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치인, 사회운동가. 5선 국회의원 출신이다. MB정부 실세로 친이계 좌장이었다. 초기부터 쓴소리하다 날라간 정두언이나 후기에 부패 스캔들로 날라간 이상득과 달리 지금도 MB 곁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허나 그러다 보니 대표적으로 호불호가 갈리는 MB 시절 정책이랄 수 있는 대운하와 4대강 정비 사업 옹호 때문에 지금도 진보 진영에선 상당한 비판을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다만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거고, 과거 운동권 전설이었던 이력과 여전히 버리지 않은 개혁적인 성향, 그리고 친박 세력과 적대적이라는 점 때문에 나름 좋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 박근혜와 대립각을 세워 친박 진영에서도 곱게 보진 않는 인물이다. 현직은 국민의힘 상임고문이다.
정치인 이재오 나이 고향 학력 이력 프로필 (MB 측근, 친이계 좌장)
이재오
李在五 | Yi Jae-oh
출생
1945년 2월 23일 (77세)
강원도 강릉군 묵호읍 부곡리
(現 강원도 동해시 부곡동)
자택
서울특별시 은평구 구산동
본관
재령 이씨
현직
국민의힘 상임고문
비상시국국민회의 상임의장
비상시국국민회의 상임대표
국민통합연대 중앙집행위원장
건국대학교 석좌교수
재임기간
제2대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
2009년 9월 30일 ~ 2010년 6월 30일
제2대 특임장관
2010년 8월 30일 ~ 2011년 9월 19일
배우자
추영례
자녀
장녀 이고은, 차녀 이은별, 아들 이민호
학력
석보중학교 (졸업)
영양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경제학 / 학사)
국민산업학교 (농업경영학 / 학사)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전공 / 석사)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최고언론과정 / 수료)
병역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전역
종교
개신교
약력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사무국장
민중당 사무총장
제15대 국회의원 (서울 은평구 을 / 신한국당)
제16대 국회의원 (서울 은평구 을 / 한나라당)
한나라당 원내총무
제17대 국회의원 (서울 은평구 을 / 한나라당)
한나라당 원내대표
한나라당 최고위원
제2대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
제18대 국회의원 (서울 은평구 을 / 한나라당)
제2대 특임장관
제19대 국회의원 (서울 은평구 을 / 새누리당)
늘푸른한국당 대표
문재인하야범국민투쟁본부 총괄본부장
4대강보 해체 저지 범국민연합 공동위원장
이재오 생애 고향 학력 이력
1945년 2월 23일, 강원도 강릉군 묵호읍(현 동해시)에서 태어났다. 8.15 광복 후 경상북도 영양군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하여 그 곳에서 성장해 영양고등학교, 중앙대학교 경제학과](64학번)를 졸업하였다. 중앙대학교 농촌사회개발학과(현 도시계획부동산학과) 학생 시절이던 1964년 6.3 항쟁에 참여하였다. 1966년 4월부터 1969년 4월까지 군생활을 했는데, 이때 5사단 소속으로 포천이동중학교에서 군 파견교사 역할을 하기도 했다.
졸업 이후 대성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를 역임하였는데, 당시 가르친 제자 중 한 명이 현재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일하고 있는 노웅래이다. 이후 재야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였다. 1979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사무국장 자격으로 경북 안동댐을 방문했다가, 현장에 박정희의 방생기념탑은 크게 선 반면 안동댐 건설 공사로 숨진 노동자들의 위령탑은 초라하게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이 10월 유신독재의 실체"라고 비판했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구속된 적이 있다. 이후에도 재야 민주화운동에 몸담으면서 1989년 창립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의 조국통일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군부독재 시절 5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자그마치 10년 6개월간 옥살이를 했고 제6공화국의 노태우 정부 시절에도 사찰을 당했다. 이러니 군부독재 세력의 후예라고 할 수 있는 박근혜에게 호감을 느낄 리 만무하며, 박근혜 정부에서도 여러모로 박근혜와 친박에게 계속 적대적인 스탠스를 취하며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주장하는 인사 중 한명이였다. 오죽하면 영화 변호인을 관람한 후 은근히 박근혜 정부를 까는 글을 SNS에 올릴 정도였으니.
