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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야기/정치 / / 2022. 4. 1. 06:25

유승민 고향 학력 프로필 재산 아내 딸 유담 (경기도지사 출마)


유승민 고향 학력 프로필 재산 아내 딸 유담 (경기도지사 출마)

 

유승민

劉承旼 | Yoo Seong-min

 

출생

1958년 1월 7일 (64세)

경상북도 대구시 대봉동

(現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

 

거주지

서울특별시 강남구 개포동 경남아파트

대구광역시 동구 용계동 강변동서마을

등록기준지

경상북도 영주군 이산면 용상리

(現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용상2리)

 

본관

강릉 유씨

 

부모

아버지 유수호, 어머니 강옥성

 

형제자매

형 유승정, 누나 유진희

 

배우자

오선혜

 

자녀

아들 유훈동, 딸 유담

 

학력

대구삼덕국민학교 (졸업)
대륜중학교 (졸업)
경북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부 (경제학 / 학사)
위스콘신 대학교 (경제학 / 박사)

 

병역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전역 (제33경비단)

 

종교

불교

 

신체

173cm, 69kg, A형

 

주요 경력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원
위스콘신 대학교 경제학과 조교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한국개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한국개발연구원 수석연구위원
한국 산업조직학회 사무국장
UC 샌디에이고 IR/PS대학원 초빙교수
공정거래위원회 자문관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제5대 여의도연구소장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연구교수
제17대 국회의원 (비례대표 / 한나라당)
제17대 국회의원 (대구 동구 을 / 한나라당)
한나라당 최고위원
제18대 국회의원 (대구 동구 을 / 한나라당)
제19대 국회의원 (대구 동구 을 / 새누리당)
제19대 국회 전반기 국방위원회 위원장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위원
제5대 새누리당 원내대표
제19대 국회 후반기 국회운영위원회 위원장
제20대 국회의원 (대구 동구 을 / 무소속)
제19대 대통령 선거 바른정당 후보
제3대 바른정당 대표
초대 바른미래당 공동대표
변화와 혁신을 위한 비상행동 대표
새로운보수당 보수재건위원장

 


대한민국의 경제학자 출신 정치인.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으로 근무하던 중,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자 최장집 교수의 제안을 받고 정책기획위원회에 참여하여, 1997년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계획안을 제안하였다. 또한 포스코의 경영진단반 10인의 일원으로서 포스코의 민영화를 골자로 하는 보고서를 제출하였고, 이것이 반영되어 2000년에 포스코의 민영화가 단행되었다. 하지만 1999년 최장집 교수가 월간조선의 사상검증 파문으로 정책기획위원장을 사퇴하자, 유승민도 물러나게 된다. 이후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이회창 총재의 영입 제안을 받고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4선 국회의원을 지내며 새누리당의 원내대표를 맡게 되었으나 박근혜 대통령과의 마찰 끝에 원내대표직을 사퇴하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박근혜 정부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무너지며 새누리당을 탈당, 바른정당의 대선주자로서 4위로 낙선한다. 대패하긴 했지만, 탄핵 사태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던 새누리당 출신으로 마지막에 지지율을 끌어올리며 상대적으로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바른정당 대표로서 국민의당의 안철수와 통합을 진행했고 바른미래당을 창당해 공동대표를 맡게 된다. 그러나 지역기반이 전무하던 바른미래당은 7회 지방선거에서 참패했고 결국 바른미래당 공동대표직을 사퇴하게 된다. 이후 손학규와의 갈등으로 바른미래당을 탈당해 새로운보수당을 창당, 자유한국당과 합당하며 미래통합당으로의 통합을 이루었다.

20대 대선에선 국민의힘 후보로 경선에 출마해 본경선까지 진출했으나, 윤석열과 홍준표에 밀려 3위로 경선을 마무리했다.

경선 이후 윤석열 후보의 지지 유세를 제외하면 대외 활동이 전무한 상황인지라 본인이 공언했던대로 정계 은퇴 수순이 아니냐는 설이 나돌았으나 지지층 및 국힘 내에서는 윤석열 정부 내각 입성 내지 경기도지사 출마 등과 같은 자리에 어렵지 않게 이름이 거론되었다.

그리고 2022년 3월 31일, 6월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할 것임을 공식 선언하였다.

 

유승민 고향 생애 가족관계 결혼 학력 프로필

가정사

본적은 경상북도 영주군 이산면이다. 집안이 경상북도 북부 지방에서 생활했으며, 부친인 유수호 전 의원을 비롯한 선대 묘소가 영주에 있다.

유승민의 조부 유재영(劉載英)은 경북 영주 지역에서 평생 빈농으로 살았는데, 글씨를 잘 써서 양반집에서 상을 당하면 비석의 글씨를 써주는 부업을 했다고 한다. 양반집에서 자식들에게 교육을 강조하고 투자하는 것을 보고,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을 교육시켰다고 한다.

유승민의 부친은 유수호 전 의원으로 경북고등학교,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고 1955년에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으며 1960년 육군 군법무관 대위로 군 복무를 마친 뒤, 대구지방법원 판사로 법조인 생활을 시작하였다. 박정희 정권에 비판적인 판결을 여럿 내려 1973년 판사 재임용에 탈락한 뒤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1985년에 민주정의당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였다가 통일국민당 - 신민당 - 자유민주연합을 거쳐서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3선 이상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켜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계를 은퇴하였다.

유승민의 모친 강옥성 여사는 상당히 독실한 불자로 알려져 있다. 대구광역시에 있는 청수사 신도회장만 30년 이상 맡아 봉사에 헌신하셨고, 아들의 공천관련 문제가 언론을 타자 대구 모 사찰에서 조용히 1000배를 올리셨다고. 또한 각종 나눔공양으로 유명한데, 법당 관련 행사나 아들 유승민 의원 관련 행사시 각종 음식들을 손수 요리해 베푼다고 한다. 아흔이 가까운 고령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매일 신문 6종류를 구독해 챙겨보실 정도로 혜안이 깊으시다고 한다.

형 유승정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뒤 사법시험에 합격하여(연수원 11기) 군법무관으로 복무를 마치고 판사로 임용되었다. 창원지방법원장, 경상남도 선관위원장, 서울남부지방법원장을 지낸 후 현재는 변호사라고 한다. 누나 유진희는 약사로 알려져 있다.

아내 오선혜는 경북여자고등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수학과를 졸업하였다. 아들 유훈동은 아버지에 이어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였으며, 현재 대기업에 재직하고 있다. 딸 유담은 은광여자고등학교, 동국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유승민 의원이 국방위원장으로 재임할 때, 아들 유훈동의 결혼식을 매우 조용하게 지내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화환은 일절 거절하였고, 지역 관계자들에게 함구령을 내려 아무도 모르게 극소수의 하객들만 데리고 결혼식을 끝냈다. 유승민, ‘아무도 몰래’ 장남 결혼식'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1958년, 경상북도 대구시 대봉동(現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에서 태어났다. 삼덕국민학교, 대륜중학교, 경북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고, 위스콘신 대학교 대학원으로 유학까지 갔다온 바 있다.

판사로 일하던 아버지의 월급으로 대구로 유학을 온 사촌형들까지 건사하느라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중이염에 걸려 병원을 가야 되는데, 돈이 없어 어머니가 극장 티켓을 암표로 팔려다가 경찰서로 연행되기도 했다. 이때 치료를 제대로 못 받은 탓에 지금도 청력이 약간 좋지 않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 집안인 것은 아니었음을 귀에 고스란히 그 증거를 남긴 셈이다. 본래 부유한 집안이 아니었고, 그나마 집에 있는 재산은 고향에 남은 장남(유승민의 큰아버지)에게 몰빵했기 때문이다. 이 시절 시골에서는 농토를 장남에게 모조리 물려주고 대신 도시로 나간 동생들의 학비를 내게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시골에서 꾀죄죄하게 농사짓고 사는 큰형 일가와 도시로 가서 세련되게 잘 사는 둘째 이하 집안들간의 갈등이 90년대까지도 드라마 소재가 되곤 했다.

이후 고등학생 무렵, 아버지가 사법 파동으로 인해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를 개업한 뒤로는 금전적 상황이 훨씬 나아졌다고 한다. 유승민 본인 또한 방송에서 어쨌든 성년이 되기 전에 집안 형편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므로 그런 측면에서의 금수저라는 지적은 딱히 부정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대륜중 3학년 시절 같은반이었던 이기만 대경영상의학원장은 유승민 의원이 중학생 때는 굉장한 축빠였고 한다. 쉬는 시간마다 나가서 축구를 했는데 실컷 공을 차고 매점에 갈 때 형편이 어려웠던 이기만 원장의 손을 잡고 기만아 너도 같이가자면서 크림빵을 사줬다고 한다.

여담으로 당시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유승민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서울로 발령을 받을 거란 소식에 경기고등학교 등의 서울 명문고 진학을 권유했지만 "친구들이 다 여기 있는데 안 가면 안 돼??"라며 거부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른바 사법파동으로 부친이 법복을 벗게 되자 서울행은 무산되었고, "어머니는 남몰래 눈물을 흘리셨지만, 나는 대구에 남게 되어 너무 좋아했었다"며 당시 철없던 자신을 회고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비평준화 시절 대경권의 명문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학창 시절 유승민은 공부도 잘하고 놀기도 좋아하는 학생이었다고 하며, 성격은 '샌님'보단 ‘쾌남’에 가까웠다. 교우 관계가 좋아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두루 친하게 지낸, 요즘으로 치면 인싸였다. 그의 고교 동기로 잘 알려진 사람들로는 정종섭 의원, 류성걸 전 의원, 권오을 전 의원, 주성영 전 의원 등이 있다.

학창시절인 70년대 청룡기에서 유승민의 모교인 경북고는 정상급의 실력을 자랑했는데, 이 영향인지 지금까지 야구를 상당히 좋아한다고 한다. 심지어 고3이던 수험생 시절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리는 경기를 보러 가기 위해 1박 2일간 가출하여 고속버스로 상경했다고 밝혔다.

당시 경북고는 고교야구 최강자로 2연속 우승을 노리던 때였다. 근데 정작 유승민이 직관하러 간 그 경기에서는 광주제일고등학교에 패했다. 그리고 씁쓸한 마음으로 학교에 돌아왔더니, 학교에선 몽둥이 찜질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 응원하는 팀은 당연히 연고구단인 삼성 라이온즈고, 딸인 유담도 삼성빠다. 부녀(父女)가 같이 직관하고, 유담 씨는 직관할 때 대부분 유니폼까지 입을 정도로 열렬한 팬인 듯.

 

1975년 대입 압박에 시달리던 한 친구가 학교 선생님에게 부당한 이유로 맞았고 경남 양산에 있는 통도사로 가출해버렸는데, 이 친구를 찾아오기 위해 유승민도 집을 떠난 적이 있었다. 친구의 가출 소식을 들은 유승민은 아버지의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을 찾아가 돈 3만 원을 꾼 뒤 그 친구를 찾아나섰다. 며칠 뒤 친구를 찾아 돌아온 유승민은 머리를 빡빡 깎은 채였다. 멋대로 가출해서 벌로 삭발당한 거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유승민 본인이 직접“어쨌든 나도 집을 나간 것이니, 걱정하신 부모님에게 사죄하는 뜻으로 머리를 깎은 것”이라 했다.

그의 고교 동문의 증언에 따르면, 유승민은 모든 친구들과 두루 잘 지내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엔 아무래도 성적순으로 끼리끼리 교제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보통이다. 유승민도 경북고의 우등생 모임인 '청록'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지만, 유승민은 친구의 배경 성분을 따지지 않고 오직 사람됨을 가지고 친구들을 만났으며, 당시 경북고의 음성서클 '광풍' 멤버들 및 문학서클 친구들과도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특히 퇴학당한 친구들과 아주 가깝게 지내는 독특함이 있었다고 하며, 심지어는 30대 초반에 재경 경북고 동문회장을 맡았을 당시 동창회 회칙을 바꾸어 중도퇴학당한 친구들도 동문회 가입을 할수 있도록 하였다. 기사.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회고에 따르면, 유승민은 고3 때 반 실장을 맡았는데, 기사. 반 친구 60명의 생일을 빠짐없이 모두 챙겨줬을 만큼 사교성이 좋았다고 한다. 집에서 몰래 양주 1병을 가져와 한 잔씩 돌아가면서 마셨다는 일화가 있다. 가난하거나 학업이 좋지 못한 친구들도 배려해 주는 등, 리더십이 탁월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상당히 감수성이 여린 모습들도 보였다. 한 겨울,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버스 정류장에서 술에 취해 있던 낯선 이를 업고 집에 들어오기도 했다. 키우던 개가 죽자 1달 동안 슬퍼하기도 했다고... 가족 중 한 사람은 “승민이가 고3 때 집에서 키우던 조그만 개가 죽었는데, 1달 동안 울기만 했다. 어머니가 '수험생이 공부는 안 하고 저러고 있다'며 걱정했을 정도”라고 했다.

유승민은 1976년, 대학입학 예비고사에서 전국 3등을 거머쥐었고,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에 합격했다. 그런데 유승민은 "형(유승정)이 너무 공부를 잘하는 바람에, 나는 집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며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최근에도 임윤선 변호사와의 방송에서 "형이 공부를 나보다 훨씬 잘했다"고 말하며 "형은 초등학교 때부터 1등을 놓친 적이 없지만, 나는 공부도 잘 안 하고 만날 놀러다니는 문제아였다"고 말했다.

