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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야기/정치 / / 2022. 5. 28. 16:55

노건평 나이 고향 학력 이력 논란 프로필(노무현 친형)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의 작은형,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에서는 언론 등에서 '봉하대군'으로 불렸다.

 

노건평 나이 고향 학력 이력 논란 프로필(노무현 친형)

 

노건영 프로필
노건영

 

노건평

盧健平

 

본관

광주 노씨

 

출생

1942년 1월 30일 (80세)

경상남도 김해군 생림면 사촌리

 

가족

아버지 노판석

형 노영현

누나 노영옥

남동생 노무현

배우자: 민미영(삼혼)

자녀: 1남 3녀

 

학력

경남고등학교 (졸업)

 

병역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전역

 

경력

前 마산세무서 행정주사보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가족 프로필은 아래 글을 확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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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건평 생애 고향 학력 이력

1942년 1월 30일 경상남도 김해군(현 김해시) 생림면 사촌리에서 아버지 노판석(盧判石)과 어머니 성산 이씨 이순례(李順禮)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친누나 1명이 있었지만, 부모님이 재혼한 사이라 이복누나 1명과 이부누나 1명이 더 있었다. 즉 누나가 3명.

1973년 일찍 세상을 뜬 큰형 노영현(盧英鉉)을 대신하여 노무현의 뒷바라지를 해줘서 노무현에게 있어서 노건평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고 저서에서 언급했다고 잘못 알려져 있고, 대통령이 된 이후에서야 갑자기 여러 구설수에 휘말려 오히려 동생의 발목을 잡아버렸다고 아는 이들이 많이 있으나, 노건평이 동생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 이후론 여러 구설수에 휘말려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아버린 것만 명백한 사실이고, 노무현의 저서에 자신을 뒷바라지 해주고 응원해준 아버지 같은 존재라고 언급되었다는 설은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노무현을 이끌어준 아버지 같던 형은 큰형 노영현(盧英鉉)이라고 되어 있다. 단지 큰형은 40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는 바람에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막내동생 노무현이 법조인이나 정치인 생활을 하기 한참 전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노무현이 사회활동을 하며 처음 알게 된 수많은 동지와 지인들은 대부분 큰형의 존재를 모른 채, 생존해 있는 유일한 친형 노건평만을 계속 주목하게 되어 오해가 생긴 것이다.

행정안전부 산하 국가기록원에서 낸 보도자료에서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아버지 대신 집안의 기둥 역할을 큰형 노영현(盧英鉉)이 대신했으며 든든한 정신적 지주이자 우상이었다고 나와 있으나 그 어떤 공식자료에도 노무현을 뒷바라지 해주고 아버지같은 존재라는 노건평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즉, 막내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자 그동안 집안의 기둥 역할을 하고 동생들을 뒷바라지 해준 큰 형인 노영현(盧英鉉)이 죽고 없자 둘째 형인 노건평(盧健平)이 친형의 공적을 가로챈 것이나 다름없다.

경상남도 최고의 명문고등학교인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군대에 입대해 병장으로 만기전역한 뒤 바로 5급 공무원이 되었다. 이후 약 10년간 세무서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세무공무원 교육시험에서 전국 1등을 차지한 적도 있다고 한다. 1977년, 마산세무서 행정주사보로 재직 중, 수뢰 혐의가 드러나, 1978년 6월에 국세청에서 징계파면되었다. 즉 노무현 대통령 당선 25년 전부터 싹수가 노란 사람이었다. 7-80년대는 세무공무원을 비롯하여 공무원들이 암암리에 적당히 비리를 해먹고 서로들 눈 감아주는 시대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징계 파면을 당할 정도라는 것은 뒤탈이 날 정도로 사정 봐주지 않고 해먹었다는 이야기이다.