아버지는 독립군 활동을 했다고 한다. 참여정부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친일청산 관련한 법을 통과시키려고 했는데, 당시 친일법 대상을 촘촘히 해야 한다고 발언했던 김희선 의원의 부친이 만주국 공안국 특무경찰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던 김일련이었고 당시 독립군이었던 이재오의 아버지를 김일련이 잡아넣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재오 정치 생활
1990년 노동정당인 민중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중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은평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이원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러다 김영삼이 이끌던 문민정부 시절이던 1994년 김문수, 이우재 등과 함께 당시 여당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은평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새정치국민회의 이원형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으며, 이후 같은 선거구에서 한나라당, 새누리당 소속으로 다섯 차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2001년과 2006년 두 차례에 걸쳐 한나라당의 원내대표(원내총무)를 지냈다. 2000년대의 이재오는 한나라당의 대표적인 개혁파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16대 대선과 17대 대선에서 각각 이회창, 이명박을 지지하고 지원했다. 특히 2004~2006년 사이에는 당시 한나라당의 당대표였던 박근혜와 끊임없이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한나라당의 대표 비박계 인사로 여겨지기도 했다. 박근혜에게 친일청산 문제와 정수장학회 문제, 인혁당 사건 등 과거사에 대해 제대로 처리하고 넘어가라고 여러차례 비판하기도 했으며, 이에 박근혜는 대표 흔들기를 하지 말라며 응수하기도 했다. 이 후에도 이재오와 박근혜의 불편한 관계는 박근혜 정부 시기까지 계속되어, 이재오는 박근혜 정부 시절에도 대표적인 비박근혜 인사로 당내에서 활동하며 박근혜 정부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기도 했다. 결국 탄핵 사태로 두 사람의 불편한 관계는 정점을 찍게 되었으니...
이명박 정부 시절
이명박 대통령과는 대학 시절 한일회담 반대 학생운동(6.3 항쟁)때부터 알고 지내다가, 6.3동지회의 전임회장과 후임회장으로 인연으로 이어지고, 15대 국회에서 같이 의정활동을 하면서 가까워졌다. 이명박이 15대 국회 첫 질문에서 낙동강과 한강을 잇는 경부운하를 언급한 것에, '형님 진짜 그거야말로 나라를 바꾸는 거다. 그러면 이걸하려면 형님이 대통령 해야 되니깐, 국회는 내가 할 테니 형님은 대통령 하시오'라고 담화를 나눴다고 한다.
2007년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MB 캠프’의 좌장으로 활동하면서 캠프 내 조직과 구성원들의 인사(人事) 문제에 이르기까지 깊숙이 관여해 이명박 후보의 경선 승리를 가져온 1등 공신으로 활약했다. 당시 열심히 이상득, 정두언과 더불어 친이계의 실세였다.
하지만 계파 갈등 속에 치러진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창조한국당의 문국현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가, 문국현이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자 이후 치러진 2010년 재보궐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었다. 원외 신분이던 2009년부터 2010년까지는 국민권익위원장을 역임하였는데, 친이계 실세라서 당시 국민권익위원회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친이계 좌장으로 친박계와 다툼을 자주 벌였고, 실제 친이계가 당권을 잡은 18대 총선에선 친박계 공천학살을 주도했다는 의혹도 있다.] 당연히 독재자의 딸이라고 비판하는 등 박근혜와도 사이가 좋지 않아, 2012년 박근혜가 당권을 장악한 후 치러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진수희 등 자신을 제외한 측근들이 모두 공천에서 대거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
비박계와 손잡고 19대 국회에서 친박계의 불통, 권위주의를 비판하다가 결국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새누리당 공천에서 탈락하여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비박계 김무성 대표가 당직인 파동까지 벌이며 은평 을에 대해 무공천을 선언하며 당선 가능성이 높아졌고, 실제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진보 진영의 표가 분산되어 이재오 의원의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었다. 하지만 정의당의 김제남 의원이 더불어민주당의 강병원 후보와 단일화를 하면서 분위기가 전환되었고, 강병원 후보의 당선으로 이재오의 6선 도전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총선 이후 새누리당에 복당하지 않고 최병국 전 의원과 함께 중도 신당 창당 작업에 착수했다.