물론 이는 초인적인 수재 타입의 형과 비교했을 때, 그것도 농담 삼아 그렇다는 것이며, 유승민도 실제로는 부정할 수 없는 우등생이었다. 사실 유승민은 학교 수업이 끝난 뒤부터 저녁까지 신나게 놀다가 귀가해 저녁을 먹고 잠을 잔 후, 새벽 2시부터 학교 가기 전까지 밀린 공부를 했다고 한다. 당시 유승민의 친구들에 따르면 "쟤는 하루 종일 노는데, 어떻게 저리 공부를 잘하나??"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그 누구도 유승민이 비상한 두뇌를 가졌다는 점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결정하는 전공 진입으로, 법학과가 아닌 경제학과를 선택하였다. 법조인 가족이어서 시도때도 없이 벌어지는 가족 간의 법 이야기에 질린 나머지 법학과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에 다른 과를 찾던 중 경제학 정도면 좀 덜 혼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꾸중을 각오하고 경제학으로 전공을 결정했다고 한다. 사실 처음에는 수학, 통계학 때문에 골치가 아파 철학과 수업이나 불문과 수업을 듣는 등 잠시 방황했다고 한다. F학점도 받아보고(…) C, D도 여러 개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은 수학은 떼려야 뗄 수 없겠다는 생각에 공부에 매진했다고 한다.

 

재학 중 군대에 입대하여 대한민국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33경비단에서 복무하면서 육군 병장으로 만기전역하였다.

유승민의 경북고 동기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판사 출신이자 대구시 유명 법조인의 아들인 유승민이 평범하게 군대를 간 것도 놀랍고, 훈련을 정말 열심히 받아 신병교육대에서 1등으로 수료했다는 사실 또한 놀라운 것이라며 증언하였다. 그리고 이어진 신병교육대장과의 면담에서 '특별히 복무하고 싶은 군 부대가 있나'라는 질문에 훗날 아내가 되는 오선혜 여사가 다니던 이화여자대학교 근처에서 복무하고 싶다며 솔직하게 이야기했고, 실제로 이화여대에서 가까운 33경비단에 배치받게 된 것이다. 웬만한 특전사 출신에게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군기가 세서 모두가 기피하던 곳을, 훗날의 아내를 위해 자원했던 것. 다행히 무사히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한 지 몇 개월 뒤에 결혼했다. 훗날 19대 대선 당시 그의 동기들은 당시 그를 좋게 평가하면서 문재인의 특전사 못지 않은 병역살이를 했었다고 평했다. 거기다 33경비단은 당시 그 유명한 장태완 장군이 특히 더 엄하게(…) 훈련을 시켰으니 말이 필요없는 수준.

참고로 유승민이 복무하던 시기(1979년 1월 ~ 1981년 4월)에 12.12 사태가 있었고, 반란의 주축 부대 중 하나가 유승민이 복무하던 33경비단(단장 김진영)이었다. 물론 일개 병사가 무엇을 했겠냐마는, 어찌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 본인 회고에 따르면 평소처럼 부대에서 지내다 부대 동료들에게 특전사 사령관은 잡혀가고 김오랑 소령은 사망했으며 장태완 사령관이 맞서다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다음 날 노태우가 신임 수경사령관으로 취임했었다고 한다. 훗날 국회 국방위원장이 된 유승민은 12.12 당시 홀로 반란군에 맞서다 전사한 김오랑 소령(추서계급 중령)의 훈장 추서를 추진해 결국 보국훈장을 추서하는데 성공하여 김오랑 기념사업회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는데, 일설에 따르면 당시 유승민이 밝히기를 12.12 당시 반란군이었던 33경비단의 일병으로서 김 중령의 훈장 추서를 자신의 책임처럼 여겼다고 한다.

여담으로, 모 방송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신임 수경사령관 노태우의 자녀] 과외병을 뽑기 위해 공부 잘하는 사병 리스트를 인사처에서 추려내어 최종 3명을 추천하였는데, 그중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재학 중에 입대한 유승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유승민은 "절대 하기 싫다"며 거부하였고, 결국 강력한 반발(?)로 무산되었다.

본인 말로는, 신병 때 개고생하며 겨우 짬을 먹었는데 이제 와서 장군 따까리하기 싫어서 그랬다고. 당시의 군사독재정권시절, 게다가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수경사령관이였던 노태우 사령관의 제안을 일개 사병이 극구 거부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배짱인 것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행여 저게 성사되었다면 지금의 유승민은 없었을 수도 있는 일이다.

 

결혼과 미국 유학 시절

서울대학교 1학년이였던 유승민과 경북여고 3학년이였던 오선혜는 당시 고교 은사님이였던 강형(전 대구한의대학교 교수) 선생님]의 댁에서 마주친 것이 첫 만남이었다. 어느 날 오선혜는, 당시 TBC의 '푸른광장'이란 여고 탐방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재학 중인 경북여고를 소개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주제를 가지고 소개해야 해서 원고가 필요했고, 결국 고교 은사님께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강형 전 교수는 유승민에게 오선혜를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원고를 다 작성한 후 직접 전달하기 위해, 두 사람은 서로 약속을 잡고 만나게 된다. "대학생 오빠한테 아이스크림이라도 사달라고 하자!"며 오선혜는 친구 2명을 데리고 나갔고, 유승민도 친구 2명을 데리고 나와 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 이후에 유승민은 강형 전 교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 여학생의 순수함과 발랄함이 맘에 듭니다"라고 언급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 오선혜는 이화여자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수학과에 입학하였고, 서울대 공대 학생들과 4:4 미팅을 하게 되어 서울대학교/관악캠퍼스를 산책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저 멀리서 슬리퍼를 찍찍 끌며 걸어가는 유승민을 만나게 되었다. 훗날 "이렇게 우연하게 마주치는 것도 필연이자 운명 같았다"라고 오선혜 여사는 회상했다.

오선혜 여사는 "그 이후 유승민을 만나면서 그의 순수한 매력에 빠졌다"고 소개했다. 이화여대 캠퍼스 축제에 초대하자, 양복이 없던 유승민은 선배에게서 빌린 양복을 입고 왔는데, 하필 동복이라 더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캠퍼스를 누볐다고 한다. 오선혜 여사가 빈 강의실에서 좋아하는 팝송을 불렀는데, 유승민이 곧바로 2절을 이어 불러서 이때 조금 반했다고 털어놨다. 또 함께 등산을 마치고 나서 오선혜가 산에서 아끼던 스카프를 잃어버렸다며 속상해 하자, 다음 날 혼자 산을 샅샅이 뒤져 기어이 그 스카프를 찾아왔다고 한다. 이처럼 두 사람은 서로의 순수함에 빠졌고, 오선혜가 이화여대를 졸업하자마자 둘은 결혼하게 된다.

유승민과 오선혜의 결혼식 사진과 신혼여행(경북 경주시 불국사) 기념 사진

1982년 서울대학교 경제학부를 졸업한 뒤, 유승민은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그 후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로 유학을 떠나서 대학원에 석박사 통합과정으로 재학하여 수리경제학, 미시경제학 조교를 하였으며 4년 만에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전공은 산업조직론, 부전공은 계량경제학, 수리경제학으로 알려져 있다. 계량경제학 강의로 1986년 최우수 조교상을 받았으며 이는 역대 위스콘신 대학교 경제학과 한국인 유학생 중 유일한 수상이다. 박사 학위 논문은 1987 Dissertation Travel Fellowship]을 수상하였다. 이 미국 경력은, 이후 정부로부터 외압을 받아 KDI연구위원에서 쫒겨났을때 UC샌디에이고에 초빙교수로 일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같은 시기에 유학생활을 했던 이들에 따르면, 유승민 의원은 당시 위스콘신 대학교에 함께 유학 왔던 동기들, 특히 후배들을 잘 챙겨주는 선배였다고 한다. 또한 행정고시 출신 공무원 유학파들에 대립(?)하는 민간 유학생의 대표주자로서 정부의 역할론에 대해 틈이 날 때마다 논쟁을 했다고 한다. 당시 공무원 유학생의 대표주자는 훗날의 정적이 될 최경환 사무관이었다.

 

난 유승민과 미국에서 위스콘신대 경제학과 박사과정에서 함께 공부해서 유승민을 아주 잘안다 유승민은 공명정대하고 정의로우며 모자라는후배인 나를 잘 챙겨준 따뜻한 사람이다 의리의 남자이다 경제학과 맥주모임에서 내가 선구자 가곡을 성악으로 노래했더니 운동권 출신 어떤 선배가 선구자는 그렇게 부르면 안된다고 비평하자 왜 안되느냐고 내 대신 싸워준 분이다 내가 공부가 부족해 수준이 낮은 학교인 플로리다 박사과정으로 전학 갔을때 많은 사람들이 위스콘신대에서 쫒겨났다고 비아냥했지만 유승민은 대구에 있는 다른사람들에게 내가 쫒겨났다는 말 대신에 살기좋은 플로리다로 갔다고 좋게 표현해준 따뜻한 분이다.

- 한 네티즌의 유승민 유학시절 일화

 

경제학자 시절

1987년,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으로 복귀했다.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시절부터 같은 연구원으로 있던 이혜훈과 사수-부사수의 관계였다고 한다. 이혜훈 의원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KDI는 남성 연구원이 압도적으로 많은 남초 직장이었고, '성평등'이라는 개념도 생소할 당시여서, 여성 연구원이 엄청난 스트레스로 사망(!)하는 사고까지 있을 정도로 여성 연구원들은 힘든 생활을 하는 경우가 잦았다. 또한 육아 문제까지 겹쳐 KDI에서 남성 연구원들의 볼멘소리가 나오기까지 했는데, 유승민 박사는 "너희 남자들 참 못 됐다. 니들이 애들 키워보기는 했나?"라며 여성 연구원들을 챙겼다고 한다. 이에 비슷한 어려움을 가지고 있던 이혜훈 박사 역시 도움을 받고, 그 계기로 지금까지 유승민과 가깝게 되었다고 인터뷰한 바가 있다.

 

고등학생 때부터 야빠였던 유승민 박사는 KDI내의 야구동아리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부총리배 중앙행정기관 야구 대회에서는 정식구장 규격의 타석에서 100m 비거리 홈런을 쳐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해당 홈런볼은 유승민 의원실에 전시 중이며, 당시 사실을 증명하는 KDI 소식지를 스크랩해 의원실에 소장하고 있다. 그 외에도 테니스, 축구 등 운동들을 좋아하는 활동적인 성격의 연구원이었으며, 비(非) 박사 연구원들에게도 깍듯하게 대했다고 한다. 주량은 한창 젊을 때 소주 10병을 마셨고, "음주가무를 좋아하는 호주가(好酒家)형 스타일"이라고 주변인들은 평가한다.

 

KDI 연구원 시절 옆방에서 근무했던 김인규 한림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KDI 시절 유승민 박사는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였지만, 누구에게나 겸손했던 인물"이라며 회자했고, 홍종호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는 "21년 전, KDI 선배 박사들의 활약에 주눅들어 외로움을 느꼈던 나를 직접 챙겨준, 고맙고 든든한 선배"라고 증언하였다. 또한 19대 국회의원이자 청와대 고용복지수석이던 김현숙 전 의원은 "박사 중심 엘리트주의가 팽배했던 KDI에서, 석사 출신과도 잘 어울려 젊은 연구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증언하였다.

KDI 출신의 한 연구원은, 샌프란시스코로 떠난 출장에서 회식 다음 날 아침 숙취로 고생하자, 유승민이 '먹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 연구원은 백도를 먹으면 숙취가 없어진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백도가 먹고 싶습니다'라고 말했고, "잠깐만 기다리라"며 나갔던 유승민은 점심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한창 후에 나타나서 한다는 소리가 "아무리 뒤져봐도 황도는 있는데 백도는 없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인간미 덕택에, 90년대 KDI의 연구원들 사이에서 유승민 박사는 독보적인 리더쉽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된다. 그 영향으로 KDI 연구위원 출신인 이종훈 의원, 신광식 전 김앤장 상임고문, 나동민 NH농협 대표, 진수희 전 보건복지부 장관, 그리고 이혜훈 의원의 남편인 김영세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경제학과 교수 등 수많은 KDI 멤버들이 유승민 의원의 대선캠프에서 직간접적으로 그를 돕게 된다. 대선후보 캠프 소개 기사에서 후보 자체가 정책브레인으로 소개된 사람은 유승민이 유일하다.

자기계발서로 유명한 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인 공병호 박사 또한 유승민의 KDI 시절의 미담을 밝혔다. 당시 공병호 박사가 소속되어 일하는 곳은 한국경제연구원이었는데 유승민 박사와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산업정책을 연구하는 곳이었다. 둘은 각종 세미나와 토론 등에서 만나서 친분을 쌓았는데, 그러던 중 1992년 공병호 박사에게 어려움이 생겨 직장도 못 나갈 지경이 되고 말았다.

고민 끝에 KDI의 유승민 박사 연구실을 찾아가 하소연 하는데 유승민 박사가 한마디 했다고 한다. "도와줄게." 다른 연구소의 연구원을 자신의 일처럼 챙겨주는 유승민 박사를 잊지 못하며, 그는 유승민에 대해 "유승민은 의리의 남자다. 옛말에 '좋은 친구 하나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하는데, 그 말은 내가 유승민을 떠올리며 하는 말이다" 라며 칭찬한다. 공병호 박사와 유승민의 젊은시절 일화

당시 유승민 박사의 전공이였던 산업조직론 전공자가 한국에선 드물었던 까닭에, 유승민 박사는 재벌 이슈가 한창이던 당시 대한민국에서 제일 바쁜 경제전문가로 활약했다. KDI 후배였던 이종훈 전 의원에 따르면, 당시 KDI에는 연구실적, 토론 및 강연 등을 고려하여 받는 성과금이 있었는데 유승민 박사는 언제나 1등을 놓치지 않는 스타 박사였다고 한다.

