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관료, 정치인이다. 사상 첫 민선 3선 충청남도지사로, 한때 충남권의 맹주로 떠올랐던 인물이다.
심대평 나이 고향 학력 이력 프로필 (충청남도지사 출신)
심대평
沈大平 | Sim Dae-pyung
출생
1941년 4월 7일 (81세)
충청남도 공주군 반포면
본관
청송 심씨 안효공파 온양공파
재임기간
제24대 충청남도지사
1988년 5월 20일 ~ 1990년 12월 27일
제9대 행정조정실장
1990년 12월 28일 ~ 1992년 3월 30일
제32-34대 충청남도지사
1995년 7월 1일 ~ 2006년 3월 24일
배우자
안명옥
자녀
장남 심우정, 차남 심우현, 삼남 심우찬
학력
대전고등학교 (졸업 / 38회)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 / 학사)
국방대학교 (행정학 / 석사)
종교
천주교(세례명: 임마누엘)
약력
제24·32-34대 충청남도지사
제17대 국회의원(대전 서구 을)
제18대 국회의원(충남 공주시·연기군)
국민중심당 제17대 대통령 선거 후보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
청와대 행정수석비서관
국민중심당 대표
자유선진당 대표최고위원
건양대학교 교양학부 석좌교수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장
심대평 생애 학력 이력
대전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관료로 근무하였다. 박정희 정부 때는 국무조정실에서 근무하였다. 전두환 정부 때는 의정부시장, 대전시장 등을 역임하였다. 노태우 정부 때는 관선 충청남도지사(1988~1990),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행정수석비서관을 역임하였다.
심대평 정치 경력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충청남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충청남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충청남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 지방선거에 출마했던 자유민주연합 후보 중에서 유일하게 당선되었다.
2006년 1월, 자유민주연합이 한나라당과의 합당을 꾀하자, 반발하는 이들과 함께 탈당하여 충청권을 기반으로 한 국민중심당을 창당하였다. 같은 해 11월 열린우리당 구논회 국회의원의 별세로 치러진 2007년 재보궐선거에서 국민중심당 후보로 대전광역시 서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한나라당 이재선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국민중심당 후보로 출마, 기호 5번을 배정받았으나, 그 해 11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무소속으로 대선 출마를 선언하자,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며 사퇴하였다. 2008년 2월, 이회창과 함께 자유선진당을 창당하고, 기존의 국민중심당을 흡수 통합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선진당 후보로 충청남도 공주시-연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2009년에 '충남지역 총리 지명설'을 두고서 이회창 총재와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결국 8월 30일에 이회창 총재의 독선적인 당 운영을 비판하며 국민중심연합을 창당하였으며 2011년 복당하였다. 이후 당 대표직에 올랐으나, 여전히 이회창 전 총재와의 불화가 지속되었다.
2011년 한미 FTA 비준안 표결에서는 보수정당 정치인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반대표를 행사하였다.
이후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침몰 직전의 자유선진당의 총선을 지휘하였으나, 자유선진당은 비례 득표율 3%를 간신히 넘기며 비례대표 2명, 지역구 3명만 당선되어, 원내 정당을 유지하는 것에 감사할 처지로 몰렸다. 본인도 직접 지역구 후보로 세종특별자치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통합당 이해찬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미 선거 초반부터 양자 대결에서 밀리던 상황이었다.
같은 해 정계은퇴를 선언했으며, 자유선진당의 후신 선진통일당이 새누리당에 흡수되자 새누리당 소속으로 있으면서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였다.
박근혜 정부가 집권하자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장(장관급), 건양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2017년 지방자치발전위원장 퇴임 이후 공직에서 물러나며 은퇴했다.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충청남도지사 후보로 출마하는 국민의힘 김태흠 후보의 후원회장을 맡는다.
심대평 여담 일화
관선과 민선 양쪽으로 충청남도지사를 역임했는 특이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같은 광역자치단체장 자리를 관선과 민선으로 모두 역임해본 사례로는 고건 전 서울특별시장, 안상영 전 부산광역시장, 강운태 전 광주광역시장, 김혁규 전 경상남도지사가 있다.
장남 심우정은 검사(연수원 26기)이며 현재는 검사장(인천지방검찰청 검사장)을 지내고 있고, 삼남 심우찬은 육군사관학교 52기 수료 후 사법시험(제50회 - 연수원 40기)에 합격하여 2015년 12월 대통령비서실 행정관을 지냈다.
같은 충청권의 맹주였던 이회창과 이인제와의 관계는 좋지 못하다. 당장 이회창의 당 운영에 반발해서 창당한 정당이 국민중심연합이며, 재합당 후에도 계파 갈등이 지속되었다. 결국 계파 갈등은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대로 터지며 이회창은 탈당하고 만다. 이인제와도 역시 에피소드가 있는데, 2005년 자민련을 탈당하고 만든 국민중심당에 합당 선도합의로 이인제를 포함한 3명의 의원이 중심당에 합류했다. 그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심대평이 대선 후보가 되자 이인제는 탈당하고 민주당에 복당한다. 이렇듯 김종필의 은퇴 후 떠오른 충청권의 맹주들의 사이는 좋지 못했다.
