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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야기/정치 / / 2022. 4. 19. 11:11

김종인 고향 학력 나이 부인 자녀 프로필


대한민국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인. 제24대 보건사회부(現 보건복지부) 장관과 제11, 12, 14, 17, 20대 국회의원(모두 비례대표)을 지냈으며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라는 거대 양당 모두에서 비상대책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큰 영향을 끼친 원로 정치인이다.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의 손자다. 2010년대 들어 정치계에서는 보수와 진보 상관없이 어려운 일이 불어닥치면 거의 해결사 혹은 킹메이커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정치적 어려움이 있을 때 정치인들이 김종인을 찾아 도움을 구하고는 했다.이른바 "정치권의 고액단타 과외선생". 그가 승리를 이끌어낸 선거만 해도 새누리당 비대위원 시절의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와 제18대 대통령 선거, 더불어민주당 비대위 대표 시절의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그리고 미래통합당/국민의힘 비대위원장 시절의 2021년 재보궐선거 등이 있다. 특히 2016년 20대 총선과 2021년 보궐선거에서는 만신창이가 된 정당들을 이끌고 승리를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그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2020년 총선 이언주 후보 지지 유세에서 옷 색깔만 바꾼 기호 2번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가 지나온 정치적 길목마다 중요한 순간과 인물이 많았기 때문에 “여의도 포레스트 검프”라는 별명도 있다.

 

김종인 프로필
김종인

 

김종인의 손을 거친 대통령만 박근혜와 문재인, 윤석열로 무려 세명의 대통령이 그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대통령 당선 이후 의견이 맞지 않아 탈당했고, 이후 정치에 염증이 생겼는지 나중에 미래통합당 황교안 당대표가 김종인에게 선대위원장 자리를 맡아달라 했음에도 처음엔 완강히 거부했었다. 이후 김종인의 회고록이 출간되었는데, 회고록에서 박, 문 두 사람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박근혜는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데다 자기 뜻대로 안 이루어지면 화를 내고, 동네 건달식 정치를 한다고 깠고, 문재인은 천하가 자기 것인 줄 알고 방자하게 굴고 겉과 속이 다르며 주변 인간관계가 복잡한 사람이라고 깠다. 아무래도 배신당했다고 느끼는 듯. "내가 박 정권, 문 정권을 창출해 낸 바람에 국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줘 두 번 사과해야 한다"고 셀프디스까지 했다. 미국과 독일의 주요 정치, 경제계 인사들과 인연은 물론, 친척들 역시 한국 경제계의 이곳저곳에서 활약 중이다. 미국의 공화당, 과거 서독 측 인사들과 연줄을 유지하고 있다. 레이건 때 국무장관 조지 P. 슐츠와 가깝다고.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 당시 연줄이 없어 발을 동동 굴렀던 한국 정계로서는 김종인의 역할을 기대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김종인

金鍾仁 | Kim Chong-in

 

출생

1940년 7월 11일 (81세)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신림리

(現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거주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본관

울산 김씨

 

현직

대한발전전략연구원 이사장

재임기간

제24대 보건사회부 장관

1989년 7월 19일 ~ 1990년 3월 19일

 

부모

아버지 김재열, 어머니 이필기

 

형제자매

누나 김종은, 김종현

 

배우자

김미경

 

자녀

슬하 1녀

 

친인척

할아버지 김병로

매형 박봉환

 

 

학력

서울덕수초등학교 (전학) →

광주서석국민학교 (졸업)

광주서중학교 (전학) →

중앙중학교 (졸업)

중앙고등학교 (졸업 / 49회)

한국외국어대학 외국어학부 (독일어과 / 학사)

뮌스터 대학교 (경제학 / 학사)

뮌스터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 석사 · 박사)

 

병역

대한민국 육군기 대한민국 육군 상병 전역

 

종교

개신교 (장로회) → 천주교 (세례명: 알렉산델)

 

신체

174cm

 

약력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대한민국 국회의원

국민은행 이사장

제24대 보건사회부 장관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건국대학교 경제학과 석좌교수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국민의당 개혁공동정부준비위원장

미래통합당 총괄선거대책위원장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여의도연구원 이사장

살리는 선거대책위원회 총괄선거대책위원장

 

 


 

 

김종인 생애 고향 학력 가족관계 및 정치활동

1940년 7월 11일 시흥군 동면 신림리에서 태어났다. 김종인의 조부는 가인 김병로로서, 가인은 면암 최익현의 부대원으로 을사의병에 참여했으며,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법조계 거물이다. 또혼 김종인의 아버지는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김재열인데, 그는 김종인의 소년기에 요절하였다. 큰어머니 고귀현을 통해 동아일보 가문과 연결된다. 광주서중학교 재학 중 이사로 상경하여 중앙중학교와 중앙고등학교(49회, 1959년 졸업)을 거쳐 한국외국어대학 외국어학부 독어과에 입학해 1963년 졸업했다. 그해 제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 통합을 주도하던 조부 김병로의 비서 역할로 정계와 연을 맺는다. 1964년에 조부 김병로가 별세하고 나서 독일로 건너가 뮌스터대학교에서 유학했다. 1969년 뮌스터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1972년에는 동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부전공분야는 재정학(공공경제학)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국과 달리 사회민주주의가 발달한 독일에서 공부한 덕에 독일식 경제민주화에 대해 긍정적인 편이다.

 

김종인 인터뷰

 

1973년 3월에 귀국, 불과 32세로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조교수가 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서강대 학부생 시절에 김종인의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서강학파로 분류되나 선성장 후분배, 재벌 육성을 중심으로 한 압축 성장을 주장해온 남덕우 등의 서강학파 선배들과는 입장을 달리하는 2세대로 구분된다. 유신 때부터 박정희 정부에서 정책자문역할로 경제개발계획 수립에 참여해, 김재익과 함께 서독의 부가가치세를 배우러 출장을 다녀와 연구보고서를 올렸다. 이미 35세 노총각이던 김종인은 십수번 선을 봤으나 인연을 만나지 못하고, 이듬해에 김재익의 중매로 김미경(金美經) 교수와 결혼했다. 서로 말이 잘 통했다고 한다.

김미경은 김정호 전 한일은행장의 딸로 2018년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식품영양학과 명예교수이고, 처삼촌이 박정희 정부에서 재무부장관과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이다. 본인의 4촌 처남으로 노태우 정부 시절 건설부 장관과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이진설이 있고, 대법관과 헌법재판소장을 지낸 윤영철이 있으며, 신민당 국회의원을 지낸 이택돈이 있다.

1977년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이었던 신현확의 반대를 무릅쓰고 의료보험제도를 최초로 도입하는 데 기여했다. 김종인은 자신이 했다고 자신하고 있고, 직접 당사자인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역시 김종인이 제안한 게 맞다고 확인해 주고 있다.

김종인은 훗날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 등에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역대 대통령 가운데 스스로 경제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고 있었던 유일한 대통령"이라고 평가했으며, 2016년 1월 더불어민주당 대표로 전직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는 자리에서 “이러고저러고 말이 많지만 그분이 오늘날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이끈 공로만큼은 누구도 부인을 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관련기사 김종인은 물론 그가 주장한 경제민주화는 시장경제를 주장하는 보수주의론이다.

1980년 국보위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전두환,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창당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이 점 때문에 전두환의 소위 부역자 취급을 받고 진보측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재미있는 점은 보수인사들 역시 김종인과 더불어민주당을 싸잡아 비난하면서 국보위 인사를 용인하다니 내로남불 운운했다는 것.

 

 

그 후 1981년부터 1988년까지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1대, 제12대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낸다.

1987년 제6공화국 개헌 당시 경제민주화 조항을 직접 작성해 관철시켰다. 노태우 정부 때 청와대 경제수석으로서 기업구조조정과 체질개선을 진두 지휘하는 한편, 재벌의 폭주를 견제하는 등 균형 잡힌 경제적 성과를 이뤄내려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정의당 후보로 서울 관악구 을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한 후, 1989년 1월부터 7월까지 국민은행의 이사장을 지냈다.

그러다가 1989년 7월부터 1990년 3월까지 제24대 보건사회부 장관을, 1990년 3월부터 1992년 3월까지 2년간 청와대 경제수석을 역임했다. 청와대 경제수석을 그만둔 후 1992년 제14대 국회에서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1993년에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당시 김종인을 구속기소한 주임검사가 후일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한 대검 중수부 함승희 검사였다. 김종인의 유일한 아킬레스건이다. 이 사건으로 김종인은 오랜시간 동안 정치적 암흑기를 걷게 된다. 현재도 김종인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가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으로 실형받은 전력을 가지고 공격한다. 홍준표는 심심하면 이야기한다. 결국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으로 형이 확정되었다.

그 후 대한발전전략연구원을 창립해 스스로 이사장에 취임해 정치와는 거리를 두며 오랜 기간 동안 야인으로 있다가 2004년 3월에 새천년민주당에 영입되며 정계에 복귀했고,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면서 원내로 돌아오게 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행적으로 2007년 제17대 대선에서는 당적은 유지했지만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를 지지했다. 그냥 단순한 지지가 아니라 정동영의 대선 후보 등록 회견 때부터 손잡고 옆에 서 있었다. 

이후 2008년 정권이 교체된 뒤 김종인은 경제 정책에서 우클릭만 거듭한 채 끝난 참여정부에 대해 쓴소리를 쏟아냈는데, '좌파신자유주의? 말장난이냐. 신자유주의는 실패한다. 노무현 정부가 무슨 좌파 정부냐? 기업한테 정부 기능을 기대하지 말라'고 인터뷰한 후 딱 두 달 만에 세계금융위기가 터졌다.

2008년에 국회의원 임기를 마치고 다시 야인으로 있다가, 2011년 12월에 중도 확장을 노린 한나라당-새누리당과 박근혜 비대위원회에 영입돼 경제민주화 공약 설계를 맡기도 했다. 이준석은 한때 박근혜 정부의 정도전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당시 이회창, 이한구 등으로부터 김종인의 경제민주화는 좌클릭, 포퓰리즘이라는 공격을 받으며 당내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지만, 새누리당은 과반 152석을 차지하면서 총선에서 압승했다.