2016년 말 박근혜 정부 최악의 오점으로 남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11월 20일 검찰이 헌정 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을 피의자로 규정하자, 21일 박근혜 대통령의 검찰수사 전면 거부와 관련 "국민들은 대통령을 뽑을 권리와 의무도 있지만, 범죄자인 대통령을 끌어내릴 권리와 의무도 있다"며 맹디스를 날렸다. 그러면서 "범죄자를 대통령으로 받들고 그 하수인이 된 새누리당도 공범이다. 더 이상 당이 존립할 근거가 없다. 즉각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이날, 이명박도 "참담한 심정이다. 박근혜는 민심에 따라 당장 퇴진해야 한다."라며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
제19대 대통령 선거 출마
2017년 1월 11일, 늘푸른한국당을 창당하였다. 정운찬을 늘푸른한국당 대선주자로 세우는 것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2017년 3월 20일 본인의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였다.
대선 후보 등록 후 2017년 4월 17일 사진처럼 복면을 하고 나와서 대선 후보간 복면 토론을 제안하였다. 이재오가 친이계 및 정치계의 중진급 인사이기는 하나 아직 늘푸른한국당이 원외 정당인 데다가 역대급의 사태가 터져 보수계열 정당의 당선 확률 자체가 희박한 만큼 차차기 친이계 재건 및 대권을 노린 대선 출마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4월 24일 군소후보 토론회에서는 그래도 정치계에서 잔뼈가 굵었던 사람답게 9명 중 제일 정상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영국 같이 정말 허황된 공약들을 내세우는 군소후보들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체계적으로 짜인 공약들+진보적 통일관은 그가 괜히 5선 의원에 특임장관까지 역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 실제로 이 토론에서의 승자는 이재오라는 게 중론이다. 다만 특유의 쉰 목소리 때문인지 어딘가 모르게 답답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은 아쉬운 점.
토론에서 '신6자회담, 남북자유왕래, 한반도평화조약' 등 진보계에서 먼저 나올 법한] 통일관을 제시하며 이재오 특유의 노련미를 뽐냈다. 다만 일부 극우인사들에겐 이재오의 통일관이 종북 수준이라는 논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개표 결과 1만 표도 얻지 못하며 12위로 낙선하고 만다. 그의 이력을 생각해보면 정치생명에 치명타란 평가도 있었지만, 애초에 대선출마는 어디까지나 일반 대중들에게 신생정당인 늘푸른한국당을 알리기 위해 출마한 것에 가까워서 정치생명에 큰 타격은 없을 거란 평가도 있었다. 게다가 이미 이재오는 70대로, 정계에서 은퇴해도 무방한 나이라 그냥 본인이 하고 싶은거 말년에 맘껏 하고 있다고 보면 될 듯.
여담으로, 투표권이 없는 10대들이 '청소년이 직접 뽑는 제19대 대한민국 대통령 운동본부'의 주최하에 대선 모의 투표를 했는데 60,075표 중 13표를 획득하며 꼴찌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 시절
2017년 12월 5일 정영진 최욱의 불금쇼에서 이명박에게 매우 적대적인 기자 주진우와 만나서 약 1시간 반가량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채널A의 시사 프로그램 '외부자들'에서 이명박 공격수로 가장 유명한 정봉주]와도 두 차례에 걸쳐 살벌한 설전을 벌였다. 처음(47회)에는 정봉주가 '의리는 좋지만 이젠 떠나실 때 됐는데' 라고 말하자 이재오는 '없는 사람들끼리 의리라도 있어야 되지 않나'라며 되받았고, 두 번째(56회)에는 김백준과 국정원 특수활동비유용건을 두고 이재오와 정봉주와 진중권이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이명박 前 대통령에 대해 수사 압력이 거세지고 있는 상황에서 보수 통합을 명목으로 늘푸른한국당을 해체하고 2018년 2월 12일, 자유한국당에 복당하였다. 복당하면서 이명박에 대한 수사를 정치보복이라며 비난하였고, 2018년 12월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석방을 촉구하였다.
2019년 9월 전광훈 목사가 출범시킨 문재인하야범국민투쟁본부에서 총괄본부장직을 맡고 범투본측에서 10월 3일 개천절 집회를 기획하였고. 집회를 주관하며 문재인 정부에 대해 날을 세웠으나, 참가자들에게 질서있는 비폭력 평화집회가 되도록 이끌었다.그러나 정작 자유한국당 대표인 황교안에게도 자유한국당은 집회에서 빠지라는 발언을 하는 등 여전히 친이 좌장의 입장에서 황교안의 친박, 친황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였다.
