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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야기/정치 / / 2022. 9. 1. 12:17

김문수 나이 고향 학력 이력 논란 프로필 (경기도지사 역임)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가 출신 정치인. 학창시절 노동운동으로 명성을 떨치며 운동권의 황태자로 불렸다. 굉장히 전투적이고 치열했던 노동운동가, 학생운동의 전설로 남아 있다. 이후 정계에 투신하여 민중당에 참여하여 1992년 14대 총선에서 전국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여 부천시 소사구에서 15대, 16대, 17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4, 5회 지방선거에 출마하여 32대, 33대 경기도지사를 연임했다.

 

대단히 성공적인 정치 이력을 쌓아왔고 경기지사로서의 도정 지표도 뛰어나 차기 유력 대선 주자로 꼽혀왔으나 2011년 도지삽니다 갑질 사건으로 그동안 쌓아왔던 친서민적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지며 중진급 정치인으로서의 정치생명이 사실상 끝났다. 2012년 18대 대선 새누리당 경선에 출사표를 던졌으나, 박근혜에게 밀려서 후보가 되지 못했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대구 수성갑에 출마했으나 낙선했으며, 2018년 전국 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선거에 자유한국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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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 나이 고향 학력 이력 논란 프로필 (경기도지사 역임)

 

김문수 프로필
김문수

 

김문수

金文洙 | Kim Moon-soo

 

출생

1951년 9월 27일 (70세)

경상북도 영천군 임고면 황강동

(현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황강리)

 

본관

경주 김씨

 

현직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상임고문

 

재임기간

제32·33대 경기도지사

2006년 7월 1일 ~ 2014년 6월 30일

 

형제자매

4남 3녀 중 여섯째

 

배우자

설난영

 

자녀

외동딸 김동주

 

학력

영천국민학교 (졸업)

경북중학교 (졸업)

경북고등학교 (졸업 / 51회)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 / 학사)

 

병역

병역면제 (중이 근치술 후유증)

 

종교

무종교 (무신론) → 가톨릭 (세례명: 모세) → 개신교 (예장대신복원)

 

신체

O형

 

 

경력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

서울노동운동연합 지도위원

전태일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민중당 노동위원장

제15-17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장

대한민국 국회 민생정치연구회 회장

한나라당 원내부총무

한나라당 노동위원회 위원장

제32·33대 경기도지사

새누리당 보수혁신위원장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

자유통일당 대표

자유공화당 대표

기독자유통일당 21 총선 선거대책위원장

 


김문수 생애 고향 학력 이력

출생 및 성장

1951년 9월 27일(음력 8월 27일), 경상북도 영천군 임고면 황강동(현 영천시 임고면 황강리)에서 아버지 김승헌(金升憲, 1916. 7. 26 ~ 1977. 6. 23)과 어머니 창녕 조씨 조순조(曺順祚, 1919. 3. 22 ~ 1973. 12. 11) 사이의 4남 3녀 중 셋째 아들, 여섯째로 태어났다. 영천국민학교, 경북중학교(現 경운중학교), 경북고등학교,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였다. 전공을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에 당시 영남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던 사촌형 김장수(金章洙, 1949. 8. 14 ~ )이 전공으로 경영학을 추천해서 경영학과를 선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정치인 김문수

 

노동운동

본디 극좌파 소리를 들을 정도로 유명한 운동권 지도자 출신이다. 사실 유명한 정도가 아니라 무려 20년 이상을 노동운동에 투신하며 활동한, 그야말로 1980년대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전설이다. 당시 노동운동을 김문수를 빼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만 하려 해도 도저히 할 수가 없다.

그들 모두 김문수를 따르거나, 혹은 김문수가 이끌던 조직과 깊게 연계되어 활동하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당시 김문수는 노동운동계의 김근태라고 볼만큼 절대적인 인물이었고, 수많은 노동운동 후배들의 흠모와 존경을 받던 인물이다.

 

첫 학생운동은 훗날 민주당의 국회의원이 되는 선배 심재권의 권유로 시작했다. 1학년때 5년 선배 심재권의 권유로 서울대 학생운동 단체 중 하나인 "후진국 사회연구회"에 들어가 학생운동을 시작했고, 2학년때 김근태에 의해 공활을 경험하고 노동운동에도 관심을 갖는다. 김문수는 70년대 초중반까지는 학생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병행했는데 스스로 회고하기를 당시 진로 방향을 제대로 못 잡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노동운동에만 전념하기로 하고 공장에 위장취업 후 노동조합을 만들면서 80년대에 전설적인 노동운동가가 되었다.

