... 그렇지 않아도 여러 기자들이 강진에 찾아가서 그에게 인터뷰를 시도했으나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선거가 다가오자 야권에서 장작으로 다시 쓰려고 손학규 행보만 쳐다보는 행태를 다시 보이자 김부겸 전 의원이 한 소리 했을 정도.

20대 총선 기간 중인 2016년 3월 30일, 측근으로 알려진 더불어민주당 이찬열 의원(경기도 수원시 갑)과 김병욱 후보(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을)를 격려 방문했다.  총선 후 정계 복귀의 신호탄이라고 주목하는 이들도 있다. 방문 당시 더불어민주당 측에서 보다 광범위한 지원 유세 동참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사양하며 곧바로 강진으로 내려갔다.

비단 더불어민주당 뿐만 아니라 국민의당의 여러 후보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직접 가지는 않았지만 송태호 동아시아미래재단 이사장을 대신 보내서 김성식 전 의원을 도운게 대표적인 예.

정치권의 호사가들은 손학규 전 지사가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의 뿌리인 호남에 칩거하면서 양쪽의 러브콜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 것은 20대 총선에서 양당이 참패해 문재인 - 안철수 두 마리 용이 사라지고 나면 19대 대선에 출마할 마땅한 후보가 없게 되니 그때 자신이 나서서 사실상 추대나 다름 없는 모습으로 대통령 선거에 나서겠다는 계산에서 비롯된 행보라고 풀이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설령 당내 세력 기반이 약하다고 하더라도 '대안이 없지 않느냐'는 논리로 그 약점을 돌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김종인 대표가 20대 총선 지원 유세에 힘을 보태달라고 도움을 청했을 때에도 손학규 전 지사는 끝내 동참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123석을 얻어 보란듯이 부활에 성공했고, 국민의당도 38석을 얻어 제3당으로서 견고한 위치를 점했다. 이에 따라 두 야당의 간판 대권주자인 문재인, 안철수 모두 입지가 더 튼튼해지는 반전이 일어났다.

특히 '나는 정계를 떠난 몸이다'라는 이유로, 중요하고 또 중요한 20대 총선에서 당의 지원 요청을 거부했던 탓에, 나중의 명분 싸움에서도 '총선 때 당에서 좀 도와달라고 했을 때에도 정계 은퇴했다며 손사래를 치더니 당이 총선 이기고 대선 시즌 오니까 정계 복귀를 하냐'는 비판을 피하기가 어렵게 됐다.

한 마디로 '최고의 타이밍을 노리다가 마지막 버스마저 놓쳐버린' 꼴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총선 후 한 달 여가 지난 5월 18일, 5.18 광주 민주화 항쟁 36주기 기념식에서 "정치의 새 판을 짜는 데 앞장서겠다"고 말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를 두고 언론과 정계는 '사실상의 정계 복귀 선언'으로 해석하고 있다.

더민주 최강의 대권 주자인 문재인 전 대표가 굳건한 당내 입지, 여론조사 선호도 1위에도 불구하고, 정작 야권의 심장부인 호남에서 지지세가 약화된 점을 파고들겠다는 계산인 걸로 보인다.

이를 두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셋째 아들인 김홍걸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객원 교수는 "국민들께서 이미 20대 총선을 통해 새로운 판을 짜 주셨는데 무슨 새 판을 또 짠다는 것인가?"라며 손 전 지사에게 쓴소리를 했다. 

정계 복귀 자체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본인의 평생 소망이었던 대권을 잡기엔 명분 싸움에서 절대적인 열세에 처한 지라 이렇게 한 번 찔러보기만 하고 결국 다시 칩거에 들어갔다.

그러던 와중에 국민의당에서 그에게 꾸준히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친안계(친안철수계)에게 눌려 있었던 호남계가 안철수라는 대권 주자가 구심점으로 서 있는 친안계와는 달리 자신들은 이렇다 할 대권 주자가 없다는 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손학규 전 지사를 데려오려고 하는 것이다. 특히 호남계의 리더격으로 불리는 박지원 의원은 손학규 전 지사에게 '더민주에 계속 있으면 친노 & 친문에게 눌려만 있을 것'이라며 노골적으로 손 전 지사를 데려오고 싶다는 의견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간 호남계는 대권은 꿈도 꿀 수 없었고 당권도 안철수 측에게 거의 다 내준 상태였는데, 김수민&박선숙 리베이트 사건이 터져 안철수&천정배 체제가 붕괴되고 박지원 비대위 체제가 들어서자 당권을 장악할 기회를 잡게 됐다. 당권을 잡았으니 이제 대권에서도 욕심을 내볼 만한 형편이 된 것이다.

하지만 호남계에는 경쟁력 있는 대권 주자가 한 명도 없다. 아니 있기는 한데, 민주당 쪽에 가 있다는 것이 함정이다. 대표적으로 정세균. 저평가 받아서 그렇지 정세균은 이래봬도 6선 국회의원이다. 더군다나 중간에 지역구를 서울로 옮겼는데도 나오는 선거마다 족족 다 이겼다. 그렇다! 이인제랑 동급이다(...). 박지원 본인은 또 너무 고령일 뿐더러 구시대 정치인 이미지가 강하다. 그래서 전남 강진에서 칩거 생활을 하며 겉으로는 정계 은퇴를 선언했지만 본인 고향도 아닐 뿐더러 더민주와 국민의당의 뿌리이기도 한 호남에서 칩거하며 '백 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는 메시지를 넌지시 남긴 손학규 전 지사에게 손을 내민 것.

여하튼 국민의당의 끈질긴 구애에도 손학규 전 지사는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는 않았다. 사실 여기까지는 정확한 상황판단을 내린 거였다. 국민의당 대선 주자는 사실상 안철수로 정해진 상황에서 손학규가 가봤자 또 민주당 때처럼 이용만 당하고 버려졌을 공산이 컸었다. 정치 관련 발언이라고는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대표가 광주 세계 웹콘텐츠 페스티벌 개막식에서 손 전 지사와 만나 "서울로 올라오셔야죠"라고 인사하자 "이제 올라가야죠"라고 대답한 것이 전부였고.