그리고 2012년 9월부터는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그의 경제민주화 의제와 공약은 2012년 12월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에 크게 도움을 주었지만, 박근혜가 집권하자마자 팽당하고 경제민주화 공약은 바로 폐기됐다. 이용만 당했지만 그는 인터뷰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비난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번에도 쿨하게 받아들였다. 2014년 12월에는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야인으로 지냈다. 대권 주자 안철수의 경제 멘토로 활동했다는 보도도 있었는데 2016년 1월 자신은 그런 적이 없으며 언론에서 지어낸 얘기라고 확인했다. 2016년 1월 20대 총선을 목전에 두고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영입 제안을 받았다. 곧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겸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추대돼 2월부터 더불어민주당의 수장이 된다. 더불어민주당은 9년간 패배만 거듭해 빈사상태에 빠져 있었고, 안철수 전 공동대표가 2015년 11월 말 문안박 연대를 거부하고 혁신 전당대회를 역제안해 내홍에 빠졌다. 결국은 국민의당으로 안철수 이하 소속의원 21명이 나갔다. 문재인 대표는 '친노패권주의' 때문에 사방에서 공격받고 있었다.

2016년 1월에는 더불어민주당에 영입되어 특정계파의 의원들만을 대상으로 한 공천 컷오프나 민주당이 우세한 지역에 측근을 공천했다가 패배하는 등 문제점이 많았다. 비대위 초기에는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 박경미 홍익대 교수, 주진형 전 한화증권 대표 등의 인재들을 영입하면서 어수선했던 당을 잘 정비하는 듯 했으며, '친노패권주의'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데에 도움을 줬다. 하지만 비대위, 선대위를 모두 거머쥐고 절대적인 공천권을 휘둘러 문제를 일으켰다. 정청래와 이해찬을 직권으로 공천 탈락시켰다. 친노의 손발을 자르고 자신은 비례 대표 2번에 공천하는 모습으로 큰 반발을 불렀다. 셀프 공천, 칸막이 공천으로 큰 욕을 먹었다.

2016년 4월 20대 총선에서 국회 1당을 차지하며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수도권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호남은 국민의당에게 의석 대부분을 내준다. 대신 더불어민주당은 호남당이란 이미지를 벗고 전국 정당으로서 이미지를 얻었으며 부산, 경남에 발판을 마련한다.

2016년 5월 24일에는 대우조선해양 노조위원장을 만나 “대형 국영기업이나 대우조선해양처럼 1만 명 이상 고용하는 업체는 노동자가 경영을 감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종국에 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총선 후 그는 의원내각제 또는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제기하면서, 추호선생, 전권노인네 등의 별칭을 얻는 등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과 친문 성향 지지층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당대표에 출마하려고 했으나 실패한 데다가 반기문 추대설, 안희정 충남지사 탈당 권유설 등이 퍼지면서 급속히 당내에서 힘을 잃는다.

2016년 8월 27일 새로 선출된 추미애 당대표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직에서 퇴임하였다. 최근에는 페이스북 계정을 신설했다고 한다. 요즘 정치권의 SNS 대세에 본인도 동참하기로 한 듯하다.

 

정치인 김종인


 

2017년 3월 27일 대선 출마를 기정사실화했다.

2017년 4월 5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그의 대선 목적은 내각제 개헌과 자신의 정치 활동의 최종 목표인 경제민주화임을 밝혔다. 그러나 일주일 뒤인 12일. 국민들이 자신의 뜻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불출마를 선언하게 되었다.

2017년 4월 30일 대선 레이스의 종반부에서 갑작스럽게 김종인은 내각구성권을 약속받고, 안철수 대선후보에 대한 지지 입장을 밝혔다. 이후 국민의당 개혁공동정부준비위원장을 맡았다. 대선 후보중 안철수, 홍준표, 유승민 후보를 모아 ‘반문재인 연대’를 구성하려는 모습으로 보였지만 3명 다 서로와의 연대를 거부했고 대선 결과는 문재인의 승리로 끝났다. 대선이 끝난 뒤에는 국민의당 비대위원장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이것도 박주선이 선출되면서 소문으로 끝났다.

경제민주화라는 만화 출판 행사 때 안철수가 방문하여 김종인을 만난 것을 볼 때, 국민의당과의 끈은 이어가고 있는 듯하다.

2020년 3월, 미래통합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반감과, 본인이 문재인 정부 탄생의 기틀을 마련 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이 크다고 한다. 그러나 총선을 고작 1달 정도 남겨놓고 영입이 된지라 너무 늦게 영입되었다는 평이 많았다. 제아무리 김종인이라 할지라도 1달 안에 민주당으로 기운 대세를 바꾸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아직 미래통합당에 완전히 적응하지는 않은듯 자신을 더불어민주당이라고 자주 실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결국 이에 대한 우려가 현실이 되어 2020년 4.15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의 패배를 막을 수는 없었다. 개표 결과 103석으로 개헌저지선을 겨우 넘기며 김종인이 이끈 선거로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참패하였다. 다만 선거 2주 전에서야 겨우 합류해서 선거전략가로서의 면모보다는 선거운동원으로서의 역할이 더 많았다. 총선 후에는 황교안을 비롯한 당내 지도부가 낙선으로 인해 공석이 되자 당내에서는 김종인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일각의 반발도 있었지만 원내지도부가 의원들의 여론을 수렴한 결과 찬성이 더 많았다며 강행했고, 김종인이 이를 수락했다.

 

4월 28일, 미래통합당 전국위원회에서 177명의 찬성으로 김종인 비대위 구성을 가까스로 추인했지만 당내에서 자꾸 나오는 반발에, 임기가 고작 4개월로 제한당한터라 자존심이 상한 탓인지 김종인 전 위원장이 사실상 취임을 거부했다. 하지만 결국 5월 22일, 내년 재보선까지 비대위원장을 맡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당선인 84명이 찬반 투표에서 내년 재보선까지 비대위 체제를 운영하는 데 '압도적 찬성'을 보였으며, 김종인 본인도 "최선을 다해 당을 정상 궤도로 올리는 데 남은 기간 열심히 노력해보려고 한다"며 "당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데 온 힘을 쏟겠다"고 비대위원장직을 수락했다. 

4.15 총선 패배 이후 미래통합당에 대해 대대적 혁신이 필요하다고 일갈하며 1970년대생 가운데 경제 전문가가 보수의 대권주자로 나서야 한다고 하며 40대 기수론을 공식 선언하였다. 이에 처음엔 김종인 비대위에 대해 찬성하던 홍준표가 김종인 반대파로 태세를 전환하여,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을 언급하여 비판하였다. 정진석 21대 총선 당선인은 $ 페이스북으로 총선 직후 홍준표 본인이 직접 전화로 “김종인 만한 사람이 없다. 비대위원장으로 모셔야 한다. 정 대표가 김종인을 띄워달라”고 요청했었다는 것을 밝히며 “그때는 김종인 씨가 동화은행 비리 사건에 연루됐던 사실을 몰랐나”고 비판했다.

 

정치에 잔뼈가 굵은 인물답게 현재 대중들이 원하는 젊고 개혁적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기성 정치인보다 젊은 정치인을 중용하고 최대한 협상의 자세로 있다. 다만 장제원, 김태흠, 박대출을 비롯한 당내 일부는 행보에 상당히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편 비대위원장 취임 후 계속 파격적인 이슈를 꺼내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진보 의제로 꼽히는 기본소득제를 꺼내들었고 박근혜 탄핵. 구속 및 이명박 구속에 대한 대국민 사과 검토와 호남 구애,장외투쟁 자제 등 이전의 자유한국당이나 김종인 체제 이전의 통합당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기대를 높이고 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리얼미터의 지지율 집계에서 박근혜 탄핵 이후 처음으로 민주당을 뛰어넘는 성과를 이뤘다. 민주당의 지속적인 문재인 정부/평가/경제/부동산 정책로 인한 반사이익이란 지적도 있지만 황교안 체제에서도 조국 사태를 필두로 하는 각종 권력형 비리 의혹 들의 호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의 지지율을 기어이 넘지 못했던 것을 고려하면 김종인 체제의 중도 구애 및 좌클릭, 강경투쟁 노선 배격이 다소 성과를 보고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보들에 대해 보수정당의 정체성이 희석된다고 반대하는 당 내부 의견도 상당하다. 하지만 얼마 못 가 8.15 집회에 미래통합당 현역의원, 지역당협위원장들이 참가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다시 지지율이 추락했다.

 

 

이후 결국 9~11월간 두 달 정도의 침체기를 겪으며 당 분위기가 많이 다운됐다. 오히려 그의 과도한 좌클릭이 기존 보수층 이탈을 불러온 것은 물론이요, 그렇다고 더이상의 유입도 없는 등 당이 침체 되었다. 이로 인해 지지율은 오히려 황교안 체제 이전 수준으로 역주행했다.

그런데 12월이 되자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했다. 더불어민주당의 실책이 부각되며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심판론이 탄력을 받으며 2021 보궐선거와 대선 승리 기대감이 한층 높아졌다. 다만, 이낙연과 이재명 등 선명한 색깔을 가진 쟁쟁한 후보들이 많은 더불어민주당과 달리, 재보선과 대선 모두에서 국민의힘의 후보들이 빈약한 상황이다. 심지어 이들은 안철수나 윤석열에게도 여론에서 밀리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김종인은 자신이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며, 단일화를 하더라도 국민의힘 소속이 후보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보수 및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이 취할 수 있는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부정적 시선과는 별개로, 국민의힘 자체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팽배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장을 여전히 하고 있는 것은 현재 여론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들이 당면한 목표가 정권 교체임에도, 야권 단일화를 수단으로 자신들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3월 23일 야권 단일후보 선출 결과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가 선출되면서 자신의 뜻을 이루는데 성공했고, 4월 7일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 국민의힘이 압승을 거두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김종인 윤석열

 

2022년

윤석열 후보가 신년부터 지지율을 떨어트리는 발언과 2030세대가 많은 게이머 관련에서도 좋은 인상을 주지 못 하면서 이재명 후보와 지지율 격차가 12%p나 차이가 나는 여론조사가 나온다.

이제서야 위기감을 느낀 국민의힘 측과 윤석열은 킹메이커 김종인에게 전권을 주는 조치를 하고 이에 김종인은 선대위 해체 후 재구성이라는 극단처방을 내린다. 바로 이대남의 실망을 준 영입인 신지예를 쳐내고 친윤들마저 전부 내친 뒤 윤석열 후보의 대선까지 비서실장을 자처하며 윤석열 후보의 재정비를 위해 일정을 전부 중단시킨다. 