 

노건평 언론노건평 수사
노건평 수사

 

노무현 대통령 임기 말인 2006~2008년쯤부터 박연차 게이트에 얽혀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박연차와 얽힌 세종캐피탈이라는 회사로부터 30여억 원을 받고 농협이 세종증권을 인수할 수 있게끔(현 NH농협증권) 청탁을 받은 혐의가 드러나 최종적으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과 2심 판결문에서 판사는 노건평에게 "평범한 세무공무원이 동생의 대통령 당선 이후로 로열패밀리가 됐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에는 애초 관심이 없었다."며 강하게 질타했다. 그리고 이어서 "'내가 키웠다’고 자랑하던 동생이 자살했고, 이제는 해가 떨어지면 동네 어귀에서 술을 마시며 신세 한탄을 하는 초라한 시골 늙은이의 외양을 하고 있다"며 폭풍디스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감형을 해주면서도 "동생을 죽게 만든 못난 형으로 전락한 노씨를 감형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끝까지 폭풍디스를 가했다.

징역 생활을 하던 중 2009년에 남동생 노무현이 자살로 인해 사망하자 노무현의 상주 노릇을 해야 돼서 임시로 가석방됐고, 다시 징역 생활을 하다가 2010년에 광복절 특사로 사면됐다.

 

2015년에는 경남기업 회장이던 성완종과 연루된 성완종 자살 사건으로 인해 성완종 리스트가 대두되면서 다시 한번 이름이 오르내렸다. 성완종의 청탁을 받고, 대통령 특사를 알선한 대가로 금품 5억 원을 수수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공소시효가 지나 법적으로 처벌받지는 않았다.

동생을 대신해 불의에 나선 일화의 주인공은 노무현의 둘째 형 노건평(盧建平)이 아닌 큰 형 노영현(盧英鉉)이다.  애초에 노건평은 1942년생, 노무현은 1946년생으로 노무현이 중학교 입학한 해는 1959년으로 이때 노건평은 18살의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아무런 직위도 배경도 없는 고등학교 2학년이 동생의 입학을 거부한 중학교를 찾아가 교장의 멱살을 잡아 협박을 하면서 니 잘못을 인정하고 우리 무현이 입학시켜 달라고 반말로 강압적인 주장을 했다면 노무현의 중학교 입학은 놔두고서라도 노건평이 다니던 경남고등학교에서 노건평을 정학 혹은 퇴학의 중징계를 내렸을 것이다.

 

 

또한 위에 언급된 내용도 중앙일보 기사와 비교하면 사실과 다르다. 당시 노무현은 진영중학교에 시험에 합격하여 입학 자격을 얻었지만 입학금이 없어서 그러다 '입학 때는 책값만 내고 입학금은 봄 농사를 지어 7월까지 갚는다'는 조건으로 입학 허가를 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노무현이 어머니와 진영중학교를 찾아가 교감을 만나 여름에 복숭아 농사를 지어 입학금을 내겠다고 호소했으나 교감은 안된다고 거절했는데 거절의 이유는 큰아들(노영현)이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취직을 하지않고 사법시험에만 매달려 부모를 봉양하지 않는 백수건달이니 노무현도 공부시킬 필요없이 농업에 종사하라고 한 것이지 노무현 학생이 집안이 가난해서 이 학교에 못 다닌다고 온갖 조롱을 일삼았다는 내용은 없다. 또한 노무현이 입학원서를 찢고 이 학교에 안녀도 좋다며 나간 것이지 이딴 더러운 학교 안다닌다는 말을 했다는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 자기 앞에서 원서를 찢고 나가는 노무현에게 교감이 '저런 놈 공부시켜 봐야 깡패밖에 안된다'고 말했다는 인신공격성 발언이 존재하지만 이 발언은 노무현의 원서를 찢고 나간 이후에 한 발언으로 시대적 배경 상 아버지 뻘인 교감 앞에서 원서를 찢는 것은 어른에 대한 노무현의 불경한 태도가 맞다. 그전에 교감이 한 발언은 이미 대학을 나온 큰 형도 백수로 가정을 봉양하지 않는데 동생을 공부시켜서 뭐하냐는 것이었다. 당시 시대상으로 대학을 나오는 사람이 흔치않고 농사에 전념하던 시대이므로 장남도 아닌 막내인 노무현을 공부시키지 말라는 의도지 가난하다고 조롱하고 멸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노무현과 그 어머니가 찾아가 만난 사람은 진영중학교 교감이지 교장이 아니다.

