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전직 국회의원. 이명박 전 대통령의 친형으로, 이명박 정부 시절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상왕이라고 불리며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렸다. 비슷한 의미인 영일대군, 만사형통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야당과 언론에서도 이를 이용해 마구 깠다.
정두언의 말로는 이명박 정부에서 높은 사람들끼리 있을 때 이상득을 지칭하는 단어가 그냥 형님이었다고 하지만 당사자가 자리에 없을 때 한정이다. 세월이 흘러 정계에서 밀려난 정두언이 방송에 많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동생 따라 SD라고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정치인 이상득 나이 고향 학력 이력 가족관계 프로필
이상득
李相得 | Lee Sang-deuk
출생
1935년 11월 29일 (86세)
오사카부 나카카와치군 나가요시무라 다이가쿠나가하라 1333
(現 오사카부 오사카시 히라노구 나가요시 나가하라 1쵸메 8-2)
사저
서울특별시 성북구 선잠로5길 39-2
본관
경주 이씨
재임기간
제17대 후반기 국회부의장
2006년 6월 19일 ~ 2008년 5월 29일
부모
아버지 이충우, 어머니 채태원
형제자매
누나 이귀선, 형 이상은
여동생 이귀애, 이윤진
남동생 이명박, 이상필
배우자
최신자
자녀
1남 2녀
학력
포항중앙국민학교 (졸업)
동지중학교 (졸업)
동지상업고등학교 (졸업)
육군사관학교 14기 (중퇴)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 / 학사)
병역
대한민국 육군 이병 소집해제
종교
개신교 (장로회)
신체
178cm, 77kg, O형
약력
코오롱 대표이사 사장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자문위원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정책분과 상임위원
주한 세네갈 명예총영사
실로암안과병원 이사
제13대 국회의원 (경북 영일군·울릉군 / 민주정의당)
제14대 국회의원 (경북 영일군·울릉군 / 민주자유당)
민주자유당 국제화전략특별위 제1분과 위원
민주자유당 제1정책조정실장
민주자유당 제2정책조정위원장
신한국당 제2정책조정위원장
신한국당 경북도지부위원장
신한국당 정책위원회 의장
제15대 국회의원 (경북 포항시 남구·울릉군 / 신한국당)
신한국당 당무위원
제15대 국회 전반기 재정경제위원회 위원장
신한국당 대선기획단 직능본부장
한나라당 당무위원
한나라당 대선기획단 직능본부장
한나라당 원내총무
제15대 국회 전반기 국회운영위원회 위원장
한나라당 정책위원회 의장
한나라당 뉴밀레니엄위원회 부위원장
제16대 국회의원 (경북 포항시 남구·울릉군 / 한나라당)
한나라당 지명직 당무위원
한나라당 국가혁신위원회 부위원장
한나라당 사무총장
한나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선대본부장
한나라당 최고위원
한나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부위원장
제17대 국회의원 (경북 포항시 남구·울릉군 / 한나라당)
제17대 후반기 국회부의장
제18대 국회의원 (경북 포항시 남구·울릉군 / 한나라당)
한일의원연맹 회장
이상득 생애 고향 학력 이력
초년기~기업인 시절
1935년 11월에 오사카부 나카카와치군 나가요시무라 다이가쿠나가하라 1333번지에서 목장 노동자로 일했던 이충우와 채태원 사이에서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1945년 광복 이후 영일군 흥해읍 덕실마을에 정착하였다.
포항 동지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14기로 입교했다가 중퇴하고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코오롱그룹에 공채 1기로 입사해 (주)코오롱 대표이사, 코오롱상사 사장을 지냈다.
국회의원 시절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경상북도 영일군ᆞ울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울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97년까지 신한국당 정책위의장을 역임하였다. 1997년 말 신한국당이 통합민주당을 흡수하여 한나라당이 되자 한나라당 원내총무가 되었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을 역임하였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02년까지 한나라당 최고위원을 역임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05년까지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제17대 국회 후반기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의 대선자금을 거의 혼자서 조달하다시피 했다. 당시 대선 캠프의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서 돈을 받아 비용을 충당했다고 한다. 또한, 이상득은 대선 후보 경선에서 전국 조직을 지휘하면서 캠프 내의 친이, 친박 분파주의까지도 견제하는 등 철저하게 조직을 관리했고, 이 때문에 대선 과정에서 "형이 없었으면 이명박 대통령은 만들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렇게 고생을 한 덕에 이명박 정부에서 상왕이라는 농담 반 진담 반 별칭으로 불리며 최고의 실권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그리고 임태희, 박영준 등은 그의 정치적 양자로 불리면서 권력의 핵심에 진입했다.