2016년 9월 20일, 전남 강진군 군민 초정 강좌에서 나라를 구하는데 자신의 목숨을 던지겠다며 정계 복귀성 발언을 하였다. 

 

정계 복귀

2016년 10월 20일 드디어 "만덕산이 내려가라 한다"며 공식적인 정계 복귀와 함께 더불어민주당 탈당을 선언했다. 그리고 "이미 명운이 다한 6공화국의 대통령이 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제7공화국 시대를 여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밝혔다. 즉, 개헌론을 꺼내든 것.

그런데 4일 후 박근혜 대통령이 개헌 카드를 꺼내며 관심을 가져가는가 했으나... 그날 저녁 JTBC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보도가 나가며 완전히 파묻혀 버렸다. 안습(...)

손학규가 정계 복귀와 함께 더민주를 탈당하자, 대표적인 손학규계 의원 중 하나인 이찬열 의원도 다음날인 21일, 더민주를 탈당하였다. 하지만 다른 손학규계 의원들은 탈당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내보인 상황.

11월 1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파동으로 인해서 거국중립내각 국무총리로 하마평이 되자 손학규 "여야 합의된 거국내각이면 총리 수용" 하겠다고 하였으나 실제 국무총리로는 김병준이 내정되었다.

11월 29일 박근혜 대통령의 제 3차 담화에 대해 손학규 "野, 朴제안 무조건 거부하면 안돼" 라면서 거국내각부터 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해서 네티즌들한테 큰 비난을 받고 있다.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찬성 234표로 가결되면서 자신과 가까운 김성식 의원이 있는 국민의당에 입당할지, 이재오를 중심으로 하는 늘푸른한국당 창당에 참여할지, 아니면 자기 세력을 이끌고 개헌을 매개로 할 신당(제3지대)을 창당할지를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손학규는 민주당을 나온 뒤부터 대통령 직선제를 이원집정부제나 내각제로 바꿔서 대권을 잡자는 생각이었는지 '제7공화국론'을 펴왔다. 따라서 이와 같은 개헌론을 주창해 왔던 소위 '제3지대'에 들어갈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했다. 때마침 국민의당 호남계도 간선제 개헌을 주창해온 터라 이들의 러브콜을 받아서 국민의당으로 향하느냐 자신의 독립 세력을 구성하느냐가 관심을 모았다.

12월 12일 안철수와 연합할 수 있음을 밝혔다. 2017년 2월 초 '국민주권개혁회의'라는 조직을 창립하고 의장으로 취임하였다. 이것은 신당 창당에 상당한 애로사항이 있었던 안철수가 이를 타개할 목적으로 민주당과 합당하는 모양새로 민주당에 입당한 것과 비슷한 전략이기도 하다.

2017년 2월 7일 국민의당과 통합을 선언하였는데 구제역에 묻혔고, 17일 입당 기사가 떴지만 하필 당일에 이재용이 구속되었다.  이쯤되면 행보를 결정하는데 문제가 있어 보인다.

2017년 3월 19일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국민의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안철수에게 밀려 2위로 탈락하였다. 경선 과정에서 제기한 이른바 독수리 5형제 프로젝트, 안철수 측 차떼기 의혹은 대선 본선에서 이른바 '조폭 차떼기 의혹'으로 불붙어 안철수를 괴롭히는 요인이 되었다. 이쯤되면 사실상... 내가 국민의당에 입당한 것은 더민주 승리를 위해서다!!!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합당 후 바른미래당 지방선거 선대위원장을 맡았다.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진 송파을 재선거 과정에서, 바른미래당 경선 결과 박종진이 1위를 차지하였으나 안철수 서울시장 후보는 손학규의 전략공천을 계속 주장하였다. 손학규 본인은 불출마 입장이었다가 2018년 5월 24일 갑자기 마음을 바꿔 출마 의사를 피력하면서 당내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으나 북미정상회담을 날려버리고 다음날인 25일 불출마 기자회견을 열었고 박종진의 공천이 확정되었다. 정치물 먹을만큼 먹은 사람이 이틀 만에 행보번복을 연달아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모를 리가 없는데....

2018년 8월 8일 정치제도, 선거제도 개혁을 내세우며 바른미래당 당대표 선거에 출마했다. 박주원 전 국민의당 최고의원에 따르면 안철수의 의중을 뜻하는 이른바 '안심'은 이미 손학규 후보로 정해져 있다고 한다. 

 

바른미래당 대표

2018년 9월 2일 치러진 당 대표 및 최고위원 선출대회에서 바른미래당의 2대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2010년 민주당 당 대표 역임 이후 처음으로 당 지도부 역할을 맡게 된 셈이다.

2019년 보궐선거에서 창원시 성산구에 후보를 내고 손학규 본인도 현지로 내려가 선거운동에 나섰으나, 바른미래당 이재환 후보가 3.57%의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하며 4위로 낙선하면서 위기에 처했다. 거기다 자유한국당의 강기윤 후보가 정의당과 민주당의 단일후보인 여영국 후보에게 겨우 0.54%p 차이로 패배하면서 보수정당 지지자들에게 창원시 성산구 보궐선거 패배의 한 이유로 꼽히게 되고 말았다.

2019년 5월, 하태경, 이준석, 권은희(1974) 최고위원이 제안한 안건들의 최고위 상정을 거부했다. 이에 하태경은 "나이가 들면 정신이 퇴락한다"고 비난했고, 손학규는 "정치에도 지켜야 할 예의가 있다"며 반격했다. 

2019년 7월, 손학규를 비롯한 당 지도부 전면 퇴진을 두고 내홍이 깊어지면서 주대환 혁신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혁신위가 구성되었다. 혁신위에서 '당 지도부 공개검증 안건'에 대해 논의가 이루어졌고 표결을 통해 상정이 의결되었으나, 이에 반발한 주대환 혁신위원장과 혁신위원이던 김소연 시의원이 사퇴하면서 입지가 더욱 좁아들게 되었다. 왜냐하면 주대환 혁신위원장은 손학규계와 가까운 인물이어서 당권파가 추천한 인물인데 무책임하게 사퇴하였고 표결에서도 오히려 손학규계가 추천한 혁신위원 쪽에서 공개검증 안건에 찬성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2019년 9월 유승민계 의원들이 '변화와 혁신을 위한 비상행동회의'를 결성하자, '나갈 거면 빨리 나가라'고 비난했다.