전태일의 모친 이소선 여사 역시 생전에 자신이 평소 아들로 대우하던 장기표와 함께 김문수 역시 "내 아들"이라 불렀다. 심지어 김문수가 자신의 적과 같은 한나라당의 소속 정치인이 된 지 한참 지난 시절에도 언론인터뷰에서 "차라리 잘했다 생각했다. 그 나쁜 놈들한테 고개 한번 숙여서라도 문수도 이제 국회의원 한번이라도 해야지 싶다. 우리 기표도 그렇게라도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김문수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훗날 한나라당 소속임에도 이소선 여사의 장례식을 지킨 사람 중 한명도 김문수였다.

그의 얼굴 한번 못 본 신인급 노동운동가 청년들도 입소문으로 퍼진 '노동투쟁 신화 김문수'의 파란만장한 전설들을 들으며 존경했다고 하니 그 위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아직 사회구성체 논쟁이 나오기도 전에, 대학 제적 후 스스로 공장에 위장취업하여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을 지내면서 밑바닥부터 노동운동을 한 인물이다.

 

 

본격적으로 대학생들의 위장취업이 시작되는 시기가 1980년대다. 1980년대의 대학생들, 특히 노동운동계에 뛰어든 20대 젊은이들에게 김문수는 절대적인 전설이었다. 당시 김문수의 연설 내용을 그대로 적은 필본이 돌아다니곤 했다고 하는데, 그 연설을 못 본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필본을 돌려 보면서 눈물 흘리는 경우들도 흔히 있었다고 할 정도니... 상술된 김문수의 청년기에 대한 진보정치인들의 발언이 과장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야말로 김문수는 1980년대 노동운동의 상징이었다.

1985년 서울노동운동연합의 설립에 기여했는데, 1986년 김문수가 인천 5.3 운동으로 체포되자, 그 뒤를 이은 인물이 현재 정의당의 당대표 심상정이었을 정도다! 심상정 대표의 결혼을 주선해 준 사람도 김문수였고 김문수가 고문을 받으면서도 심상정 대표의 위치를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심지어 유시민 작가와 티비 토론을 하러 나와서 과거 서로를 동지로서 보호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하면서 덕담을 나누기도 했었다. 이 시절 안기부에서 고초를 겪은 이야기는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 최민희 의원의 연설 중에 짤막하게 언급되기도 했다.

그리고 6월 항쟁 이후로 양김씨의 분열로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자, 본격적인 진보정당이 필요하다면서 이재오, 장기표, 이우재 등과 손을 잡고 재야민주화운동 세력, 노동운동 세력 일부를 모아서 1990년에 민중당을 창당하고 본인은 노동자 밀집지역인 서울 구로(갑) 지구당 위원장을 맡는다. 하지만 민중당은 1992년 14대 총선 때 단 한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고 득표율 미달로 해산되면서 말 그대로 물을 먹었다. 그리고 같은 해 14대 대선에서 재야와 노동 운동 진영에서 민중후보로 추대했던 무소속 백기완도 1%라는 저조한 득표율을 보이며 낙선한다.

이후로 1년간 택시기사로 일하다가 94년 김영삼에게 영입되어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면서 보수로 전향한다. 이때 김영삼은 과거 군사정권 잔당이라는 색채를 지우기 위해서 재야민주화운동 인사들을 대거 영입했는데, 그 중에 가장 네임드가 김문수와 이재오였다. 그리고 이 둘을 따라서 엄청난 숫자의 노동운동가, 재야인사들이 민주자유당에 합류한다. 이후 국회의원과 경기도지사도 지내면서 신한국당 - 한나라당 - 새누리당으로 이어지는 보수정당의 대표적인 대권 잠룡으로까지 성장하게 된다.

 

 

이러한 전향에 대해 본인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 공산주의권 국가들의 몰락을 지켜보며, 당장의 급진적 사회주의보단 성장에 자원을 집중하되 복지도 함께 따라가야 한다는 온건론으로 노선을 선회한 것이라고 밝혔다.

사실 김문수 입장에서는 1970년대까지 자신이 해왔던 학생운동의 경력이 끝나고, 1980년대에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방향이 학생운동의 주류가 되었으니 전향을 하는 것도 크게 이상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197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20년 이상 김문수는 현장중심의 사상을 가진 노동운동가였다.

