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연우무대를 창립한 구성원 중 하나로 사실주의계열 공연예술인 출신이기도 하다. 정치계파상 분류를 하려면 민평련계로 분류는 되지만, 내부에서 비주류에 해당되어 사실상 범민평련계 겸 비노 정도의 포지션을 가지고 있다. 70년대부터 80년대 초까지는 김지하, 임진택, 채희완 같은 문예운동계 선배의 뒤를 이어 박인배 등과 함께 2세대 문예 민주화운동, 문예 노동운동계의 정통파로 활동했다.
1983년부터 민청련 결성을 주도하면서 문예운동세력에서 공개적 민주화운동 세력으로 옮겨갔고, 87년 개헌 이후 90년대 초반 민청련 의장 역임 후 90년대부터 중앙정치계 진출을 통해 정체성이 문예운동가 쪽에서 공개 민주화운동 출신 정치인쪽으로 완전히 변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중앙정치 진출로의 부침에서 특정 계파들과의 트러블까지 생기면서 힘을 받기 어려운 정치인이 되어 민주화 운동경력에 비해 인지도가 많이 떨어지게 되었다.
연극배우 겸 연출가 출신 정치인답게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청장 재임 시절(2기~3기)인 2010년대에 영화공간주안이나 학산소극장, 시민미디어센터 등 연극영화 관련시설을 미추홀구에 대량유치한 걸로 유명한 인물이다.
박우섭 나이 고향 학력 이력 프로필 (인천 남구청장 역임)
박우섭
朴祐燮 | Park Woo-seop
출생
1955년 7월 22일 (66세)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본관
무안 박씨
학력
용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미생물학 / 학사)
인하대학교 (행정학 / 석사)
종교
감리회
병역
단기사병(질병 사유)
가족
아버지 박주학, 어머니 김기배
형제 1남 4녀
부인 이미영
슬하 2남(장남 박기모)
재임기간
제18·20·21대 인천광역시 남구청장
2002년 7월 1일 ~ 2006년 6월 30일
2010년 7월 1일 ~ 2018년 6월 30일
경력
민청련 1대~4대 총무부장
민청련 5대 운영위원장
민청련 9대 부의장
민청련 11대 의장
민주당 부대변인
임채정 국회의장 비서실장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청장(3선)
박우섭 생애 고향 학력 이력
1954년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경찰인 부친 박주학과 모친 김기배의 1남4녀 중 셋째이자 외아들로 태어났다. 경찰이었던 부친이 충청도 내에서 발령이 날때마다 이사를 다녀야했기에, 서산군 태안면으로 이주하여 서산태안초등학교에 재학하다가, 당진군 당진면으로 이주하여 당진기지초등학교를 다니다가 4학년때 당진초등학교로 전학가서 졸업하였다. 상류층 출신은 아니라 어릴때 부유하지 않았으나, 부친이 파출소장이나 경찰서 계장을 하는 등 60년대 초반 기준으로는 평균보다 나은 경제사정으로 가난하지는 않게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박우섭은 초등학교에 도시락을 못싸온 아이들과 자기 도시락을 나눠먹고, 학교 끝나면 당진의 냇가에서 그들과 쥐불놀이를 하며 놀곤 했다. 부모가 개신교(감리교)인이라 자연스레 어릴때부터 개신교인이 되었다.
국민학교때 당진에서 공부를 잘하는 걸로 유명했던 그는 졸업후 서울에 있는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고 서울로 유학하여 용산중학교, 용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문리대 미생물학과를 졸업하였다. 단, 운동권내에서 박우섭은 서울대학교 미생물학과 72학번인게 유명한데, 주민등록이 늦어진 케이스로 추정된다. 실제 나이는 1954년생으로 알려져 있다. 공연예술활동으로 민주화운동을 이끌던 운동가 출신 정치인으로, 신입생때 서울대 단과대 풍물패 중 하나로 유명한 '두레'에 있으며 학생운동에 처음 관심을 두게 되었으나, 이내 연극에 빠져 두레활동을 금방 그만두고 서울대 문리대 연극회에 들어가 연극배우 생활을 하며 연우무대 초기 구성원으로까지 활동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때 연행되었던 1000여명의 학생 중 하나였다. 시위 주동자는 아니어서 오래 잡혀있지 않았다고 하는데, 당시 시위주동자 중 하나로 잡혀간 이해찬이 경찰서에서 경찰들에게 엄청나게 폭행당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었다고 한다. 경찰서에서 풀려난 이후에도 계속 주요시위에 참여하여 1975년 4월 3일 긴급조치 반대 시위, 소위 43시위 때도 또 잡혀가서 한달간 잡혀 있었다. 이후 서울대에서 무기정학을 당해버렸고 곧바로 징병 영장이 나와서 1976년 가을까지 방위로 복무하였다. 그러던 중에도 연극활동을 계속하였고 소집 해제 후에는 이미 퇴직한 아버지 대신 경제활동을 해야 했기에 회사를 다니기로 결심해, 대한항공 고졸신입 공채시험을 봐서 합격했고 1976년말부터 1978년 가을까지 2년이 조금 안되는 기간동안 회사원 생활을 했는데, 그러던 와중에도 1977년에 연우무대 창립에 참여해서 연극인 생활을 병행했다. 회사생활을 2년도 못한건 잘렸기 때문인데, 학생운동하던 후배들 몇명을 숨겨주다가 경찰에 잡혀서 1978년 가을에 구속되었고, 연말에 집행유예로 풀려났기 때문이다. 출소한 이후 1979년에는 연극만 했고 온전히 예술인 겸 문예 노동운동가로 살려고도 고민했다고 하는데, 1년도 안되어 그해 가을 박정희가 죽고 연말에 전두환의 쿠데타로 신군부까지 들어서면서, 기껏 군사독재가 끝난걸 또 연장시킨 전두환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적개심으로 1980년부터 김근태 같은 선배들처럼 공개적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어 그들과 함께 목숨을 건 생활을 하며 공개운동 지도자로 사회적 정체성이 변해버리게 되었다.