또한 KDI의 중요 프로젝트는 유승민을 거쳐 진행되었다고 하며, 후배 연구원이였던 홍종호 교수 역시 "KDI시절, 유승민은 제일 바쁘고 잘나갔던 선배였다"며 KDI 시절을 회상했다. 90년대 초반 KDI에서 유승민과 함께 일했던 오영숙 연구원은 인터뷰에서, "당시 유승민은 차기 원장감 이라는 소문이 있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유승민은 KDI의 산업조직팀(법경제팀)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유승민 박사는 1988년 12월 KDI 정책토론회에서 정보통신분야 규제완화분야를 맡게 되었는데, "국영기업이 사실상 모든 통신산업을 독점하고 있고, 이로 인한 정부의 직접규제로 인해 이들이 시장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통신산업의 민간경쟁을 유도하여, 시장경쟁력 강화와 소비자의 이익을 도모하자"고 주장하였다.

훗날, 한국정보통신공사는 KT로 민영화되었고, 정부는 1997년 시내전화 경쟁을 위한 제2시내전화사업자로 하나로통신(현 SK 브로드밴드)를 선정하는 등 본격적인 통신시장 경쟁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90년대 후반부터 한솔, 두루넷, 한국통신 등의 인터넷 서비스 업체 간에 경쟁이 치열하게 불붙기 시작해 한국의 인터넷 환경은 세계에서 최고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하나로통신(현 SK 브로드밴드)은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유승준(스티브 유)을 기용해 ADSL인터넷을 광고하기도 했는데 "따라올 테면 따라와봐"라는 최고의 유행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이에 질세라 KT는 '메가패스(Megapass)'라는 브랜드를 출범시키고, 신화 에릭을 모델로 기용하여 CF를 방영하였다. 에릭의 랩에 묻혀서 그런지 메가패스가 내가팼어로 들리고 말았는데, 당시 초중고생에게 컬트적인 인기를(…) 끌어 뜬금없는 마케팅 대박을 터트리기도 했다. 현재는 KT의 올레(Olleh), SK의 브로드밴드(Broadband), LG의 유플러스(U+) 브랜드로 3사의 초고속인터넷 경쟁체제가 유지되고 있고, 심지어는 현대 HCN 같은 지역인터넷 사업자까지 등장하는 등 소비자의 선택권 역시 다양해졌다.

OECD산하 디지털경제정책위원회(CDEP)는 '디지털경제전망(Digital Economy Outlook) 2017이란 보고서에서, 한국의 인터넷 서비스 평균속도는 약 29Mbps로 세계 1위이며, 100Mbps 이상 속도 인터넷가입자 비율은 세계 2위라고 발표하는 등 한국의 인터넷 환경을 세계 최고수준으로 평가하였는데 이는 엄연히 인터넷통신 시장의 경쟁의 산물이다.

1988 서울올림픽 이후, 한창 세계화 바람이 불던 한국사회에서, 유승민 박사는 특정 시장의 공기업 독점을 매우 경계하는 한편, "세계적으로 매우 드문 재벌이라는 기업의 지배구조를 뜯어고쳐, 곧 다가올 글로벌 시장에서의 기업경쟁력을 도모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게 된다.

90년대 초중반, 대한민국은 한창 재벌 대기업 위주의 고도성장 덕택에 현대, 삼성, 대우, 현대그룹 등을 중심으로 한 재벌이 한창 그 위세를 떨치고 있을 시기였다. 정경유착은 물론이고, 아무리 재벌 개혁을 부르짖어도 경제성장이라는 구호 아래 묵살되던 시기였다. 그 와중에 유승민은 경제개발계획 정책발표나 토론회에서, 당시에는 감히 말도 못 꺼낼 법한 혁신적인 재벌개혁을 발표하곤 했다. 전경련이나 경영자총연합회 등 재벌 대기업 집단에서는 당연히 반길 리가 없었고, "저 사람 좀 이상한 사람 아니냐" 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1993년 공정거래정책회의에서 유승민 박사는 출자총액제한제도, 채무보증 한도축소, 심지어는 정부의 기업분할명령제도 도입 등 당시 재벌경제 대한민국에서 감히 말도 안 되는 정책을 들고 나와 주목을 받았다.

또한 당시 김영삼 정부출범 이후 대통령 직속 행정쇄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함과 동시에, 김영삼 정부의 경제정책에 관해 '친대기업' 정책이라며 비판하였다. 당시 정부의 재벌정책에 관하여 유승민 박사가 한국경제신문에 투고한 칼럼. 또한 재벌집단의 신문, 방송, 금융기관 소유에 대해 "현실왜곡 현상이 발생한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때부터 유승민이란 젊은 경제학자는 그 이름이 조금씩 언론에 오르내리기 시작한다.

1994년 한국산업조직학회 사무국장을 역임하였다. 당시 삼성그룹의 자동차시장 진출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이미 국내 기업들이 양분하고 있는 자동차시장의 시장진입 허용에 관하여 찬성/반대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이미 과점 상태의 시장이며, 삼성은 자동차시장 경험 부족으로 위험성이 크다"며 사실상 허가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비쳤는데, 이는 결국 기존 자동차업계의 기득권 유지 논리에 불과했다. 이에 유승민 박사는 KDI 연구보고서를 통해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삼성의 자동차산업 진출을 통해 자동차산업의 경쟁을 도모하여, 자동차산업의 발전과 그에 부수되는 관련 부품시장의 활성화, 그리고 기업경쟁력 강화를 함께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진입 초반 어느 정도의 시장 혼란은 있겠지만, 거시적으로 자동차산업 전체의 이익이 된다며 삼성의 자동차시장 진입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미있는 점은, 당시 한국자동차협회에서 한국산업연구원(KIET)에 삼성의 자동차산업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연구용역을 발주했고, KIET는 재용역을 KDI에 발주했는데 그 용역보고서에서 삼성의 자동차산업 진출을 찬성하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이에 재용역을 발주한 KIET는 물론이고, 현대, 기아, 대우 등 타 자동차회사들은 당황하게 된다. 결국은 본인들이 의뢰한 연구용역이 삼성의 자동차산업 진출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결국 삼성은 자동차시장에 뛰어들게 되고, 3년 후 신차를 발표하여 본격적인 대한민국의 자동차 시장 경쟁이 시작되게 된다. 당시 경제기획원 공무원들 사이에서 "KDI에 발주한 연구용역 담당자가 유승민이면 반드시 중간점검을 해야 한다"는 소문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연구용역 보고서는 주문자의 입맛에 맞게 주문생산을 하여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보충적 성격이 매우 강했지만, KIET 용역 일화는 누구의 입맛도 맞추지 않는 유승민의 소신을 나타낸 것이다.

그 후 삼성자동차는 SM5 모델 출시와 함께, 당시로는 매우 혁신적이던 3만6천km 무상수리보증정책 등을 들고 나와 한국 자동차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현대자동차는 2년 후인 2000년대부터 이 정책을 적용했을 정도. 또한 대한민국의 자동차 주력시장인 중형차 시장에서 현대 소나타와 삼성 SM5간 양강구도가 10년 이상 형성되었고, 이건희 회장이 직접 생산 전반에 걸친 품질관리를 선도하며 대한민국 자동차시장에서 이른바 '품질경영' 시대를 열었다. 결국 삼성의 자동차시장 진출은 사실상 현대, 기아가 양분하던 한국 자동차시장에 경쟁원리가 도입되어 산업 전체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후 2010년 대한민국 자동차산업은 생산량기준 세계 5위를 고수하고 있다.

1995년 한국산업조직학회 학술회의에서, "대통령직속의 규제개혁청을 신설하여 강력한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규제개혁은 독과점을 방지하는 것이지, 친재벌적 성격의 정책이 아니라며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1998년 규제개혁위원회가 대통령 직속으로 설치되어 지금까지 존속 중이다.

1996년 거대 공기업이였던 한국중공업의 민영화 문제가 대두되자, 1996년 유승민 박사는 "한국중공업이 공기업으로만 머물러 있으면 국제경쟁력이 약화될 수 밖에 없다"며 민영화를 통한 경쟁력 확보와, 지배구조의 일원화를 주장하였다.

2000년 12월 한국중공업의 두산그룹 인수가 결정되었고, 그 후 두산중공업으로 명칭을 바꾸게 된다. 두산중공업은 공격적인 M&A와 사업다각화를 통해 국내 유일의 원자력발전 설비전문기업으로 거듭남과 동시에 2015년 기준 해수담수화플랜트 세계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는 등 굴지의 중공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는 한국 공기업 민영화의 대표적인 성공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90년대 초반 한강의 기적의 대표주자였던 포항제철(포스코)의 박태준 체제가 무너지면서 대한민국 철강의 자존심인 포항제철이 흔들리게 된다. 이에 포철에서는 산학협력으로 포철에 대한 경영진단에 나서게 된다. 경영진단반 10인중 한사람으로 유승민 KDI박사가 선정되었고, KDI가 최종적으로 포항제철 경영진단보고서 작성용역을 수주하게 되자 유승민 박사가 프로젝트를 총괄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 현대제철과의 힘겨루기를 하던 포항제철의 경영진단보고서 내용 중, 시장진입을 자유롭게 하여 경쟁원리의 도입을 주장한 유승민의 주장이 당시 통상산업부와 의견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집필 후 보완작업을 하던 중 유승민 박사가 1996년 미국 UC San Diego대학의 IR/PS대학원에 초빙교수로 임용되어 미국으로 떠나는 과정에서 정부에 의한 외압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 후에 귀국하여 다시 KDI에서 선임(수석)연구위원으로 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포항제철은 IMF 이후 지분을 전부 매각하여 민영화가 되는 동시에 포스코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후 한국 굴지의 철강그룹으로 도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M&A(기업간 인수합병)문제가 한국 재계에 화두로 떠오르자, 유승민 KDI 연구위원은 M&A규제를 풀어 기업의 시장 진입과 퇴출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할 뿐더러 그것이 21세기 우리의 선택이라면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원칙은 존재하여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대신 그 반대급부로 "재벌총수나 임원진들을 사실상의 기업 이사로 간주하여 경영부실에 책임을 묻고, 기업간에 오가는 불법자금을 처벌하는 법 조항을 형법에 신설해야 한다" 는 신선한 주장을 하였다. 그 후 재정경제원은, 2000년부터 외국인의 한국에 대한 적대적 M&A 허용을 시작으로 점차 M&A의 규제를 풀어나갔다.

 

1997년 당시 IMF 위기의 도화선이였던 기아자동차 부도 사태 당시, 당시 김선홍 회장을 포함한 기아의 최고경영진의 잇다른 경영 실패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이른바 기업의 사물(私物)화 현상, 즉 내 회사가 아니니 최고경영진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현상이 대두되었다. 이에 유승민 KDI 박사는 "소유, 지배권이 없는 전문경영인 이 경영부진 속에서도 살아 남으려면 필연적으로 사내에 ‘정치’ 요소가 자라게 된다"며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또한 정부가 서둘러 과감한 구조조정에 나서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훗날 기아자동차는 워크아웃에 들어가 현대그룹에 매각되어 지금의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이 탄생하게 된다.

1997년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열린 제 3차 경제규제개혁위원회에서, 정부가 일반의약품(OTC)을 슈퍼나 편의점에서 팔 수 있도록 추진하려고 하자, 대한약사회에서는 절대 반대 입장을 내비쳤고, 보건복지부에서는 약사 편을 들면서 "의약분업과 연계해서 고려해야 한다"고 하였다. 유승민 연구위원은 "그것을 왜 의약분업과 연계해야하는지 납득할 수 없다"며 일반의약품의 슈퍼, 편의점 판매에 찬성하였다. 2011년 한국소비자원에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70%이상의 국민들이 이 제도에 찬성하였고, 결국 2012년 말부터 일반의약품의 편의점 판매가 시작되었다. 유승민은 훗날 자서전에서 "약사인 친누나가 동생 때문에 고생했다"고 말했다.

 

유승민 박사는 전두환 정권 시절 생겨난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 방송광고시장의 독점적 폐해를 야기했다며 한국방송광고공사의 폐지를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이를 반영한 논문을 KDI에서 발행하는 '한국개발연구' 학술지에 최초로 게재하고 위와 같이 인터뷰했다.  주장이 보도된 이후, 익명의 공기업 간부로부터 전화로 엄청난 욕설을 들었다고 한다

 

 

유승민 비판 및 논란 사건 사고 인간관계 인맥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비서실장 당시 행보

박근혜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파문으로 과거 한나라당 시절, 박근혜 당대표의 비서실장 시절의 행보들이 비판 받으면서 진정성을 의심 받았다. 이 시기의 행적으로 좌측에선 박근혜 후광으로 정치 편하게 하려는 기회주의자, 우측에선 박근혜를 버린 배신자란 인식을 남기게 되었다.

 

해명

다만 이 시기만 하더라도 대내외 적으로 한나라당 전 대표였던 박근혜에 대해 일견 좋은 평가가 제기되었다는 반론이 있다.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고 당시에 불렸으며, 경향신문은 2007년 올해의 인물로 박근혜를 꼽기도 했다. 2010년에도 민주당은 당 공식 입장으로 박근혜에 대해서 '''박 전 대표는 평소 신뢰와 원칙을 매우 강조한 정치인"'라고 호평하기도 했다.

또 10여년 전에 한나라당 대표로서의 박근혜에 대한 평가와 대통령 박근혜의 평가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하기에 사람이 바뀐 것이라고 지적하는 의견도 있다.1 2 실제로 2000년대에 박근혜와 행동을 함께했던 유승민, 김무성, 전여옥 모두가 공교롭게도 2010년대에 넘어오며 박근혜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세 명은 모두 2000년대의 박근혜와 2010년대의 박근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는 이 세 명에만 해당되는 증언들이 아닌데, 실제로 많은 탈박인사들이 2000년대와 2010년대의 박근혜는 다른 존재였다고 말하고는 했다.

이렇게 박근혜와 함께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2000년대와 2010년대의 박근혜에 대해 괴리감을 느끼는 이유는 2000년대와 달리 2010년대부터 들어서 최순실이 개입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실제로 청와대 핵심관계자들에 따르면 최순실이 본격적으로 박근혜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정윤회와 이혼을 한 이후부터였는데 이때 공교롭게도 정윤회와 최순실이 이혼을 한 시기가 2010년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 두 사건의 타이밍이 모두 공교롭게도 2010년대부터라는 것은 박근혜가 변하기 시작한 이유가 최순실의 개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라는 합리적 의심이 드는 부분이다.