소위 말하는 PD 계열이었고, 사회주의 혁명의 이상이 깨진 이후에는 이러한 운동이 방향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노동 및 부정 부패는 비단 진보 진영에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보수 진영에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므로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인용구로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전향에 따른 비판을 피할 수는 없었고 아직까지도 김문수는 진보 쪽 인사들에게 "노동운동을 배신한 변절자"라고 불리는 경우도 많다. 같이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김문수를 보호하기 위해 고문을 당했던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당시 국민의힘의 전신인 신한국당은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을 완전히 장악한 김영삼에 의해 독재정권 인물들이 죄다 쫓겨나가고 상도동계, PK 출신들과 개혁 공천으로 영입된 인사로 한 번 물갈이된 당이나 다름 없었다는 점은 김문수의 행보를 정당화 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신한국당 자체는 독재정당의 역사를 공유하지만, 노태우와 민정계가 3당합당으로 끌어들인 김영삼에게 잡아먹혀 물갈이가 된 상태라는 점이다. 하지만 탄핵 정국 이후 뉴라이트 세력이 기득권을 잡기 시작하면서 속칭 상도동계, 소장파들은 대부분 전 군부세력으로 전향했고 일부 소장파들은 탈당해서 열린우리당으로 들어갔다.

 

김문수 노동운동 시절

 

어찌되었든, 김문수 이외에도 PD운동권 중에는 1990년대 초에 소련이 무너지는 걸 보고 충격받아 활동을 접어버린 사람이 꽤 있었으며, 러시아 혁명 자체도 너무 미화되었다고 보거나 폭력적인 '혁명' 이라는 방식에 대해서 회의감을 느끼는 등 여러 분파로 나뉘어진 건 사실이다. 다만 그 운동권 출신 중에서도 김문수가 거물급이니 유명세를 탄 거다. 이런 온건파 출신 중엔 "87년 이전이면 모를까 민주화가 된 이후엔 이런 호전적인 운동권 마인드가 오히려 도움이 안될 수 있다"라고 보는 사람도 있으므로, 김문수와 연관된 여러 행보가 비판 사유가 될 순 있어도, 그가 운동권 성향을 떨쳐냈다는 이유가 비난 사유가 되기는 힘들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상술된 이소선 여사(전태일의 모친)는 이미 김문수가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도 진보언론과 인터뷰할때 한나라당 쪽을 "나쁜 놈들일지라도"라고 부르면서도 "김문수는 내 아들이다. 나는 문수가 어디 가든 원망한 적이 없다. 김문수도 국회의원은 했으니 다행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심지어 이소선은 장기표도 그렇게라도 해서 국회의원이 되었으면 좋겠다고까지 말했었다.

 

 

김문수가 비록 지금은 보수 성향의 새누리당 소속이라고 하지만 과거를 잘 살펴보면 민주 투사이자 야당 인사였던 김영삼이 운동권 출신 김문수를 끌어들여 자신의 당인 민주자유당 - 신한국당으로 영입시킨 것으로, 그 당이 현재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으로 존속하고 있는 것이니, 정치 입문 당시부터 우익적인 색채를 띄었다기보단 시간이 흐르며 당의 방향에 따라 운동권 색을 버리게 된 모습이 강하다고 볼 수도 있다.

특히 김영삼이 당시 당으로 끌어들인 사람은 대다수가 야당 인사(상도동계)이거나 민주화에 협력하던 사람(손학규, 이재오, 노무현, 김문수 등)이었기에 그렇다. 하지만 이에 대해 보수정당으로 간 뒤에도 개혁파로 남아 보수정당의 각성을 추구하던 사람들과 달리, 우익적 발언도 서슴치 않으면서 우익층의 환심을 사려는 것을 볼 때 결국은 잿밥에 더 관심 있는 것 아니냐고 김문수를 비판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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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입문 이후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인 자유민주연합 박규식 후보, 김대중의 측근인 새정치국민회의 박지원 후보 등을 꺾고 당선되었다. 이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이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경기도지사 출마를 위하여 17대 국회의원직은 사퇴하였다.

 

경기도지사 시절

민선 최초로 경기도지사를 연임할 만큼 상당히 좋은 능력과 정치 감각을 발휘하였다. 그가 창시한 개념인 GTX를 2018년 들어 오히려 더불어민주당이 밀어주는 것만 봐도 확인사살이었다.

김문수의 도지사 도정 중 가장 큰 성과로 거론되는 것은 경기도 최초의 대중교통 환승할인이 적용된 수도권 통합 요금제 도입이다. 2004년 서울시 대중교통 체계 개편 이후 2년 넘게 지지부진하던 것을 2006년 7월 취임 후 곧바로 재협상에 나서서 수도권 통합 요금제가 마침내 1년 만인 2007년 7월 1일부터 시행되게 하였다.

