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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야기/정치 / / 2022. 8. 31. 06:53

미하일 고르바초프 사망 나이 업적 학력 이력 프로필 (소련 초대 대통령)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로 소련 공산당 제6대 서기장, 소비에트 연방의 마지막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제11대 최고회의 주석이자 초대 대통령.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의 최고 권력자로 재임하면서 조지 H. W. 부시 대통령과 길고 길던 냉전을 종식시킨 인물이자 고르비(Gorbi)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소련 정치 및 경제체제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혁신(글라스노스트(개방)·페레스트로이카(개혁))을 시도했다. 소련을 살리려고 진정한 의미에서 노력한 마지막 인물로써 노멘클라투라로 불리는 기득권층의 반발(대표적으로 8월 쿠데타)과 보리스 옐친 등 신진 세력의 대두를 적절히 통제하지 못해 본의 아니게 소련을 붕괴의 길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구권을 포함한 자유 진영에서는 냉전을 종식시킨 그를 높이 평가하지만, 정작 러시아에서는 '초강대국 소련을 멸망시킨 매국노'라는 부정적 평가가 많다. 대한민국에서는 블라디미르 레닌, 이오시프 스탈린, 니키타 흐루쇼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과 더불어 인지도가 높은 소련 인물 중 하나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사망 나이 업적 학력 이력 프로필 (소련 초대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 프로필
미하일 고르바초프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Горбачёв

Mikhail Sergeyevich Gorbachev

 

출생

1931년 3월 2일

소련 러시아 SFSR 북캅카스 스타브로폴 지방 프리볼노예

(現 러시아 북캅카스 연방관구 스타브로폴 지방 프리볼노예)

 

사망

2022년 8월 30일 (향년 91세)

러시아 모스크바 쿤세보 구 티모셴코 중앙 임상 병원

 

재임기간

제6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1985년 3월 11일 ~ 1991년 8월 24일

제11대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1988년 10월 1일 ~ 1989년 5월 25일

초대 소련 최고회의 주석

1989년 5월 25일 ~ 1990년 3월 15일

초대 대통령

1990년 3월 15일 ~ 1991년 12월 25일

 

부모

아버지 세르게이 안드레예비치 고르바초프

어머니 마리야 판텔레예브나 고르바초바

 

배우자

라이사 막시모브나 고르바초바(1953–1999, 사별)

 

자녀

딸 이리나 미하일로브나 비르간스카야

 

학력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법학 / 학사)

 

종교

무종교 (사실상 러시아 정교회)

 

신체

175cm

 

 


하나의 완벽한 공산주의 모델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 한 국가의 장래와 그 체제는 그 나라 국민들만이 정할 수 있다. 어느 나라도 타국의 국내 상황에 간섭하거나 압력을 가해서는 안 된다.
브레즈네프 독트린 폐기를 선언하며.

 

“농업 상황이 처참한 지경입니다. 1917년부터 말이지요.”
체르넨코 정권 시기 농업부 장관 재임 도중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과의 회담에서.

 

고르바초프 생애 고향 학력 이력

어린 시절 및 출세 가도

남러시아 캅카스 인근의 스타브로폴 프리볼노예에서 농부였던 세르게이 안드레예비치 고르바초프와 마리야 판텔레예브나 고르바초바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이곳은 러시아에 속해 있지만 여러 인종이 모여 살던 곳이었으며, 그의 외가는 우크라이나계 카자크와 러시아인의 혼혈 집안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역사상 최초로 러시아 혁명 이후에 태어난 서기장이다. 바꿔 말하면 처음부터 소련인이었다는 것이다.

 

고르바초프 이력고르바초프 정치 활동

 