다만 유승민은 2011년 당대표 경선까지는 "박근혜 전 대표를 끝까지 지킬 사람이 누구겠느냐"며 자신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를 호소한 것을 보아 이 때까지는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한 것으로 추정되며, 박근혜 대통령 당선 이후 박근혜의 본격적인 불통 행보로 인하여 돌아선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캠프 당시 이명박 검증 논란

2007년 과거 유승민은 “지난 대선의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충분히 검증된 흠이 없는 후보가 대선 후보로 선출돼야 한다”며 "박 전 대표는 대표 재임 기간 정책적, 도덕적 검증을 받았지만 이 전 시장은 검증을 받지 않은 만큼 당연히 검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당에서 후보검증위원회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검증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며 “이미 한반도 대운하 공약, 신혼부부 1주택 공급 공약 등 정책 중심으로 검증을 준비해 왔음을 밝히며 적극적으로 당시 이명박 대선 후보에 대해 공세를 퍼부었다. 유승민의원 “이명박 자질검증 하겠다”

당시 이명박 대선후보의 측근인 정두언 의원은 유승민이 ▲대운하 ▲행정도시 ▲줄세우기 금품살포 ▲출판기념회 ▲김유찬 ▲김경준 현대건설+서울특별시장 ▲검증 일반 등과 관련해 총 13차례에 걸쳐 이 전 시장 비난 발언에 나섰다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정작 대선 후보로서 진짜 대통령이 될 자격이 있는지 후보자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필요했었던 것은 이명박 전 대통령보다 오히려 박근혜 대통령임이 드러나면서 거센 비판을 받았다. 이후 유승민은 반대 측에 의해 정치인으로서 사람을 보는 눈이 없다는 비아냥을 들었다.

아래 반론에 따르면 당시 박근혜와 그 주변의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옹호를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한때 박근혜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전여옥 전 의원 등의 증언이나, 당시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여야 가리지 않고 박근혜 주변의 여러 문제와 박근혜 본인의 자질 문제가 알게모르게 퍼져 있었다고 한다. 그걸 드러내놓고 이야기할 정도가 아니어서 알려지지 않았을 뿐.

 

해명

유승민은 16대 대선 당시 이회창 캠프 핵심으로 참여했던 사람이다. 당시 대세론을 타며 안정적 지지율을 받던 이회창이 막판에 이런저런 논란이 터지며 동력을 잃고 결국 당선에 실패한 것이 굉장히 뼈아프게 남았을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이회창 아들의 병역 문제 논란 등이 꼽혔다.

이 경험의 영향으로 유승민은 2007년 대선에 임하며 대선 후보의 도덕성 검증에 큰 무게를 두었는데 당시 한나라당의 유력 주자는 박근혜, 이명박이었다. 그런데 이명박은 1996년에 선거 비용 관련해서 위법 행위를 하고 증인을 해외로 도피시키는 행위를 저질러 의원직이 상실되기까지 한 전력이 있었고, 전과에 구속된 경력 등등 도덕성 논란의 꼬리표도 있었다. 안 그래도 전과가 만만찮은데 이명박은 당시 BBK 의혹, 내곡동 사저 문제 등 친인척이 연루된 비리 사건들도 현재 진행형으로 논란 중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승민은 썰전 출연 때도 밝혔듯이 박근혜가 정책적 능력은 좀 크게 부족해도 원칙은 잡혀 있고 깨끗한 사람이라고 느꼈고 이에 정책 부분은 참모들이 도우면 된다고 생각했는지 박근혜를 돕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여성 정치인이니 병역 논란에도 자유로웠을 뿐더러, 당시에는 전과조차 0건이었던 나름대로 깨끗한(?) 정치인이었다. 최태민 논란부터 시작해 정수장학회 같은 의혹도 제기되기는 했지만, 사실상 '논란'일 뿐 객관적으로 그것에 범죄라고 입증할만한 물증이 없기에 당시에는 사소한 의혹으로나 치부되었다. 그리고 정수장학회에서 손 떼라고 박근혜에게 2005년에 유승민이 조언했음에도 박근혜가 그런거 신경 쓰지 말라고 하자, 이 때부터 조금씩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논란

2005년 박근혜 한나라당 당대표 비서 실장을 10개월간 지내고 2007년 박근혜 대선캠프 정책메시지단장을 지내는 등 원조 친박이었던 유승민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전모를 알았는 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이에 대해 유승민은 11월 2일과 3일에 걸쳐서 "최태민 딸이고, 정윤회 부인이고, 그건 다 알려진 사실 아니냐. 최순실 씨가 과거든 최근이든 국정 농단을 하는지는 몰랐다.", "그걸 알고도 가만있으면 정상이 아니다. 난 몰랐다.", "최태민의 딸이고 정윤회의 전 부인이다. 이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라며 대통령 의상을 챙기는 모양이더라, 이 정도로 알던 사람이었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도 저렇게 한 줄은 진짜 몰랐다.'''라고 해명을 했다. 실제로 JTBC에서 최순실과 청와대 비서실 관계자가 찍힌 비디오는, 당시 최순실이 한복을 골라주던 장소의 녹화 영상이었다.

유승민은 분명 최순실의 존재 자체는 알고 있었다. 위에 유승민 본인의 해명과 더불어서 2007년 박근혜 대선캠프 정책메시지단장으로써 이명박 후보 측에서 최태민에 대해 제기한 의혹을 해명을 하는 영상이라든지 유승민 의원의 최측근 이혜훈 의원의 인터뷰, 유승민의 연설문이 개판이 돼서 돌아왔다는 전여옥 전 의원의 인터뷰,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 옆에 최순실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몰랐다고 하면 거짓말" 이라면서 친박이 최순실이라는 사람 자체를 몰랐다고 변명하는 것 자체를 차단한 김무성 의원의 인터뷰 등 여러가지의 정황을 볼 때 유승민이 최순실은 물론 최태민과 박근혜와의 관계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아래 문단에도 지적하였듯 최태민 방어 발언 논란과도 이어진다.

 

반론

이를 반론하는 측에서는 2007년 경선 이후 유승민은 꾸준히 박근혜와 불화가 생겨왔고, 심지어 박근혜 정권 4년 동안에는 그야말로 냉대를 받았으며, 유승민 역시 박근혜 정권과 줄곧 대립각을 세워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2007년 이전 '원조 친박'이었을 때도 최순실과 그 주변에 대해 상세하게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유승민은 2016년 11월 16일 새누리당 대구시당에서의 기자간담회를 통해 "대통령을 믿고 뽑아준 대구·경북 시·도민이 느꼈을 수치심과 자괴감, 배신감을 생각하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참담한 심정이다."며 "박근혜 정부 탄생에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사과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2005년 대표 비서실장을 한 이래로 박 대통령에게 끊임없이 잘못된 부분을 지적했다며 "이제 와서 '최순실을 알았다'며 정계에서 물러나라고 하는 야당의 저급한 정치 공세에는 단호히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 2 물론 유승민은 과거에 박근혜를 도왔고 정권 창출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면서 책임이 있다는 점을 최순실 게이트 직후는 물론 대선 기간 때도 항상 인정하였다. 

하지만 2017년 대선 기간 동안 박근혜 전 대통령의 처우에 대해서 '사면은 부적절하지만 사법적 판단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린 뒤, 그때 가서 국민의 요구, 시대적 상황을 다 봐서 결정하겠다.'란 말을 했으나, 반년이 지나 1심을 앞둔 시기엔 사법적 판단이 끝나지도 않았는데도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 통합을 위한 정치적 결심을 해야 함'을 언급하며 사면을 해야 한다고 암시하는 주장을 하였다.

 

최태민 방어 발언 논란

이장우 새누리당 최고위원이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에서 제기한 비판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이장우 의원은 유승민에 대해 "최태민 관련 의혹에 대해 적극 방어한 인물"이라고 9년 전 유 의원의 '최태민 방탄 발언'을 끄집어냈다. 이외에도 중앙일보, 일요주간에서도 최태민을 방어하는 발언으로 기재하였다.

유승민은 과거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검증 과정에서 박근혜 캠프 정책 메시지 총괄 담당자로서 박근혜 후보 측의 '최태민 보고서' 유출 건을 계기로 상대 측인 이명박 후보 쪽에서 최태민 의혹에 대해 공세를 취하자 이에 항변하면서 "최태민 씨가 박근혜 후보 처남도 아니고 이명박 후보와는 다르다. 이 후보의 큰 형도 아니고", "14년 전에 돌아가신 분 얘기를 왜 꺼내는지 모르겠다"라고 하며 문제를 제기한 이명박 후보 측을 오히려 깎아내렸다.

이후 10년 가까이 지나고 나서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최순실이 어떻게 박근혜 대통령과 절친하며 민간인 신분으로 유래 없는 총애를 받으며 국정까지도 간섭할 수 있게 되었는가"가 초유의 관심사가 되었다. 거기서 과거 이명박 대선 후보 측의 문제 제기에서 언급된 최태민이 재조명되었고 이후 수많은 관련자들의 증언들과 증거들로 통해 최순실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무조건적인 총애를 받으며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최순실의 아버지인 최태민이 오래전부터 박근혜에게 접근하여 치밀하게 정치 공작을 하고 줄을 댔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로 인해 최태민 논란을 이미 죽은 사람인데 쓸데없이 언급한다고 일축하며 이명박의 친형이나 제대로 관리하라는 언급을 한 유승민의 과거 발언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후 유승민 본인이 직접 14년 전에 돌아가신 분 얘기를 왜 꺼내는지 모르겠다라고 하며 덮었던 최태민이 저질러왔던 비리들과 문제점들이 하나하나 밝혀졌다. 최태민 항목 참조. 최태민이야말로 도저히 현대 대한민국에서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최순실 게이트 자체를 가능하게 한 만악의 근원이었음이 밝혀지면서 유승민의 흑역사로 취급받게 되었다.

이러한 유승민의 과거 논란이 될 행보와 발언들은 새누리당의 인적 청산 문제를 둘러싸고 친박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같은 새누리당 의원들에 의해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해당 항목들의 출처들 또한 전부 새누리당 의원인데 원래 같은 편이었던 사람들이 돌아서면 더 무섭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친박은 과거 유승민도 최태민 의혹 해명을 덮는데 앞장섰던 과거 행적들을 비판하며 박근혜를 도왔다는 것을 맹공하고 있다.

유승민은 박근혜 캠프 소속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명박 후보와의 치열한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최태민, 최순실, 정윤회 등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거짓말을 하면서 박근혜의 최태민 일가 관련 의혹에 대해 방어한 것이다. 당시 친박 핵심으로서 박근혜의 실체를 잘 알고 있었던 유승민의 이같은 대응이 아니었다면 국민들이 박근혜와 최태민 일가와의 관계를 알지 못하는 일도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유승민의 친박으로서의 진영논리에 충실한 대응은 문제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아직까지도 원조 친박으로 공격받으면서 지지층 확장이 힘든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반론

이에 대해 유승민은 각종 인터뷰와 SBS의 대선면접에 나와 본인이 최태민, 최순실, 정윤회등을 알고 있었다고 인정했고 정윤회의 경우 박근혜의 비서실장으로 일하며 아예 한 호텔에서 직접 본 적도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유승민은 이명박 대통령과의 치열한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언론에는 최태민 건을 방어한 것과 달리 실제로는 사석에서 박근혜에게 최순실 일가에 대해서 경계하고 그런 사람들이랑 어울리지 말라는 쓴소리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근혜는 이를 무시하며 "비서실장이 왜 그런 것에까지 간섭을 하세요?"라고 면박을 했다고. 이 발언에 설득력을 가하는 것은 당시 프로그램의 면접관에는 전여옥이 있었는데, 정여옥 역시 당시 유승민-김무성과 함께 박근혜와 같이 행동하는 측근이었다. 이 면접에서 경험자인 본인은 유승민의 발언에 대해 반박하지 않고 오히려 침묵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사실상 동감한다는 의사 표시를 했다. 이는 유승민의 해명이 사실이라는 의견에 설득력을 더해주는 부분이다.

 

원조 줄푸세 논란

출자총액 제한제는 이제 폐지할 때가 됐다.

- 2004년 8월 24일 국회 정무위원회 

출자총액 제한을 강화하고 징벌적 손해배상을 좀 더 엄격해야 한다.

- 2016년 9월 30일 서울대학교 강연 

 

유승민은 이회창의 등용으로 2000년 경제통, 정책통으로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에 참여해 여의도연구소의 소장(2000년 2월 ~ 2003년 6월)을 맡으며 경제정책을 이끌었으며, 2007년 대선 경선에서 박근혜 캠프에 참여해 총괄단장을 맡아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운다)' 공약을 함께 만들면서 공약의 논리적 근간과 구체적 정책을 만들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공정한 경제를 위한 시장경제 수술'을 주장하는 현재와는 대비되는 행보라는 비판이 존재한다.

4월 13일 대선 TV토론에서 “2007년에도 세금 줄이는 정책에는 반대했다”라 한 것에 대해 당시 캠프에서 후보 특보로 활동한 한 인사는 “그랬다면 쉽게 떠올라야 하는데 그런 기억이 없다”고 했다. 이 인사는 “당시 박근혜 후보의 거의 모든 연설문과 정책 공약은 반드시 유 후보의 손을 거쳐서 완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면서 “정책을 주도하던 유 후보였기에 그가 캠프의 대표 상품인 ‘줄푸세’에 반대한다고 생각지 못했다”고 돌이켰다. 또한 2007년 박근혜 캠프 전문가 그룹에서 활동한 신세돈 숙명여대 교수는 “당시 유 후보가 규제를 푸는 문제에는 공감을 했을 것”이라며 “감세에 반대했다면 한두 번 의사를 표명했을 수는 있지만 내 기억에는 그런 정황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고 되새겼다. 