그러나 이 처방이 윤석열 후보가 자리비운 사이 속전속결로 이뤄진 것이고 김종인만 남은것에 대해 윤후보는 매우 불쾌하며 "이건 나에 대한 쿠데타"라며 조수진을 옹호하던 때와 다르게 화를 내었고 김종인을 되려 배제하겠다는 인터뷰를 하고 하룻동안 장고에 들어간다.

5일 오전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 해촉 예정이 발표되었다. 김종인의 윤석열 선대위 전면 쇄신 단행예정 일방적 조치에 대한 윤석열의 조치인 듯. 5일 오전 김종인은 선대위 해체소식에 나간다면 제발로 나가겠다며 인터뷰 함으로써 사실상 김종인은 윤석열 캠프 소속을 그만두겠다고 한다. 결국 이번 대선은 윤석열 주도로 운영하게 되었다.

 

한편 이준석 당대표의 경우 윤석열 및 윤핵관과 갈등을 빚은 점에서 김종인과 공통점을 공유하는데, 김종인이 주도한 선대위 개편안이 이준석과 논의된 것이기도 하고 김종인이 선대위원장에서 해촉되었듯이 이준석 또한 당대표 사퇴 압박을 받았으나 이후 윤석열과 극적으로 화해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에게 ‘경질’당한 김종인 전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이 5일 “그 정도 정치적 판단 능력이면 더 이상 나하고 뜻을 같이할 수가 없다”며 윤 후보를 작심하고 비판했다. 그는 격한 어조로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윤석열 당선’을 도와주는 유일한 사람이 나뿐이었다”며 “내가 무슨 목적으로 쿠데타를 하겠느냐”고 주장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의 지지율 상승 부진인 반면 윤석열은 이준석과 갈등 봉합 이후 청년층을 공략하며 지지율을 0.1%까지 따라잡으며 위험해지자 더불어민주당 측에서 김종인에게 러브콜을 하고 있다. 1월 26일 즈음에 김종인은 이재명 후보가 나를 만나고자 한다면 만날수 있다고 말한 적도 있었고 1월 31일 김종인 측은 이야기는 안 했으나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송영길은 김종인과 만나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김종인도 이재명 후보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며 인터뷰했다.

2월 6일 김종인의 사무실에서 민주당 대선 후보인 이재명과 만남을 가졌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김종인은 회동과 관련해 "사람 한번 만난 것 가지고 뭘 그렇게 관심이 많으냐"며 "특별한 얘기 한 것도 아닌데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이재명 캠프 합류설에 선을 그은 것으로 해석된다. 2월 10일 저서 '대통령은 왜 실패하는가'의 출판기념 청년 포럼 중 "어차피 양당 후보 가운데 한 명이 당선될 텐데 누가 되더라도 나라의 앞날이 암울하다"며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모두를 비판했다. 김종인은 "한쪽 후보가 당선되면 문재인 정부보다 더욱 폭주할 것이 명백하다"고도 했다. 

 

 

이후 20대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가 당선되었다. 윤석열 캠프에서 나온 상태였기에 마무리가 좋지 않게 끝났지만, 결과적으로 윤석열의 당선에 큰 일조를 한 것은 분명하다. 윤석열 후보의 지지율이 이재명 후보에게 큰 폯으로 뒤지던 와중 김종인의 독단적인 선대위 해체가 지지율 상승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기 때문이다. 윤석열 지지율 하락의 주범인, 이준석을 비롯한 지도부와 윤석열(과 윤핵관)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은 김종인의 선대위 해체를 기점으로 줄어들었다. 물론 내부 갈등 소멸을 두고 김종인이 총대 매고 윤석열 계열 인사를 정리한 것이 원인이라는 시각과, 김종인과는 별개로 윤석열이 이준석과 화해하며 내부 갈등을 수습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 원인이라는 시각이 갈린다.

이후 김종인계와 이준석계 인사들과 함께 대통령 인수위원회에 임명되지 못했다. 몇달 전까지 자신이 중심축으로서 활동했던 선대위의 또다른 뼈대인 김한길,김병준이 임명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윤석열의 최측근이자 대선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충돌해왔던 장제원 등의 친윤에 의해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 국민의힘 당적을 유지하고 있지만, 윤석열이 당선된 이상 친윤에게 계속해서 견제 받을 가능성이 높다. 김종인은 선거 결과가 나온 이후 윤석열으로부터 그동안 도와줘서 고맙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밝혔다.

 

 

 

 

김종인 평가 비판 논란

성격

장점도 소신과 고집, 단점도 소신과 고집

아주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다. 고집이 강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고,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서슴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고 한다.

자신의 목소리를 소신 있게 내는 건 좋지만, 반대 의견이 나오면 그것을 무시하거나 사퇴를 거론하는 부분은 양날의 검이다. 그런 모습이 강직하고 소신있는 모습으로 비춰지는 경우도 있으나, 때론 '벼랑 끝 전술'을 쓰는 고집불통으로 비춰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경제 정책인 경제민주화를 관철하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는 성격이라는 비판이 있다. 또 정치적 경험도 없다. 즉,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집단 내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반발을 어루만지며 무난한 결론을 이끌어 내는 재주는 없다는 뜻이다. 그저 '전권'을 위임받아 독선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을 현실화 할 줄 아는 전형적인 고위 관료 스타일이라는 비판이 있다. 즉 일생을 경제민주화에 올인한 사람이지만 정작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정치관의 소유자. 시어도어 루스벨트식 경제체제를 신봉하지만 정작 그 방식은 전형적인 엘리트주의라는 것도 모순적인 행보이다.

‘소신’하면 김종인 의원도 만만치 않다. 그는 정치권에서도 정당을 초월한 소신있는 언행으로 유명하며 당을 초월한 의원들의 모임인 ‘조화로운 사회를 위한 모임’을 이끌고 있다. 

새누리당에는 대선 때 김 위원장의 공(功)을 인정하면서도 "그와 함께 일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당시 김 위원장과 일했던 한 관계자는 "김 위원장은 자리를 맡으면 전권 행사를 요구하는 스타일이어서 기존 조직과 마찰을 빚을 가능성이 크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사퇴 카드 등을 던져 불협화음을 일으켰다"고 했다. 

광주광역시를 찾은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가장 먼저 한 일도 5ㆍ18 유족회 등 관련 단체를 만나 자신의 국보위 이력을 사과하는 것이었다. 갑작스런 김 위원장의 행동에 기자들은 물론 의원들까지 모두 놀랐다. 평소 ‘독불장군’이라고 불릴 정도로 자신의 고집을 쉽게 꺾지 않는 성격의 그였기 때문이다. 

 

고집불통이란 별명을 얻으면서도 정말로 고집스럽게 반(反)재벌 입장을 유지하고 있는 걸로 잘 알려져 있다. 직선적인 성격에 원리원칙주의자로 노태우 정권에서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일하던 시절에는 노태우 대통령의 친인척과 마찰을 빚기도 했고 정권 말기 당시 노 대통령이 추진하던 이동통신 사업에 대해서는 '국민의 의혹을 살 수 있으니 진행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정치인 김종인의 행보는 다소 어지러워 보였어도, 경제민주화를 신봉하는 경제학자 김종인의 행보는 30여 년 동안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는 적어도 경제학적 일관성면에서만큼은 자신이 가진 철학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비례대표 4번 동안 법률안 발의가 0편이었다고 한다. 의원 활동을 무려 4번이나 역임했는데, 소위 '경제민주화의 상징'이라면서 이에 대한 경제 법안 발의가 하나도 없는 것은 정말 의아한 일. 80년대 군사독재 시절 국회의원은 시절이 시절이라 국회의원이 명목상이었다 치더라도 하더도, 2004년 새천년민주당 시절 비례대표 당시에도 법안 발의가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에 새천년민주당에서 부대표 직함을 주며 우대하였는데, 본인의 요구 사항이 대표나 당론으로 통하지 않자, 부대표임에도 그 직도 내놓지 않고 당무도 거부하고 당사에 나오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정리하자면 시대적 흐름에 맞는 아젠다를 세팅하는 능력이 있고 전권을 가지고 - 100% 가지고 있어야 한다 - 있는 경우 조직을 이끄는 능력 또한 있다. 나이까지 감안하면 꽤나 유연하고 본인 판단에 합리적인 주장이라 생각하면 들이받아도 그 주장 받아준다는 점도 장점이다. 미디어와 매우 친화적인 사람이라 전언정치로 권력을 획득함에 상당히 능하다. 이게 바로 김종인이 이른바 킹메이커라고 불리는 이유. 다만 본인 스타일과 자신이 추구하는 스타일 모두 자신이 보스가 되어야 하는 사람인데 후보 김종인은 유권자들에게 전혀 매력적이지 않고 본인 역시 굽신거리는 선거운동은 할 생각이 1도 없으니 자신의 선거는 이길 수도 없고 나갈 생각도 없다. 하지만 보스는 되고 싶으니 자신이 보스를 차지할 가능성이 있는 자리엔 미디어와 친한 세력들을 적극 활용해 그 자리를 결국 차지하는데 본인은 바른 소리를 해서 팽당했다 주장하지만 실상은 본인이 보스가 아닌데 항상 보스가 되려 함에서 오는 문제들로 인해 진짜 보스급 인물이 보스에 오르면 팽당하는 것이다.

박근혜, 문재인, 윤석열. 인물 개개인에 대한 호불호나 능력치 모든걸 떠나 대선 캠프에서 보스는 대선 후보지 캠프의 총괄선대위원장이 아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항상 자신이 후보보다 위에 있어야 하고 심지어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인 것이다.

 

김종인 젊은시절김종인 젊은시절2

 

경제민주화

김종인을 한 마디로 상징하는 단어.

1964년 독일 뮌스터대학으로 건너가 경제학 석박사학위를 딴 뒤 독일 정치계, 학계와 두루 교류해온 독일통답게, 그가 지향하는 경제모델은 '독일식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이다. 이는 노동유연성 강화 등 시장경제의 틀을 인정하면서도 양극화 해소를 위해 사회안전망 확충과 소득 재분배, 대기업의 독점 규제 등을 위해 국가가 적극적인 역할을 펼쳐야 한다는 점이 골자다.