2019년 12월 23일, 소설가 이문열, 송복 연세대 교수 등과 함께 보수계열 시민단체인 국민통합연대를 출범시켰는데 이곳에는 친이, 비박, 친홍 계열 정치인들도 여럿 왔다. 이에 대해 직접, 정치인 여러분들은 개인적 친분 때문에 온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 자리에 전광훈 목사가 와 축사를 해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후 문재인 하야하라는 전광훈 집회에도 몇번 모습을 보여 이재오가 전광훈에 물든 것 아니냔 우려가 나오기도 했는데, 본인 왈론 초대를 받아 몇번 간거라고 밝혀서 10월 이후에는 이름 빌려준 값만 해준 듯 하다. 본인 스스로도 모 팟캐스트 방송에 출연해 '군복 입고 태극기 들면 그게 애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태극기 부대를 은근히 디스하는 거를 보면 더 그렇다.
2020년 21대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이 대참패한 이후엔 몇몇 보수인사들과 함께 성명을 내고, 미래통합당은 자진 해산하고 중도실용 정당으로 환골탈태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물론 문재인 정부가 잘했다는건 아니고, 이런 정권 하나 심판못하는 무능한 야당에 대한 질타가 강했다고 보면 될듯. 이명박 정부 때엔 전성기를 누렸지만 그에 못지 않은 숱한 비난과 질타를 받았던 MB맨이었으나 박근혜와 각을 세운 이후, 잇따른 친박내홍사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이 터지면서 온건보수의 이미지가 생겼다. 친이계도 이명박 정부 이후 각종 내분과 이합집산으로 그 흔적이 옅어져서 그런지 친박이 욕을 먹는 것에 비하면 굉장히 운좋게 이미지 타격을 많이 입지 않았다.
2020년 5월 이후에는 KBS 정치시사프로그램 더 라이브 에 보수측 정치원로 패널로 출연하고 있다. 8월 24일자 방송에서 8.15 광복절 문재인 정부 규탄 집회 참석 후 코로나 검체검사 결과 음성이 나온 것을 밝혔다.
2020년 9월 1일 건국대학교 석좌교수로 임용되었다.
2021년 3월 18일 야권단일화를 촉구하며 김무성, 김문수와 함깨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윤석열이 제20대 대통령 선거 유력 대권주자로 주목받을 때부터 비판의 목소리를 자주 냈다. 윤석열이 뚜렷한 정치적 노선과 국가 경영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 및 정치력을 드러내지 않는 점을 근거로 들며 인기가 꺼지는 건 한순간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또한 국민의힘 제20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선 윤석열 보다는 홍준표가 대선후보가 되는 것이 낫다고 평가했었고, 윤석열의 선거대책위원회를 평가하는 자리에서는 100점 만점에 40점이라고 말했으며, 김병준-김한길 등을 포함시킨 것에 대해 올드보이의 총체라며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를 매섭게 비판했다. 이후 윤석열 후보와 안철수 후보의 야권 단일화에 대해서는 단일화를 안 한다면 정권교체는 못한다고 평가했다.
친이계 중진답게, 2022년 1월 24일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 석방을 촉구하기 위한 전직 국회의원들의 성명서에 이름을 올렸다.
윤석열 정부 시절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로는 친윤석열 성향을 드러내고 있었으나, 윤석열 대통령의 청와대 이전 문제에 대해선 비판적 의견을 냈으며, 새 정부 출범 뒤 처음으로 단행된 8.15 특별사면을 앞두고 최근 정부와 여당의 잇단 불통 행보로 인해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이 20%대까지 떨어지자 특별사면 명단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을 제외시키면서 이에 이재오 국민의힘 상임고문은 언론을 통해 윤 대통령이 신의의 문제를 져버렸다며 날카로운 쓴소리를 냈다. 또한 출연하는 프로그램에서 윤석열 정부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이재오 여담 일화
저서로 '한국학생운동사'가 있는데, 1984년에 초판이 나왔다. 이 책은 1945년부터 1979년까지 학생운동의 역사를, 직접 활동하던 운동권 출신이 쓴 최초의 책이라는 점에서, 학생운동사에서 굉장히 가치가 높은 저서로 평가받는다. 재미있는 것은 이 책이 워낙 의미가 있다 보니 꾸준히 재판(再版)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행정구역 개편에 관심있는 정치인 중 하나라서 여러 번 자신만의 (도 폐지 뉘앙스를 지닌) 행정제도 개편안을 제안한 적이 있다. 전국을 50여 개 광역시로 개편하자는 것. 또 내각제에 관심이 있어서 이원집정부제를 골자로 한] 개헌 제안도 종종 하고 있다. 이는 그가 차린 정당인 늘푸른한국당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이명박과 이재오가 같은 경주 이씨라는 이야기나 재령 이씨가 분적한 성씨이나 이재오가 항렬상 손자뻘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재령 이씨의 분적 이후 고려시대의 기록이 미비하여 항렬을 세는 중시조가 다르므로 항렬을 비교할 수 없다. 그러므로 2010년대 들어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같은 항렬이라는 이야기도 사실이 아니다. 실제 이재오는 23세로 추정된다.