한편, 2015년 4월 8일 국회 본회의에서 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마친 후 기자들과 만나 증세 방안과 관련한 질문을 받고 "대기업과 부자에 대한 증세가 먼저 이뤄지고 그 사람들에 대한 형평성 시비가 없어지면, 시간을 두고 중산층 과세 같은 것은 장기적으로 중산층 과세 같은 것은 장기적으로…(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반론

하지만 줄푸세를 입안한 사람은 유승민이 아니었다. 당시 유승민 의원은 정책본부장이 아닌, 메시지단장으로 정책분야에 책임을 지는 위치가 아니였다. 또한 줄푸세를 만든 사람은 국가미래연구원이라는 싱크 탱크를 조직해서 박근혜 전 대표의 대선 운동을 도왔던 김광두 서강대 교수였다. 그는 2017년 대선에서 문재인 캠프에 참여했다. 바른정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경쟁했던 남경필 前 경기도지사가 "(유 후보가) ‘줄푸세’ 공약을 박근혜 당시 대통령 후보 시절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중부담·중복지를 말하고 있다."고 비판했을 때도 유승민은 김광두 교수와 최경환 자유한국당 의원의 개입이라고 반박하였다. 후에 유승민 측근의 말에 따르면 내부 혼선이 외부에 비치는 걸 꺼렸기 때문에 당시 감세 반대 견해를 공개리에 밝히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김광두 교수는 "'줄푸세' 용어를 만든 건 아니지만, 개념은 내가 제안했다"며 일정 부분 시인했다.

4월 13일 대선 TV토론 때 문재인 후보로부터 원조 줄푸세 공격을 받았을 때도 "그거 만든 분은 지금 문 후보님 캠프에 계시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또한 세금 줄이는 부분에 대해서는 당시 본인이 "세금 줄이는 거 함부로 하면 안 된다"며 반대했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당시 박근혜 후보와 끝까지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그리고 재벌 개혁에 대해서는 유승민은 1993년 김영삼 정부의 신경제정책 공정거래정책협의회에서 발표한 재벌 정책과 당시 자신이 가졌던 생각과 지금과 달라진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유튜브 영상) 다만 나머지 분야에서는 정치권에 들어오고 나서 생각이 바뀐 부분이 있는데 지역구 국회의원을 직접 하면서 서민, 차상위계층, 빈곤계층, 노점상인, 자영업자, 중소상공인 등과 만나고 접촉하면서 경제, 복지 분야에 있어서 생각이 바뀐 부분이 있음을 밝혔다.

그리고 유승민은 애초에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으로 재직했을 때부터 진보 진영에게서도 좋은 평가를 받을 만큼 일반적으로 보수주의자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과는 다르게 생각이 유연한 편이었으며, MBC 백분 토론에서 토론을 벌였던 유시민은 유승민을 좋은 토론 파트너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하루아침에 의견을 바꾼 것은 결코 아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 여당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서 비판을 했으며 특히 재벌, 대기업, 감세정책, 사회경제적 양극화 현상 등에 대해서 적극적인 비판을 하였다.

 

경인TV 논란

2006년 11월 9일 한나라당 유승민 의원, 신현덕 전 경인TV 대표, 강동순 방송위원회 상임위원, 윤명식 KBS 심의위원, 모 프로덕션 J 사장이 서울 유명 고급 일식집에 모여 벌인 술자리에서의 대화 내용이 2007년 4월 5일 관련 내용이 보도되었고, 다음날 6일 전문이 공개되었다.

해당 녹취록에서는 심각한 권언유착 의혹들이 드러나 정치적 파장을 불러왔다. (전문보기) 녹취록에 따르면 참석자들은 한나라당의 대선 승리를 위해 해당 언론사들과 한나라당이 서로 도와야 한다며 협조를 다짐했고, 대선 홍보를 위해서는 감성을 자극해야 한다는 등 구체적인 전략이 이야기 되었다. 해당 녹취록이 보도된 뒤 열린우리당은 유승민 의원을 국회 윤리위에 제소했다.

 

반론

유승민 의원은 당시 어떤 자리인지 모르고 참석하였으며, 자리를 같이했던 방송위원회 강동순 상임위원만 2번째 만남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초면이었다고 전했다.

열린우리당에 의해 윤리위원회에 제소되었고 당시 열린우리당 측에서는 한나라당이 방송을 장악한다며 특위를 구성해 법원으로 조사를 나가기도 했지만, 유승민 의원에게 특별한 문제가 될 만한 사실이 없어서 흐지부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승민은 녹취록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는데, 본인도 거의 처음 보는 사람들인 데다 자신이 잘 모르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그냥 듣고만 있었다고 진술했다. 당시 유승민 의원을 윤리위에 제소해 이 사건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사람이 우상호 전 원내대표다.

또한 당시 유승민 의원은 야당 초선 의원 시절이었으며, 심지어 유승민은 방송과 언론 관련 상임위인 '미방위'에 소속되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훗날 2009년 속칭 '미디어법' 당시 한나라당의 찬성 당론을 뒤집어 기권표를 던졌으며, 2012년 총선 직전에는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으로 대구에 출마하는 와중에도 당시 언론 파업에 찬성 입장을 밝힐 정도로 언론의 독립성에 신경 쓰기도 했다.

20대 총선 대통령 사진 반납 거부 논란

20대 총선 당시 새누리당 대구시당은 탈당하여 무소속 신분이 된 유승민의 선거 사무실에 공문을 보내 "대통령 존영(사진)을 오는 29일까지 반납하라"고 정식으로 통보했는데 이를 유승민이 거부하였다.

당시 새누리당 주류계에서는 "유 의원이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반대해 놓고 대통령 사진을 계속 걸어두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고 당당하지 못한 자세"라고 비판하였다.  대통령과 척을 져 놓고 친박 지지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사진을 떼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왔다.

 

해명

이에 대해 유승민은 "저는 지역구에서 선거 운동할 때 새누리당으로 복당할 것이라고 애초에 밝혔고, 새누리당이면 출신 대통령을 좋든 싫든 사진을 걸어 놓아야 되기 때문에 그냥 놔둔 것"이라고 밝혔다. 진보측 논객인 유시민 역시 "새누리당이 '대통령은 우리만의 대통령'이라는 좁은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유치한 요청을 하는 거다"라고 말하며 이 논란 자체에 대해 비판하였다.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바른정당을 창당한 현재 유승민은 '이제는 정말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넜다' 라는 생각으로 대구 사무소의 박근혜 대통령 사진을 떼어냈고 그 자리에 대신 시계를 걸어 놓았다. 사진의 향후 행방에 대해 유승민 측은 "새누리당에서 요청이 오면 돌려주려고 사진이 든 액자를 포장해놨다"고 밝혔고 새누리당 대구시당은 "유 의원 쪽에서 자진 반납하면 받겠지만 먼저 사진 반납 요청은 하지 않을 것" 이라고 했다.

 

바른정당 사당화 논란

"신당이 김무성·유승민 당으로 비쳐지는 것 문제" - 나경원 자유한국당(당시 새누리당) 의원

 

나경원 의원은 새누리당 탈당을 보류하며 바른정당 합류에 대해 좀 더 신중하게 결정하겠다고 말해 논란이 되었는데 이는 이전에 비박 측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친박 측과 원내대표 경선을 두고 충돌한 당사자답지 않은 발언이기 때문이었다. 이후 밝혀진 이유는 바른정당이 유승민과 김무성 위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거센 반발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나경원 의원은 “유승민·김무성 의원이 합의하면 정강·정책을 우리가 그대로 따라가야 하느냐. 그건 아니다”라고 강조하였으며 "(신당이) 유승민표 정당으로 너무 가버리면 저희가 회복하기 어렵다. 그 부분에 대한 문제 제기 없이 가서는 곤란하다"고 하며 자신이 비판을 제기한 이유와 당위성을 말했다. 

나경원 의원은 지금의 친박 주도의 새누리당과는 분명하게 선을 그으면서도 "창당 과정에서 김무성·유승민 의원 둘이 합의하면 뭐든지 되고, 마치 두 분의 정당인 것처럼 비쳤는데 이런 부분이 개선돼야 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러면서 의사 결정 과정이 좀 더 민주적으로 되어야 된다고 보기에 지도자가 물론 결단을 내려야 될 때도 있겠지만 패권적으로 운영되어서는 안 된다며 비판하였다.

MBC ‘신동호의 시선집중’ 인터뷰에서도 나경원 의원은 “창당 선언을 하기 전에 이 부분을 충분히 토론하자고 했는데 실질적으로 정강정책은 유승민 의원과 친한 의원들이 다 정하겠다, 이런 식으로 외부로 발표돼 그런 부분에 대해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며 “신당이 모든 보수의 가치를 담고 모든 대선 주자를 받아들이는 데에 부족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을 확실히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하며 개혁보수신당의 정강·정책 작업이 유승민 의원에 의해 주도 되고 있음을 거듭 비판하였다. 

바른정당 탈당사태로 유승민 의원이 국민의당과 통합을 주도하고 있는 시점에서 통합에 반대하는 인사들은 유승민 사당 논란에 다시금 불을 지피기도 했다. 탈당을 앞두고 있는 바른정당 핵심 당직자는 “유 대표가 왜 9명의 의원이 탈당하고 나서야 뒤늦게 보수대통합을 추진하겠다고 했는지 모르겠다”면서 “물론, 당 상황이 급박해지니까 양보 아닌 양보를 한 것 같은데, ‘일부러 9명을 내쫓고 완전히 자기가 주도권을 움켜쥐고 통합을 추진하려고 그랬나’ 이런 의심까지 든다. 전당대회도 공당의 행사가 아닌 유승민 개인 팬클럽 대회를 연상케 하는 것 같았다”면서 “전당대회 완주감사패 이벤트도 유 대표 개인 팬클럽인 ‘유심초’에서 기획했고, 곳곳에 붙여져 있던 플랜카드도 유심초에서 붙인 것이다. 바른정당이 완벽하게 유 대표의 ‘사당’이 된 증거”라고 말했다. 물론 이 당직자가 탈당을 앞두고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겠지만.

이 이야기는 후에 바른정당이 통합과 자강으로 내부 의견이 갈리며 자강의 대표 주자인 유승민을 견제하기 위한 명목으로 또 등장했다. 이에 2017년 9월 28일 전당대회 출마 기자회견에서 유승민은 바른정당을 창당한 뒤 단 한 번도 사당화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없으며, 그 얘기는 자신에 대한 모독이라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반론

이러한 비판에 대해 바른정당에 합류한 이혜훈 의원은 바른정당 사당화 논란을 제기한 나경원 의원에 대해 본인의 원내대표 자리가 잘 되지 않아서 섭섭해서 그런 것 같다고 비판했다. 유승민 의원은 “나 의원이 (신당을)‘유승민 대선캠프냐’고 말하기도 했다는 데”라는 질문에 “말이 안 되는 얘기”라고 일축하며 “저 뿐만 아니고. 다른 의원이 많이 있는데 말이 안 되는 얘기”라면서 “(당직을) 일체 안 맡을 거니 그런 얘기할 필요도 없다”, "이 당을 김무성당이다 유승민당이다 사당화하는 건… 우리가 사당화가 싫어서 나온 마당에 어떻게 당을 사당화 하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반박하였다.

그리고 유승민 의원이 지지했던 신당의 명칭도 채택되지 않았는데 과연 한 개인의 사당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게다가 2017년 5월 2일에 바른정당 국회의원 13명이 전날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와 미팅하고 탈당을 발표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는 바른정당에 소속했던 전체 국회의원 중 40%에 달하는 비율이었다. 생각보다 유승민의 당 장악력이 사당 논란을 일으킬 만큼 견고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반증으로 볼 수도 있다.

유심초를 들먹이며 공격한 부분은 말 그대로 트집에 가깝다. 전당대회 출마자의 지지자들이 플랜카드를 들고오는게 뭐가 문제인가? 당시 유승민은 엄연히 전당대회 출마자였다. 애초에 유승민 측에서 유심초를 인위적으로 동원한 물증과 증거가 전혀 없다.애초에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는 것도 아니고, 전당대회 출정식에 나와 플래카드를 들고 후보를 응원하는 것은 일반적인 전당대회에서 당연한 현상이다. 한국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다. 즉 이를 두고 사당화의 증거라 몰아가는 것은 억지라 할 수 있다.

 

좌클릭 논란

"유승민 원내대표의 행동은 좌파적 운동권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본다." - 조갑제

“지금껏 하신 말씀을 들어보면 유승민 의원은 좌파적 사고에 너무 젖어있고, 정의당(에 어울리는), 사회민주주의적인 사고를 너무 많이 하는 것 같다.” - 전원책]

"경제, 노동, 복지 부분에 좌클릭만이 개혁인 것처럼 포장되는 부분에 대해서 우려를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 나경원 새누리당 의원.

"유 의원의 대선공약이 바른정당의 이념과 노선이 될 수 있는지 치열한 논쟁이나 검증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유 의원이 내세운 대선공약은 문재인 정부의 포퓰리즘 정책들과 거의 같거나 유사하다" - 김용태 바른정당

 

유승민은 과거 새누리당의 중진 의원이자 박근혜 대통령 당선에 크게 기여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이후 발언들과 행보, 정책 성향으로 인하여 좌파가 아닌가 하는 의혹과 비판을 자신이 속한 보수 세력에게서 줄곧 받아왔다.

대한민국국회 - 의안정보시스템 - 이동통신단말장치 유통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안

실제로 유승민은 2014년 5월 단통법 표결에서 찬성에 투표하기도 하였다. 또한 2015년 4월 새누리당 원내대표 시절 사회적 경제기본법을 발의했으며 자본주의 경제가 실패해서 대안으로 사회적 경제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신이 추구하는 경제 모델로 중부담-중복지를 통한 북유럽 국가들의 사회민주주의를 내세웠다.