공산국가에서 중요시되는 출신 성분은 농민으로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집단농장에서 일을 하는 농부였고 그도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도와 콤바인을 모는 등 농장에서 일을 하였다.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해서 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일도 열심히 했고, 공부도 잘한데다가 출신 성분도 우수했기 때문에 최고 명문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법학부에 진학할 수 있었고, 1955년 법학 학위를 받는다. 재학 시절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고, 이후 고향인 스타브로폴에서 관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중앙으로 진출했고, 중앙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안드로포프 같은 사람들 눈에 띄어 초고속으로 출세했다. 사실 고르바초프는 당대의 러시아인 공산당 당원치곤 술을 멀리하고 아첨을 할 줄 몰랐다. 이 점은 당대의 소비에트 연방에서 흔했던 술고래 관료들을 몹시 한심하게 생각한 안드로포프가 주목하면서 오히려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고, 하루에 10시간 정도의 일은 전혀 불평 없이 해내던 근면한 근무 자세도 플러스가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농업문제에 대해서 브레즈네프나 코시긴에게 직언하는 등 강단이 있는 간부로 여겨졌고, 이 때문에 소련 공산당 내부의 지지를 얻어 정치국 후보위원을 거쳐 정치국 위원에 선출되었다. 1980년대에 소련 공산당 정치국에서 최연소 정치국원이었으며, 서기국의 책임자가 되었다. 브레즈네프도 그를 상당히 높이 평가하여 바로 정치국 위원 자리를 주려고 했고 안드로포프도 그를 아꼈다. 반면 체르넨코는 고르바초프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안드로포프는 고르바초프가 자신의 후임자가 되길 바랬으나 그가 너무 일찍 사망하면서 권력은 체르넨코가 승계한다. 고르바초프를 좋아하지 않았던 체르넨코는 고르바초프는 농업서기인데 그가 서기국을 책임지면 서기국이 농업국이 될 수 있다면서 그를 해임하려고 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에게 우호적이었고, 그를 서기장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던 우스티노프가 고르바초프는 그런 오류를 범한 적이 없다고 지지하였다. 결국 체르넨코도 얼마 못 가 사망하자 정치적 안정을 위해 오랫동안 집권할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했던 정치국 안에서 가장 젊은 그가 떠오르게 되었다. 당시에 그는 기대를 한몸에 모았다.

 

집권

앞서 보듯 그가 서기장이 되기 전에 소련은 세 명의 서기장이 1년마다 한 명씩 노환으로 사망하는 혼란기에 접어들어 있었는데, 때문에 당시 서기장 후보 중 가장 젊었던 그가 고작 54세의 나이로 서기장이 된다.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기에 시작된 소련의 개혁/개방 운동이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체제에 들어서 반동, 정체되다가 그의 시대에 다시 활성화되고 정점을 맞은 것으로 평가되곤 한다.

 

고르바초프 개혁

 

개혁정책

소련 공산당 정치국에서 농업식량 담당 서기로 있다가 1985년에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되었다.

취임하면서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를 외치면서 당시 침체에 빠져 있던 소련에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했다. 그야말로 임기 매년을 뉴스와 역사의 소용돌이에 빠트렸던 인물이다. 타임지 선정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말이다.

대외적으로는 사상 최초로 서방 세계와의 군비 축소와 평화 무드를 만드는 업적이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며, 무엇보다도 냉전을 종식시켰다. 소련 경제의 발목을 잡던 아프가니스탄에서 1989년 철군했다. 1989년 5월에는 중국 베이징을 방문하여 덩샤오핑을 만나 1960년대 수정주의 논쟁 이후 격렬하게 대립하던 중국과 화해했다.

또 1989년에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하고 동·중부유럽 공산주의권 국가의 변화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10월 27일), 이는 곧바로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벳 혁명 등으로 이어지면서 대다수 중부유럽 국가들의 민주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같은 해 몰타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H. W. 부시와 정상회담을 가지면서 냉전의 공식적인 종결을 선언하였다. 한마디로 2차대전 후 40여년 이상 이어오던 공포, 대립의 시대에서 평화의 시대로의 물꼬를 튼 인물. 이러한 업적으로 서방 세계로부터 이 사람이 확실히 뭔가 다르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결국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고르바초프 개혁의 원본 노선은 공산당 일당 독재였던 소련과 중앙/동유럽을 사회민주주의 국가로 바꾸는 것이였다. 소련 공산당 역시 소련 사회민주당 비슷한 형식으로 바꾸려고 했고 순수 계획경제에서 혼합경제로 이전, 복지나 사회보장제도는 전과 비슷하게 하고 기업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 브레즈네프 이래로 만연했던 생산성 저하를 극복하려고 하였다. 즉, 그는 전반적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북유럽식 사민주의 체제로 전환하려고 했다.

 

 

고르바초프 개혁의 좌절과 소련의 해체

리더십의 문제

고르바초프의 리더십이 확고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고르바초프는 그의 능력과 성실성을 높이 평가한 안드로포프의 총애아래서 고속승진을 하여 당지도부에 진입한 신진인사였다. 1985년 고르바초프가 정권을 잡았을 때, 고르바초프는 덩샤오핑과는 달리 19명 정원의 제27기 당정치국의 거의 막내였다. 집단지도체제의 도구였던 당정지국에 여러모로 고르바초프보다 커리어가 높고 나이도 많은 17명의 장로가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고르바초프의 리더십이 먹힐 리가 없었다. 실제로 이후 고르바초프는 집단지도체제인 당정치국 제도의 문제점을 깨닫고 1980년대 말 대통령제를 신설해서 소련 대통령자리에 오르지만, 이 때는 오히려 소련공산당을 탈당한 보리스 옐친등이 조직적으로 그의 리더십에 반대하여 식물 대통령이 되고 만다.