김문수는 애초 대중교통 분야에 관심을 많이 가진 인물로 알려져 있었는데, 서브컬쳐계에선 예전부터 그가 철덕이라는 설이 나돌기도 했다. 또 택시 기사 체험을 전국 각지에서 하고 다니며 택시를 대중교통으로 인정하고자 하는, 속칭 택시법을 찬성하는 견해를 보이기도 했다. 과거 PD파, 즉 노동운동권에 있으며 이런 대중교통에 관심을 가졌고 연장선상으로 택시 기사 체험이란 파격을 선보인 것이란 추측이 많다. 후술되어 있듯 대중교통만큼은 주민과 매우 가까운 행보를 보인 것.

 

 

2013년 당시 김문수 지사가 일본 기후현과 관광, 도자기 분야, 저출산 고령화 대책 등에 대해 교류 협력하기로 했었다. 김 지사는 “일본은 한국보다 먼저 저출산·고령화 현상이 고착화했다. 한국도 과거 일본처럼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부동산 침체와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다”며 “일본의 앞선 경험이 한국에 도움이 될 것이므로 이에 대한 해결방안에 대해 교류 협력했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후루타 하지메 지사는 공감을 표하며 “기후 현에서는 5년 전부터 인구감소 저출산·고령화 대책이라는 10개년 장기구상을 세웠다”며 “현재 정책 시행 5년을 맞아 중간 점검을 하고 있다. 

경기남부와 북부지역을 연결하는 경기순환버스도 김문수 도지사의 업적이다. 경기순환버스 운영의 활성화를 위해 2013년 4월 1일 수원시와 의정부시를 최단거리로 빠르게 통행하는 경기순환 8401번 노선을 시행하게 되었다.

2018년 범 수도권 부동산 시장을 뜨겁게 달궈온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 역시 최초 기획자가 김문수였다. 아이러니한 건, 최초 제안자는 김문수인데 2018년 들어서 GTX를 적극 추진하는 쪽은 이재명 前 경기도지사, 심상정 現 정의당 의원 등 진보 성향 정치인들이라는 거다. 김문수 도지사의 극우 발언들을 비판할지언정 GTX만큼은 오히려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정책을 펴는 것만 봐도, 김문수 도지사의 교통행정 하나만큼은 이명박 서울시장보다 더 높았으면 높았지 결코 못하지 않을 정도로 높은 행정감각을 보여줬음에 이견이 전혀 없다.

 

김문수 선거운동

 

20대 총선 출마와 실패

2014년, 경기도지사 불출마를 선언함으로서 도지사 활동은 마감하게 되었고, 대신 동당(同黨)의 남경필 후보를 지지하며 당 차원에서 활동을 벌여갔다. 퇴임 직후 새누리당 보수혁신위원장을 맡게 되었으며 국무총리 후보로 거론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소리소문없이 지나갔고, 2016년 20대 총선이 다가오자 대구 수성구 갑에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는 더민주의 다크호스 김부겸 전 의원과 빅매치를 벌이게 되었다. 대권잠룡으로까지 거론되는 양반이 험지가 아닌 텃밭에 출마한다는 것에 비판을 가하는 당 내 기류도 있었으나, 김문수 본인은 수성갑이 험지라며 절대 쉬운 지역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참고로 김문수는 영천시 태생 - 경북중학교(현 경운중학교) - 경북고등학교, 김부겸은 상주시 태생 - 대구중학교 - 경북고등학교 출신으로, 둘 다 대구광역시 인근 출생 - 대구에서 성장 - 타지에서 정치 생활을 거쳐 대구에서 재도약 코스를 노리고 있으며, 김문수가 김부겸의 고등학교 5년 선배이다.

그리고 예정대로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한구 현직 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한 대구광역시 수성구 갑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해당 지역구에서 오랫동안 지역주의에 맞서 도전해 온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고 만다. 그나마 2위로 낙선하였긴 하지만, 이것도 무소속이나 기타 정당 후보도 없는 1:1 대결에서 37.7% : 62.3% 로 무려 득표율 24.6%p, 득표 수 33,536표 차 대패로 낙선하며 김부겸에게는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최초의 민주당계 대구 소속 국회의원이라는 영예를 안겨주면서 김문수의 입장에서는 상처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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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 본인이 험지 출마론을 거부하고 선택한 보수 초강세 지역인 대구에서 참작이 불가능한 대패를 당해 대권 잠룡으로서의 위상은 회복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며, 아예 정계 복귀 가능성 자체에 대해서 걱정해야 할 상황이자 사실상 정계 은퇴 수순을 밟는 것이 아니냐는 여론도 있다. 상대방인 김부겸 후보는 이후 당 내 TK 맹주이자 전국구 정치인, 원내대표 후보군, 당 대표 후보군, 대권주자로 위상이 압도적으로 상승했다.