결정적인 계기는 유승민이 2015년 발표한 국회 교섭단체대표 연설이었는데 연설문을 발표한 이후 보수 측에선 맞는 말을 한 것이라고 호응하는 측과 진보 좌파 측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며 반발하는 측으로 나뉘어져서 크게 논란]이 되었지만 반대 측인 진보 쪽에선 큰 호응]을 받으며 말이 통하는 보수, 상식적인 보수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각인시키는데 크게 성공하였다. 하지만 보수 측에선 이 연설을 계기로 유승민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보며 싫어하는 반대파들도 크게 늘어났다.

이후 해당 연설문으로 촉발된 좌파적 가치관을 가졌다는 비판과 의혹 제기는 계속해서 이어지게 된다. 조갑제는 같은 해 TV조선에서 자신이 유승민을 결정적으로 의심한 것이 바로 원내대표 연설이었음을 언급하며 유승민의 정체성과 가치관이 크게 의심된다고 혹평하였다. 

전원책 변호사는 2017년 1월 2일 JTBC 신년토론에서 유승민이 보수 진영의 인물이라고 보기엔 가치관과 사고가 크게 하자가 있음을 언급하며 지난 번 원내대표 연설 등을 볼 때 정의당 당원으로 활동하는 게 옳지 않나 생각한다고 하였다. 

연설문 논란 뿐만 아니라 유승민은 바른정당 정강과 정책 추진 목표를 정하는 과정에서도 좌파 편향적 가치관과 정책 성향을 보이며 집착한다고 비판 받았다. 실제로 나경원 새누리당 의원은 2016년 12월 새누리당 탈당을 보류하며 바른정당에 합류하는 것을 유보하겠다고 하면서 두 가지가 적어도 개선되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신당의 정강·정책에 대해 경제나 노동과 같은 부분이 좌클릭으로 가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이후에도 유승민이 좌파적 정책에 집착하면서 매달리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제19대 대통령 선거 때 경제 정책, 노동 정책에서 공약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보다 더 진보적이고 정의당 심상정 후보와 가까웠다는 주장도 있으며 19대 대선 토론회에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와 대립하기도 했다. 또한 유승민 대선 후보는 2017년 당시 경제 정책에서 DTI, LTV 강화를 앞장서서 주장하였으며 탈원전에도도 긍정적인 의견을 보이기도 하였다. 제20대 대통령 선거 공약에서는 최저임금이나 근무 시간 제한, 탈원전 등의 정책을 폐기하였다.

 

반론

2017년 2월 16일자 허핑턴포스트와의 인터뷰를 통해 유승민의 노선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원문

저는 복지, 노동 이런 이슈, 교육 같은 이슈는 보수·진보 구분할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국민들한테 제일 필요하고 국민들이 원하는 것, 어려움을 덜어드리는 거면 저는 좋다고 생각하고요. 그동안 민주당이나 정의당에서 말해왔던 복지나 노동이나 교육이나 보육이나 주택, 의료 정책 중에 ‘저 정책은 참 괜찮다’ 싶으면 저는 아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편입니다.

(중략) 굳이 제가 주장하는 복지가 (민주당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저는 아주 무책임한 보편적인 복지를 아주 광범위하게 하는 걸 찬성하지 않습니다.

유승민 본인도 자신의 가치관과 행동에 대해 좌파가 아닌가에 대해 의심을 받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2015년 10월 16일 저녁 대구 중구 계산성당 강연 일문일답에서도 드러난다. "대구에서 개혁을 얘기하면 좌파라고 한다. 유승민도 좌파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대해 "조그만 방촌시장에서 나물 뜯어와 비닐 하나 펴놓고 난전하시는 분들은 (선거만 하면) 전부 새누리당이다. 그분들을 위해서 우리 새누리당이 무슨 일을 했느냐? 펑펑 쓰자는 것은 아니다. 양극화 해결하는 복지를 하면 그게 왜 좌파인가? 저는 좌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좌파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저는 정통 보수다. 민생 문제는 중도 개혁으로 가야 한다. 너무 오른쪽으로 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주장에 대해 갈수록 동의하는 분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를 좌파라고 생각하지 말아 달라."고 해명하였다

또한 JTBC 신년토론에서 유시민 작가에게 "분배를 통한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발언했던 것으로 보았을 때, 확실히 경제적 사고의 기반만 보아도 좌파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오히려 사회적 자본 확충과 중소기업 도약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말처럼 영국의 보수당이나 혹은 독일의 기민련과 같은 노선으로 봐야 할 것이다.

애초에 유승민 스스로가 본인을 공화주의자라고 소개하고 있고, 실제로 유승민은 이러한 공화주의적 노선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공화주의는 안보나 공동체에 대해서는 보수적이지만, 경제적으로는 복지에 친화적이며 신자유주의와 대비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정책 노선의 변화와는 별개로, 이념적으로 유승민은 정계 입문 후 일관되게 공화주의적 노선을 유지하여왔다. 안보에서도 경제에서도 모두.

또한 유승민은 일관적으로 창업 활성화 등 기업을 통한 경제부양과 강경한 안보정책을 주장했으며 최근에는 좌파라고 비판받았던 최저임금 인상과 탈원전 등의 공약을 폐기했기 때문에 좌파라는 비판은 과하다고 할 수 있다.

 

증여세 논란

2017년 19대 대선 기준, 선관위에서 공지한 후보자 정보 공개 자료에 따르면, 유승민 의원과 직계비속(딸,아들)의 전과 사실과 최근 5년간 세금 체납 이력은 전부 '없음'으로 공개되었다.

유승민 의원의 딸의 재산 내역이 4.13 총선 기간에 공개되었는데, 22살에 2억 원에 가까운 재산을 보유했다. 하지만 증여세는 한 푼도 내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어 구설수에 올랐다. 증여세를 내고 난 이후에는 절세 의혹이 생겼다.

유승민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손정환 회계사는 2016년 10월에 YTN에 출연해 현행 상속세 규정에 대해 설명했다.

 

◆ 손정환: 먼저 정부에서 상속세는 모든 재산 이전에 대해 부과하는 것보다 부의 이전에 대한 세금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자들만 대상으로 상속세를 부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요. 만약 피상속인의 배우자가 생존한다면, 10억 원을 공제하고요. 배우자가 안 계시면 5억 원을 기본 공제가 되므로 그 이하의 상속 재산을 가지신 분은 상속세를 납부하지 않아도 됩니다.

 

따라서 예를 들어 아버지가 3억짜리 집과 3천만 원짜리 자동차를 물려 주었을 경우 자식도 상속세를 따로 내지 않는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아버지가 과거 2년간 5억 이상, 1년간 2억 이상 예금을 인출했을 경우, 어디에 사용했는지 증빙 서류가 없다면, 무조건 사전에 증여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승민의 경우 딸이 어렸을 때 만들어 둔 통장에 10년 이상 부어온 금액이 최근에서야 2억에 달한 것이므로, 회계사의 발언대로라면 현행법에서 정한 금액 기준에는 미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본 위키의 상속세와 증여세를 참조하자. 참고로 20년 동안 1억 원을 부모는 자녀에게 아무런 위법적 수단 없이 원금 그대로 증여할 수 있다. 증여세의 경우, 교육비와 생활비는 증여세 부과에 포함되지 않으나, 그 생활비 수준, 교육비 수준이 일반 평균보다 지나치게 높다면 당연히 조사 대상이 된다. 다만 카드 사용을 생활화하면, 금융 기록이 모두 전산에 남기에 소비에서 사치품 비중이 크지 않는 한 그다지 문제 삼지 않는다고 한다. 즉, 유승민의 딸이 명품 핸드백을 수집한 게 아니라면 거론될 가능성이 적다는 얘기다.

 

 해명

이런 논란에 대해서 2017년 2월 22일 유승민은 "딸의 예금 1억 8천만 원은 용돈이 아니고 (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저에게) 그때 그때 주신 것을 모아 놓은 것이며 직계 가족끼리 차명이 허용될 때였다"면서 "(예금 통장을) 딸 이름으로 해 놓은 거는 제 불찰이며, 2천 700만 원의 증여세를 냈다"고 해명했다.

이후 추가적으로 다른 방송에서 해명한 내용으로는 "(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손녀를 예뻐하시다보니 결혼 자금 등등을 미리 챙겨주시느라 큰 돈을 받게 되었다.", "법이 바뀌기 전까지는 직계 가족간 차명이 허용될 때라 부부와 딸의 통장을 섞어서 사용하느라 돈이 섞인 것도 있다. 이만한 큰 돈이면 나중에 딸에게 가게 될 것이어도 일단은 제 명의의 통장에 넣어 놓는 것이 맞았다고 생각한다. 어린 딸이 많은 예금을 가진 것에 대해 상처 받으신 (특히 청년)분들께는 죄송하게 생각한다." 등이 있다.

정리하자면, 이 건은 권력을 이용한 부정부패가 아니라 그냥 가족 내에서 돈이 왔다 갔다 한 것이고, 그 과정에서 법이 바뀌었으나 인지하지 못하여 제때 처리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승민이 증여나 세금에 대해 정말 떳떳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감출 생각이었으면 차라리 숨겼거나 고지 거부를 하거나 했을 것이다.

 

유승민의 페미니즘 논란

유승민 바른정당 대선 후보가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고 타 부처에서 여성정책을 살리겠다"고 말했다.

유승민 후보가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 지지 전국여성대회`에서 "여성가족부에 예산을 주고 했는데 실제로 여성을 위해 한 것이 뭐가 있느냐"며 이같이 말했다.

이어 "여성은 직장내 차별, 일과 가정의 양립 등 이런 사회를 만드려면 고용노동부, 보건복지부 등에 여성과 관련된 부처를 만들어서 제대로 해야 한다. 제 의견에 동의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 후보는 "누가 `유승민은 여가부 폐지하자는 사람`이라고 말하면 `유승민은 여성정책 더 잘 챙기려고 한 말이다`고 답해달라"며 부탁하기도 했다. 아울러 그는 "저는 교육부와 고용노동부 등에 여성 정책을 위한 충분한 지원을 하겠다"라며 "저는 상당히 페미니스트다. 제대로 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때문에 유 후보의 "나도 페미니스트다."라는 발언과 바른미래당 시절 혜화역 시위 지지,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을 두고 사이트에서 비판을 하는 여론이 있다. 남초 커뮤니티에선 페미니즘에 옹호적이라고 비판하고 여초 사이트에선 정작 여가부 폐지 주장 등 여성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곤 한다.

 

반론

당당위는 성평등을 주장하지만 래디컬 페미니즘을 배제하는 시민단체로서, 흔히 이야기하는 반페미니즘 진영의 가장 대표적인 시민단체이다. 이러한 당당위와 만나며 의견을 주고받고 협력한 정치인들은 여성표가 떨어지는 특성상 소수인데 그 소수인 정치인들이 유승민과 하태경, 정병국과 같은 친유계 정치인이다. 만약 유승민이 흔히 TV에서 보이는 극단적 페미니스트라면 이러한 활동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고로 유승민을 여가부에 대한 해명으로 보편적인 래디컬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판이다. 굳이 페미니스트로 분류를 하자면 리버럴 페미니스트에 가깝고, 또한 유승민의 세대는 젊은 남성과 달리 페미니즘을 여성우선주의보단 양성평등의 개념으로 알고 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할 부분이다.

또한 유승민이 페미니스트 관련 발언을 할 때 당시는, 혜화역시위가 순수하고 온건적인 여성운동으로 편향보도 왜곡보도되었던 시기였다. 특히 이는 신문매체와 주류 언론들에서 좌우를 가리지 않고 이루어졌다.  그 때문에 당시는 홍준표] 등 다른 보수정당 정치인들까지도 이 왜곡보도에 속아넘어가 페미니스트에 관한 긍정적 발언을 했던 시기였던 것. 때문에 이런 비판 자체가 악의적인 짜집기에 불과하다.

거기에다가 유승민은 여성부를 폐지해야 한다, 1조2000억 쓰면서 하는 일은 막말뿐이다 라며 몇 년간 지속적으로 여성가족부에 대한 해체요구와 비판을 했다. 또한 여성가족부를 해체한 뒤 각 부서의 일로 이관시켜서, 여가부 예산이 여성단체 페미니즘단체의 돈줄로 가지 않도록 방지하는 대안까지도 주장했다.

 

안종범에게 인사 청탁 논란

19대 대선 정국 당시, 유승민이 2014~2015년에 동향 출신이자 대학원 동문인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에게 최소 10명 이상의 공공·금융 기관 임원 인사 청탁을 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논란이 되었다.

2017년 4월 30일 사정당국에 따르면 유승민이 안 전 수석이 청와대 경제 수석으로 발탁된 2014년 6월부터 1년간 평소 알고 지냈거나 지인에게 소개 받은 사람 10여명을 공공기관과 금융기관 대표 또는 감사 등에 앉혀 달라고 안 전 수석에게 요청한 것으로 나타났다. 검찰 특별수사본부와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수사 중 안 전 수석의 휴대전화를 압수해 분석하는 과정에서 유 후보와 안 전 수석이 이 같은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은 사실을 파악한 것으로 전해졌다.