 

조급함

당시 소련은 아프간 전쟁을 위해 매년 수백억 달러에 달하는 전비를 지출하고 있었던데다 1980년대 초에 비해 크게 떨어진 유가의 영향으로 재정적인 여유가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체르노빌 사태까지 터지는 바람에 급격한 개혁을 추진할 여건이 못 되었다. 그럼에도 고르바초프는 사회와 경제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급하게 개혁안을 실시해 소련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결과적으로 소련의 해체를 초래했다. 온건하고 점진적인 개혁안을 추진한 덩샤오핑의 개혁이 성공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중국이 30여년에 걸쳐 계획경제를 자본주의로 이행하고 아직까지도 토지나 부동산 같은 경우는 공산주의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고르바초프는 조급함에 경제를 더 망치고 자신의 정권 기반도 박살낸 것이다.

 

고르바초프 개혁 실패고르바초프 평가

 

경제 개혁의 실패

특히 내부적인 개혁의 실패가 가장 큰 문제였는데, 수십 년 동안 유지되어 온 계획경제와 과도한 국방비 지출에 따른 경제 침체를 탈피하고자 시장경제 도입을 추진했고, 1990년에는 공산당 일당 독재를 폐기하고 대통령에 취임하여 다당제와 의회 제도,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등 정치체제의 개혁도 시도하였다. 그러나 시장경제 도입은 침체돼 있던 경제를 오히려 더욱더 막장으로 몰아갔다. 수십 년간 공산당 지시로 결정되던 상품 가격을 갑자기 수요-공급에 따른 시장 자율 가격으로 대체하니 혼란이 닥쳤던 것. 원래 의도는 보조금을 줄이고 고급 상품을 사기 위해 줄을 서는 일을 줄이는 것이었지만, 막상 경영 자율화를 시켰더니 국영기업들이 국영상점에 싼값에 내놓아야 할 물건을 암시장에 몇배 이상의 가격으로 비싸게 팔면서 수십년간 (강제적으로) 안정화시켜 놓았던 물가가 오르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유통체계가 난잡해지면서 이전에 줄을 서지 않아도 될 상품을 (값싸게) 사기 위해서 줄을 서야 했으며 줄을 서지 않으려면 시장에서 바가지를 써서 상품을 구해야했다.

또한 물가상승분을 벌충하기 위해 돈을 찍어내기 시작했는데 통화량 증대로 은행에 예금은 넘쳐났고, 구매력도 크게 올랐지만 막상 돈이 넘쳐나는 상황 속에서도 생산 부문 투자는 그에 따라가지 못했고, 결국 줄은 더욱 길어지고 지하경제는 더욱 융성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처음부터 경제개혁이 효과가 없던 것은 아니라서 1988년에 일시적으로 경제성장률이 5.5%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구권 및 코메콘 붕괴로 1989년을 기점으로 다시 침체기로 접어들었고 1990년에 대조국전쟁 이래 최초로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다. 또한 암시장 환율은 급속히 올랐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날로 팽창하는 지하경제와 높아져 가는 물가상승률을 잡으려고 1991년 1월에 50루블과 100루블권 지폐를 무효화하는 방식의 화폐개혁을 시행했지만 이는 대놓고 독립 운동을 벌이던 발트 3국의 경제력을 마비시키는 것 외에는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뒤이은 1991년 8월 쿠데타로 고르바초프는 허수아비가 되고 각 산하 공화국들은 세금을 중앙정부로 납부하지 않고, 각 공화국별로 연계가 되었던 산업시설간의 연계도 끊어지기 시작하며 생필품 공급이 급속히 줄기 시작하며 소련의 경제는 마비되었다. 결과적으로 1991년의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11%를 기록하였으며 그렇게 허무하게 고르비의 임기를 끝내게 된다. 실제로 헝가리나 1920년대 소련 등 여러나라에서 시행하면서 물자부족을 해소하는 효과를 봤던 방식이었지만 지방 분권화와 경영 자율권 확보가 정권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중앙정부의 통제력 상실로 이어졌고 거기에다가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간에 정치적인 급변 상황까지 겹치며 경제파탄을 일으킨 것이었다. 거기에 소련 붕괴 이후로 극도로 벌어진 빈부 격차를 생각하면 경제개혁 실패의 후유증은 현재진행형이다.

 

 

정치 개혁의 실패

글라스노스트로 확대된 언론의 자유는 기존 소련 체제 내부의 문제점들을 좀더 투명하게 드러내서 해결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오히려 체제 개선보다는 그동안 억눌려 있던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창구로 기능하면서 소련 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특히 민주화와 선거를 일부 허용하더라도 독립 민족주의가 있는 공화국들에 대하여 광범위한 지방자치를 허용한 것은 실수였다. 실제로 고르바초프의 지방선거와 지방자치 허용 이후 발트 3국과 우크라이나 등의 공화국들에서는 독립파가 무더기로 공화국 최고회의에 진출하여 독립을 외치면서 소련 해체의 단초를 제공했고, 중앙아시아와 캅카스에서도 광범위한 자치권을 얻은 지역 정치인들의 갈등으로 소수민족 폭동 사건들이 발생했다. 이런 난맥상에 군부와 관료 등 보수파를 중심으로 한 기득권층이 대거 반발하면서 8월 쿠데타로 이어지게 된다.