특히 대구광역시가 옛부터 보수정당의 텃밭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처참하게 박살난 후보는 김문수 후보가 유일한데, 다른 새누리당 낙선자들은 무소속 후보자들에게 패한 것이지만, 그래도 이들 무소속 후보들은 거의 전부가 새누리당에서 공천을 받지 못해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후보들임을 감안해야 한다. 결국 김문수만 유일하게 텃밭인 TK에서 야당에게 처참하게 개박살난 새누리당 후보인 셈이다.

물론 김부겸에게 패배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일단 대구광역시에서의 지역 기반이 없다시피한 점을 꼽을 수 있다. 김문수 본인은 대구의 바로 윗동네인 경상북도 영천시 출생에 경북고등학교 출신으로써 대구와 아주 무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와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연속으로 출마하면서 꾸준히 오랫동안 지역 표심을 다지고 도전을 해 온 김부겸에 비해 김문수는 국회의원 지역구도 3연속으로 경기도 부천시였고, 경기도지사를 2번 연임하는 등 경기도에서만 주로 활동하는 등 사실상 경기도민이었고, 인맥과 개인 조직도, 정치적 기반까지 모두 경기도에 근거를 두고 있다. 당연히 사람들은 다시 경기도에 나오겠거니 예상했는데 느닷없이 대구에 나온 것은 크나큰 실수였고, 경기도민이 왜 여기서 나와 소리가 나올 정도로 경기도민들이나 대구시민들이나 하나같이 너무도 뜬금없는 상황이다. 거기에다 당시 수성 갑 현역인 이한구가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지역구 관리를 포기하고 이미 2년 전에 짐싸고 경기도로 거처를 옮겨버린지라 지역에선 비판 여론이 팽배해 있어서 오히려 새누리당 후보로 나선 것이 페널티가 되어버린 셈이다.

 

결정적으로 김문수는 도지사 시절 대표적인 수도권 규제 완화론자였다. 경기도는 서울특별시를 끼고 있다는 것 때문에 지방 균형 발전 정책의 일환으로, 또 수도 서울의 자연 환경 보호를 위해서 수많은 규제를 당하고 있다. 당연히 경기도는 이런 규제에서 벗어나기를 강하게 원하고 있으며, 경기도지사를 포함한 경기도의 자치단체장들도 자연히 수도권 규제 완화론을 주장한다. 고로 김문수가 지낸 경기도지사는 낙수효과 이론에 입각한 수도권 규제 완화를 외치고, 당연히 투자가 수도권으로 몰리게 되면 간접 피해를 입는 비수도권 지방자치단체와는 서로 으르렁거릴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대구광역시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을 뿐더러 뭘 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수도권으로 뺏어가려한 양반이 그저 학연, 지연, 당이란 뒷배경만 믿고 텃밭 대구에 출마했으니 이러한 모습은 대구시민들에게 큰 모욕감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범새누리당 계열 이외의 인물로 찍을 만한 후보를 낸 두 지역구들인 북구 을과 수성 갑, 그 중에서도 김부겸이라는 인물이 19대 총선부터 일찌감치 기반을 다져온 수성 갑에 출마하겠다는 것은 수성 갑 주민들에게 "날 좀 떨어뜨려주십쇼."라고 대놓고 광고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선거 기간 내내 김부겸 후보의 압도적인 여론조사 우위가 나타났고, 물론 여론조사와 달리 막상 선거 당일에는 우파결집으로 새누리당을 찍을 것이란 추측도 있었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전반적으로 20대 총선의 가장 큰 피해자 중 하나인데, 차라리 오랫동안 활동해 온 경기도권에서 출마했더라면 공약 면에서도 재선 도지사라는 충분한 경력을 내세워 지역 주민들에게 친화적이고 선도적인 공약을 내세우면서 수도권의 전문가로써 본인의 이미지를 부각할 수 있었다. 만약 경기도에 출마했다면 그런대로 본인의 기반을 갖고 있으며, 지역 기반의 지지가 있는 만큼 최소한 대구만큼 큰 차이로 낙선하는 수모는 모면했을 것이며, 분투한 것만으로 인정을 받았을 거다. 도청 소재지이자 후임 지사의 지역구였던 수원시 병도 있었고, 하다못해 과거 자신이 있었던 부천시 소사구(現 부천시 병) 지역구로 갔었어도 나름 승산이 있었던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새누리당의 아성이나 다름없는 대구에서 이렇게 크게 참패하면서 사실상 이 시점에서 '거물 정치인' 김문수의 생명은 완전히 끝났다.

