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정치인. 한때 양김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이끌었으나 중도통합론을 주장해서 선명야당론을 주장한 양김에 밀려 정치에서 은퇴하였다.
이철승 고향 학력 이력 사망 나이 부인 자녀 프로필 (제9대 전반기 국회부의장)
이철승
李哲承 | Yi Cheol-seung
출생
1922년 5월 15일
경기도 경성부 종로방 수표동
(現 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동)
사망
2016년 2월 27일 (향년 93세)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본관
전의 이씨
호
소석(素石)
재임기간
제9대 전반기 국회부의장
1973년 3월 12일 ~ 1976년 3월 11일
부모
아버지 이석규, 어머니 청주 한씨
형제자매
2남 5녀 중 장남
배우자
김창희
자녀
아들 이동우, 딸 이양희
친인척
숙부 이석주, 사위 김택기
사촌동생 이헌승
친손녀 이은선, 이희선
이학렬(친손자)
김남선(외손자)
김두연(외손녀)
학력
전주제2공립보통학교 (졸업)
전주고등보통학교 (졸업)
보성전문학교 (법과 / 수료)
고려대학교 정법대학 (정치학 / 학사)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 석사)
종교
유교 (성리학) → 불교
경력
제3대 민의원의원(전북 전주시)
제4·5대 민의원의원(전북 전주시 을)
대한체육회장
제8대 국회의원(전북 전주시)
제9·10·12대 국회의원(전북 전주시·완주군)
신민당 대표최고위원
자유전선 고문
자유민주연합 특임행정위원
대한민국 헌정회 명예회장
이철승 생애 고향 학력 이력
1922년 경기도 경성부 종로방 수표동에서 이석규(李錫圭)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본가가 있는 전주에서 자랐다.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재학 당시 경성제국대학 이혁기등과 함께 일본 제국 학병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럼에도 결국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하였다.
8.15 광복 이후, 극우진영에서 학생 운동을 하며, 반탁 운동의 '행동대장'격으로 활동했다. 반탁학련 활동시기 좌익과 중도파를 대상으로 한 '테러'에 나서면서 정치깡패로 불렸다. 이 때 김성수, 유진산과 가까운 관계였다.
광복 직후 당시 극우파로 정치를 시작했음에도 이승만과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에 대해서만큼은 '청산해야 한다'는 확고한 입장을 가졌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이 때문에 친일경찰 세력이 반민특위 요인 암살음모를 계획했을 때, 이철승도 친일경찰세력으로부터 '암살대상 가운데 한 명'으로 지목될 정도였다.) 이를 계기로 그는 이승만과 결별한다.
1948년 김구가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방북하려고 할 때에는 경교장 앞에 누워서 못 가도록 막으면서까지 반대했다.
6.25 전쟁 중에는 학생들을 모아 학도의용군을 편성, 낙동강전선과 대구에서 참전하였으며, 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 비리, 횡령의 실상을 국회에 폭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편, 전쟁 초기 3개월간 인민군 점령지인 서울에 있던 그의 아버지가 퇴각하던 인민군들에게 살해당하는 비보를 접하기도 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 후보로 전라북도 전주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신성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전라북도 전주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박정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전주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이승만 정부의 독재에 반대하였다. 사사오입 개헌 파동 때는 가결을 선포한 자유당 소속의 최순주 국회부의장의 멱살을 잡았다. 이후 민주당에 입당하여 장면 등과 함께 신파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1958년~1959년 터진 자유당에서 개악한 '국가보안법 파동' 당시 필사적으로 반대]하기도 하였다.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당 소속으로 전주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다만 고대생 습격 사건 때는 민주당 소속이면서도 친 자유당 계열 정치깡패인 임화수 등과 친하다는 이유로 후배들에게 타도 대상이 되었다. 1961년에는 대한체육회 회장도 겸직하였다.
1960년 5월 말 내각 책임제 개헌을 할 당시에 "정파 싸움만 계속 되어 야기되는 혼란은 어떻게 할 거냐. 군소정당이 난립해 오는 혼란을 봐라. 프랑스 제 4공화국이 망한 것도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것도 모두 정파싸움에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여러 언론이 자신을 민주 반역자라고 매도하자 "너희가 날 민주 반역자라 그러는데 생, 사육신도 그 당시는 역적이었다. 1년 뒤에 날 반역자라 매도한 사람은 자신이 반역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5.16 군사정변 직전 외국에 가 있다가 정치규제를 겪고 외국에서 민권 운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귀국하여 1970년 신민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출마했다.] 신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1차 투표에서 김영삼, 김대중에 이어서 낮은 득표로 3위를 차지하였다. 이후 김대중과 협상하여 당총재 선거에서 자신을 밀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자신의 계보 표를 밀어주어 김대중이 2차 투표에서 역전 당선되는게 기여하였다.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주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김용진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그 해 있던 진산 파동 과정에서 범 진산계에서 갈라져 나와 독자 계보를 형성하였다. 10월 유신 직후 치러진 1973년의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주시-완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유기정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제9대 국회가 개원하자 야당 몫의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다. 이 때 여당 몫의 국회부의장인 김진만과는 한 때 사돈 관계를 유지하였다.