2008년 이명박이 대통령에 취임하고 같은 해 치러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두언을 비롯한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의 불출마 요구가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해당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후 여론이 좋지 않자 2선 퇴진과 함께 자원외교에만 전념하겠다고 선언했는데, 문제는 그의 곁에 몰려든 공기업 사장들과 함께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어마어마한 부실투자를 주도했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이른바 만사형통('만사'(모든 일)는 '형'을 '통'하면 풀린다)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이외에도 고향 이름을 딴 영일대군, 상왕 등 각종 호칭이 생겼다. 특히 2008년 18대 총선을 앞두고 정두언 의원 등 여당 소장·쇄신파의 불출마 요구를 묵살하고 6선 고지에 오른 후 그의 위세는 더욱 막강해졌고, 매년 예산안 심사 때마다 이 전 의원 지역구에 상당한 예산이 책정되면서 이른바 "형님 예산"이라는 조롱까지 나왔다.
이상득 사건 사고
저축은행 비리
이명박 정부 말인 2012년 솔로몬·미래저축은행 등으로부터 7억6000만 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헌정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의 친형으로서 구속되는 불명예를 안게 된다. 결국 대법원에서 징역 1년 2개월의 실형이 확정되어 징역을 살았고, 2013년 9월 8일, 만기 출소했다.
포스코 비리
2015년 10월 5일, 포스코 비리와 관련하여 검찰의 수사를 받았다. 제3자를 통해 금품을 수령한 혐의를 받고 있으며, 유죄가 인정될 경우 형량이 징역 15년이라고 한다. 그러나 2016년 11월, 이에 대한 혐의로 검찰에서 징역 7년과 벌금 26억을 구형했고, 2017년 1월에 1심 판결이 나왔다. 형 결과, 징역 1년 3개월이 나왔는데, 재판부는 이상득의 건강상태와 고령임을 감안해서 법정구속하지는 않았다.
그 뒤 2017년 가을 항소심 때는 징역 7년이 구형되었다. 2심 선고는 2017년 11월 15일이었고, 항소심도 쌍방의 항소를 기각했다(즉, 1심과 결론이 같았다. 이상득은 이에 불복, 상고했다.
이후 2019년 5월 대법원에서 1,2심과 같은 형인 징역 1년 3개월형이 확정되었고, 5월 16일 서울북부지방검찰청의 형 집행에 따라 이상득은 서울동부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2020년 8월 만기 출소했다.
국정원 특활비 상납 의혹
2018년 1월 22일에는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상납받은 혐의로 검찰로부터 자택과 사무실이 압수수색을 받았다. 그리고 24일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출석해야 하나 불응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기사 링크 그 이유는 갑자기 압수수색을 당해 경황이 없어 변호인 준비 등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며, 1월 26일 출석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연기 의사를 밝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식당에서 지인과의 점심식사 도중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이명박 측 이야기에 따르면 이전에도 쓰러진 적이 있었으며, 수감생활 후 눈이 나빠지고 그 외의 지병도 많아 몸이 상당히 안 좋은 상태라고 한다. 하지만 이상득 측 변호인은 검찰에는 반드시 출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후 1월 26일, 휠체어에 탄 채 검찰에 출석했는데, 건강 문제로 4시간 만에 조사를 중단하고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상득 여담 일화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음에도 신장이 182cm로 어지간한 젊은이보다 크다. 장신으로 유명한 정치인 정몽준과도 큰 차이는 안 난다. 친형인 이상은도 비슷하게 키가 크며, 둘 다 어깨도 상당히 넓다. 동생인 이명박도 173cm니까 동세대 중에서는 큰 편이지만, 형들에 비해 골격이 그리 넓지도 않고, 형들의 키가 압도적으로 크기 때문에 가족 중에서는 작은 편이다.
큰 체격, 경상도 사투리라는 속성과 조금 어울리지 않게 말투나 목소리는 꽤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편이다. 동생 이명박이나 형 이상은은 전체적 말투는 비슷해도 부드럽거나 나긋나긋한 말투까지는 아니지만 이 쪽은 사투리 자체를 안 쓰는 사람들보다도 많이 나긋나긋한 편이다. 이에 비해 이명박과 이상은은 목소리나 말투가 흡사한데, 문장 끝부분을 살짝 쉰 소리로 끄는 듯한 말투가 더 뚜렷하다.