2020년 1월 3일 유승민계 의원 8명이 바른미래당을 탈당했다. 1월 27일에는 귀국한 안철수 전 대표가 손학규의 대표직 사퇴 및 자신을 위원장으로 한 비대위 체제 전환을 요구했다. 물론 손학규는 안철수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오너가 CEO 자르듯 일방적으로 해고 통보를 당했다."라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결국 안철수 또한 바른미래당을 탈당하고 신당 창당을 선언하면서, 손학규와 결별하게 되었다.

2월 3일 주승용, 김동철, 김관영 의원 등이 손학규에게 "10일까지 퇴진하지 않으면 탈당하겠다"고 통보했다. 설상가상으로 최측근이었던 이찬열 의원까지 2월 4일 바른미래당을 탈당하고 자유한국당으로 가게 되면서 바른미래당은 손학규만 남은 채 공중분해될 가능성이 커졌다. 

결국 대안신당·민주평화당과의 합당을 결정하고, 2월 21일 바른미래당의 마지막 최고회의를 주재했다.

 

민생당

2020년 2월 24일 바른미래당과 대안신당, 민주평화당이 신설 합당하면서 민생당 소속이 되었다. 민생당 출범 후 한동안 잠행을 이어가던 중 민주당 이낙연 전 국무총리와 미래통합당 황교안 대표가 맞붙는 21대 총선 종로구 출마설이 돌았으나,  천정배 전 국민의당 대표 등 호남 지역구 의원들의 만류가 이어지자 뜻을 접은 것으로 보인다.

3월 23일에는 난데없이 비례대표로 공천 신청을 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한편, 같은 날 정동영 전 민주평화당 대표가 "손학규가 배후에서 민생당의 더불어시민당 등 범진보 비례연합정당 참여 등을 저지하고 반 호남 노선을 주장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3월 25일, 민생당의 상임 선거대책위원장에 임명되었고 그 다음날 비례대표 순번 2번을 받았다. 민생당이 봉쇄 조항을 돌파할 경우 당선 안정권에 해당하는 순위였으나 이틀 후인 3월 27일, 민생당 공관위가 비례대표 순번을 조정하여 14번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4.15 총선에서 민생당은 당선자 0을 기록하면서 의석을 한 자리도 건지지 못하면서 원내에서 처참하게 소멸하였다. 손학규는 4월 16일 선대위원장 임무를 마치면서 모든 책임을 질 것임을 시사하였다. 나이도 이제 어느덧 70을 훌쩍 넘긴 고령이 된지라, 사실상 정치 생명이 끝났다는 의견이 대다수.

 

4번째 대선 출마 선언과 사퇴

그런데 2021년 11월 28일, 리서치뷰에 따르면 29일 2시 30분에 손학규가 대선 출마 선언을 할 수 있다고도 한다.  그리고 실제 출마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라고 한다. $ 네티즌들은 농담으로 내일 또 무슨 대형사고가 터질까 하고 있다.

11월 29일,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출마를 선언하며 "개헌으로 87년 체제를 청산하겠다"며 정치 개혁을 첫 번째 대선 공약으로 제시했다.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의회 중심의 연합정치라는 새로운 길을 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거대 양당제는 갈등과 분열, 대립과 투쟁만을 조장할 뿐"이라면서 "다당제 국회로 바꿔 싸우지 않는 국회를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또한 "제 출마에 대한 온갖 비난과 조롱을 안고 가겠다"라고도 밝혔다.

과거 한나라당을 탈당한 뒤 17대 대선에서 대통합민주신당의 경선 후보로, 18대 대선에서는 민주통합당의 경선 후보로 나섰지만 모두 2위로 패배했고 19대 대선에서는 국민의당의 경선 후보로 출마했으나 안철수 대표에게 또 다시 2위로 패배한 후 이번이 4번째 대권 도전이다. 4번째 만에 드디어 처음으로 본선에 출마하는 것이기는 하나 줄어든 정치적 영향력, 고령의 나이 등으로 봤을 때 유의미한 득표율을 얻기는 어렵다는 것이 중론.

지난 2016년에도 정계 복귀 선언과 함께 당시 소속 정당이던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한 바 있는데, 이번에도 민생당을 탈당하고 무소속 출마로 가닥을 잡았다. 민생당으로 출마했으면 TV토론 출연을 노리거나 민생당이 쌓아놓은 돈이라도 선거비용으로 펑펑 쓸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주요인사들이 다른 당의 후보를 지원하거나 탈당을 준비하는 등 거의 망해가는 민생당의 후보로 나오느니 무소속으로 나오는게 차라리 낫다고 판단한듯 하다.

하지만 2022년 1월 27일, 정체된 지지율을 극복하지 못하고 후보직 사퇴를 선언하였다. 이마저도 같은날 북한의 미사일 발사 뉴스에 묻혀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손학규 평가 

"자신만의 브랜드를 보여주기에 부족했다”

2007년 1월 10일 경향신문 "손학규 인터뷰 평가"

시류에 어둡고 정치적 감각이 떨어진다. 총리나 장관 같은 임명직 관료에 맞는 사람이 선출직을 노리다 보니 생기는 비극(?)의 주인공. 정치적 감각 문제로 지속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반복했으며, 결국 그게 누적되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즉, 일부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던 "뽑히질 못해서 그렇지 능력과 인성은 괜찮다"라는 이미지마저 점차 사라져가 재기하기 어려워졌다.