 

김문수 경기도지사 시절

 

20대 총선 낙선 이후

이후 2016년 8월부터는 본인의 페이스북을 통해서 개인방송을 시작하였다. 이를 통해 우병우 민정수석의 거취를 명확히 해달라든가, 사드 배치에 찬성을 하는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 본인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9월 7일, SBS 뉴스브리핑에 출연하여, 경기도에서 오랫동안 정치를 해왔던 그가 대구로 내려와 총선을 도전했던 이유, 당대표 출마 시사 후 불출마 선언 등에 대하여 본인의 심경을 밝혔다.

2016년 10월, 외교안보 전문가 초청 안보특강에서 송민순 전 외교부장관 회고록 논란으로 불거진 문재인 전 대표의 북한 인권 결의안 기권 논란을 언급하였는데, 여기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 문재인 비서실장, 김만복 국정원장을 반역자라고 거친 언어로 비판하기도 했다. 

11월 15일 비박계의 임시 지도부인 비상시국위 12인 공동대표 중에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오죽하면 비상시국위 출범에 분노한 친박계 이정현 대표로부터 지지율 합쳐서 10%도 안 되는 대선주자들이 당을 먹칠한다면서 남경필, 원희룡, 오세훈과 같이 대선주자에서 사퇴하라는 맹비난을 듣기도 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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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대선 불출마와 이후

어거지에 가깝게 친박에 들붙는 행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19대 대선에는 불출마했다. 가장 큰 이유는 자유한국당 경선에 참여할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친박 행보로 지지를 얻었다면 지지자들의 후원금으로 금전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이처럼 뜬금포로 친박 행보를 펼치며 결국 대중들한테 밉상으로 찍히고 정작 소소한 친박 돌격대장 지분은 김진태가 모두 가져가버려 결과적으로는 아무런 이득도 하나 얻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로는 사실상 근황도 잘 안 잡힌다. 정부 출범하자마자 친박집회 참석해서 "문재인 정부 타도"를 외쳤다는 것만 근근히 보도되곤 한다. 2018년 1월 8일, 조갑제 TV와의 인터뷰에선 문재인에게 정신이상자라는 막말까지 곁들여 여전한 디스를 했다.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18년 3월에는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후보군이 무주공산에 가까운 자유한국당의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물망이 잡혔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나름 이름값 있는 인물이라지만 옆동네 광역단체장인 경기도지사를 2번이나 역임했고, 현재 대구로 내려가 있는 인물인지라 뜬금없다는 반응이 상당하다.

현실적으로 당선 가능성은 높지 않은데, 20대 총선때도 대구 수성 갑에서 김부겸에게 완패했고, 현재 옆동네인 대구 북구 을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내려와 있는 상황이라 자신은 대구에서 설 자리를 잃었기에 서울시장 출마를 바탕으로 지역구를 서울로 옮기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새누리당에서 같이 있었던 정태근 전 의원이 제기하기도 했다.  원래 지역구인 부천 소사는 자신의 보좌관 출신인 차명진이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어 돌아가기 좀 그렇고.

게다가 더욱 현실적인 문제로는 선거를 치를 돈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19대 대선 불출마 이유에서 보듯 선거를 치를 돈 자체가 없는 그에게 서울시 전체를 유세하며 다닐 돈이 있는지는 과연 미지수다. 자유한국당 중앙당에서 지원을 해준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게다가 상대는 3선을 노리는 박원순에다가,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중도+중도보수 진영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안철수인지라 상당한 고전이 예상되었다. 거기에 당시 문재인 정부의 높은 지지율로 인해 당선 가능성은 더 낮았다.

4월 11일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공식 출마 선언을 하였다.

 

김문수 정치활동

 

5월 30일, 6월 7일 두 차례의 토론회에서는 기대보다는 선전했다는 평이 많다. 판넬을 많이 사용해서 "판넬왕"이라는 별명이 새로 생겼다. 수치화된 자료를 앞세운 논리를 무기로 삼은 안철수에 비해 김문수는 시청자들에게 보여줄 시각자료에 집중을 한 모양이다. 7일 토론에서는 안철수에게는 큰 공격을 안하고 김종민과 치열하게 대립하면서 이날 안철수와 함께 박원순이 또 다시 털리는데 일조했다. 그리고 박원순의 "빚이 많은 건 청백리" 드립을 탄생시키는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

안철수 후보와 단일화 논의가 상당히 오갔다고 알려졌지만 안철수 측의 일방적 사퇴 요구가 이어지자 6월 6일, 선거를 완주할 의사를 분명하게 내비쳤다.