 

고르바초프 덩샤오핑

 

소련의 해체

니콜라이 리즈코프 내각의 대 러시아 타협 거부 등의 정치적 이유와 상술했던 고르바초프의 실패로 1991년에 소련 보수파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고르바초프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으나, 당시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이 시민의 저항을 이끌어내면서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간다. 이후 고르바초프는 소련 공산당 해체 및 민주 국가로의 소련 개헌이라는 마지막 연방 유지 방안을 제시하나, 결국 소련은 옐친에 의해 1991년 12월 해체된다.

이후 2000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도 나갔으나 블라디미르 푸틴이 당선되었고 고르바초프의 지지율은 1%도 안 나왔다. 2011년 선거를 겨냥하여 2008년 9월에 레베데프와 함께 중도 성향의 러시아 민주당 창당을 발표하면서 12년 만에 정계에 복귀했는데, 그가 맡은 건 당 고문역이라 실질적인 힘은 그리 크지 않았다.

고르바초프가 일생 동안 겪은 위상 변화를 그의 이름이 점점 짧아지는 것으로 그려낸 만평도 있다.

 

세계적 공로가 하나 더 있다면 집권 중이던 1986년에 터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와 북극해안의 핵 폐기물 문제를 세계에 공개한 점이다. 고르바초프 자신도 이 일을 통해 개혁 추진 속도를 더 낼 수가 있었다. 체르노빌 사고 처리 과정에서 경직되고 비효율적인 관료주의 체제의 한계를 절감해서 급진적인 개혁을 밀어붙였다고 한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그의 인기에 타격을 준 일이 바로 보드카 판매와 소비를 규제한 정책이다. 러시아의 평균수명이 1960년대 중반 이래로 침체되었고 그 원인 중 하나가 알코올 중독의 증가였는데 보드카 판매를 규제하면서 일단 평균수명을 늘릴 수 있었지만 반대로 그의 정치적 인기는 줄어버렸고, 가뜩이나 석유값 하락으로 소련의 세수가 후달리던 형편이었는데 보드카 판매까지 규제시켜 놓으니 세금도 줄어들어 버리는 동시에 암시장까지 활성화되고 말았다. 게다가 술은 규제한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며 러시아인들 스스로 정신 차려야만 해결 가능한 문제니 결국 고르바초프가 밀려난 뒤 다시 원상태로 돌아갔고 사회복지제도의 붕괴와 더불어 러시아의 남성 수명은 57세까지 떨어졌다. 한편 이 정책에 극구 반대했던 소련 해체의 큰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하나인 니콜라이 리즈코프의 지지율은 오르기 시작했다.

 

 

고르바초프 퇴임 후

퇴임 후 보리스 옐친에게 푸대접을 받았다. 거기에 당시 러시아 경제와 사회복지제도가 붕괴되었고 연금도 제때 지급되지 못할 정도로 고르바초프의 대우는 형편 없었고, 고르바초프는 외국 대학이나 기관의 강연료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루이 비통, 피자헛 등 외국 기업의 CF에 출연하여 생활비를 벌 정도였다. 어느 날, 자신의 매달 연금이 얼마일지 궁금해져 은행서 1달치 연금을 $로 환전했더니 불과 몇십 센트에 불과했다고 기자들 앞에서 한탄하기도 했다.

1993년 4월 1일에 드미트리 무라토프 등 진보성향 언론인들에게 자금 후원을 해 노바야 가제타를 창간했으며, 지금도 10%의 지분을 갖고 있다.

1996년 러시아 연방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0.5%의 처참한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미 1990년대 초반부터 고르바초프에 대한 평가는 최악이었고, 소련 부활을 내세운 겐나디 주가노프가 1차 투표에서 옐친과 비슷한 득표율 (옐친 35%, 주가노프 32%)을 받은 것을 보면, 고르바초프의 당대 평판을 알 수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과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다. 반 푸틴 진영을 지지하며 푸틴과 대립각을 여러 번 세웠다. 고르바초프는 푸틴이 독재자가 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당연히 러시아의 집권 여당인 통합 러시아와의 사이도 좋지 않다. 통합 러시아 소속 국가두마 의원들이 소련 붕괴의 책임을 물어 고르바초프를 고발한 적도 있다.