국회 신상 발언에서 "나 같은 사람이 청춘을 바쳐 민주화 운동을 했기 때문에 오늘날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가능했던 것", "노무현 대통령은 독재하에서 경찰서 유치장도 한 번 안 가본 사람"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자신이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것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민중당 사무총장시절 자금모금을 위해 민중당 지지자였던 유명가수 민해경을 섭외해서 디너갈라쇼 기획을 했다고 한다. 민해경은 무료로 출연했고 수입은 민중당에 기부했다고 한다.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도 이명박, 이재오와 6.3 항쟁에서 같이 했었던 만큼, 셋과의 친분도 상당히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사이는 당시 이재오가 야당 원내대표로 정적 관계였지만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나름 유명한 일화로, 참여정부 시절 사학법 문제로 여야가 치열하게 대립하던 당시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부르자 여당 원내대표(김한길)까지 포함해 셋이서 만났는데 자신이 야당의 원내대표로서 양보를 부탁하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번엔 야당에 양보해 주시죠"라고 여당 원내대표에게 부탁했고 그는 당 분위기가 그렇지 않다는 말을 남긴 뒤 여당에 이를 전하러 떠났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은 이 원내대표와 함께 청와대를 둘러보며 또 만날 수 있겠냐고 물었는데 훗날 보니 그게 설마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몰랐다고. 이 사건을 겪고 이재오는 친이계 좌장인 것과는 별개로, 노무현에 대해 "정국이 꼬여 여야가 싸울 당시 야당의 편도 들어줄 줄 알던 여유를 가진 자"였다며 호평했다.
2013년 영화 변호인을 관람한 후 "잊고 살았던 고문 당한 전신이 스믈스믈거리고 온몸이 근질근질하고 전신이 옥죄이면서 아파온다. 비단 나뿐일까? 아, 그런데 지금 이 나라 민주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눈물이 난다"라는 트윗을 올리기도 했다.
보수정당에 대해 '독재당이다, 수구보수꼴통당이다 이런 소릴 탈피하자'고 주창했는데,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롯한 친박계와 견원지간으로 지낸 것도 이런 그의 사상적 신념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2014년 12월 29일 올라온 노유진의 정치까페에 보수 여당 의원 중 최초 게스트로 출연해 노회찬, 유시민, 진중권 교수와 정치 입문 계기부터 시작해서 MB 정권 시절 일들과 박근혜 정부 평가 등 여러 만담을 나눴다. 본인 왈 야당보다도 당시 여당인 보수를 개혁하는 게 급선무란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보수 정당으로 입문한 게 컸다고.
20대 총선을 1주일 앞둔 2016년 4월 6일 저녁 8시경, 서울 은평 을에서 유세 중 한 취객에게 "(국회의원) 그만 해먹어라, 왜 자꾸 나오냐"라며 가슴을 타격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만 사건 이후에도 이재오 후보는 별 문제없이 선거 유세운동을 진행했으며, 경찰은 경범죄 혐의로 취객을 체포했다. 이와 연관되어 19대 총선 때 은평구를 위해 마무리하지 못한 지역사업이 있다는 취지로 마지막 총선이라는 말을 했는데, 20대 총선 때도 비슷한 말을 하며 이번이 마지막 선거라고 해서 타격당한 거 아니냔 웃픈 소리가 떠돌기도 했다.