6월 13일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 종료후 발표된 출구조사에서 박원순 후보의 55.9% 득표 예측에 더블스코어 이상으로 뒤지는 21.2%의 지지율의 2위 낙선이 예측되었으며 52.8% : 23.3%로 2위로 낙선했다. 하지만 애시당초 목표가 안철수를 이기고 2등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꽤나 선전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서울에서도 민주당세가 특히 강한 관악구, 안철수의 전 지역구인 노원구 2곳에서 근소하게 밀린 것을 제외하면 서울 전 지역에서 안철수를 누르는 데에 성공했다. 대구 수성갑에서의 패배로 정치인생을 마무리했다면 텃밭에서조차 참패한 몰락한 거물정치인의 이미지로 기억되었겠지만 당선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의 요청에 따라 서울시장 선거에 뛰어들어 명확한 보수색을 어필하며 자유한국당의 서울 2위를 탈환해내면서 명예회복에 성공했다.

 

극우로의 전향

김문수는 큰 실수를 했다. 자유한국당에 있었으면 컷오프당할 것을 알고, 광화문 세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여 다시 미래통합당에 들어가서 생존하려는 것 같다. 

 

2020년 1월 27일, 신당 창당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신당 명칭으로는 국민혁명당을 선택하고 비례한국당의 이름을 개칭하여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태극기 세력 중심으로 정치권을 통합해야 한다고 밝혔고, 창당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으머 현역 국회의원이나 시민단체 쪽에서도 참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광훈 목사가 신당에 합류하냐는 질문에는 "신분이 목사"라며 "응원하고 후원, 지원해줄 것"이라고 답했는데, 이를 보아 신당에 입당하지는 않지만 지지 세력으로 약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신당 창당이 가시화될 경우 기존 존재하고 있는 자유한국당, 새로운보수당, 우리공화당에 이어 이언주 신당, 이정현 신당에 이은 6번째 보수정당이 되버린다.

결국 2020년 1월 30일 자유한국당을 탈당했고, 얼마 안 되어 자유통일당을 창당하였다. 이정현의 신당이 아직 창당되지 않음에 따라 5번째 보수정당이 되었다.

이후 자유통일당과 우리공화당의 합당 문제로 전광훈과 결별한 줄 알았으나 2020년 3월 21일 자유공화당을 탈당했다. 결국 다시 전광훈과 사랑제일교회 성도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기독자유통일당에서 활동할 것을 밝힌 후  현재는 기독자유통일당 자문위원장이 되었다.

2020년 8월 사랑제일교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 사건이 터지면서 전광훈과 친밀하게 지내 온 김문수의 정치생명은 완전히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20년 8월에는 광화문 집회에서만 발견되었다. 이로인해 전광훈 지지자들에게 욕을 먹고 있다.

2020년 9월 24일에 10월 3일 광화문 집회 중단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집회 이후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 증가를 막기 위해 대면집회보다는 차량 집회로 하는것이 안전하다고 이야기를 하였는데, 극우인 전광훈 지지자쪽에서 비난을 받고있는걸로 봐서 전광훈과의 관계는 끝인것 같다.

 

김문수 극우 전향

 

2020년 10월 3일 차량시위를 했다. 서경석 목사가 대표로 있는 새한국에서 주최하는 강동구 굽은다리역에서 차량 시위에 참여하였다.

2020년 11월 2일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재수감 전 자택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 논란이 되고 있다.

매주 화요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탈북자 인권법 촉구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경기도 지사 시절부터 탈북자 인권을 챙기는 모습을 보였는데 지금도 유효하는걸로 보인다. 태영호 의원, 나경원 전 의원도 매주 참여중이다.

미국 부정선거 논란에 대해서는 바이든이 승리를 했는데 왜 계속 그거를 물고 넘어지냐고 하면서 강경한 입장을 표현하고 있다. 미국은 3일만에 재검표가 이루어졌는데, 한국은 6개월이 지나도록 재검표가 안되고 있다며 불만을 표했다.