사실 민주자유당에서 정치를 시작한 만큼 보수층으로의 확장성도 있고, 한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경기도의 도지사를 역임했다는 점에서 수도권에서의 득표력도 기대해볼 만하며, 도지사 및 장관 재직 경험을 통해 행정 능력까지 입증했다는 점에서 '저평가 우량주'로 평가받았었다. 그러나 2007년에는 한나라당에서 이명박과 박근혜 양강에 밀리고, 진영을 옮겨 대통합민주신당 창당에 참여하면서 유력 주자로 부상했으나 조직표를 끌어모은 정동영에게 밀려버렸다. 2012년의 경우는 더욱 허망한데, 2010년~2011년 민주당 대표를 지내면서 2011년 4월 재보궐 선거에서 '험지' 분당을 당선에도 성공했으나,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재부상한 친노계에게 장외 주도권을 내준 결과,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참신한 슬로건을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민주통합당 경선에서 문재인에게 큰 차이로 패하고 만다. 마지막 시도에서는 2016년 국민의당 창당 과정 및 20대 총선에서 애매한 태도로 일관한 결과, 대권주자로서의 존재감이 실종되기에 이르렀다.

썰전에서 이철희 소장이 말하기로는, 손학규는 대통령감이지만 정치에 무른 편이라고 한다. 이유는 너무 신사라서 즉 정치 투쟁에 밀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판에 20년 있었던 사람에게 신사라서 투쟁에 밀린다는 말은 결코 칭찬이 아니다. 제대로 말하면 당내의 여론을 주도하는 코어 지지층에 인기가 부족한 스타일이다. 이제 70을 훌쩍 넘은 고령이라는 점도 걸림돌로 작용한다. 보수층과 수도권에서 먹히는 강점이 있다는 말이 무색하게 2014년 7.30 재보궐 선거 때 새누리당의 신인 김용남 후보에게 깨졌다는 점에서 실제 확장성에 의문이 있기는 하다.

잦은 수준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두 차례 양대 정당을 떠나고 나서 국민들이 지지할만한 신뢰를 얻지 못한 것도 문제였다. 노무현 대통령을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일명 경포대 발언)으로 비판하고는 정작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민주신당 창당에 참여하면서 민주당 최대지분의 친노계를 자극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건너온 철새정치인이라는 것이다. 이인제를 받아주던 정당이 할 말은 아니긴 하다만 게다가 이명박 정권 교체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가 점점 오르고, 사망 이후로는 거의 절정으로 오르면서 "노 전 대통령께 결례를 범했다"고 사과를 했지만, 근 8년 간의 꾸준한 행보에도 국민의당으로 이적할 때까지 친노계의 불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이명박이 대통령 퇴임 뒤에, "그 사람도 참.. 한나라당에 남았으면 대권후보까지 되었을 건데.. 괜히 옮겨가지고.."라는 말까지 했다. 다만 한나라당에서 나올 당시의 손학규는 이명박의 친이계와 박근혜로 대표되는 친박계 양쪽 모두에게 적대당하며 한나라당 내에서 정치적으로 끝장난 상태였다. 일례로 이명박은 손학규의 탈당에 대해 "당에 남더라도 시베리아가 기다리고 있을 것"라고 냉소했을 정도. 그러므로 훗날 이명박이 한 말은 진심으로 안타까워서라기보단 "그러길래 나한테 숙이면 편했을텐데..." 정도의 조롱으로도 볼 수 있다.

바른미래당 와해 과정에서 최측근이었던 이찬열마저 손학규를 등지게 된 것은 엄청난 타격이다. 심지어 손규라는 멸칭으로 불리는 등 비아냥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손학규 비판 및 논란 사건 사고

20대 총선 더불어민주당 선거 지원 요청 거부

2014년 7.30 재보선에서 낙선한 뒤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아파트 대신 전남 강진군에 있는 만덕산 모처의 초막에 칩거하고 있던 상황에서 20대 총선 당시 더불어민주당에서 손학규에게 선거 지원 요청을 하였지만 거절하였다.

당시 민주당은 매우 힘든 상황이었는데,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은 과반은 물론 180석, 혹은 단독 개헌 가능 의석인 200석도 달성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반면에 민주당은 새누리당의 막강한 기세뿐만 아니라, 민주당에서 떨어져나간 국민의당이 민주당의 전통적 텃밭이었던 호남에서 민주당을 밀어내고 선전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기 때문에 보통 위기가 아닌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은 민주 진영 내에서 정치적 거물이었던 손학규의 도움을 받아 조금이나마 선거의 흐름을 바꿔보자 한 것이다. 하지만 손학규는 이러한 민주당의 절실한 요청을 끝내 거절하였다.

선거 지원 요청을 거절한 이유에 대해서는 '자신은 정계 은퇴를 한 사람이기에 유세 지원 등 정치 활동을 하지 않겠다'라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세간의 해석은 다르다. 총선에서 야권이 표의 분산으로 여권에 참패하게 되면 야권의 대표 대선 주자들이 정치적 타격을 입어 행보에 차질이 생길테고, 이 틈을 노려 손학규 본인이 위기 속에 구세주처럼 등장하여 사실상 추대에 가까운 형태로 야권의 새로운 유력 대선 주자가 되려고 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하지만 20대 총선은 우리나라 정치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한 편의 반전 영화였다. 100석 이상만 얻어도 성공한 것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열악한 상황에서 선거를 치렀던 민주당이 수도권에서 압승하고 낙동강 벨트에서 크게 선전한 덕분에 123석을 얻어 원내 제1당에 등극하였고 국민의당도 호남을 석권하여 38석을 확보, 제3당의 입지를 다지는 데에 성공한다. 반면 선거를 매우 낙관적으로 바라봤던 집권여당 새누리당은 원내 1당을 민주당에 빼앗기는 수모를 겪는다. 결과적으로 이 총선에 명운을 걸었던 야권 대선주자들의 입지가 더욱 탄탄해지는 결과가 나왔다. 결국 손학규는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 꼴이 된 셈이었다.

만약 손학규가 민주당의 도움 요청을 받아들여, 본인의 본거지인 경기도, 그리고 더 나가서 수도권에서 열심히 선거 지원 활동을 했다면 민주당의 수도권 압승에 대한 공의 상당 부분은 손학규가 차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20대 총선에서 민주당은 손학규가 연고가 있거나 정치 활동을 한 적이 있는 수원 5개 지역구와 분당 갑/을을 민주당이 싹쓸이 하는, 상상하기 힘든 결과를 얻었는데 만약 손학규가 이 지역에서 열심히 유세 지원이라도 해줬더라면 이러한 엄청난 성과에 손학규 자신의 지분이 있다는 생색이라도 내볼 수 있었을 거라는 말이다.