정두언의 말에 의하면 이상득은 평소에도 자신이 MB보다 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상득은 MB의 자서전격 저서인 '신화는 없다'에 대해 얘기가 많이 과장되었다며 본인을 내세우려고 가족들을 바보로 만들었다고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고 한다. 교회의 신앙 간증에서도 이명박이 가족 얘기를 하다 보면 상대적으로 자신이 폄하되는 것에 불만을 가졌던 것 같다고 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 취임 이후 여러 인터뷰들에서 자존심 상해하는 모습이 여러 번 비춰졌는데, 그 중 이상득의 이명박에 대한 열폭 레전드로 기자들한테 울먹이며 했던 얘기가 있다.
대통령 임기 종료 후 현역에서 은퇴해 강남구에 살고 있었던 이명박과는 다르게 이상득은 현재도 강북인 성북동에 거주하고 있다.
이명박의 아들보다 이상득의 아들 이지형의 외모가 이명박과 더 닮은 편이다. 실제로 외모를 보면 아버지 이상득보다 작은아버지 이명박과 외모 및 두상이 많이 닮았는데 특히 뿔테를 착용했을 때 모습은 더더욱 닮았다.
김근태 전 국회의원이 사망했을 때 조문하러 갔는데, 그 자리에서 김근태와의 인연을 언급하기도 했었다.
이명박처럼 대기업의 CEO를 맡기도 해서 정장을 보는 눈이 좀 있고, 키도 이명박보다 커서 그런지 수트핏이 상당히 좋은 인물이기도 하다.
박지원과 사돈지간이라는 얘기가 인터넷상에 많이 퍼져 있는데, 실제로는 이상득과 박지원은 사돈의 사돈지간이라고 한다. 그래서 서로 인맥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오히려 이상득의 진짜 사돈은 오명 전 건설교통부(現 국토교통부) 장관이다.
20대 국회에서 상반기 대한민국 국회의장을 맡았던 정세균 전 국무총리와 의외로 친분이 있다. 비록 이상득과 정세균이 상호간에 정당은 달라도 둘 다 대기업에서 종사했던 경력들이 있는데다 정세균이 대인관계가 상당히 좋은 인물인지라,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사이여도 인맥 관계가 형성돼 있는 듯 하다. 이 외에도 더불어민주당 소속 이강래 전 국회의원과도 친분이 있다.
2004년 6월 5일, 17대 국회 개원 시 첫 회의를 국회의장 직무대리로서 주재했다. 새 국회 개원 시 국회의장이 선출되어 있지 않은 관계로, 보통 최다선 의원이 국회의장 직무대리로서 국회의장 및 부의장단을 선출하는 회의를 주재한다. 당시 17대 국회는 탄핵 역풍으로 열린우리당 계열 초선 의원이 많이 배출된 상황에서 최다선 의원이 6선 김원기 의원이었지만 최연장자인 이상득 의원이 회의 주재를 맡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 전반기 국회의장으로 김원기 국회의장이 선출되었다.
2010년, 무아마르 카다피가 국정원의 리비아 내 공작에 항의하며 한국-리비아 관계가 경색되자 리비아에 특사로 파견하여 해결한 바가 있다. 그런데 불과 이듬해 카다피가 리비아 내전으로 몰락하자 카다피와의 인연을 고려하여 2011년 3월 국회를 통과한 '리비아 정부의 유혈진압 규탄 및 중동·아프리카 지역의 민주화 지지 결의안'에 기권하였다.
2012년 1월, 일제강점기 때 불법 유출된 조선왕조의궤 반환에 기여한 공로로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인 혜문스님에게 감사패를 받았다. 한일관계가 순풍이던 일본 민주당 집권시절 여야 정치인들과 정부가 합심하였다. 여당엔 이상득, 야당에 이낙연 전 의원이 일본과의 막후교섭에 공을 들였다고 한다.
이상득 선거 이력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영일/울릉
47,795 (51.67%) 당선 (1위)
초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영일/울릉
50,435 (52.89%) 당선 (1위)
재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포항 남/울릉
55,105 (48.77%) 당선 (1위)
3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포항 남/울릉
64,067 (53.45%) 당선 (1위)
4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포항 남/울릉
59,370 (50.10%) 당선 (1위)
5선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포항 남/울릉
68,392 (69.62%) 당선 (1위)
6선
한 지역구에서만 내리 6선을 달성하였으며 한 번도 낙선한 적이 없다. 지역구 자체가 특정당 공천만 받으면 100% 당선인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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