그가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이끌어온 중도보수 성향의 기민당이다. 기민당이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깨닫고 정책 수정을 했듯, 국민의힘도 성장주의, 민영화, 감세 등 보수 진영이 강조해온 가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게 김종인의 지론이다.

 

삼성그룹과 각 세우기

삼성과의 악연은 최소 삼성이 자동차 사업을 추진하던 시절부터 형성되였다. 자서전에 의하면 노태우 정부 시절, 경제수석으로서 삼성의 자동차 사업 진출을 강하게 반대하던 자신을 이건희 회장이 매우 미워했는데, 청와대에서 마주치자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낼 정도였다고 한다.

17대 국회에서 재정경제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검찰 고발안건에 찬성표를 던졌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삼성자동차 손실보전 문제와 관련해 국감증인으로 채택됐으나 출석을 거부해 논란이 됐다.

김종인은 “삼성이 갚지 않고 있는 돈이 이자까지 붙어 5조원이 넘는다”며 “돈을 그렇게 많이 버는 삼성이 왜 이 돈은 갚지 않는지 국민들은 궁금해하는데, 당사자를 불러 이를 따지지도 못하는 국회를 국민들이 어떻게 보겠나”고 증인채택을 요구했다.

이전에도 삼성그룹에 불리한 금산법에 찬성하는 등 삼성그룹과 각을 세워왔다.

 

재벌규제하는 5.8조치 단행

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된 지 2개월만에 역사상 가장 강도 높은 수준의 재벌규제로 여겨지는 5.8조치를 단행했다. 재벌기업의 비업무용 부동산을 강제로 매각하고 신규취득을 금지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5.8조치 때 5대재벌 기조실장들을 청와대로 불러 부동산 4800만 평을 매각하도록 하면서 빨갱이 소리는 물론 모욕적인 비난도 들었다고 한다. 전경련이 주최한 토론회에 가서 전경련 회장을 맡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에게 “자본주의가 기업인 멋대로 하는 게 아니다”며 2시간 넘게 자본주의에 대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경제민주화 헌법 조항 밀어붙이기

1987년 제9차 헌법 개정 당시 개헌특위 경제분과위원장을 맡아 119조2항 이른바 경제민주화 조항을 밀어붙였다. 김종인은 이 조항을 만들고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별도 보고해 허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용갑 새누리당 고문이 경제민주화 조항이 남재희 민정당 정책위의장의 작품이라는 주장을 했으나 남 전 의장이 직접 이를 부인하며 김종인이 만든 것이라고 확인했다.

 

 

의료보험제도 도입에 기여

1977년 서강대 교수로 재직하던 중 의료보험제도 도입을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김종인은 국무총리실 산하에 설치된 의료보험제도 도입 평가교수단 단장을 맡아 보고서를 작성해 올렸고 이를 근거로 의료보험제도 도입 결정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1989년 의료보험의 전국민 확대 과정에서 당시 노태우 정부의 보건부 장관직을 맡아 일임했다.

코로나19 사태에서 드러났듯, 그가 이룩한 성과 중 가장 의미있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대목.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에 기여

예전부터 수많은 진보적 정치, 경제 전문가들(예를 들어 한성대학교 김상조 교수)로부터 정무적 감각과 경제 정책의 전문성을 모두 갖춘 인물로 평가받아왔다. 호남 출신의 내공 있는 경제 분야 테크노크라트로,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아왔던 인물.

그러다가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때 박근혜 대선 캠프에 합류해 박근혜 정부 출범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의 실정으로 새누리당에 대한 민심이 나빴던 상황에서, 박근혜는 이명박과 달리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보살필 것이고, 재벌들의 전횡에도 철퇴를 내릴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주었던 것.

그리고 김병로 선생의 손자로서 호남 출신의 명문가의 자제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박근혜 당시 후보가 호남에 대해 우호적일 것이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에도 공헌했다. 그 결과 한화갑, 한광옥 등 동교동계 출신 인사들이 박근혜를 지지하게 만들었고, 호남에서 제법 많은 박근혜 표를 가져왔다. 특히 과거 일자리 등의 문제로 수도권으로 상경한 호남출신이 많다는 것을 고려하면 단순히 보이는 호남표 그 이상의 효과를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참하게 토사구팽 당했다. 포털 사이트들에 '김종인'을 검색하면 '토사구팽'이 연관검색어로 등장하고 손석희 JTBC 보도 담당 사장도 JTBC 뉴스룸에 출연한 김종인에게 '토사구팽' 당했다는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질문할 정도. 이준석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에 표현에 의하면 박근혜 정부의 정도전이 된 인물.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시절

 

더불어민주당의 구원자

그후 더불어민주당의 선거대책위원장 겸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전격 영입되었을 때에는 과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전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진보 진영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대표적인 진보 정치인인 노회찬 정의당 전 의원이 더불어민주당의 김종인 영입 소식에 대해 "오랜만에 더불어민주당이 예뻐 보인다. 한국의 보수가 김종인 박사 정도의 노선이라면 이 나라는 훨씬 좋은 나라가 되었을 것."이라고 긍정 평가를 내렸을 정도.

하지만 김종인 대표가 지난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때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이 했었던 당 대 당 야권 연대'를 거부하는 바람에 지역구 선거 경쟁력이 극도로 약한 정의당이 지역구 선거에서 노회찬, 심상정을 빼고 모두 패배하자 정의당 지지자들에게는 천하의 개쌍놈 취급을 받게 됐다.

영입 이후 더불어민주당의 분열 흐름은 잠잠해졌고, 국민의당으로 탈당하던 흐름 역시 멈추었다. 탈당의 흐름이 멈추자 전세는 역전되어 거꾸로 국민의당으로 탈당한 사람들이 고립되었다.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의 대표가 된 뒤 한 두 달 만에 자신만의 식견과 정무 감각으로 당의 지지율을 끌어 올렸다. 본래 더민주의 고질병 중의 하나가 '불복의 문화'였다. 그 정도로 내부적 총질과 돌출 행동이 난무했었고 이로 인한 거부감이 높았는데 김종인 대표 취임 이후 분란이나 책잡힐 행동을 할 여지가 있는 사람들은 전부 걸러지거나 자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김종인 중심으로 철저하게 단합하여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필리버스터 중단으로 인해 나빠졌던 당 상황을 '야권 통합론' 제시로써 단숨에 역전시킨 것은 그 백미였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대로 진보 정당과의 연대를 거부함으로써 새누리당이 더민주를 상대로 오랫동안 우려먹던 여러가지 공세의 여지를 싹 차단시키고, 중도표 획득에서 유리한 여지를 점한 것 또한 무시 못할 업적이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김종인을 '기레기 조련사'라 불렀고, 일부 지지자들에게서는 '갓종인'으로 추앙을 받았을 정도.

 

 

THAAD 배치 문제에 대해서도 김종인 대표의 현실적인 정무 감각은 훗날 빛을 발했다는 평을 듣는다. 박근혜 정부가 THAAD를 경북에 배치하겠다고 했을 때 당연히 반대 입장을 표명할 줄 알았던 더불어민주당은 '찬성하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반대하는 것도 아님. 신중하게 결정하자 ㅇㅇ'라는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대응 방식을 내놓았다.

물론 진보 성향의 지지자들은 김 대표의 '전략적 모호성' 대응을 비판했고 지금도 비판하고 있지만, 김 대표는 이러한 신중론에 대한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더민주의 지지율이 잠깐 출렁이긴 했지만 뒤의 결과를 보면 '전략적 모호성' 대응은 현명한 부분이 있었다는 게 어느 정도 검증이 됐다.

우선 북한이 SLBM을 발사하고, 다섯 번째 핵실험을 강행하는 등 연일 무력 도발을 일삼는 것에 대해 우리나라 국민들이 THAAD 배치의 당위성을 점점 인정해가고 있는데, 더민주는 일찌감치 '신중하게 결정하자'는 입장을 내놓은 덕분에 보수 진영으로부터 안보 공세를 받을 건덕지가 없었던 것이다.

국민의당은 재빨리 THAAD 배치 반대를 당론으로 채택했지만 이후에 벌어진 안보 상황들 때문에 보수 진영 지지자들로부터 외면을 받았고, 그로 인해 스텝이 꼬여 이제 와서는 더불어민주당과 비슷한 신중론 쪽으로 당론을 바꾸려고 하는 걸로 알려졌다.

진보 성향이 강한 지지자들이야 비겁하다고, 싸워야 한다고 비판을 한다지만, 더민주의 전략적 모호성 전술이 현실에서 적지 않은 효과를 본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김종인 비대위 대표의 뒤를 이어 당권을 잡은 추미애 당대표도 당대표 경선 때에는 THAAD 배치 반대를 당론으로 채택할 것처럼 이야기하다가, 막상 당대표가 된 뒤에는 당론 채택을 계속 연기하면서 김종인 전 대표의 신중론 전략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공천 이후 논란

그러나 그 후 공천과 관련된 그의 행보에 대해서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공천 칼바람에 대한 비판

김종인 대표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은 김종인의 공천이 친정(親政) 공천이라는 것이다. 더민주에서 지난 1년간 쌓아온 혁신 결과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실 문재인 대표는 인적 요소가 개입되지 않고 각 분야 점수를 종합하여 컴퓨터로 당락 여부를 가리는 시스템 공천 하에서 컷오프가 이루어지는 제도를 만들고 물러났다. 그러나 김종인 대표는 이러한 시스템 공천 제도를 사실상 무력화시키고, 지극히 불투명한 기준, 자의적인 기준에 따라 친노 세력들을 솎아내버렸다.

실제로 김종인 대표가 직접 매체에 '친노 솎아내기'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종걸 원내대표는 종편에 출연하여 자당 공천 방향을 친노 세력 정리라고 소개하였다. 보수 언론 및 국민의당에서 특정인을 찍어서 누구누구 떨어뜨려라 요구하였고, 김종인 대표도 그에 호응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의원들이 탈락하자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은 동요하였다.