즉, 손학규가 민주당 비대위가 보낸 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문재인처럼 전국 지원 유세를 돈다거나 아니면 본거지인 경기도, 수도권 집중 유세를 했거나 안되면 후보들에게 격려 방문을 했으면, 아니면 적어도 당시 야권 후보들의 후보 단일화를 중재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면 아마 민주당의 대선 후보 경선은 문재인 단독 1강 체제가 아닌, 주류 진영이 지지하는 문재인과 비주류 진영이 지지하는 손학규의 양강 구도로 진행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자신이 소속되어 있었던 정당의 미래에 눈을 감고 개인의 정치적 진로만을 먼저 생각한 그의 판단이 결국 그가 2014년부터 짜온 모든 정계 복귀 계획을 망치고 대권을 향한 그의 길을 가로막는 최대 장애물이 되어버렸다. 자기가 몸담은 정당의 이익과 판세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만을 위한 정치를 하려다 스스로 넘어져 앞길을 망친 셈이니 누굴 원망하겠느냐만은. 다만 본인은 분명히 정계은퇴 상태여서 그랬다고 말했다.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 당비 대납 논란

바른미래당 이준석 전 최고위원이 23일 “손학규 대표의 당비 1,750만 원이 타인 계좌에서 입금된 사실이 확인됐다”고 주장해 ‘당비 대납’ 의혹을제기했다. 이에 손 대표는 “현금으로 당비를 납부해 당직자 명의로 당 계좌에 입금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 전 최고위원은 23일 국회에서 열린 바른미래당 비당권파 모임인 ‘변화와 혁신을 위한 비상행동(변혁)’ 회의에서 “타인 계좌에서 입금된 게 확인된 것만 최소 7회고 금액은 1,750만 원”이라며 “정치자금법, 정당법, 배임수재죄 등에 있어 매우 심각한 처분을 받을 수 있는 사안”이라고 했다. 정당법과 바른미래당 당헌에는 당비는 다른 사람이 대납할 수 없다고 명시돼있다. 이 전 최고위원은 “해명을 못할 경우 손 대표는 당원 자격 정지와 더불어 대표직에서 궐위될 수도 있다”고 했다. 이에 손학규 대표는 “개인 비서에게 현금으로 줬고 비서가 임헌경 전 사무부총장에게 보냈는데 임 전 사무부총장이 자기 계좌에서 당 계좌로 보낸 것”이라고 해명했다. 

 

당 운영 관련 논란

2018년 하반기 손학규 대표와 김관영 원내대표를 비롯한 바른미래당 지도부는 야3당이 지지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과 관련한 선거법 개정을 목표로 당시 당대표인 손학규는 이정미 정의당 대표와 단식투쟁까지 돌입해가며 해당 사안에 대하여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더불어민주당은 공수처와 각종 예산안 입법 등을 포함한 선거법 개정안을 수용하면서 법안 처리과정을 패스트트랙에 올리는 것으로 결과적으로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며 단식투쟁을 종료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구 바른정당계의 반발에 부딪혔고 이에 대한 잡음을 해결하기 위해 감행한 당 조직 인사내정 등과 관련한 행위들로 인하여 바른미래당 내의 계파갈등은 손학규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내홍이 격화되었다.

더구나 2019년 보궐선거 결과 참패로 당내 분위기를 전환해 볼 수 있는 기회마저 날아가버렸고 그로부터 몇 주 뒤인 4월 18일 현직 원외 지역위원장 20명을 비롯해 전 지역위원장, 정무직 당직자 등 60여 명이 손학규 대표의 사퇴를 요구한 바 있다. 안철수계를 중심으로 목소리가 나왔다. 

김관영 원내대표가 오신환 및 권은희 의원을 사개특위에서 강제로 사보임시키자, 4월 26일 바른미래당의 원외 지역위원장 전체 81명 중 49명은 성명서를 내고 "위선과 독재로 당의 분열에 앞장서고 있는 손학규 대표, 김 원내대표를 보면 분노와 참담함을 금할 길이 없다"며 지도부의 총사퇴를 요구했으며, "안철수 전 대표와 유승민 의원의 공동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원내대표의 사보임으로 인해 당내 최고위원들이 당무를 거부하고 있는 상태에서, 5월 1일 주승용 의원과 문병호 전 의원을 지명직 최고위원 2명을 임명한 것을 두고 절차적으로 당헌 위반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바른미래당 하태경, 이준석, 권은희, 김수민 최고위원은 "당헌 23조4항에 따르면 지명직 최고위원 임명 때 최고위원회에 협의하도록 돼 있다"며 "손 대표의 주승용·문병호 지명직 최고위원 임명은 당헌 위반으로 원천무효"라고 주장했다. 

설상가상으로, 5월 3일에는 지도부 총사퇴와 안철수·유승민 공동체제 출범을 요구한 정무직 당직자 13명을 무더기로 해임하면서 독재 논란이 더 불거졌다. 

이후 패스트트랙 및 사보임에 반대하였고 손학규 퇴진을 요구한 오신환이 원내대표에 당선되면서, 손 대표의 입지는 축소될 전망이다.

5월 17일에 지도부 해임을 주장한 당직자 13명에 대한 해임을 취소하면서,  해당 논란은 약간 사그라들었으나, 대표 사퇴 요구는 계속되고 있다.

5월 20일 정책위의장에는 채이배 의원, 원내대변인에는 최도자 의원, 사무총장에는 임재훈 의원을 지명선임했다. 이에 바른정당계는 "이러한 지명선임은 최고위원들과 합의한 적이 없고 통보와 다를 바 없다"고 반발했다. 오신환 원내대표는 "임명권은 당대표의 권한이지만 정책위의장은 원내대표와 호흡하며 국정현안과 정책에 대해 같이 논의하는 자리인데 자신과 협의도 없이 채이배 의원을 임명 강행하는 것은 안된다" 하면서 "당을 민주적으로 운영하시라"며 최고위원 회의에서 손학규 대표를 향해 비판했다.