그렇게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다 고초를 겪었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중 학원소요사태에 연루되어 수배범이 되었고, 이후 전두환 측이 강력하게 학생운동 수배자들을 잡아올 것을 지시하자, 인천과 부천 등지로 도망쳐 3년간 이리저리 숨어사는 수배자 생활을 하였다. 도망자 6명이 사는 인천 구월동 신축주공아파트 월세방을 본진으로 하면서, 비상사태 때마다 수도원이나 지인집 등을 옮겨다니며 살았는데, 그러던 도망자 생활 중에도 경인지역 공장노동자들의 노동연극을 주도하거나 다른 연극인들을 노동연극단체와 연결하는 등 노동문예운동에 계속 관여하였다.
10명도 안되던 초기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즉 민청련 결성 계획부터의 주동 세력(당시 민청협 이후 인천시 구월동에 숨어 살거나 인천부천을 왔다갔다 하며 살던 사람들이 많아 소위 구월동사람들이라 불리운다. 그중에 김근태도 있었다.)이었고, 최민화와 함께 김근태를 의장으로 추대하며 초기 민청련을 이끌던 인물. 이후 공권력의 민청련을 향한 공세가 시작되고, 의장 김근태가 잡혀간 이후에는 박우섭 본인도 잡혀가기도 하고, 출소하고 나서 민통련 활동과 민청련 부의장 활동을 병행하기도 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1989년 11대 의장이 되었다. 먼 미래에는 파가 갈리지만, 고등학교 1년선배 겸 서울대 동기로 함께 7080시대 민주화운동을 한 절친 이해찬과도 민청련에서 함께 활동했었다.
1987년 6월 항쟁 때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 중 하나인 총무국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박우섭 정치 활동
1991년 신민주연합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통합 야당 민주당이 출범하자 부대변인을 지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에 인천직할시 북구 을 선거구로 공천을 신청하였으나 이병현에 밀려 탈락하였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조순 서울특별시장 후보 캠프의 대변인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김대중이 정계 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가 창당되자 새정치국민회의로 당적을 옮겼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인천광역시 남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신한국당 심정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공천에서 유필우 전 인천광역시 정무부시장에 밀려 탈락하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해당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민봉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한나라당에 입당하였고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인천광역시 남구청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다시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있다가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인천광역시 남구청장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이영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같은 해 이호웅의 국회의원직 상실로 치러진 2006년 재보궐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인천광역시 남동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이원복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8년 4월부터 같은 해 7월까지 임채정 국회의장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인천광역시 남구청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법률소비자연맹에서 발간한 지자체장 공약이행평가에서 221위를 기록했다. 다시 말해 꼴지.
이런 평가가 무색하게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인천광역시 남구청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7년 2월 손학규를 따라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여 국민의당에 입당하였다. 이때부터 본인의 정치인생이 꼬여버리기 시작하는데, 국민의당 지지율이 완전히 망가져버리자, 본인의 향후 정치인생도 장담할 수 없게 되었고, 국민의당·바른정당 합당이 완료되기 전인 2018년 1월 31일 국민의당을 전격 탈당하였으며, 바른미래당에 합류하지 않고 무소속 신분을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나아가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도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이후 2019년 5월 24일, 자신이 구청장을 맡았던 남구의 후신인 미추홀구 을 선거구에 출마를 선언하며 더불어민주당으로 복당하였고, 6월 25일에 남구 을 지역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21대 총선 동구·미추홀구 을 예비후보로 등록하였지만 경선에서 남영희에게 밀렸다.
이후에는 사회단체 운동에 매진하는 등 사실상 정치계와 거리를 두고 있다. 한때 일부 언론에서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인천광역시장 예비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출마 계획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박우섭 여담 일화
문화예술운동 쪽 민주화운동가 출신이라 예술계 인사들과도 친분이 있어, 정치인으로서는 특이하게 영화 출연 경력이 있다. 서울대 문리대 연극반 시절부터 알고 지낸 선배인 장선우 감독의 꽃잎에서 의사 역할 단역으로 나왔고,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 사람들에도 단역으로 나왔다고 한다.
박우섭 선거 이력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인천 남 갑
26,304 (27.96%) 낙선 (2위)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인천 남 갑
13,745 (17.58%) 낙선 (3위)
2002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인천 남구청장
62,454 (50.80%) 당선 (1위)
초선
2006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인천 남구청장
43,818 (31.60%) 낙선 (2위)
2006
하반기 재보궐선거
인천 남동 을
4,203 (12.29%) 낙선 (3위)
2010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인천 남구청장
86,996 (53.32%) 당선 (1위)
재선
2014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인천 남구청장
86,214 (50.20%) 당선 (1위)
3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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