고향이 대구로 같은 유 후보와 안 전 수석은 미국 위스콘신대학교 대학원 동문이다. 유 후보가 안 전 수석에게 인사 청탁을 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대구·경북(TK) 출신이거나 2007·2012년 박근혜 대선 후보 캠프에서 선거를 도운 인사들이다. 유 후보는 문자 메시지를 통해 경북고 선배인 ㄱ씨에 대해 대우 증권과 서울 보증 보험 사장 자리에 갈 수 있는지 안 전 수석에 문의했다. ㄱ 씨는 두 곳의 사장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유 후보의 거듭된 요청 끝에 중소기업청 산하 금융기관의 사장이 됐다. 유 후보는 또 새누리당 원내대표 재직 중 모 대학교수를 안 전 수석에게 추천해 산업통상자원부 산하기관 원장에 취임 시키는 데 일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유 후보는 "청와대가 워낙 그런 부분에서 내정을 많이 하기 때문에 내정한 사람이 있는지 알아봤을 뿐이고 제가 거론한 사람 중 아무도 …한(임명된) 사람은 없다. 청탁이 아니고, 그냥 내정된 사람이 있는지 물어봤을 뿐이다. 내정된 사람이 있는데(있으면) 응모하는 게 망신만 당하는 일이니까, 내정자가 있는지 알아봤을 뿐" 이라고 밝혔다.  유승민 후보가 안종범 전 수석에게 인사 등을 부탁한 12명의 인사 중 최소 2명은 실제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갔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에 대해 한편 박영수 특검팀 관계자는 공소사실과는 관련없는 사안이라고 하였고, 검찰 특수수사본부는 언론과 일절 접촉한 사실이 없다 며 선을 그었다.,  또한 당사자들은 하나같이 '나랑 유승민 후보와는 서로가 부탁할 사이가 아니다'라며 의혹을 부인하였다.

청탁 의혹 논란이 최초로 나온 2017년 5월 초에는 그다지 큰 논란이 되지 않고 끝났다. 그러나 2018년 7월 26일, 김어준의 블랙하우스에서 해당 의혹을 재점화하여, 다시 논란이 되었다. *,  참고 자료. 이에 대하여 유승민과 친한 사이라고 밝힌 정두언 전 의원은 도와달라고 했으니 이건 청탁이 맞다고 하며 이 행위를 비판하였다.

이에 대하여 바른미래당 권성주 대변인은 지난 대선에서 다 해명된 내용이며 능력 있고 괜찮은 주변 인물들을 추천하고 살펴봐달라고 하는 것은 적폐몰이라고 반박하였다. 

인사 청탁 문자에서 공개된 내용을 보면 전부 유승민이 먼저 안종범 경제수석에게 특정 인사에 대해 자리를 부탁하는 경우였고 그 추천 근거도 능력이나 자질보다는 경북고나 TK 같은 학연, 지연에 기반하는 방식이었다. 같이 인사 청탁에 관련된 김무성의 경우 대우조선 사장 자리를 추천하면서 "LNG 선박 엔진을 최초로 개발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한 특수한 특수선 분야로 대우조선을 끌고 갈 수 있는 적임자다." 라고 능력을 강조하는 것과 비교해 보면 유승민의 경우는 추천보다는 청탁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유승민은 박근혜와 사이가 안 좋은 비박 인사였기 때문에 이러한 연줄에 의지하는 인사 청탁은 대부분 불발되었다.

안종범에게 했던 인사 청탁은 유승민이 인맥을 통해 자신의 지인의 자리를 챙겨주려는 구시대적인 끼리끼리 문화의 일환으로 봐야 하며 이렇게 폐쇄적이고 정실주의적인 인사 청탁 행태에 대해 정치인이라는 사람이 단순히 불법이 아니고 대가성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당당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반론

결론적으로, 이 사안에서 유승민은 법률적으로 부정청탁이 아니다. 이런 식의 인사 추천은 원래 공식 절차이자, 합법이다.

 

첫째로, 유승민 의원의 행동을 "기업에서 사람 뽑는데 본인 빽으로 들여보내줬다!"라고 잘못 비유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청와대 인사 선발 방식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청와대에 인사 추천 = 단계 무시하고 인사 합격으로 이어짐' 이 아니다. 청와대에서 인사를 선정하는 과정은 일반 기업과 다르기 때문.

일반 기업은 공채를 내면 입사 지원서를 여러 사람들이 낸다. 그리고 그 중에서 걸러내는 방식이다. 그러나 청와대는 그런 공채를 내는 일은 드물고, 추천 방식으로 원서를 낼 수 있게 한다. 다시 말해 원래부터 추천 받은 사람들만 원서를 낼 수 있고, 그 중에서 경쟁하는 방식이다. 이는 학교장 추천전형으로만 원서를 받는 대학과 유사하다 볼 수 있다.

꼭 이명박-박근혜 시절뿐만이 아니더라도, 원래 청와대의 인사 내정 절차는 이러한 ‘후보 추천→인사·민정수석실 2∼3배수 압축→약식 검증→대통령 보고→1·2배수 재압축→정밀 검증→인사 발표’ 단계같이 복잡한 단계를 거치는 것이 정석이다.

청와대로 원서 제출을 위해서는 꼭 이러한 추천이 필요하다. 현 문재인 정부에서도 인사추천위원회가 하는 일은 동일한 과정을 거치며, 단지 인사추천위원회는 정밀 검증 단계가 좀더 강화된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유승민 의원과 관련되어 나온 것은 '후보 추천' 단계이다. 여기서 여당의 중견 의원이나 당내 유력 인사 등 좋은 인재를 많이 알 법한 사람들을 선정하여 인사 추천을 부탁한다.

유승민 의원 또한 여당 중견 의원으로 포함된 사례. 그동안 이런 추천 절차는 오랫동안 합법적으로 이어져왔다.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에 관한 법률'의 5조에서 금하는 것은, 법령을 위반하여 선정 또는 탈락되도록 하는 행위를 지적하며 금지한다. 여기서 법령을 위반하여 선정 또는 탈락에 영향을 끼치려면 최초 단계인 후보 추천외에도 여러단계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은 되어야 가능하다.

이러한 청와대 인사 절차의 특수성을 고려했을때, 이러기 위해서는 청와대의 경우 7단계 전체에 영향을 끼쳐야 부정청탁이라고 함이 타당하다. 유승민 의원의 경우, 다른 여당 중견 의원들처럼 안종범 경제수석에게 연락을 한 것이 전부이므로, 직접 영향을 미친 단계는 공식적 합법적 절차로 허용되는 최초 단계인 '후보 추천' 하나에만 한정된다.

유승민이 영향을 준 것은 청와대의 인사 선정 7단계 중에서 맨 앞쪽에 있는 한 단계에 불과. 거기다가 모든 지원자가 여당 중견 인사들에게 인사 추천을 받아서 왔기 때문에, 당시 2011년부터 박근혜와 대립을 하고 있었던 유승민의 영향력만 슈퍼맨처럼 7단계 전체에 미쳤다고 보는 것은, 유승민 의원이 비선실세에 준하는 인사 영향력을 가지지 않는 이상 상식적으로도 비합리적이며 불가능한 판단이다.

비유해보자. 학생이 대학 원서제출 필수서류에 학교장 추천서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자 학교장은 추천서에 "요새 수학과에 우리 XXX학교 출신들이 적던데 이 학생 수학 잘 합니다. 이 학생 능력이 있습니다. 잘 봐주십시오. - 교장 OOO 올림"이라고 서술했다. 이를 "학교장이 추천서를 써서 부정청탁했다!"라고 할 수 있는가? 전혀 할 수 없다. 당연히 학교장 추천서의 내용은 교장의 자율권한이며, 추천서 하나로 (똑같이 추천서를 받은) 다른 모든 지원자들과 7단계나 되는 전형을 각개격파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며 보편 상식적으로도 납득할 수 없는 설명이다.

이 전형에 지원한 수십, 수백명의 지원자들은 모두 추천서를 받고 들어온 지원자이다. 심지어 이 학생이 추천을 부탁한 학교장(유승민 의원)은 대학과 갈등이 깊고 밉보이는 사람이다. 추천이 직접 영향을 미치는 단계는 7단계 중에서 1단계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 때문에 추천한 12명 중 2명이 합격했다는 것은, 추천서보다는 다른 요인(지원자의 능력과 전공이 해당 직무 적성에 전문성을 갖추었다는 등)으로 합격했다고 보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고 타당한 판단이다. 따라서 이런 지식과 보편상식으로 판단할때 부정청탁이라는 가설은 부정된다.

 

둘째로, 법률에서 정한 부정청탁 조건에도 한참 미달한다. 본 사건은 금품이 오가지도 않았으며, 친인척을 추천한 경우도 아니고, 제 3자를 정상적 과정을 통해 추천한 것에 불과하므로 부정청탁 요건에 미치지 아니한다.

또한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에 관한 법률이 2015년에 제정되었고, 그 다음해인 2016년에 시행되었다. 이 법 규정은 행위가 발생한 시점이 법 시행일 이전이라면 소급해서 적용되지 않으므로 이에 따라서도 부정청탁 요건에 미치지 아니한다.

따라서 유승민 의원의 경우 법률적으로도 무죄가 된다.

검찰 특수본과 국정농단 사태를 수사하던 박영수 특검은 결국 아무 문제가 없다고 판단, 무혐의로 결론을 내려 내사 종결했다.

 

공수처 공약 번복 논란

2017년 19대 대선에서 유승민은 본인의 공약으로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진 공수처 출범을 공약하며 문재인 정부와 같이 공수처를 설치하겠다는 주장을 폈다. 실제로 공수처는 검찰개혁안 중 하나로 김영삼 정부 때부터 나온 이야기였고 이명박 대통령도 검찰개혁안에 공수처 설치를 검토하였으며 당시 여당이었던 한나라당도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대선이 끝나고 2년이 흐르자 입장이 바뀌어 문재인 정부의 공수처 공약을 악법으로 규정, 패스트트랙에 올리는 것을 결사 반대하며 과거 자신의 공약을 뒤집은 것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이로 인해 정치권과 여당 지지층에선 '너도 공수처 찬성했으면서 왜 지금와서 호떡 뒤집듯이 말을 바꾸는가'라는 좋지 않은 시선을 띄었고 유승민의 대선 공약 번복 사례 No.2로 남게 되었다.

 

반론

이는 유승민의 공수처 공약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서 일어난 논란이다.

과거 유승민의 19대 대선 공약집을 확인하면 알 수 있겠지만 유승민이 주장했던 공수처와는 현 문재인 정부가 올린 패스트트랙 버전 공수처와는 그 내용과 결이 다르다. 두 공수처 법안은 수사와 기소 권한을 지녔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문재인 정부의 공수처에선 대통령이 공수처장 및 차장을 모두 임명한다는 점, 공수처가 사건 이첩을 원하면 검찰은 이를 거부할 수 없다는 점, 추천위원회 7명 중 5명이 친여권/친정부 인사로 들어가는 점 등등 공수처의 권한이 비대하나 이를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부실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통령이 직접 공수처장과 차장을 모두 임명할 수 있고 여당 역시 이에 동조하기에 사실상 국회가 견제 역할을 못하며 대통령의 거수기 역할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유승민의 대선 공약에서의 공수처는 수사와 기소 권한을 통합하는 것까지는 동일하지만 반대로 책임자를 대통령이 아닌 국회가 추천해 대통령이 이를 의결하고 국회에서 특검 발동을 의결할 경우 공수처는 직무정지가 되도록 감시, 견제장치를 마련했다는 특징이 있다. 즉 문재인 정부의 공수처와는 다르게 유승민의 공수처는 국회가 아닌 대통령이 거수기 역할을 하게 되고 만일의 사태에도 특검이 도입될 경우 공수처를 정지시킬 수 있다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이는 권력의 강도에 대한 유무로, 유승민의 공수처 법안이 패스트트랙에 올라간 공수처보다 훨씬 약하고 권력분산적임을 알 수 있다.

즉 유승민이 패스트트랙 버전 공수처를 반대한 이유는 본래 공약보다도 비대해진 공수처의 권한, 그리고 이를 막을 견제장치에 전무하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애초에 유승민은 패스트트랙에 공수처를 올리더라도 확실한 견제 장치를 마련한 권은희 안의 경우 지지할 수 있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즉 유승민이 반대한 것은 공수처의 절대봉쇄가 아닌 무소불위의 권력이 될 수 있는 문재인 정부의 공수처를 반대한 것뿐이라는 것. 그리고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21대 총선에서 180석을 차지한 것을 계기로 야당의 비토권을 무력화한 공수처법 개정안을 강행하여 통과시키자 "반드시 정권교체를 해서 저런 공수처를 만든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해야 한다"며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유승민을 공수처 번복으로 비판하는 것은 세부 내용도 알아보지 않고 단순히 공수처라는 개념만을 언급한 잘못된 비판임을 알 수 있다.

 

강정마을 구상권 철회 공약 관련

 

"제가 대통령이 되면 강정마을에 대한 구상권을 철회하겠습니다" - 2017년 5월 1일

"구상권을 한 푼도 받아내지 않고 포기한 일이 어제 벌어졌다.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 2017년 12월 13일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강정마을 구상권과 관련해 논의가 불붙었다. 2017년 1월 31일, 바른정당 소속의 원희룡 제주특별자치도지사는 자신의 불출마를 선언한 기자회견에서 "당장 강정마을의 구상권 소송 철회 문제가 시급하다"며 대선 공약에 반영해야할 제주 지역 현안으로 강정마을 구상권 철회를 꼽았다.

각 당의 제주도당은 강정마을 구상권 철회를 대선 공약화하는 것에 대부분 공감한 터라, 자유한국당 제주도당마저 구상권 철회를 중앙당에 제안했다. 그러나, 홍준표는 이에 대해 안보 사업이라면서 "추후 해당 부처의 입장을 들어보고 검토하겠다"며 유보 입장을 피력하며 비켜갔다.

반면 2017년 4월 14일, 바른정당은 제주지역 5대 공약을 발표하면서 "강정마을 구상권 철회와 제주4·3 배보상법을 제정해서 대한민국 통합 전기 마련하겠다"며 동시에 "사법처리대상자 사면 (별금형 206명)"이라는 공약을 내세우며 자유한국당과 차별화에 나섰다. 특히 국비 지원이라는 재원 마련 방안을 밝히기까지 했다.