이번 인선이 합의를 통해 이루어진 것인지, 손학규가 강행해서 이루어진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신임 원내대표 선출 이후 당이 계속해서 내홍에 빠져들면 이것은 당 대표의 리더십에 흠이 갈 수밖에 없다. 사실상 패스트트랙 정국과 강제 사보임을 거치면서 자신의 최대 지지기반과도 같았던 안철수 계가 돌아선 바람에, 손학규의 리더십에 치명상을 입은데다 이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사퇴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7월 24일 오신환 원내대표와 바른정당계 하태경 이준석 권은희 최고위원, 안철수계 김수민 의원 등이 불참한 가운데 장진영 당 대표 비서실장과 채이배 정책위의장이 합의해 중앙당 윤리위원장을 선임했다. 중앙당 윤리위원장에는 안병원 전 대한석유협회 회장이 임명됐다. 

사실상 이후 바른미래당 최고위는 손학규계 당권파 진영으로 구성되고 원내회의의 경우 바른정당계 및 비당권파 진영으로 양 진영 회의로 구성되어 갈라져 버렸다.

결국 2020년 1월 구 바른정당 출신 의원들이 새로운보수당을 창당해 분당해나가면서 간신히 20석 교섭단체 지위를 유지하는 데 그치게 됐다.

 

당 대표 사퇴 발언 번복 논란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는 15일 추석 전 당 지지율이 10%가 안 되면 사퇴하겠다'고 한 것과 관련해 "(약속이 유효한지) 아직 답변을 못 드리겠다"고 말했다.

손 대표는 이날 당 최고위원 회의 후 기자들과 만나 "당이 분열된 상태에서 싸움이 혁신위원회로까지 확대가 될지는 (몰랐다)"며 "우리가 지지율을 높인다는 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있는 것인지 (봐야 한다). 답변을 보류하겠다"고 했다. 4·3 보궐선거 참패 후 당내 일부의 퇴진 요구를 받아온 손 대표는 지난 4월 15일 "추석까지 당 지지율이 10%에 미치지 못하면 대표직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러나 현재로선 이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확답을 할 수 없다는 뜻으로 보인다. 

결국 추석이 다 지나서도 사퇴하지 않았다. 본인이 스스로 한 약속을 깬 것이다. 한편 손 대표는 이런 비당권파 발언에 대해 "퇴진파가 지지율 상승에 같이 노력해 줬느냐"라고 반문했다.링크 결국 유승민계 의원들은 손학규의 태도에 환멸을 느낀다며 새로운보수당으로 분당했다.

새로운보수당 분당 이후 사퇴 번복을 둘러싼 논란이 진정되는가 했더니, 안철수 대표가 한국으로 돌아온다. 손학규 대표는 안철수 대표가 귀국하기 전까지만 해도 "안철수 전 의원이 오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안 전 의원의 말을 들어주고 최선을 다하겠다. 많은 의견을 같이 해결해 나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라면서도 "제가 '무조건 나간다'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안철수 전 대표가 귀국해 손학규 대표의 사퇴 및 비대위 체제로의 전환을 촉구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며 다시 사퇴 요구를 일축했다.

결국 안철수 전 대표 역시 손학규 대표의 이중적인 태도에 회의감을 느낀다며 2020년 1월 29일 바른미래당 탈당을 선언하며 당을 떠났다. 뒤이어 최측근으로 분류되었던 이찬열 의원조차 손학규 대표와 결별한 뒤 자유한국당에 복당했고, 결국 안철수계를 비롯한 바른미래당 소속의 거의 모든 의원들의 집단탈당이 사실상 확정되면서 손학규 체제는 파산선고를 받고 말았다. 

 

기타 논란

음주운전으로 뇌사 상태에 빠진 윤창호 씨의 친구들 면전에서 자신의 젊은 시절 음주운전 경험을 고백하여 논란이 되었다. 실제로 음주운전 경력이 있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을 음주운전에 의한 피해자와 피해자의 친구들 앞에서 말하는 것은 그 이상으로 굉장한 망언이다. 다만 이건 순수 망언이라고 보기에는 본인의 과거를 흑역사로 자조&반성하는 식으로 말한것이다. 그 다음에 바로 음주운전은 살인행위나 다름없는 짓이라고 선을 그었다.

경기도지사 재임 시절, 자신을 지구의 영웅으로 표현한 만화책을 초등학교 교재로 썼다가 선거법 위반 논란을 겪었다. 

간호조무사협회 창립 46주년 기념식에서 '처음부터 간호조무사를 꿈꾼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 '가정 사정상 학교에 제대로 못 가는 등 여러 가지 개인 사정상 간호조무사를 택할 수밖에 없지 않으신가.' 같은 발언과 간호조무사에게 '낮은 대우를 받는 자격을 갖고 계신 분들'이란 표현을 사용해 논란을 빚었다.

1월 31일 바른미래당 호남계가 당대표 사퇴를 최후통첩했다는 이야기를 식당에서 당직자들에게 듣고 술에 취해 있었던 손학규 대표가 "개X끼들, 나가려면 다 나가라 그래라, 당대표는 절대 그만 못 둔다!"라고 이야기 했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21 총선을 앞두고 민생당 비례대표 2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 5선에 도전하자 민생당 내에서 노욕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말았다. 민생당 내부의 갈등이 다시 생길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결국 14번으로 밀렸다. 14번으로 나올 바에 아예 나오질 말지 어차피 민생당은 해당 선거에서 지역구, 비례대표 모두 0석을 획득하여 욕심 많은 이미지만 쌓고 실익을 챙기지는 못했다.

 

 

손학규 여담 일화 인간관계 인맥 행보

흔치 않게 이인제처럼 육군 현역병 출신으로 병장 만기 제대를 하였다. 무려 35개월 동안 복무하였으며 본인도 전역 당시에도 예비군복을 입고 오전 근무한 후에 집에 갔다고 하면서 나름대로 군 복무를 열심히 한 편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정계의 잠룡 혹은 거물이라고 불리는 인물답게 고정적인 지지층이 있으며 지지자들의 손학규를 향한 마음은 일편단심이다. 매 경선에서 고배를 마셔도 '우리의 가슴 속 영원한 대통령은 손학규 의원님'이라며 위로와 응원을 할 정도.