썰전에서 정의당 소속 유시민 작가는 더불어민주당이 왕정으로 돌아갔다고 비난했다. 비교하기 그렇지만, 현재 더불어민주당의 상황은 마치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 혼란의 혼란을 거듭하는 프랑스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 공화국은 훗날 혁명으로 수립한 민주주의 대신 왕정 즉, 나폴레옹을 선택하게 된다. 만약 총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다면 김종인 대표의 위치는 아주 견고해질 것으로 보인다. 김종인 대표를 비토하는 사람들은 그가 총선에서 이기더라도 나폴레옹처럼 황제가 될지, 아니면 워싱턴 대통령처럼 민주주의를 지킬 지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

유시민 작가는 김종인 대표로부터 시작된 더불어민주당의 공천 논란과 정의당과의 야권 연대 거부를 놓고 '더민주는 붕괴 중이다'라고 진단했지만, 20대 총선 실제 결과는 이들의 예상을 완벽하게 빗나간 더민주의 화려한 부활이었다. 하지만 박근혜에 의해 10차 개헌 떡밥이 국회에 투척된 이 후 미국식 대통령 중임제 개헌을 주장하는 친문 그룹과 김종인을 필두로 의원내각제 내지 오스트리아식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지지하는 반 문재인 그룹이 의원총회에서 종종 썰전을 벌이고,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반문 진영이 전략적으로 지지하는 안희정 충남지사의 지지율이 점차 높아지면서 유시민의 예측이 맞아떨어질 지 귀추가 주목된다. 현재까지는 더불어민주당이 정당 지지율이 40%를 초과하는 등 60년 정당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고, 그 선두에는 문재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친노 • 친문계가 존재하는 만큼 아직까지는 지켜볼 일이다.

 

김종인 이해찬

 

중도 싸움을 위한 고육지책, 그리고 차도살인설

김 대표가 정청래 의원과 이해찬 의원 등을 자른 이유에 대해서는, 이를 이른바 '중원 공략'의 차원에서 그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훗날 여론조작 사건으로 전국구 스타(?)가 된 드루킹과 그 추종자들이다.

그들의 개소리에 따르면 여태껏 민주당계 정당이 번번히 새누리당에 진 이유는 바로 이 중도 싸움에서 밀렸기 때문이며, 게다가 이번에는 국민의당으로 분당까지 되었기 때문에 호남 유권자를 잡는 게 매우 중요한 이상, 이러한 고육지책을 썼다는 것이다.

중도 무당파층과 호남 유권자층의 마음을 잡기 위해서는 기존 민주당에 덧씌어진 두 가지 이미지를 해소시켜야 한다. 하나는 '대화와 타협 보다는 투쟁만을 고집하는 운동권 정당'이라는 이미지와 호남을 소외시킨 '친노 패권 정당'이란 이미지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당은 번번히 중요 선거에서 새누리당에게 졌으며 국민의당은 한때 호남에서 민주당을 여론조사에서 압도했었다.

이 두 가지 이미지를 불식시키거나 최소한 희석시키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에 따르는 상징적인 조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싸움만 하는 운동권 정당 이미지와 친노 정당 이미지 각각을 대표하는 인물로 정청래 의원과 이해찬 의원을 선정해 잘라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운동권 정당과 친노 정당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대안 야당으로서 박근혜정부의 경제 실정에 집중한다면 중도 유권자들과 방황하는 호남 유권자들을 잡을 수 있다고 계산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다만, 친노 & 비노 이런 구분이 어떤 실체가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유념해 두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은 친노라고 불리는 의원 20~40명과 나머지는 적게는 3~4명, 또는 10여명의 인맥으로 이뤄진 그룹 몇 개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른바 '계파 정치'라는 것인데, 김종인 대표는 더불어민주당에 영입된 직후에는 "친노 패권은 모르겠는데, 분명한 것은 비노계가 훨씬 더 많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뒤에는 친노, 친문 주류와 갈등, 대립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2, 3차 컷오프를 진행하면서 문재인 전 대표가 강력한 당권을 휘두른 적이 없었으니 친노 패권주의라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셋째 아들인 김홍걸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객원교수는 "친노가 누구인지 알 수 없고, 확실한 것은 친문 의원은 1명 밖에 없더라" 하는 말을 했었다.

친노 세력이라는 말은 처음에는 호남의 보수층에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후 언론을 통해 확대 재생산 되면서 현재 종편을 비롯한 조중동 등 보수 언론에서 기정 사실처럼 광범위하게 통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지만, 조중동 뿐만 아니라 다른 언론에서도 친노라는 용어는 널리 사용되고 있다. 친노가 없으면 친박은 뭐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친노 혹은 친문계로 분류되는 사람들의 당사자들 이야기이지, 언론과 대체적인 평가는 더불어민주당의 주류는 친노 혹은 친문이 다수라는 것이 중론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친노가 일시적으로 후퇴하였으나 이명박 정부의 거듭된 실정으로 전임자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이 되살아났으며 그 바람을 타고 2012년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가 취임하면서 친노, 친문이 주류를 형성했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근데 주권당원은 압도적으로 많은데, 대의원은 비문이 더 많다.

정청래 의원, 이해찬 전 총리 등은 탈락했는데 친노무현 & 친문재인 성향의 초, 재선 의원들은 많이 살아남은 것을 두고 "상징성이 있는 중진들은 뽑아내고 경쟁력을 갖춘 초, 재선 현역 의원들에겐 기회를 주는 전략이 아니겠느냐"는 분석도 있다.

5선의 문희상 의원, 3선의 유인태 의원, 노영민 의원 등 ‘현역 하위 20% 컷오프’에서 1차로 물갈이된 인사들과 4차 컷오프에서 이해찬 전 총리와 함께 공천에서 탈락한 5선의 이미경 의원은 대체로 문재인 전 대표와 가까운 주류 쪽 중진들, 즉 올드보이들이다. 반면, 노무현 전 대통령과도 가까웠고 문재인 전 대표와도 가까웠던 김태년, 홍영표, 박남춘, 전해철, 백원우 등 초선, 재선 의원들에겐 단수 공천을 주었다.

그러한 연유로 이 컷오프 파동은 일반적인 주장과는 다르게 꼼꼼히 살펴보면 그저 모두 존재감이 큰 거물들이라 그냥 일이 커 보이는 것일 뿐인 착시 현상이라는 말도 있다. 이들은 "김종인 대표가 친노를 공천 학살했다."는 주장은 과장이라고 본다.

친노 & 범친노 인사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공천에서 배제된 건 사실이지만, 지난 18대 총선과 19대 총선 때 친박근혜계와 친이명박계가 서로 주고 받았던 수준의 대량 공천 학살까진 아니었고, 문재인 전 대표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거나 측근이었던 초재선 의원들과 그가 앞장서서 영입한 신진 인사들은 거의 모두가 컷오프의 칼바람을 무사히 피해 국회의원 후보가 되었으며, 오히려 그 중 몇몇은 전략공천이라는 특혜를 받아 선거에 나섰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쉽게 말해서, 더불어민주당의 컷오프 파동은 친노라는 그룹의 시각에서 보면 일방적인 탄압이지만, 막상 문재인 전 대표의 시각에서 보면 오히려 본인의 지분을 크게 늘려준 고마운 소동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각에 조금 문제가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문재인 전 대표가 영입한 인사는 모두 정치 경험이 거의 없는 신인에 불과한데, 비례대표를 준 것도 아니고 대부분 지역구에 출마, 그것도 대부분 험지로 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입 인사들 대부분 자신의 지역구는 스스로 결정했고, 지역구가 결정된 영입 인사들 중엔 경선을 통과해서 출마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대개 전략공천 아니면 단수 공천으로 출마했다. 단수 공천이야 한 지역구에 더불어민주당 소속 예비 후보자가 그 영입 인사 한 명 뿐인 경우도 있어서 그렇다고 칠 수 있다지만, 전략공천은 특혜다. 한 지역에 출마를 준비하는 예비 후보자가 여러 명인데도 당 지도부가 한 후보을 골라 경선 없이 그냥 후보로 확정하는 게 전략공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재인 키즈'들 중에서 수도권에 출사표를 던진 후보들은 전원 전략공천을 받아 출마했는데 대개 당선되어 돌아와 20대 국회의원이 됐다. 특히 국가 재정 전문가인 김정우 세종대 교수의 경우는 호기롭게도 험지 중의 험지이자 본인의 고향이기도 한 강원도 철원군에 출마하려고 했다가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김 교수의 지역구를 철원군보다 여건이 더 좋은 경기도 군포시로 바꿨고, 김 교수는 비록 근소한 차이이긴 했지만 당선에 성공했다.

호남으로 간 영입 인사들은 전패했으나, 더불어민주당의 호남 참패는 예상했던 사람이 별로 없었던 돌발 변수였다.

영남으로 간 영입 인사들의 경우, 오창석 전 팩트TV 아나운서는 패기있게도 '부산 정신'이란 슬로건 아래 조경태 의원이 내리 3선을 했던 부산 사하구을 출마를 자청했다. 유영민 포스코 ICT 전 사장도 부산광역시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새누리당 강세 지역인 해운대구 출마를 스스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유 전 사장은 거물 하태경 의원을 상대로 41%의 득표율을 기록해 충분히 후일을 기대해도 좋은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정찬모 울산광역시의회 전 교육위원장도 아예 입당을 더불어민주당 울산광역시당에서 하면서 울산광역시 울주군에 도전하겠다는 용감함을 보여주었다.

경상남도 양산시에 출마한 서형수 전 한겨레신문 사장이 떨어질 가능성이 무척 높다던 예상을 깨고 당선된 특별한 사례다.

그리고 비례대표에 출사표를 던진 문 전 대표의 영입 인사들도 처음에는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의 월권으로 인하여 낙선권인 C그룹으로 몰렸다가 문재인 前 대표와 김종인 대표가 김 대표의 자택에서 만남을 가지고, 더불어민주당 중앙위원회에서 재선거를 거친 결과 다시 당선권으로 거의 다 올라와 대부분 국회의원 배지를 받게 됐다.

특히 당선권 명단에 김 대표의 추천 인사들과 문 전 대표의 영입 인사들이 섞이게 되었기 때문에 김 대표와 문 前 대표 모두 자신의 영입 인사들을 국회로 진출시켜 윈윈하였다.

 

그래서 나온 게 문재인 전 대표의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설이다.