2020년 12월 10일,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의 '문재인 정권 폭정 종식을 위한 보수 통합 회의'라는 명분으로 여러 보수인사들을 불러들였는데 여기에 참석해서 김문수 전 도지사는 "지금까지는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만날 자리가 없었다. 국민의힘은 광화문에 태극기를 들고나오는 사람을 극우라고 하지 말고 태극기를 왜 들고 싸우는지 알아야 한다" "폭정에 맞서기 위해서는 양처럼 좋은 사람도 필요하지만, 사납고 무섭고 예측 불가능한, 성난 민심이 모이는 자리도 필요하다"며 "이 모임이 확대돼 일주일에 한 번씩만 모인다면 문재인이 깜짝 놀랄 것"이라고 말했다.

2021년 3월 18일, 국민의힘 소속의 김무성, 이재오와 만나 오후 3시까지 오세훈 - 안철수 단일화 문제를 최대한 빨리 합의해야 한다고 촉구함과 동시에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김종인의 사퇴를 요구했다. 

2021년 6월, 일부 강경보수 및 친박 측에서는 이준석 신임 당대표가 좌파라고 주장했지만, 김문수는 이준석의 저서 <공정한 경쟁>을 읽고 나서 이준석의 경제관, 안보관, 교육관을 보면 좌파가 아니라고 옹호했다.

이후 소리소문 없이 국민의힘으로 복당했으며, 8 지선에는 출마하지 않았지만 김은혜 경기도지사 후보의 유세에 참석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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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 여담 일화

2018년,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 의사를 밝히면서 4월 11일, 1976년에 취득한 환경관리사 2급 자격증을 강조하며 미세먼지 관련 대책에 대한 공약을 발표했는데, 실제로는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한 편이었으나 언론에서 도로에 그냥 물 뿌리면 된다는 식으로 왜곡 압축한 내용을 헤드라인으로 내세우는 바람에 빈축을 샀다. 12일 SBS 주영진의 뉴스브리핑에서 중국과의 협상, 국내적으로는 디젤 자동차 배기가스 해결, 먼지 측정기의 높은 고도를 사람 눈높이로 낮추기, 지하철에 집진시설을 설치 등의 모든 공약이 제시되었다.

악수를 굉장히 힘주어 하기 때문에 혹시나 만나서 악수를 할 일이 생긴다면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것이 좋다.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무척 세게 잡는다.

2018년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했을 때 우상호가 뼈는 대구에 묻고 살만 올라왔냐고 디스해서 순살치킨 드립이 돈 적이 있다.

2019년 9월 17일, 문재인 전 대통령 하야와 조국 전 법무부장관 사퇴를 촉구하며 삭발식을 거행했다. 그 전날 삭발을 단행한 황교안 전 자유한국당 대표와 비교되었는데, 황 전 대표의 경우 서울시내 이용업 종사자가 자원봉사로 삭발을 해주었으나 김 전 지사의 경우 같은 당의 박대출 의원이 오른손만을 사용해 밀어서 아파하는 모습을 보였다.

2011년 8월 대한송유관공사 을지연습 대테러 훈련 때 취한 견착자세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논란이 된 적이 있었는데, 김문수가 잡은대로 총 쏘면 얼굴이 다칠 수 있다.  유용원의 군사세계에서 신비의 견착자세와 김문수의 견착자세를 비교하면서 소소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문수 측 말로는 해당 사진은 사격자세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조준경에 대해 물어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었다고 한다. 

MBTI는 ESTJ라고 한다.

 

 

종교

프로필에 나와있듯이 원래는 무신론자였다가 가톨릭에 귀의하여서 가톨릭 신자가 되었고, 이후에 개신교로 개종했다. 먼저 가톨릭 신자가 된 계기는 1980년대 초반에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하다가 수배되자 한 가톨릭 시설에 은신하던 중 그 곳의 수녀한테서 세례를 받은 것이 그 계기라고 한다.

그러다가 2017년 경 개신교로 개종했다고 하며, 2017년 이후 현재까지 꾸준히 전광훈 목사가 시무하고 있는 사랑제일교회에 등록 교인으로 출석하는 중이라고 한다. 전 목사는 김 전 지사에게 집사님이라고 부르며 집회에 자주 같이 나온다.

 

김문수 선거 이력

 

김문수 선거 이력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483,041 (3.75%)

낙선 (5번)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부천 소사

33,446 (39.19%) 당선 (1위)

초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부천 소사

47,101 (61.62%) 당선 (1위)

재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부천 소사

50,418 (52.94%) 당선 (1위)

3선

 

2006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도지사

2,181,677 (59.68%) 당선 (1위)

초선

 

2010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도지사

2,271,492 (52.20%) 당선 (1위)

재선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수성 갑

51,375 (37.69%) 낙선 (2위)

 

2018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1,158,487 (23.34%) 낙선 (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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