디시인사이드 설립자인 김유식에게 지지를 받기도 했다. 실제로 김유식은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당적을 옮긴 손학규 지지모임인 선진연대. 정확히는 전진코리아의 공동대표로 있기도 했다. 덕분에 본인 이름의 갤러리인 손학규 갤러리가 만들어 지기도 했다. 본인 역시 디시인사이드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식에 공식 초청을 받아 참석했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 및 이재오 전 특임장관과는 6.3 항쟁때부터 알고 있어 친분이 있는 사이이다. 오히려 세 사람이 한솥밥을 먹던 신한국당-한나라당 시절에는 이 세 사람 모두 상호간에 허물이 없는 매우 친한 사이었다. 이재오는 이명박을 도우면서 친이계의 좌장이 되었고, 손학규는 민주당계 정당의 당적으로 이동하면서 예전보다 사이가 멀어졌지만 이명박과 이재오도 손학규에 대해서는 최근까지도 상당한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한다.

손학래 대한민국 철도청장, 한국도로공사 사장과는 항렬이 같긴 하나, 친형제는 아니다. 의외로 혼동하는 사람이 있는 듯.

5월 21일 바른미래당이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발대식 및 전국 공천자 대회'를 열었는데, 바른미래당 중앙선대위원장을 맡은 손학규가 이날 문재인 정부의 경제 정책을 호되게 비판하는 일장 연설을 했는데, 바른미래당이 아닌 바른민주당으로 말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때까지야 그냥 말실수를 했으려니 했다. 그런데 2019년 4월 9일에는 바른정당 계열의 당 최고위원들이 손학규 당 대표에게 4.3 재보선 패배 책임을 물어 사퇴를 종용하고 있는 것에 대해 단호히 거부하면서 바른미래당에 대한 애정을 역설하는 와중, 당명을 바른미래당이 아닌 더불어민주당이라고 말하는 실수를 또다시 저질렀다. 유튜브 영상. 1분 26초부터 흥분해서 한 실수라지만 일각에서는 '손 대표가 사실은 민주당으로 돌아가길 갈망하고 있는 게 아니냐'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강적들 256회에 진보 패널로 출연해서 자유한국당은 사실상 죽은 정당이며 다음 총선 에서 자신들의 중도 정당이 원내 제2당이자 새로운 거대양당 체제를 이룰 것이고 지금의 보수 정당은 소멸될 것이라고 독설을 날렸는데 아이러니하게도 21대 총선에서 자유한국당은 미래통합당으로 보수통합을 이룬 후에 비록 패배했지만 의석수 100석 이상을 지켜내며 보수의 명맥을 유지하며 영남권의 패권을 다시금 가져오는 것은 물론이고 거대 양당 체제 유지에 성공한데 비해 한국당이 죽은 정당이라고 독설을 날렸던 본인은 당대표로써 바른미래당을 파탄내고 국민의당에서 갈라져나온 민주평화당, 대안신당과 다시 합쳐서 민생당으로 어찌어찌 재탄생시켰지만 총선에서는 의석수 0석이라는 처참한 성적으로 원내에서 축출되면서 정작 본인의 정당이 원내에서 소멸한 정당이 되고 말았다.

 

 

손학규 징크스 사건 사고 

정치 행보를 보일 때 심사숙고를 하는 편이다. 심사숙고 자체는 문제가 안 되는데, 결정을 내리는 시점을 전후해서, 더 큰 일이 터져서 행보 자체가 묻혀버리는 경우가 많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하도 타이밍이 절묘한 경우가 잦다 보니 타이밍의 마술사라는 반어적 별명이 붙었고 여러 언론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아예 '손학규가 움직이면 나라에 큰일이 터진다'는 농담까지 나올 정도다.

다음은 손학규 징크스의 구체적 사례들을 나열한 것이다.

2006년 민심대장정 → 북한 1차 핵실험

2007년 광개토전략 → 고건 불출마 선언

2007년 한나라당 탈당 → 한미 FTA 타결

2010년 민간인 사찰 농성 → 연평도 포격 사태

2011년 국회 쇄신안 → 31개 저축은행 영업정지 사태

2016년 복귀 및 개헌 제안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

2017년 국민의당 입당 → 이재용 구속 수감

2017 대선 공약 발표 → 사드 배치, 김종인 민주당 탈당

2017년 북한 핵보유국 인정 발언 → 이명박 정부 정치계 블랙리스트, 화이트리스트 공개

2017년 미국서 귀국 →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사고

2018년 정초 산행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우연히 조우 → 북한, 평창동계올림픽 참가발표

국민의당 - 바른정당 통합 찬성 의견 발표 → 이명박 정부 당시 김태영 국방부 장관의 UAE 파병 비밀협약 인정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바른미래당 선거대책위원장직 수락 →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논란, 박진영의 개신교계 사이비종교 구원파(권신찬-유병언계) 전도 논란

송파을 보궐 선거 출마 선언 → 2018 북미정상회담 취소

송파을 보궐 선거 출마 번복 →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2018년 북미정상회담 재개 가능성 타진, 다음 날 2018 제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

바른미래당 당대표 출마 선언 → 태풍 솔릭,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폼페이오 장관 방북 취소 명령

바른미래당 당대표 당선 → 청와대 대북 특별사절단 발표, 손흥민 군면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폐회식

국회 로비 단식농성 → 강릉선 KTX 열차 탈선 사고

이학재 의원, 류성걸 전 의원 탈당 → 강릉 펜션 일산화탄소 누출 사고

2019년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당내에서 제기되는 대표 퇴진론을 일축', 퇴전거부하며 "계파주의 굴목 안해" → 이재명 직권남용 및 선거법위반 1심 무죄, KIA 타이거즈 김기태 감독 자진사퇴

2019년 자칭 '손학규 선언' →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의 딸 조민에 대한 의혹이 논란이 됨.