다만 우크라이나 사태가 벌어진 2014년부터는 갑자기 푸틴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는 러시아인이라면 당연한 것인데, 크림 반도는 소련 시절 행정편의로 우크라이나에 간 것인데 이제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이상, 다시 러시아에 와야 한다는 것이 러시아인들의 공통적인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를 추진한 푸틴은 러시아인들의 전적인 지지를 받았다.

사실 푸대접을 받았던 옐친 시대와는 달리 푸틴 집권 이후에는 대우가 좋아진 것도 사실이다.

 

노태우 고르바초프

 

2008년 10월 국제환경포럼, 2009년 5월 세계평화의 종 공원 준공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두 행사 모두 서울 중구 프라자호텔에서 열렸다. 2009년 5월에는 손녀 아나스타샤 비르간스카야와 함께 참석했다.

2011년 3월에는 러시아 최고 등급 훈장인 사도 성 안드레이훈장을 수여받았다.

2011년 8월에는 푸틴 정권이 소련 공산당의 다운그레이드판이며 구태적이라고 비판했지만, 푸틴을 옐친 시대의 혼돈으로부터 러시아를 구했다며 치켜세우기도 했다. 12월에는 148%에 대해 선거 결과를 무효화하고 재선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푸틴은 대통령 2번, 총리 1번 했으면 충분하다며 물러나야 한다고 말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푸틴 총리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러시아의 정치 불안이 악화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2016년 5월 23일에 크림 합병은 올바른 결정이라는 발언에 문제를 제기하고 입국을 금지한 우크라이나를 비난했다.

앞서 서술되었듯이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했던 만큼, 현재는 주로 사민주의 계열 군소 정당에서 활동하고 있다.

2016년 4월에 방한해 제주포럼에 참석했다.

2016년 6월에는 언론에 많은 러시아 국민들이 자신을 미국 스파이로 평가하는데 억울하다고 하였다가 러시아 국민들에게 냉소만 받는 안습의 극치를 이루었다.

2016년 10월 10일. AFP와의 인터뷰에서 심해져 가는 러시아와 미국간의 갈등을 "세계가 위험한 수준에 도달했다"며 "갈등을 멈추고 대화와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2017년 1월 27일 핵전쟁 위험이 점점 현실화되면서 미-러가 대화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2017년 6월, 나토의 확대를 두고 푸틴과 설전을 벌였다. 푸틴은 고르바초프가 순진하게 나토 확장 금지를 문서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토가 확장되어 러시아의 안보가 위험해졌다고 주장했고, 고르바초프는 옐친-푸틴 시절에 확장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2017년 10월, 자신의 서기장, 대통령 시절 사건과 기억을 담아 '나는 여전히 낙관론자'라는 제목의 새 책을 발표했다.

책 출간행사에서 한 시민이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한 생각을 물었고,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가 불러온 긍정적 사실·부정적 사실 모두 있다. 하지만 페레스트로이카는 러시아와 러시아 국민에게 자극을 주었고 그것은 전 세계에 ‘시동을 거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는 후문.

2019년에도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2020년에는 <태양 아래>, <푸틴의 증인들>로 유명한 반푸틴 영화감독인 비탈리 만스키 감독이 촬영하는 다큐멘터리를 찍기도 했고, 9월에는 대통령 3번, 총리 1번이면 충분하다며 블라디미르 푸틴은 이제 물러나야 하고, 헌법에 기초하여 민주적인 선거로 새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고 하는 등 또다시 푸틴의 심기를 거스르기도 했다. 하지만 흘러간 정치인인데다가, 고르바초프 본인의 영향력도 거의 없는지라 딱히 푸틴이 탄압을 가하지는 않았다.

2021년에는 2016년에 이어 또 제주포럼에 온라인 화상회의 형식으로 참석했다.

2021년 8월 17일, RIA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탈레반의 승리로 끝나고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으로 탈출하는 미군과 아프간인의 참상에 대해, 처음부터 성공할 수가 없는 작전이었다며, 패배를 좀 더 일찍 받아들여야 했다고 평했다. 

다음 날인 8월 18일, 소련 보수파 쿠데타 30주년을 앞두고 도쿄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푸틴 정권의 독재적 성향이 심화되고 있다고 또다시 푸틴을 건드렸으며, 그럼에도 본인은 낙관주의자라면서 어려움, 오류, 좌절이 있더라도 러시아의 노력은 헛되지 않을 것이란 말을 덧붙였다.

2022년 1월 13일에 소련의 리투아니아 독립 운동 탄압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유족들이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군사 작전을 중단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소송을 제기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에 위기가 고조되자 고르바초프는 자신과 부시가 한 약속을 깬 NATO와 미국을 비난했다.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별다른 발언을 하지 않았다.

2022년 8월 30일(모스크바 현지 시각 기준) 사망했다. 