2019년 9월 충남 논산의 지방지인 놀뫼신문과의 인터뷰를 가졌다. 본인이 도지사 시절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계룡시 신설에 대해 여전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도지사 자리에서 물러난 지 어느덧 10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도정에 관련한 주제에 대해서는 혜안이 밝은 모습을 보였다. 인터뷰에서 볼 수 있듯이 팔순이 거의 다 된 고령임에도 상당히 달변가다.
2020년 국회방송 오유경의 책방 7회에 출연하며 8년만에 국회에 방문했는데, 인터뷰에서 정치인으로는 큰 성과를 못 거두었다며 본인은 공직자로 불리길 희망한다고 한다. 그는 정치인이 아닌 공직자로서의 모습과 능력은 상당히 우수했다.
초대 민선 충남도지사, 3선 도지사라는 정치적 무게감에 비해서 사실 중앙 정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사실 도지사로서의 심대평은 상당히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경실련 등의 민선자치 도정평가에서 항상 1위를 도맡아 했으며, 천안/아산/당진의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제조업 기업을 대거 유치했다. 그 외에도 '백제문화권' 개발이나 생계보호특별조례, 계룡시 신설 등의 업적을 남겼다.
행정가로서는 오늘날 현대 충남 행정의 밑그림을 닦았다고 할 만큼 매우 유능했던 셈이나, 그 업적을 홍보하여 자신의 브랜드로 삼기엔 소속 정당 자민련의 늙은 이미지가 큰 걸림돌이 되었다. 개인 역시도 도정의 성공을 부각해 전국 정치인으로 발돋움 하기보다는, 지역 할거 정치인으로 안주하였기에 구태한 지역주의 정치가의 이미지를 결국 벗지 못했다. 자신의 지역 내 패권을 위해 두 차례나 탈당해 독자 창당 노선을 밟은 것 역시 비판을 받았다.
자유선진당 시절 중앙 정치의 이합집산에 개입되었던 대표적 두 장면이 있다.
2009년 당시 이명박 정부에서 이회창 총재를 회유하기 위해 심대평 총리 카드를 던졌으나, 이회창 총재가 먼저 거부한 장면이다. 물론 마치 심대평 대표를 가로막기 위한 모양새처럼 되어 양자의 갈등이 심해지는 원인이 되었지만, 이명박 정부는 세종시 행정도시 이전을 막기 위한 '방탄' 국무총리, 즉 현실의 정운찬 총리의 역할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 가능성은 현실화 되기 불가능에 가까웠다. 설령 심대평 지사가 세종시 수정안을 받아들이며 총리가 되었다고 한들, 정운찬 총리처럼 지역의 지지만 잃고 정계에서 더 일찍 퇴장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2012년의 경우엔 자신이 직접 몸값 올리기에 나섰던 경우였다. 당시 박근혜 비대위원장에게 숙청당한 새누리당 비박 인사들의 불만이 높았는데, 그 맹주 격인 김무성 전 원내대표에게 직접 신당 창당을 제의한 것이다. 그동안 박세일의 국민생각이나, 정운찬 등에게 동업제의를 받았을 때도 반신반의하던 김무성이었지만 이번 경우에만큼은 선진당의 지역기반이나 제3당으로서의 의석수, 선거 지휘의 전권을 넘기겠다는 조건에 반색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김무성 본인이 탈당 기자회견 직전에 생각을 철회함으로서 현실화되지 못했다. 72시간의 법칙 그리고 심대평과 자유선진당은 예정된 몰락의 길로 가게 되었다. 설령 현실화가 되었다고 해도, 자유선진당에겐 실제 19대 총선 결과보다는 무조건 나았겠지만, 비박계의 입장에선 보수 분열이라는 책임을 떠안게 되는 치명적인 제안이었다. 더욱이 심대평 의원 개인의 운명만을 따지면, 세종시의 경우 온건 보수세력이 추가로 결집했다고 한들 이해찬을 이기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모바일 홈페이지가 아직 남아있다. 19대 총선을 준비하며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심대평 선거 이력
1995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충청남도지사
616,006 (67.88%) 당선 (1위)
초선
1998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충청남도지사
656,795 (84.63%) 당선 (1위)
재선
2002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충청남도지사
508,796 (66.96%) 당선 (1위)
3선
2007
상반기 재보궐선거
대전 서 을
24,573 (60.30%) 당선 (1위)
초선
2007
제17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후보 사퇴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공주·연기
47,937 (63.32%) 당선 (1위)
재선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세종
15,679 (33.82%) 낙선 (2위)
현재 당적은 국민의힘이지만 정계 은퇴 이전 역대 선거에는 충청권 보수정당 소속으로만 출마했고 선거 과정에서 보수정당이 아니라 민주당계 정당과만 두 번 선거 연대를 한 경력이 있다. 당선될 때는 늘 60% 이상의 압도적인 지지율을 얻은 것이 포인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