1974년 8월 신민당 총재 선출 전당대회에 출마하였으나 김영삼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비주류로서 정일형, 정해영, 신도환, 고흥문 등과 함께 김영삼의 당 운영을 독선적이라고 비판하는 한편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의 은밀한 지원을 받고 김태촌의 조직폭력배를 동원하여 1976년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을 사주했다. 결국 그 해 9월 치러진 신민당 수습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을 꺾고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11월 사무총장에 이기택, 원내총무에 송원영, 정책위의장에 박일을 임명하는 당직 개편을 실시하였다.
이후 박정희 유신정권에 대한 온건한 노선의 협조적인 태도로서 참여 하의 개혁, 중도통합론]을 주장하면서 군사독재정권과의 투쟁을 포기하고, 정권과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김영삼을 위시한 대여강경노선 선명야당파들과 재야 인사들에게 사쿠라라고 비판받았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를 진두지휘하면서 자신도 전주시-완주군 선거구에서 당선되었다. 그러나 1979년 3월 백두진 국회의장 선출 파동에서 김영삼의 강경 여론이 우세하자 지도력이 흔들렸다. 결국 1979년 5월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에 밀려 총재에 선출되지 못하였다.
1980년 5.17 내란 이후 정치활동 규제를 당하여 전라북도 진안군에 칩거하였다. 1984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된 후 신한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주시-완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민우 구상에 동조하여 내각제 개헌론을 주장하고 양김의 '선명야당' 노선에 반기를 들었다가 통일민주당 분당과 6월 항쟁 이후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었으며,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주시 을 지역구(현재의 완산구)에 출마하였다가 평화민주당 손주항 후보에 패배하여 낙선하고 결국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정계에서 은퇴한 이후로는 민주당계 정당에 오랜기간 몸에 담았던 경력과는 다르게 자유민주비상국민회의 단체 의장 등 보수쪽 활동을 많이 했다.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유족들에게 막말을 하고 야인시대 방영 당시 정치깡패 임화수를 옹호해서 물의를 빚었다. 임화수의 아들과 같이 고소한다고 나서다가 되려 임화수가 저지른 더러운 짓이 더 드러나면서 데꿀멍했다. 그럼에도 임화수가 반공영웅이라고 죽을 때까지 옹호했다. 또한 서울평화상 시상을 담당하는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장 자리에 1996년에 취임했고 사망할 때까지 약 20년간 역임했다.
2016년 2월 27일 향년 93세로 사망했다. 역시 "양김"에게 밀린 영남 출신의 이기택 전 의원과 7일 간격으로 사망.
이철승 여담 일화
성우 김태훈이 이철승 전문 배우이다. 다만 야인시대에서는 원종선이, 제5공화국에서는 송석호가 맡았다. 영화 킹메이커에서는 '이한상'이라는 가명으로 등장하며, 배우 이해영이 연기했다.
이양희 성균관대학교 아동복지학과 교수(현 국민의힘 중앙윤리위원장)의 아버지다.
나중에는 대통령 자리까지 오른 양김씨에 밀렸지만 양김씨가 아직 정치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인 1940년대 해방정국 때부터 반탁운동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이후에도 6.25 전쟁에 직접 참전하고, 1980년대까지 굵직한 역사적인 사건들에 주요인물로서 계속 연관되어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후 2016년까지 살아 있다가 사망했기 때문에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 중 한명으로 볼 수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이런 인물들이 몇명 있기는 하지만 이철승의 경우처럼 20대 때부터 이름을 알린 경우는 드물다. 비슷하게 현대사의 산증인 소리를 듣는 김종필만 해도 5.16 이전까지는 크게 인지도가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어찌보면 1884년 갑신정변 때부터 활동해서 1940년대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미군정 고문 역할을 하고 6.25 전쟁 발발까지 보고 죽은 서재필과도 비슷한 부분. 만일 이철승이 정치적 행보가 더 나았더라면 더 많은 선수를 올렸을 수도 있지만 의미 없는 가정이다.
이철승 선거 이력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전북 1
8,126 (24.33%) 낙선 (2위)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1
4,630 (13.02%) 낙선 (3위)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1
21,229 (53.89%) 당선 (1위)
초선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2
20,028 (63.75%) 당선 (1위)
재선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2
19,598 (62.63%) 당선 (1위)
3선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1
64,496 (71.98%) 당선 (1위)
4선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1
73,803 (49.60%) 당선 (1위)
5선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1
100,404 (52.01%) 당선 (1위)
6선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1
125,023 (48.19%) 당선 (1위)
7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전주 을
9,918 (9.73%) 낙선 (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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