 

또한 근본적으로 이 소식을 듣고 진영중학교에 찾아가 항의한 사람은 큰 형 노영현(盧英鉉)이다. 노영현도 진영중학교에 찾아가 교감을 만나 멱살을 잡고 항의했다는 기록이 없으며 항의 시에는 교장을 만나 입학에 문제가 없는데 자신이 취직 및 사법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내 동생인 노무현의 입학 거절을 하는 것은 부당함을 피력했으며 또한 동생 노무현이 입학원서를 찢은 것에 대해서도 동생이 감정이 격해 우발적으로 어른의 말에 무례한 짓을 했다며 대신 사과하여 노무현이 진영중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노무현에게도 네가 이버지 뻘인 교감 선생님과 어머니 앞에서 입학원서를 찢은 행위는 어른에 대한 불경이라고 하며 야단을 쳤고 노무현도 형의 꾸지람에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고 진영중학교에 입학한 이후에 어머니와 함께 교감 선생님을 찾아가 사과를 했다고 한다.

노영현은 1973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 1932년생으로 노무현이 부산상고에 진학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법관의 길로 가게 뒷바라지해준 인물로 평가받는다. 노무현은 1965년부터 사법시험에 도전하기 위해 공부했고, 1975년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므로 실제로 노무현을 사법시험에 합격할 수 있게 기틀을 잡고 뒷바라지해 준 것은 노무현의 큰 형 노영현(盧英鉉)이지 둘째 형 노건평(盧建平)이 아니다. 노건평은 노무현의 앞날에 아무런 도움을 준 적이 없다. 그런데도 노건평이 노무현을 키웠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이 나돌게 된 것은 큰 형 노영현이 죽고없자 노건평이 사석에서 자신이 노무현을 키웠노라며 온갖 공치사를 자신에게 갖다붙이며 자신의 일화인 떠들었기 때문이다. 노무현도 동생 입장에서 둘째 형을 나무랄 수 없었기에 그냥 둔 것이 훗날에 벌어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이라 비극의 발단이 되었다. 괜히 노무현 전 대통령 생전부터 노건평에게 여야를 막론하고 봉하대군이라는 멸시어린 별명이 붙은 것이 아니다.

 

 

노건평 사건 사고

박연차 게이트

본인과 동생인 노무현 前 대통령이 연루된 정치적 사건이다. 어찌 보면 박연차 게이트는 노무현 前 대통령의 자살로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으니 노건평의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상득과도 일치한다.

 

노건평 사건 사고
노건평 사건 사고

 

성완종 특사

성완종이 2007년 11월 23일 행담도 비리 관련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는다. 이후 12월 12일에 특사 검토 대상자로 성완종이 추천되고, 이에 대해 법무부는 반대 의견을 제시한다. 이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고, 12월 28일 특사 명단 74명이 선정되는데, 이때 성완종은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노무현, 이명박이 만찬 회동을 하고, 12월 30일 이명박 대통력인수위원회에서 성완종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하게 되고, 12월 31일에 특사 명단에 성완종이 포함되면서 75명의 특사 명단이 확정된다. 이 과정에서 성완종 특사에 대한 윗선의 개입이 있다는 의혹이 생기는데, 당시 노건평은 이에 대한 답을 회피했고, 이명박의 친형인 이상득도 "나는 개입하지 않았다."며 회피했다.

 

 

노무현 서거 이후

2017년 노무현 전 대통령 8주기 추도식에 참석하고, 그해 8월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 음성 인터뷰를 진행한 이후로는 별다른 소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본인 입으로 카메라에 얼굴을 내밀기를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현재 노무현의 형제들 중 누나와 함께 살아 있는 단 두 명의 인물 중 하나이다.

 

노건평 노무현 추도식
노건평 노무현 추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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