'친노 패권주의 프레임'으로 인해 제대로 된 권한 행사를 못했었던 문재인 전 대표가 바깥에서 온 이방인이자 강골인 김종인 박사를 데려와 절대 권력을 가진 '차르'로 만든 뒤 '비문(非文) 친노' 인사들을 싹쓸이한 다음 그들의 빈자리에 자신이 직접 영입한 외부 인재들을 심어 '친노 패권주의'라는 족쇄를 확실히 깨부수고, 자신의 당 장악력도 최대화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종인이 총선 이 후 대놓고 문재인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민주당의 당 케미스트리에 해를 끼치다가 탈당하고, 또 이 갓종인의 빅픽처, 문재인의 차도살인지계설을 주장한 드루킹이 훗날 대선 승리의 댓가(?)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문재인 대통령의 안티로 돌변하여 매크로를 돌려 문재인 대통령을 비방하고, 안희정을 신격화하는 여론주작을 시도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가설은 말 그대로 흑역사가 되었다.

 

김종인 문재인

 

반문(反文)인 듯 반문 아닌 반문 같은 행보

총선이 끝난 뒤 문재인 전 대표와 김종인 의원의 관계는 애매모호하다. 서로 닭 소 보듯 소 닭 보듯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정확히 누가 말했는지를 확인할 수가 없어 편리한, '관계자에 따르면' 이라는 표현을 쓴 인터넷 기사에서는 거친 표현이 나온 적이 있긴 한데, 둘 다 서로에게 공개적으로 직격탄을 쏜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사건이 터지고 '이런 일을 재발하지 않게 하려면 이원집정부제나 내각제로 우리나라의 정부 체제를 바꿔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차기 대통령의 임기는 3년으로 줄여야 한다'는 개헌론이 대두되면서 이 개헌론자들 중 가장 대표적인 한 사람으로 김종인 의원이 부상하였고, 이로 인하여 2012년부터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을 주장해온 문재인 전 대표를 본인이 직접 저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이 대선판에 나왔을 때 민주당 의원의 신분으로 그와 만남을 가져 김종인 의원이 반기문 캠프로 갈 것이라는 이야기가 힘을 얻기도 했고, 또 더불어민주당에서 19대 대선의 후보 자리를 놓고 문재인 전 대표와 경쟁하고 있는 이재명 성남시장이나 안희정 충남지사 쪽을 은근히 지지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근데 재밌는 점은 소위 '반문(反文) 연대' 혹은 '친박과 친문을 제외한 제3지대'를 완성할 마지막 고리 같은 존재로 언론이 띄워주고 있는(?) 인물인데도 불구하고 막상 말은 그렇게 하면서 정작 중요한 행동이나 떡밥은 하나도 안 보여준다는 것이다. 반기문 캠프로 갈 것처럼 보였을 때는 본인이 '나를 왜 그 사람과 결부시키나, 기분 나쁘게'라며 가능성을 일축했고, 개헌에 관해서는 개헌론자들과 뜻이 통하는 발언은 계속 하고 있지만, 막상 그쪽에 직접 가담한다거나 하다 못해 공동 선언문이나 결의문 같은 것도 내지 않았다.

이제 뭔가 일을 하려나 보다 싶을 때마다 항상 발을 빼는 등의 행보로 제3지대의 김을 빼놓는 짓만 반복해온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그때마다 전권을 달라는 요구를 했지만 번번이 거절을 당해 '그럼 내가 있을 이유가 없다'면서 손을 끊은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또 더불어민주당의 비례대표 2번 후보로 당선돼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기 때문에 제3지대나 반기문 캠프 등으로 넘어가려면 탈당을 해야 하는데 그럼 우리나라 법에 따라 국회의원 배지도 떼야 하기 때문에 이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본인은 의원직에 연연해하지 않는다고 반론하지만.

 

안희정 충남지사가 '문재인 대세론'에 그나마 맞설 만한 다크호스로 떠오른 뒤로는 안희정 캠프 쪽에서 김종인 의원으로부터 경제 정책에 대한 의견을 많이 듣는다던가, 안 지사의 측근이라는 모 민주당 의원이 김종인 의원실에 상당히 자주 드나든다더라 등의 이야기도 나왔으며, 실제로 안희정 캠프에서 김종인 의원에게 경제 정책에 관한 전권을 위임할 테니 오라고 제안했다는 뉴스도 보도됐었다.

김종인 의원 본인도 "안희정 지사는 초기의 노무현 모습 같고, 문재인은 말기의 노무현 모습 같다"고 하는 등 두 사람 간의 관계에 훈풍이 부는 기조가 보이고 있는데, 김종인 의원은 여전히 이렇다 할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안희정 캠프에서 경제 정책에 대한 전권을 줄 테니 오라고 했다는 뉴스에 대해서도 '특정인을 지지하지는 않는다'라며 선을 그었다.

단, 1월 16일 독일 뮌헨에서 열리는 안보회의에 참석한 뒤 우리나라로 돌아오면 자신의 거취에 관한 결심을 밝히겠다고 말한 걸로 알려졌다. 그러면서 '순교'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는데 본인이 생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순교하겠다는 말이 정확히 무얼 하겠다는 것인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김종인 의원 본인조차 이 순교라는 단어를 무슨 의도로 말한 것인지에 대해서 확답을 주지 않는 상황.

일각에서는 김종인 의원 본인이 직접 대선 출마를 하려는 것 아니냐는 예측을 내놓기도 하지만 2월 23일에 대선 출마설에 대해 질문했을 땐 그럴 뜻이 없다고 말한 바가 있다.

그러나 뮌헨에서 닷새 만에 돌아온 뒤에도 본인의 거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김종인 의원은 기자들의 질문에 "헌법재판소의 탄핵 판결이 나고, 정치 일정이 어떻게 잡히느냐에 따라서 두고 봐야지. 미리 단도직입적으로 뭐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라고 답한 걸로 알려졌다.

그러나 2017년 3월 8일 더불어민주당을 배은망덕한 정당이라 디스하며 탈당계를 내 20대 국회의원직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3월 10일 중앙선데이와의 인터뷰에서는 "이번 대선에서는 킹메이커 역할을 하지 않겠다"는 발언을 하면서 간접적으로 대선 출마 의사를 밝히며 타도 문재인의 각오를 다짐에 따라 이 논쟁 역시 어이없이 끝나버렸다. 그리고 4월 5일 19대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보수정당의 구원투수, 그리고 승리

미래통합당 총괄선대위원장이 된 2020년 3월 20일, 문재인 정부에 대해 "마치 천하를 손에 넣은 것처럼 판단하고 행동하는 중"이라고 언급했다. 자신의 비례대표 2번 배정에 대해서는 문 대통령이 비례대표를 먼저 제안하고서도 이후 '셀프 공천' 논란이 발생하자 "전후 사정을 설명하지 않고 나 몰라라 입을 닫은 채 은근히 그 사태를 즐기는 태도를 취했다"고 주장했다. 3월 25일에 출간된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를 통해서 “영원한 권력이란 없는 법이다. 글 쓰고 있는 이 순간 재임하고 있는 대통령도 돌아가는 형국을 보니 편안하게 임기를 마칠 가능성이 극히 낮아 보인다”고 밝혔다.

비례대표를 제안했던 사람이 문 대통령이라고 주장하면서 “모멸감을 느낀다”고도 했다. 그는 “밤늦게 우리 집까지 찾아와 ‘위기에 빠진 당을 구해달라’ 부탁했던 사람, 선거 승리만을 위해 민주당에 가지는 않겠다고 하니까 ‘비례대표를 하시면서 당을 계속 맡아달라’고 얘기했던 사람이 그런 일이 발생하자 전후 사정을 설명하지 않고 나 몰라라 입을 닫은 채 은근히 그 사태를 즐기는 태도를 취했다”고 비판했다.

이어 “총선이 끝나고 민주당은 이른바 친문(親文) 세력이 당권을 장악하고 급격히 그런 방향으로 분위기가 쏠렸다”며 “나에게 셀프 공천 모욕이라니, 물에 빠진 사람 살려줬더니 보따리 내놓는 정도가 아니라 숫제 파렴치범 취급하는 모양 아닌가”라고 했다. “애초에 정치인의 말을 온전히 믿지 않았지만 … 인간적인 배신감마저 느꼈다. 이런 건 정치 도의를 떠나 기본적인 인성의 문제다”라고 밝혔다. “문재인 후보가 박근혜보다 나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동안 내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문재인 후보는 주변이 좀 복잡한 사람이었다. 그를 에워싸고 있는 그룹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면 결국 그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면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것이 뻔했다”고 했다. 그는 “나는 국민 앞에 두 번 사과해야 한다. 하나는 박근혜 정부가 태어날 수 있도록 했던 일이고, 다른 하나는 문재인 정부가 태어날 수 있도록 했던 일이다”라고도 했다.

그러나 당대표인 황교안을 필두로 김대호, 차명진의 실언으로 인해 김종인의 자질이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당내 여론과 강경 지지자의 뜻에 맞게 움직이는 셋에 비해, 선거를 이기기 위해 중도층을 안아야 하는 김종인은 당의 선대위원장인 입장에서 이들을 제지해야 하는 입장에 놓였고, 이 와중에 징계의 수준에 따라 일어날 수 있는 당 내의 분열까지 잠재워야 하는 상황이라는데 과연 한국 정치현실상 중도층의 존재가 있는지 여부도 확인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결국 이러한 선거지형 속에서 결국 미래통합당이 쉽게 정리를 못하면서 미래통합당은 역대급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후 김종인은 선대위원장에서 사퇴하고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황교안을 비롯한 지도부와 윤리위, 그리고 극우 지지자들을 비판했다.