 

고르바초프 푸틴

 

고르바초프 평가

서방에서

서방 세계에선 냉전의 종결자, 평화와 민주주의의 사도 등 대단히 높게 평가한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가져다주던 냉전을 종식시키고, 동유럽 국가들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었으며, 그리고 체르노빌과 같은 환경 오염 문제에 대해 공개하여 인류에 큰 기여를 했다.

 

구 소련 지역에서

러시아인들은 그를 강대한 조국 소련을 망하게 만들다 못해 미국에 헌납한 매국노라고 생각한다. 매국노라고 보는 것은 부당하다고 해도 개혁의 실패로 국가를 해체시킨 책임은 피하기 어렵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고르바초프가 중국의 덩샤오핑이나 베트남의 쯔엉찐과는 달리 무리한 개혁개방 정책을 강행함으로써 소련의 공산당 체제가 빠르게 망한 것도 사실이라 변명의 여지도 별로 없다. 소련 국민들이 기나긴 줄로 상징되는 생필품 부족과 KGB의 감시 같은 것에 살긴 했지만 교육, 의료, 주택 등 기본적인 삶의 질은 보장되었고, 소련은 미국과 함께 세계 최강의 군대, 세계 최고의 과학 기술, 스포츠, 예술을 보유한 초강대국이었기에 러시아인들은 국가에 대해 충분히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련 해체 이후 모든 게 산산조각나면서 어느 순간 러시아는 3류 국가가 되고,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조차 힘들 정도로 사회 시스템이 붕괴해버린 것이었다. 군대의 경우, 서방 진영에서 가장 두려워하던 소련군이 건재할 당시에는 병력이 500만 명으로 규모만 놓고 보면 미군을 압도할 정도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의 러시아군은 병력 수가 120만 명으로 쪼그라들고 군용 물자도 줄어들었는데 그나마도 노후화되고 고장난 게 태반이다.

러시아 방송에서 방영한 고르바초프에 대한 평가 토론. 극우파 정치인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 러시아 자유민주당 당수와 연극 감독인 이오시프 라이헬가우즈의 토론이다.

 

 

한편 일부는 그가 미국에서 보낸 첩자거나 희대의 무능아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중국 공산당처럼 하지 않고, 무제한 개방을 펼쳤기 때문에 소련이 무너졌다는 것. 농담이 아니라 그는 2000년대 중국 공산당이 개최한 회의에 초청되어 자신이 너무 정치개혁에 성급했다고 인정하고, 중국 공산당의 길이 더 바람직한 길같다며 뒤늦게 후회하기도 했다.

중국 관영 언론 인터뷰에서는 “내가 중국의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은 충고는 ‘민주화’와 관련된 어떤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라며 “(민주화를 용납하면)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소련 해체 과정에서 공산당이 영도력을 잃었던 부분에 대한 후회를 밝혔다. 출처가 중국 관영 언론이라 비판적으로 볼 여지는 있지만 말이다.

소련 말기는 경제 사정이 상당히 나쁘기는 했지만, 덩샤오핑이 정권을 잡은 문화대혁명 직후 중국보다야 훨 사정이 나았으며, 고르바초프나 소련 공산당이 잘 수습했다면, 민주제는 몰라도 현재의 중국식 체제를 이뤄 국민의 경제생활을 훨씬 윤택하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의 성급한 개혁은 둘다 박살냈다.

덩샤오핑의 경우는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과 같은 급진책을 남발하다가 국가를 재앙에 빠뜨리는 것을 자신이 직접 목격했기 때문인지, 어떤 정책이라도 경험적으로 검증하며 조심스럽게 접근했고, 이런 시도는 성공을 거두어 중국을 재건할 수 있었다. 이런 느린 접근도 덩샤오핑이 워낙 혁명가나 행정가로서 명망이 높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고르바초프는 덩샤오핑 같은 권위는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사용해도 결국 보수파와 개혁파의 갈등속에 흐루쇼프처럼 실각했을 가능성이 많다. 중국이나 소련이나 계획경제의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지속가능이 불가능했고, 양쪽 모두 개혁과정에서 반발은 엄청났으나, 중국은 덩샤오핑이 가졌던 엄청난 권위와 교묘한 정치술로 반발을 억누르면서 조심스럽게 당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경제개혁을 추진해서 성공을 거두었고, 소련은 조급하게 정치개혁까지 손댔다가 초가삼간을 다 태웠다고 할 수 있다.

 

레이건 고르바초프

 

러시아는 소련 해체 후 10여년간 헤메다가 2000년대 중반에야 엄청나게 오른 유가 덕분에 어느정도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자원에 의존하는 경제체제는 자원 가격에 민감한 법이라 2014년 유가가 급락하고 우크라이나에서 일이 터지자 러시아는 다시 혼란의 도가니로 빠지고 있다. 결국 이것도 알고보면 고르바초프의 개혁 실패와 옐친의 무능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물론 아직도 그 경제구조의 개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푸틴의 잘못도 크다. 2022년 기준, 30년이 지났는데도 러시아는 수호이, 미그, 에네르기아, 흐루니체프 등 구 소련 시절의 기술력으로만 연명하는 군대나 항공우주 관련 기업들을 제외하면 세계적으로 내세울만한 대기업도 없이 아직도 한국과 GDP로 엎치락 뒤치락 하는 실정이다.