바른미래당 대표 취임 1주년 →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의 무제한 기자간담회

유승민 발언 비판 기자회견 및 여야 영수회담 제안 → 봉준호 감독 오스카 각본상 감독상 작품상 국제영화상 수상

바른미래당 대표직 사퇴 및 합당 수용 →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환자 100명 돌파

민생당 상임선대위원장직 사퇴 →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온라인 개학 및 등교 개학 무기한 연기

2020년 12월 31일 이명박, 박근혜 사면 주장 → 2021년 1월 1일 이낙연의 "이명박, 박근혜 사면 건의할 것" 발언

2021년 11월 30일 대선 출마 선언 → 국민의힘 당대표의 공식일정 전면 취소·칩거 , 대한민국의 코로나19 오미크론 변이 확진자 발생

2022년 1월 27일 대선 후보 사퇴 선언 → 대법원 정경심 교수 징역 4년 확정 판결, 김학의 파기환송심 무죄, 승리 2심에서 1년 6월로 감형, 북한 미사일 발사,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 관련 유죄 확정, 최신원 1심 유죄, 헌법재판소 개성공단 중지 합헌 결정

 

제20대 총선에서 야당이 승리하면서 정계 복귀 타이밍은 제대로 꼬여버렸고, 결국 2016년 10월 20일에 만덕산이 내려가라고 한다며 개헌론을 꺼내들고 정계 복귀를 선언하였다.

그런데 그 직후인 10월 24일에 최순실 태블릿 보도가 터지면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때부터 손학규의 별명은 만덕산이 되었으며, '만덕산'이라는 명사는 '무슨 결정을 하면 바로 큰일이 터져 아웃 오브 안중이 되어버리는 상황'을 말하는 정치적 용어가 되었다.

탄핵 정국에서 국민의당의 호남계 의원들은 안철수에 대항할 만한 당내 대선 주자로, 안철수계 의원들은 경선 흥행을 위한 카드로서 손학규를 1순위 영입 대상으로 두고 있었다. 손학규는 2017년 2월 17일 국민의당에 합류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특검에 의해 구속, 수감되었다. 게다가 며칠 전부터 북한에서 미사일을 날려보내고 김정남이 죽어버리는 등 북한발 뉴스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여론은 손학규에게까지 관심을 줄 여유가 없었다.

2018년 8월 8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바른미래당 당대표에 출마를 선언했다. 치욕과 수모를 감내하고서라도 당을 위해 헌신하며 양 극단의 정치를 끝내겠다는 요지의 연설을 남겼다. 하지만 세간의 관심은 이번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에 쏠려있는 듯. 실제로 JTBC는 아예 대놓고 손학규 징크스를 운운하며 이번엔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기도 했다.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대안신당 세 정당의 통합정당인 민생당이 2020년 2월 17일 출범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합의 막판(창당 예정일)에 손학규 측]의 단순 호남 3당 합당은 의미가 없다며 중도의 빅텐트 통합을 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합의가 결렬되거나, 바른미래당 일부 통합 찬성파가 탈당하여 민생당에 합류할 것으로 보인다.

손학규의 퇴진요구 수용으로 통합은 이루어 질 것으로 보이나, 손학규가 통합 거부 선언을 한 다음날, 신천지 대구교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 사건을 시작으로 대경권을 중심으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확산되었다.

2021년 11월 30일 여의도 한 카페에서 또대선 출마선언을 하였지만...국민의힘 이준석 당대표가 국민의힘 대선 후보 윤석열과의 갈등으로 공식일정을 전면 취소하고 칩거에 들어가면서 이또한 반쯤 묻히게 되었다. 게다가 코로나19 바이러스 오미크론 변이 확진자까지 나오게 되어 완벽하게 묻혔다.

물론 징크스라는 것이 대개 그렇듯 몇몇 경우는 보는 관점에 따라 부적절한 사례를 억지로 끼워맞추는 확증편향성이 있으니 그점을 감안해서 볼 필요가 있다.

북한 1차 핵실험이나 2016년까지의 사례는 그럴 듯하나, 이후의 사례는 타이밍이 문제가 아니라 손학규 본인이 그냥 쩌리 정치인으로 전락했기에 아무런 관심을 못 받는 것이다.

이 외에도 손학규가 보수정당을 탈당하고 민주당계 정당으로 옮긴 후 대선 후보 경선에 3회 참여했는데, 자신은 경선에서 탈락하고 경선에서 손학규를 이긴 후보는 본선에서 낙선하는 징크스가 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대통합민주신당 후보 정동영이 2위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민주통합당 후보 문재인이 2위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국민의당 후보 안철수가 3위

 

손학규계 

민주당(2008년) 시절에는 손학규계를 이끄는 당내 대주주 중 한 사람이었다. 훗날 국무총리가 된 이낙연도 손학규가 국민의당으로 입당하기 전까지는 손학규를 따르는 대표적인 손학규계로 분류되었다. 만덕산으로 은둔한 이후에도 손학규계는 건재하여, 20대 총선 직후까지만 해도 언론에서는 손학규계를 14명 정도로 꼽았다.

하지만 이후의 엇박자로 손학규를 따라 실제로 탈당한 현역 정치인은 이찬열 의원과 박우섭 인천 남구청장 단 두 명 뿐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당시 당내 결속을 위해 손학규계를 대폭 끌어안았고,결국 제19대 대통령 선거가 문재인의 승리로 끝나면서 사실상 손학규계는 와해되었다.

 

 

손학규 선거 이력 경력

1993

상반기 재보궐선거

경기 광명

41,683 (44.9%) 당선 (1위)

초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광명 을

31,544 (42.65%) 재선

 

1998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도지사

1,303,340 (45.69%) 낙선 (2위)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광명

65,887 (47.35%) 당선 (1위)

3선

 

2002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도지사

1,744,291 (58.37%) 초선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

31,530 (44.76%) 낙선 (2위)

 

2011

상반기 재보궐선거

경기 성남 분당 을 41,570 (51.00%)

당선 (1위)

4선

 

2014

상반기 재보궐선거

경기 수원 병

27,979 (45.04%)

낙선 (2위)

 

2020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758,778 (2.71%)

낙선 (14번)

 

 

손학규 저술 활동 책 저서

손학규와 찍새 딱새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끝나고 퇴임하면서 출간한 책.

대한민국 손학규를 발견하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발간한 책이다.

저녁이 있는 - 손학규의 민생경제론 : 2012 18 대통령 선거를 내놓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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