선거 참패 후 미래통합당에서는 김종인을 비대위원장으로 모셔오자는 움직임이 나타났고, 심재철 원내대표가 대표 권한대행으로 김종인 비대위를 통과시키려 하였으나 김종인 비대위만 통과하고, 임기를 고치는데는 중진 의원들의 방해로 인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후 주호영이 압도적인 표차로 신임 원내대표가 되었고, 강력하게 김종인 비대위를 밀어부쳐 당선인의 총의로 김종인 비대위를 다시 통과시키고 임기도 2021년 재보선까지로 정해놓았다. 김종인 입장에서는 난파선이 된 정당의 대표가 되면서 어쩌면 인생 마지막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2020년 6월 1일 비대위원장 취임 이후 보수정당으로서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진취적 정당'을 내세우면서 보수 삭제를 언급하기도 했고, 기본소득, 적극적 재정투입, 사회안전망, 재벌 개혁, 불평등 해소 등 그동안 보수진영이 앞세웠던 가치와는 거리가 먼 것들을 거론하면서 정치권 어젠다를 주도했다. 다만 당내 반발은 극복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취임 1개월 동안, 중도층의 미래통합당 지지율도 올라갔다. 리얼미터의 5월 4주차 여론조사에서는 중도층의 미래통합당 지지율이 24.5%였는데, 6월 3주차 여론조사에서는 31.5%로 7%p 상승했다. 이슈 선점 능력과 자기정치에서 합격점을 받았다는 평. 아직 성과를 못 올렸다는 평도 있지만, 김종인 위원장은 취임한 지 1개월밖에 안 되었다. 

여당인 더불어 민주당의 성추행 논란과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의 연이은 부동산 정책의 실책, 견제세력 없는 독선적인 국정운영을 연발하면서 그 반사이익을 얻었고 김종인이 비대위원장이 된 후 통합당에서는 막말 논란이 줄었으며 장외투쟁 대신 장내투쟁으로 전환한 것과 초선 윤희숙의 나는 임차인입니다 라는 명연설로 중도층이 상당수 유입되었다. 전례없는 폭우로 침수피해 입은 지역 중 호남을 가장 먼저 방문하여 피해에 관한 위로를 하는 결단력 있는 행동력을 보였다.

8월 13일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미래통합당의 지지율이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율보다 높게 나온 것으로 조사되었고, 중도층에서는 오차범위 밖에서 민주당을 앞섰다. 물론 직후에 터져버린 사랑제일교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 사건으로 인해 지지율이 다시금 떨어지고 말았지만 어찌 되었든 미래통합당 입장에서는 총선 참패로 인해 힘들어진 상황을 상당부분 회복했으며, 이 사건이 끝난 이후에는 미래통합당의 당명 변경과 여러 변화가 예정되어 있는지라 결국 이 시점에서 다시금 당을 살릴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김종인의 정치인생 마지막 승부수가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인지 중요한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후 재보궐선거에서는 황교안 체제의 가장 큰 문제였던 친박과 태극기 부대의 완전배제와 국민의힘 당직자들의 입막음을 철저하게 수행해 낸것과 동시에 안철수와 오세훈의 단일화 경쟁으로 주목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하고 LH 사태와 백신, 그리고 부동산 민심으로 민주당의 지지율이 낮은것이 시너지를 불러일으켜 결국 출구조사에서 서울 전 지역 오세훈 우세와 부산에서 박형준 60% 득표율이라는 진기록을 이뤄내는 등 국민의힘 구원투수로서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실현해냈다. 2020년 21대 총선 이후 여당에 모든 상임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넘겨주거나 장외투쟁을 포기하고 극우파들과 거리를 두는 등의 행보로 비판과 비난에 시달렸으나 결과적으로 거대 여당의 폭주로 인한 법무부와 검찰 간의 갈등, 부동산 정책 실패 등에 대한 책임이 전혀 전가되지 않으면서 김종인의 이러한 행보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다만 서울시장 야권 단일화 과정에서 본선도 아닌 경선치고 상대 후보인 안철수에 대한 비방전이 다소 과한 감이 있었던데다, 선거 직후 지나친 공치사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보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김종인의 한계는 이미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던 202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에 180석을 내준 참패에서 한계가 입증되었으며,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의 승리 역시 궁극적으로는 정부에 대한 불만, 특히 LH 투기 사건으로 정부와 여당에 대한 지지가 추락하면서 반정부 민심이 모아진 결과물일 뿐 특정 개인의 공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선거 이후 김종인은 국민의힘, 특히 중진 정치인들을 두고 "외부 세력과 야합하여 권력 투쟁에 골몰할 생각만 해서는 정권 탈환이 불가하다"며 "정신 못 차렸다"고 날선 비판을 가했고, 여기에 국민의힘 정치인들 역시 야권 화합을 강조하면서 "곱게 떠나시라"는 반응이다. 여기에 더해 "야권의 승리"라는 발언을 두고 국민의힘과 국민의당 쌍방에 독설을 날리는 등 마지막까지 잡음을 일으키는 모습 때문에, 선거 승리에도 불구하고 국민의힘 전통 지지층이나 국민의당 지지층에서는 여전히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편이다.

 

김종인 안철수

 

안철수와의 갈등 끝에 선거 승리.

2021년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안철수가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함에 따라, 국민의힘과 국민의당의 단일화 가능성이 새롭게 대두되었다. 단일화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국민의힘 후보, 안철수가 각자 출마했다가 표 분산으로 민주당이 당선될 경우, 다음 대선에서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인지라 지지층 대부분은 단일화를 바라는 입장이었는데, 매번 안철수와의 갈등을 부추기는 발언을 하고 단일화 가능성을 떨어뜨리는 행보를 보여 신뢰도가 상당히 떨어진 상황이다.  그래서 목표가 정권교체인 것에는 안철수에 동의하면서, 정작 꼭 국민의힘 후보가 당선되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은 결국 정권교체란 목표는 안중에도 없고 그저 자당의 이익만 추구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앞서 김종인은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 안철수로 구성된 3자구도로 맞붙어도 승리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보인 적이 있었는데, 여론이 전혀 그렇지 않음을 뒤늦게 깨달은 모양인지 한달이 지나지 않아 갑자기 "야권 단일화는 숙명적"이라며 입장을 바꿨다. 그러나 안철수가 지난 대선에서 야권 단일화를 하지 못하고도 그대로 출마했듯이, 여전히 국민의힘 후보로 단일화를 하자고 주장하는 김종인의 주장에 안철수가 따를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안철수의 입장은, 국민의힘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기 때문에 국민의힘 간판으로는 야권의 승리가 어렵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권에 대한 심판론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이 곧 국민의힘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는 점, 아직 지난 정권에 대한 불신 및 부정적 시각이 가시지 않은 점, 양당정치체제의 신물이 나 이탈한 중도층이 크게 늘어났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이는 합리적인 시각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행히도 오세훈과 안철수의 단일화 경쟁에서 오세훈이 승리하면서 안철수가 이에 승복하고 매우 적극적으로 투표운동을 도와준 결과 국민의힘이 선거에서 민주당을 압살해 정권교체 가능성에 청신호가 켜지기 시작하면서 본인의 정치경력을 승리자로 기록함은 물론 대한민국 보수정당의 구원자 역할을 충실히 하는데 성공하여 킹 메이커의 면모를 다시 한번 보여줬다.

 

 

퇴임 이후

2021년 재보궐선거가 끝나고 은퇴 이후 국민의힘, 야권, 안철수에게 거센 비판을 잇따라 하면서 이에 반발하는 일부 국민의힘 정치인들과 안철수를 옹호하는 여론에 많은 비난을 받고 있으며 국민의당과의 협력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표출하여 이에 반발한 안철수, 국민의당 지지 여론에서 김종인을 거세게 비난함과 동시에 권은희 국민의당 원내대표도 공개적으로 김종인을 비난하였다.

 

국민의힘 비판 행보

하지만 은퇴후에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을 하면서 쌓여온 것들이 많아서인지 결국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국민의힘의 정치인들의 행적들에 대해 거세게 비판을 하였다.

주호영에 대해 안철수를 서울시장 후보로 만들려던 사람이라고 직격으로 비판하며 주 대표 대행이 국민의당과 통합을 추진하는 것을 두고 "내가 그 사람은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다"고 성토하며 내가 그런 사람들을 억누르고 오세훈을 후보로 만들어 당선시켰는데, 그 사람들이 또 지금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울시장 후보 경선 당시 국민의힘 중진 의원들이 당내 오세훈 후보가 아닌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를 지지하면서 오 후보에게 사퇴를 종용하기도 했다고 폭로했다.

김병준 전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비대위원장이자 현직 국민의힘 세종시당위원장이 자신에 대해 뇌물을 받은 전과자'라며 윤 전 총장이 손을 잡을 리 없다고 비난한 김병준 전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비대위원장을 두고는 "진짜 하류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반발했으며, 국민의힘 장제원 의원에 대해선 “홍준표 의원 꼬붕”이라며 “상대도 안 한다. 지가 짖고 싶으면 짖으라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국민의힘에서도 김종인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들이 나왔다. 4선의 권영세 국민의힘 의원이 이날 국민의힘 중진 의원 연석회의에서 “마시던 물에 침을 뱉고 돌아서는 것은 훌륭한 분이 할 행동이 아니다”라고 비난하는가 하면 또 다른 중량급 인사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원래 그런 사람”이라며 “자기 장사를 위해 일부러 저러는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국민의힘과 김종인 사이의 갈등이 불거졌다. 장제원은 "선거가 끝난 지 고작 일주일 남짓 만에 저주의 막말을 쏟아내는 것은 탐욕적 당 흔들기에 불과하다", 기술자 정치는 반드시 청산해야 할 구악김 전 위원장은 희대의 거간(居間) 정치인으로 기록될 것"이라는 표현들을 써가며 김종인을 비난했다.

또한, 김종인은 국민의힘을 두고 "아사리판"이라고 비판했는데, 실제로 국민의힘은 재보궐선거 이후 당대표 선거에서 자중지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선 안철수, 국민의당과의 통합이 논란이 되었다. 차기 당권과 야권 통합 문제를 놓고 당내 파열음이 터져나온 것. 국민의힘 비대위원들은 주 권한대행이 당권을 거머쥐기 위해 통합을 지렛대로 삼고 있다고 의심하는 중인데 실제로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를 상대로 통합 논의에 별다른 진전이 없는데도 마치 조만간 극적 타결에 이를 것처럼 포장하며 거취 결단을 미루고 있다는 지적이다. 현재 주호영은 신설 합당에, 비대위원들은 안 대표의 개별 입당에 기울면서 국민의힘 통합에 대해 시각차가 크다. 한 비대위원은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안 대표가 국민의힘에 입당하면 그만"이라며 "신설 합당까지 하면서 통합할 이유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에 대해 15일 비대위 비공개회의에서 "합당이 비대위에서 논의된 적 없다"(김현아), "합당의 당위성이 뭔가"(김재섭)라는 문제 제기부터 "거취부터 결정하라"(김병민)는 압박까지 다양한 목소리가 쏟아졌으며 지난 12일 재선 모임, 14일 4선 이상 중진 모임과 초선 모임에서 일제히 주 대표대행을 견제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태경 등은 아예 주호영의 조기 퇴진을 요구하고 있는데 문제는 주호영이 물러나더라도 당권과 통합을 둘러싼 난맥상은 당장 봉합되기 어려울 전망이다. 실제로 국민의힘 핵심 관계자도 언론에서 당 대표를 노리는 주자들의 '뒷작업'이 판치고 있다며 김 전 위원장의 '아사리판' 발언이 선견지명이 돼가는 것 아닌가 라며 우려를 표했다.