2017년 퓨 리서치 센터의 조사에 의하면 러시아인들 중에서 고르바초프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람들의 비율은 22%에 불과했다. 이는 우크라이나(22%)나 조지아(18%), 아르메니아(13%)와 같은 다른 구소련 국가들도 마찬가지. 조사가 이루어진 국가들 중 고르바초프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가 50%를 넘긴 구소련 국가는 2차대전 때 소련에 강제로 병합당한 에스토니아(56%)가 유일했다. 다만 동유럽 위성국들을 포함할 경우 헝가리(54%),폴란드(51%),체코(53%)가 있다. 그러나 소련 해체의 여파가 너무 강했는지 그 반러국가인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서도 긍정 평가가 각각 48%, 39%라는 처참한 수치를 기록했다.

 

단, 고르바초프가 옐친보다는 나은 평가를 받는다. 사실 정확히는 둘 다 최악인데, 굳이 고르라면 고르바초프가 아주 조금 더 낫다는 것. 이유는 크게 2가지다. 첫 번째로, 옐친의 소위 '서방으로부터 조언받은 충격요법'을 실시한 후 벌어진 러시아의 참상에 비하면 고르바초프 시기는 그보다는 나은데다가, 고르바초프가 재임했을 땐 이미 브레즈네프 시절에 개입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여파'라는 요소가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었고, 여기에 '체르노빌 참사'라는 악재까지 겹쳐진 게 일종의 면피 요소는 되기 때문이다. 특히나 미국도 소련처럼 아프간에서 죽 쑤다 철수하고 있으니 더더욱 면피할 구석이 조금은 있는 셈. 결국 2021년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기도 전인 8월 15일에 항복했고, 미국의 철군 및 민간인 이송 과정이 참으로 졸렬하고 한심하게 진행되고 있어, 철군 과정 및 사후 아프간 공산정권 지원이라도 잘한 고르바초프가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물론 이후 공산정권이 무너지긴 했지만 옐친이 소련을 해체시키고 러시아까지 철저하게 말아먹은 탓이지, 둘 중 하나라도 안 됐으면 여전히 지원을 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고르바초프는, 러시아인들이 자부심을 느꼈던 소련이라는 국가 자체는 수호하려 노력했고 8월 쿠데타로 권력을 잃었음에도 각 공화국의 자치권을 좀 더 강화하는 형태, 즉 주권국가연맹 체제로 바꿔서라도 유지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당연히 평가가 좋을 리가 없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때문에 동유럽 공산 국가들은 물론 소련까지 무너지면서 사회주의 형제국들로부터의 원조가 끊겼기 때문이다. 이는 북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결국 1990년대에 이르러 고난의 행군이라는 궤멸적인 결과를 낳고 말았다. 특히 냉전 시기 내내 북한이 공들여 온 중·소 사이에서의 줄타기 외교 전략이 완전히 무너져 버려 중국에 경제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었다.

당장 북한의 "세계력사" 교과서만 봐도 북한은 고르바초프를 현대수정주의자, 사회주의배신자라는 표현을 동원하여 신랄하게 까고 있다. 대내적으로 다당제 도입, 시장경제 도입, 사상문화 분야에서의 자유화, 군대의 비정치화·비사상화를 추진하여 소련을 해체로 이끌었고, 이러한 정책이 대외적으로도 영향을 끼쳐 동유럽 공산 정권이 붕괴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고르바초프 마거릿 대처

 