엄청난 자전거 애호가이다. 이명박도 상당한 자덕이라 둘이 같이 타고 다니기도 한다. 이 때문에 웃지 못할 일도 겪었는데, 2007년 10월 자동차 전용 도로인 올림픽대로에서 자전거를 탄 혐의로 즉결심판에 넘겨진 적이 있었다. 한반도 대운하 자전거 탐방을 마치고 서울로 오던 중이었는데, 같이 자전거를 타던 관계자 13명도 함께 즉결심판에 회부됐다고...
과거 운동권 경력이 있어서인지 노회찬, 심상정 의원과도 면식이 있는 사이였다. 그래서인지 이명박 전 대통령도 대통령 당선 직후 심상정을 직접 찾아가 만나기도 했다. 한편, 이재오는 2013년 당시 안기부 X파일 문제로 노회찬 전 의원이 의원직을 상실할 때 안타까움을 표현한 적이 있었고, 그의 의원직 상실을 막고자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 발의에 이름을 올린 적이 있다. 노회찬 의원이 2018년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하였을 때도 본인의 페이스북에 긴 추도사를 올려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명박, 이재오는 이명박 정부 시절 국무총리로 임명된 정운찬과 상당히 친해져서, 현재 이재오와 정운찬은 늘푸른한국당에서 행적을 같이하고 있으며 실제로 정운찬은 제19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였다. 다만 아직까지는 국민의당, 바른정당, 늘푸른한국당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고 있는 편인지라, 늘푸른한국당 내에서는 이재오의 대선 등판 요구가 나오고 있다고... 그리고 이내 그 요구를 수락해 늘푸른한국당 대선 후보로 확정되었다.
이재오의 이름 석자의 뜻을 해석하면 있을 재(在)에 다섯 오(五)인데, 흥미로운 점은 이재오는 민주화 운동으로 감옥을 5번 갔었고, 국회의원 5선을 했다는 거다. 숫자 5랑 인연이 많은 듯. 또 이재오의 선조가 나름 유명한 갈암 이현일인데 숙종 시절 환국 두 차례 잠깐을 제외하고는 만년 야당이었던 영남 남인의 대표격 인물이라는 것도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반면 아랫문단의 서청원은 달성 서씨로서 선조가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를 배출했던 서인-소론의 명문가였고, 다산 정약용과 동시대인으로서 과거시험에서 그 정약용을 차석으로 밀어내고 수석을 했던 서영보의 6대손이다.
한때는 서청원과 같이 범(汎) 상도동계(민주계)이면서 중앙대 2년 선후배로 동세대고 6.3항쟁도 같이 했었던 관계로 매우 친했으나 2000년대 중반의 당내 정치구도를 거치면서 친이-친박의 구도가 굳어진 2007년부터는 견원지간이 되었다.
19대 대선 후보 15인 중에서 전과에 유일하게 반공법 위반이 있었다. 참고로 반공법이 폐지 혹은 국보법에 병합된 때는 1980년이다.
국민의당 창당 당시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에게 영입 제안을 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안 전 대표가 자택까지 찾아가 설득했음에도 결국 입당하진 않았다.
정치 비평을 하는 유튜브 채널도 있다. 채널 이름은 '이재오의 와이러니'이다.
추미애 전 법무부장관의 아들 병역 의혹에 대해 자신은 외아들이 있는데 강원도 인제군에서 복무했으며 전방초소근무도 시켰고 복무 중 아버지를 밝히지 말고 휴가도 나오지 말라고 했다고 한 것을 근거로 추 장관의 행실을 비판했다.
자기 인생에 있어서 국회의원이 될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본인의 이름에 맞게 오(다섯 오) 국회의원 5번을 했는데 우스갯소리로 "아버지가 이재육이나 이재칠로 이름을 지었으면 6~7선을 했을 텐데 아쉽다고" 한다.
이재오 선거 이력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은평 을
21,716 (17.42%) 낙선 (4위)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은평 을
48,146 (43.63%) 당선 (1위)
초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은평 을
53,121 (51.04%) 당선 (1위)
재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은평 을
53,107 (45.25%) 당선 (1위)
3선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은평 을
38,164 (40.81%) 낙선 (2위)
2010
상반기 재보궐선거
서울 은평 을
48,311 (58.33%) 당선 (1위)
4선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은평 을
63,238 (49.51%) 당선 (1위)
5선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은평 을
34,318 (29.52%) 낙선 (2위)
2017
제19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9,140 (0.02%) 낙선 (1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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