 

김종인 안철수2

 

국민의당/안철수에 대한 비판

11일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에 대해 “그 정도 수준 정치인밖에 안 된다고 확신했다”고 밝히며 안철수가 야권의 승리라는 표현을 쓴 것에 대해 비판하며 어떻게 건방지게 그런 말을 하나. 자기가 이번 승리를 가져왔다는 건가”라며 “유권자들은 ‘국민의힘 오세훈’을 찍었다. 안철수는 ‘국민의힘 승리’를 축하해야 했다”고 반박했다.

국민의힘과 국민의당의 합당 논의에 대해서는 비판하며“안철수는 지금 국민의힘과 합당해서 대선 후보가 되겠다는 욕심이 딱 보인다”“서울시장에 출마하면서 대선은 포기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사람이 대통령 되면 나라가 또 엉망이 된다”고 했다. 오 시장과 안 대표의 단일화 효과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3자(오세훈·안철수·박영선) 대결로 해도 우리가 이긴다”고 반론했다.

김종인의 안철수 비판에 국민의당은 거세게 반발했다. 국민의당 구혁모 최고위원은 이날 당 최고위 회의에서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겨냥해 “뇌물수수로 징역형을 받아 의원직이 박탈된 범죄자 신분이었으니 쌓았던 공도 그렇게 크진 않은 것 같다”고 원색적으로 비난해서 이준석 전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사과하지 않으면 공개적으로 더 크게 문제 삼을 것“이라고 받아쳤다 .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캠프 구원투수, 갈등으로 조기강판

이준석 대표와 윤석열 후보 캠프와의 갈등이 폭발하면서 윤석열의 지지율이 처음으로 이재명한테 역전당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결국 선거 승리를 위해 윤석열이 한발 물러서 갈등이 가까스로 수습되었고 12월 3일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직을 수락하였다. 고령의 나이임에도 4월 재보선에 이어 국민의힘 대선캠프를 이끌게 되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얼마 못 가 윤핵관의 지속적인 도발과 이를 막으려는 당대표 이준석과 당대표를 나잇빨로 밀어붙이려던 조수진의 갈등이 폭발하고 조수진이 재도발하는 등 트롤짓 덕에 이준석 당대표는 조력을 포기를 선언하고 선대위 사퇴를 하는 대악재를 만나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준석 당대표에게는 자신이 만류하였는데도 나간 것과 나가고 난 뒤 당대표라고는 전혀볼수없는 마치 제3자 처럼 논설,평가하는 모습에 섭섭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와중에 윤석열 대선후보로부터 선대위 대수술을 할 권한을 받게 된다.

그런데... 윤석열 대선 후보자는 김건희 여사의 대국민 사과가 전혀 안 먹혀든 것과 윤석열 후보자의 계속된 망언으로 대중들의 지지도가 계속 내려가는 와중 2021년 재보궐 선거의 승리에 일조한 2030 청년들을 무시하고 친윤파에서 페미니스트 진영 인사들을 영입하는 행보로 인해 2030 청년들의 지지철회가 늘어나면서 대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이다.하지만 김종인이 이들을 모두 날려서 다시 위기에서 1차적으로 벗어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윤석열 후보는 자신을 꼭두각시화와 지지율 떨어진것은 온전히 후보책임 메시지가 담긴 메시지에 자신에 대한 쿠데타라며 되려 노발대발하였고 결국 5일에 선대위 해체로 김종인을 자르는 수단을 취한다. 이에 김종인은 나가더라도 내발로 나가겠다며 구원투수 역할을 하기도 전에 종료되었다.

김종인이 나간 당일 몇시간만에 윤석열과 친윤주도로 하는 청년간담회를 파국으로 장식하면서 김종인이 그냥 제발로 윤석열과 손절한게 킹메이커 이미지를 유지시키는 신의 한수였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김종인은 이번 대선에서 패배할 경우 이준석이 당의 분란의 중심이었던만큼 당대표로서 져야하는 책임은 물론 대표직 사퇴는 물론이고 앞으로의 본인 정치인생에 대한 사망선고를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평가했다.(이준석이 아니꼬왔던 모양) 

그러나 이준석의 세대포위론이 반쯤 성공하며 정권교체를 하게 됐다.

 

 

김종인 재산

2016년 국회의원 시절 신고한 재산만 85억 486만 6000원에 달한다. 평소 선거운동 등에서 차고 나오는 시계와 금괴를 3억원 이상 가지고 있다는 설로 봤을 때, 현재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김종인 재산과 시계 금괴 등 재산형성 과정의 ‘의혹들’ 논란 - 한강타임즈

[한강타임즈 = 박귀성 기자] 김종인 재산 형성 과정 의혹에 이어 시계와 금괴까지 논란이 불거지자 더불어민주당이 ‘선거 막판 음해’라면서 펄쩍 뛰었다. 김종인 시계는 지난 9일 세종시 지원

www.hg-times.com

 

 

김종인 여담 일화

누군가가 김종인 자신을 당대표로 추천하는 내용으로 쓴 페이스북 글을 공유했다가 삭제했다. 그동안 김종인은 당대표에 대한 욕심이 없다고 밝혀왔는데, 이번 일을 통해 속마음이 드러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후에 해명하길, 실수로 누른 것이며 그 글을 읽지도 않았다고 했다.

보수정당과 민주당계 정당을 수시로 오갔음에도 불구하고 철새 정치인이라는 비판이 거의 없는점은 특이하다. 오히려 각 정당에서 선거때마다 모셔가려고 손을 내밀 정도이다. 오랜 정치 경력으로 원로로써 대접을 받고있다고 봐야한다.

대선급 정치인을 제외하고는 가장 다양한 별명이 있다. 대표적인 별명은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 시절 붙은 '차르'로 반대당의 안철수도 인용한 적이 있다. 상술한 여의도 포레스트 검프는 물론 "추호도 ~할 생각이 없다"는 말투에서 딴 '추호노인'이나 항상 전권을 달라고 '전권영감' 같은 비야냥성 별명도 있는가 하면, 갓종인 킹종인 같은 긍정적 별명도 있다. 경제민주화 전도사라는 별명도 있었다. 보수, 진보 정권 모두에서 선거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경험으로 선거때마다 정당들은 그에게 손을 내밀어 '정치 기술자', '선거 기술자'라는 별명도 있다.

2020년 6월 대선주자 후보로 백종원을 언급했다가 여론을 한번 들썩이게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인터넷 반응은 물론 여권, 야권 정치인들도 웃기는 소리하지 말라며 저격했지만, 그만큼 대중적이고 참신한 야당의 대권 후보나 새로운 선출방식을 기대하고 있다는 정도로 해석한 관점도 존재한다.

 

 

김종인 선거 이력

1981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5,776,624 (35.6%) 당선 (49번)

초선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7,040,477 (35.2%) 당선 (32번)

재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관악 을

34,752 (27.12%) 낙선 (2위)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7,923,718 (38.5%) 당선 (11번)

3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1,510,178 (7.1%) 당선 (2번)

4선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6,069,744 (25.5%) 당선 (2번)

5선

 

전국구, 비례대표 의원만 다섯 번을 했고, 17대 총선과 20대 총선에서는 민주당계 정당에서 당선됐다. 딱 한 번 나온 지역구 출마기록인 13대 총선에서는 이해찬에게 패배하며 지역구에서는 당선되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국회의원 당선 모두가 비례대표를 통한 것이었고, 특히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당선을 통해 제20대 국회 국회의원 최고령자로 기록되었다. 비례대표가 초선 의원들을 위한 자리로 인식되는 한국 정치지형에서는 나름 특이한 이력이다.

그나마도 다섯 번의 의원 생활 중에서 한 번은 뇌물수수, 다른 한 번은 의원직 상실로 제대로 의원생활을 한 건 11, 12, 17대 뿐이다.

 

김종인 선거운동

 

 

김종인 책 저서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2012, 2017)

2012년에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라는 책을 썼고 2017년에 이를 다시 수정, 재출간하여 『결국 다시 경제민주화다』가 나왔다. 경제에 관한 책인데 일반인이 이해하기는 쉬운 편이다. 저자가 독일 뮌스터 대학에서 재정학을 전공한 경제학박사이고 경제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한 경험도 있으나 정치인 활동이 길어서 그런지 경제학 학술서 같은 느낌은 아니다. 특히, 이 책에는 의료 보험, 재형 저축, 부가가치세 등의 도입 과정과 저자가 평생을 걸쳐 세 번이나 시도한 노사 관계 재정립을 위한 노동법 개정 등의 얘기가 담겨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저자의 풍부한 독서와 경험을 바탕으로 자본주의 역사와 원리에 비추어 시대마다 정치인이 해야 하는 역할에 대해 강조하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 책을 통하여 저자의 경제민주화는 독일식 사회자유주의인 '질서자유주의'의 영향을 짙게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거대 경제 세력에 대한 정치의 견제 기능을 강조하는데 이는 시장가격기구를 신뢰하면서도 공정한 시장을 지키기 위해 국가 질서의 원칙을 강조하는 질서자유주의와 유사하다.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2020)

2020년에는 회고록을 집필했다. 박정희 정부에서부터 문재인 정부에 이르기까지 역대 정부에서의 경험과 평가를 담고 있다. 주로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사에 관한 이야기가 중심적인 내용이다. 특히 노태우 정부 시절의 이야기가 풍부히 담겨있으며, 상술하다시피 본인의 손을 거친 두 대통령, 박근혜와 문재인을 비판한 대목이 주목받기도 했다.

 

왜 대통령은 실패하는가?(2022.1.28)

킹메이커, 김종인의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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