고르바초프 여담 일화

김일성이 크고 아름다운 혹으로 유명하듯 이 사람도 머리에 있는 점인지 흉터인지 모를 모반(birthmark)으로 유명하다. 만화 같은 그림에서 이분을 묘사하면 열의 아홉은 저 자국을 빼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 시사 만화에선 '반점이'라고 나오면서 그의 정책을 비판하는 묘사도 있었다. 9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라면 몇몇은 알 수도 있는데 머리에 초콜릿이 흘러내린 것 같다고 해서 한국에서의 별명이 "고르바초코"였다. 그러나 서기장 취임 이전 사진에서는 필름에 인위적으로 수정을 가해 반점을 지웠기 때문에 없다. 자세히 보면 모양이 한반도와 만주쪽 지도를 닮은데다 희미하게 휴전선도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한국의 젊은 사람들도 고르바초프가 정확히 뭘 한 사람인지는 몰라도 '머리에 지도가 그려져있는 사람'이라고 말할만큼 모반이 상당히 임팩트가 크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을 방문한 구 소련의 지도자이다. 고르바초프의 방한은 소련 붕괴 직전인 1991년 4월 19일에 이루어졌는데 당시 일본 방문 일정을 마치고 바로 귀국하려는 고르바초프를 노태우가 제주도로 초청, 4월 19일 밤에 제주도를 방문하고 4월 20일 노태우와 정상회담을 가진 후 당일 본국으로 귀환했다. 대한뉴스 보도 소련이 붕괴된 후 1992년 10월 경향신문과 국제교류재단 초청으로 방한이 이루어질 뻔했다가 러시아 정부에서 고르바초프에게 출국 금지 조치를 내리는 바람에 무기한 연기되었고 1994년 3월이 되어서야 방한이 성사되었다. 유달리 방한을, 특히 제주도에서 열리는 포럼에 많이 참석하는데, 첫 방한 장소인 제주도의 풍경이 인상깊었던 듯. 쉬리의 언덕과 사계어촌체험마을 등을 둘러봤으며, 사별한 아내 라이사가 해녀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담은 동상이 제주도에 남아 있다.

2001년에 내한했을 당시,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정치학 명예박사의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래서 학생들 사이에서는 2012년 버락 오바마가 외대에 방문해 명예동문 자격을 수여받기 전까지 외대 최고 아웃풋이 소련 서기장이란 이야기가 있었다.

1997년에는 피자헛 광고에 출연했다. 당시 초인플레이션으로 소련 서기장 연금이 2달러 수준으로 떨어지고 옐친의 견제까지 받으면서 재단 활동이 좌초되자 기금 마련을 위해 광고에 출연했다. 전 서기장인만큼 출연 조건은 까다로워서 촬영은 러시아에서 하고, 각본은 고르바초프가 동의해야만 했으며 먹는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됐다. 붉은 광장을 통째로 비워서 촬영을 하고, 배우들도 세대 갈등을 통해 당시 러시아인들의 혼란을 최대한 표현하려는 등 많은 수고가 들어갔다. 병맛이라는 평도 많지만 고르바초프 본인은 나중에 인터뷰에서 맘에 든다고 인정했다. 2007년에는 소외층 어린이를 돕기위해 루이비통 광고에 출연했다.

어떤 이들은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시점으로 다른 사람으로 바뀐 거라는 음모론을 내놓기도 한다. 그때 전후로 머리의 반점 모양이 달라졌다고... 그때를 기점으로 고르바초프는 결과론적으로 미국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많이 내놓았기도 했다.

 

고르바초프 사망

 

 

이오시프 스탈린이 화성인과 싸운다는 정신나간 게임. <스탈린 VS 마샨>의 OST 중에는 러시아에 자유를 가져온 그를 찬양하는 헤비메탈 곡이 삽입되어 있기도 하다.

뮤직비디오 맨 마지막에 하늘에서 코카콜라와 함께 떨어지는 노란색 덩어리는 트윙키라 불리는 일종의 크림빵인데 굉장히 달고 기름진 걸로 유명하다. 한 번 단종된 적이 있었으나, 인수합병을 거쳐 다시 생산되기 시작했다.

고르바초프의 이름을 딴 보드카도 있다. 사실 정치인 고르바초프와는 관계없이 Leontowitsch Gorbatschow라는 러시아의 귀족이 러시아 혁명을 피해 외국으로 망명을 가서 1921년부터 생산하기 시작한 것. 러시아산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베를린, 독일산 보드카이다. 베를린에서는 마트나 24시간 매점 등에서 9유로 정도에 700ml 풀 보틀과 미니어처를 흔하 사먹을 수 있다. 홈페이지를 들어가면 마치 러시아에서 생산할 것 같은 분위기지만 실상은 독일산. 다만 실제 고르바초프는 술과 담배를 매우 싫어하여 하지 않으며 술도 먹어야하는 상황에서만 마시고 먹더라도 많이 마시지 않는다.

24세 때의 고르바초프의 사진. 흔히 아는 이미지와 달리 뚜렷한 이목구비와 각도 있는 얼굴을 가진 미남이었다. 게다가 비만을 매우 싫어하여 항상 다이어트를 하여 균형잡힌 몸을 가졌다.

블라디미르 레닌을 아직도 존경한다고 한다. 반면 이오시프 스탈린은 소련 체계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었다면서 비판했다. 이와 정반대로, 블라디미르 푸틴은 이념을 떠나서 레닌을 싫어하고, 스탈린은 은근슬쩍 미화해주는 경우가 많다.

보통 이 사람을 서양 근현대사 교과서에서 처음 보는 경우가 많아 과거의 인물이라 생각하지만,21세기를 넘어 2022년까지도 생존해있었다가 결국 그 해 8월 30일에 향년 91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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