심지어 2017년 4월 19일 보도된 제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제주도민사회의 통합을 위해 해군의 구상금청구소송 철회와 사법처리 대상자 사면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겠다. 해군이 제주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한 강정마을 주민 등을 상대로 34억 5000만 원의 공사지연금 구상권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10년이 다 되도록 엄청난 분란을 겪어야 했던 강정마을이 또 다른 갈등에 휩싸일 위기다. 해군은 강정지역에서 앞으로 주민들과 함께 할 공동운명체인 만큼 화해와 상생을 통해 함께 가는 모습이 필요하다. 국가안보 확립과 제주 크루즈 관광 산업의 활성화를 위해 추진된 국책사업 민군복합형 관광미항 건설과정에서 발생한 강정주민의 아픔과 갈등을 치유하고, 지역 공동체 회복의 차질 없는 추진을 위해 노력하겠다"라며 유승민 본인이 직접 공약을 밝혔다.

2017년 5월 1일, 제주도를 방문하여 공약을 재확인했다. 심지어 기자회견에서 "제가 대통령이 되면 강정마을에 대한 구상권을 철회하겠습니다"라고 본인이 직접 말했다. 적극적 고려라는 기존의 발언보다 한 발 더 나가 "하겠습니다"라고 밝혔다. 영상 2분 9초부터 해당 발언이 시작된다.

이후 대선이 끝난 뒤, 같은 당 소속의 원희룡 제주특별자치도지사는 "새로 들어선 문재인 대통령 정부는 공약대로 강정마을에 대한 구상권 철회, 사면 등을 빨리 이행해 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가 2017년 12월 12일 제주 강정마을 구상권 청구 소송을 사실상 철회하는 내용의 법원 강제조정안을 수용하자, 유승민은 다음 날 "정부의 강정마을 구상권 포기는 법치주의 파괴"라며 "구상권을 철회하는 내용의 법원의 강제조정안은 정부가 거부할 수 있는 것인데도 그대로 수용했다"며 이어, "문재인 정부가 스스로 공권력을 무력화하고 법치를 파괴한 것"이라며 "제주 해군기지 공사 지연에 따른 건설업체 보상금 문제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고 정부를 비판했다. 심지어 본인이 사면을 공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구상권 포기에 이어 과거 불법 시위자들에 대한 사면을 검토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들린다"면서 "불법시위로 인한 피해액을 국민 세금으로 물어주고 이들을 사면까지 해주는 일이 계속된다면 바른정당은 절대 좌시하지 않겠다"라며 말했다.

이에 대해 "선택적 기억상실"이 아니냐는 비판과 함께 '말 바꾸기' 내지 '이중 플레이' 논란을 사고 있다.

 

사과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유승민 본인도 인정한 말 바꾸기가 맞다. 결국 사과했다. 같은 바른정당 소속의 원희룡 제주특별자치도지사가 2017년 12월 12일 기자회견을 열고 구상권 철회를 환영하며 "대승적 차원에서 법원의 조정안을 받아들여준 강정마을 주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고마운 말씀을 드린다. 또한 어려운 결단을 내려주신 대통령 님과 정부, 사법부에도 경의를 표한다”고, 이어 “앞으로 강정마을 주민들의 사면복권을 위한 노력도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정부 차원의 각별한 관심으로 빠른 시일 내 사면 복권이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의견을 밝히자 이에 대해 유승민은 "제가 십분 이해"한다고 밝혔다.

유승민 의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발언 당일 오후 곧바로 "오늘 아침 저는 정부가 제주해군기지 구상권 행사 문제에 대해 법원의 조정안을 받아들인 결정을 비판했다"며 "오늘 저의 비판은 지난 대선 과정에서 바른정당의 후보로서 발표했던 구상권 철회 공약과 배치되는 발언으로서, 결과적으로 대선 공약을 번복하게 되었다"고 "그 경위가 어찌 되었든 국민과의 약속을 번복한 데 대해 국민과 제주도민 여러분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최저임금 1만원 관련 공약

19대 대선 기간 때 최저임금을 2018년부터 연평균 약 15%씩 인상해 2020년이면 1만원에 도달한다는 계획을 문재인보다도 먼저 내세우며 대선 후보로 선거를 치렀다. 당시 공약 사항은 문재인 후보와 별 차이 없는 주장이었다.

다만 당시 유승민은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고용감소를 피하고 자영업자 등 영세 사업주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향후 3년 동안 영세업체 근로자의 4대 사회보험료를 국가가 지원하는 보완장치를 강구하겠다"며 최저임금 상승에 대한 대비책을 타 후보와 다르게 어느정도 마련해두었다.

그럼에도 2020년까지 10000원으로의 급속한 인상은 결국 경제에 어느정도 타격을 줄 것이 불가피 할 것으로 보였고, 유승민은 이후 문재인 정부에서 전년도 대비 최저임금이 16.4% 로 상승해 7530원이 된 시기, 대선으로부터 8개월이 지난 시점인 2018년 1월 바른정당 최고회의에서 "최저임금이나 근로 시간 단축이나 과속을 조절하고 그런 식으로 정책 전환하기를 촉구합니다."라며 대선 기간 때 공언한 자신의 공약을 뒤집었다. 그리고 2018년 10월 국감에서 김동연 경제부총리를 향해 소득주도성장 쓰레기통에 발언을 하면서 최저임금 인상 속도 조절을 주장하였다.

 

사과

2018년 1월 10일 중소기업중앙회 신년회에 참석해서는 "작년 대선 후보였던 사람으로서 3년 안에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올리는 게 과속이라고 생각하며 반성한다."라며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선거연대 말바꾸기 논란

 

보수 후보 단일화 철회할 생각 전혀 없다. 끝까지 단일화를 안 하고 패배의 길을 가는 것이 야당이 되는 것 아니냐?

- 2017년 2월 5일  

 

제가 단일화를 하려고 출마를 한 것이 아니다. 단일화는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거기(단일화)에 목을 매거나 그것만 쳐다볼 생각은 전혀 없다.

- 2017년 3월 28일 

 

바른정당 1차 탈당 사태 당시 주도적 역할을 한 김성태 의원은 탈당의 이유를 유승민 의원의 탓으로 돌리며 유승민 후보는 후보 경선 과정에서 보수 후보 단일화를 여러 번 약속했는데 갑자기 입장을 선회했다며 그를 비판했다. 김 의원은 '유 의원은 자기 정치만 했다. 유 후보로서야 자기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지만 정작 당은 만신창이가 됐잖아요'라는 말을 통해 유승민 의원을 '신종 불통'이라고 비난했다.

바른정당 집단탈당 미스터리 김성태 의원에게 듣다 “망가진 둥지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오는 것도 ‘철새’인가”

김성태 의원의 말이 철새의 변명(...)에 불과하긴 하지만 유승민 의원이 대선 당시에는 안철수와의 단일화를 거부했으면서 현재는 말을 바꾸어 국민의당과의 합당을 검토한다는 점을 볼 때 다시금 되새겨야 할 부분이다.

또한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자유한국당과의 연대는 당내 반발을 극복하면 가능하다는 발언으로 논란이 되었다. 

이때문에 자유한국당에 대한 혐오가 극심한 호남과 구 국민의당 파에서 거센 반발이 나오고 있다. 유승민, 창당 한 달 만에 한국당과 공생하기로 맘 바꿨나 “육두문자까지 들었다”…바른미래 호남 의원들 반발 ‘폭발’

 

반론

남경필 후보와의 바른정당 토론회를 들어보면 당시 유승민의 구체적인 생각을 알 수 있는데 자유한국당과 단일화의 경우 자유한국당이 정상화되고 친박 청산을 완성할 경우엔 보수대통합이란 구실로서 단일화가 가능하다는 전제조건이 붙어있었다. 그러나 자유한국당의 후보로 나온 홍준표 후보는 박근혜에 대한 옹호 발언과 탄핵 불복을 외치며 이와는 먼 모습을 보여주었다. 즉 자유한국당과의 단일화 거절은 처음부터 내건 조건과 일치하지 않았기에 거절한 것뿐이었다.

지방선거에서의 자유한국당 연대 문제에 대해선 유승민 대표는 이에 대해 "부분적인 야권연대 같은 경우 당내 반발이나 국민적인 오해를 극복하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라면서 "현실적으로 원희룡 제주지사의 경우 일대일 구도를 원하고, 그것은 당연히 야권 단일 후보를 해달라는 것"이라고 발언했다. 바른미래당 탈당 및 무소속 출마를 고려했던 원 지사를 의식해 부분적 야권연대를 고려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 부분은 제가 오늘 확정적으로 말하면 난리가 나니까 당내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보고, (또) 국민 여론과 민심을 살펴봐야 한다"라고 야권연대에 전제조건을 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의 야권연대는 어려울 것이며, 만약 연대가 된다고 해도 지역당이나 개별 후보 차원에서만 이루어지고 중앙당 차원에서 추진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사면 관련 발언 논란

유승민 “박근혜 고초, 인간적으로 가슴 아파…빨리 사면돼야"

2020년 1월 19일 새로운보수당 경북도당 창당대회 기자회견에서 "보수 정치권이라고 할 것도 없이 정치권 전체가 (박 전 대통령의 사면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맞다."고 답변했다. 물론 뒤에 “박 전 대통령이 겪고 있는 고초에 대해 인간적으로 너무나 가슴이 아프지만, 정치인으로서 탄핵의 강을 건너야 하며 탄핵은 보수가 미래로 나가기 위해 역사에 맡겨야 한다”고 말하긴 했다만, 2019년 10월에도 "탄핵에 찬성했지만, 개인적으로 그분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며, "국민통합과 나라의 품격을 위해선 재판이 끝나면 당연히 사면돼야 한다"고 발언하는 바람에 논란을 빚었는데, 또 다시 이런 발언을 하게 된 것.

거기다가 본인이 보수통합을 외치면서 보수재건을 위해 협상하고 있다는 상대측인 자유한국당은 김형오 공천관리위원장부터가 1월 22일에 열린 공관위 2차 회의에서 "연휴를 맞아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석방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 빨리 구속이 해제되기를 대통령을 비롯해 나서서 빨리 결단내려주기를 바란다."고 석방 요구를 해대는 마당에 과연 탄핵의 강을 건널 수 있을지는 요원해보인다.

2021년 3월 17일자에 나온 매일신문과의 인터뷰 내용 중에서 "박 전 대통령이 감옥에 계시면서 고생하시는데 개인적으로 나만큼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나의 진심을 알아봐 주셨으면 좋겠다." 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2021년 3월 30일,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도 문 대통령이 국가의 품격을 위해서라도 박근혜 대통령을 사면하는 것이 옳다고 밝혔다.유승민 "文, 국가품격 위해 눈치보지 말고 박근혜 사면해야" 1월부터 여러 번 발언하는 것을 보아 확고한 듯 하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이런 말을 한 것은 오로지 본인의 대권 행보 때문이 아닌가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데, 친박 및 극우 지지자들에게는 유승민에게는 박근혜 탄핵을 동조한 배신자로 찍혀 이미 마음이 떠난 상태라 좋은 감정이 없을 것이며, 전직 대통령들에게 전대미문급의 형량을 구형했던 당시 야권 내 대권 지지율이 가장 높은 윤석열 前검찰총장을 견제하기 위한 발언이었다 치더라도 전직 대통령의 형량의 부당함과 별개로 죄목 그 자체를 부정하는 모습으로 비춰 질 가능성이 있어 해당 발언이 도로 친박으로 돌아가려는 모습으로 보일 수 있어 그나마 개혁보수 이미지를 믿고 지지하는 중도층마저 떠날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다.

 

가덕도 신공항 관련 논란

부산일보는 가덕도 신공항은 부산·울산·경남(부울경) 지역의 핵심 추진 사업이며, 과거 정부에서 정치적 의도를 갖고 경제적 타당성을 낮게 평가했다는 것이 부울경의 인식이라고 밝히면서, 유승민 전 의원이 이런 측면을 무시하고 ‘미래세대의 빚’이라고 단정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주장했다. 대구 지역 국회의원 시절 지역발전을 가로막는다고 K2 비행장 이전을 강력 추진했으면서 비슷한 취지의 가덕도 신공항을 비판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유승민은 문재인 정부가 2020년 상반기 재보선을 노리고 대구·경북과 부산·경남을 갈라치기 하는 것으로 의심된다고 주장했다. 국토부가 10년 넘게 상당한 돈을 들여 검토한 결과는 김해신공항 확정이라는 점을 거론하면서 “이럴 때일수록 부·울·경 의원들은 합의할 수 있는 원칙을 찾아서 수용할 수 있는 약속을 하는 게 필요하다”며 “대구·경북도 부산·경남 경제 발전을 위해 열린 마음으로 문제를 보고, 부산·경남 쪽도 거꾸로 봐야 한다”고 신공항 논란이 지역 갈등으로 빚어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임대아파트 주민 비하 논란

2020년 12월 11일, 문재인 대통령이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와 경기 화성동탄 공공임대주택을 방문에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중 문 대통령이 “그러니까 신혼부부에 아이 1명이 (세대) 표준이고, 어린 아이는 2명도 가능하겠다(는 뜻인가)?”라고 되물은 내용이 몇몇 언론으로부터 '13평 집에 4인 가족도 살겠다', '부부가 아이 둘도 키우겠다'고 단언한 것처럼 보도가 된 바 있다.

이에 다음 날인 12월 12일, 유승민은 본인의 페이스북에 "이 정권 사람들 중에 공공임대에 살겠다는 사람은 한 명도 못 봤다"며 "자기들은 공공임대에 살기 싫으면서 국민은 공공임대에 살라고 한다"고 꼬집었다. 그는 "그래서 이런 말들이 나오는 거다. ‘니가 가라 공공임대'"라면서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비판하는 포스트를 게시했다가 임대아파트 주민을 비하했다는 논란을 샀다.

게다가 과거 자신의 행적과 모순이라는 주장도 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당시 바른정당 후보였던 유승민은 저소득층 주거복지를 위한 소형 신축 임대주택 공급확대를 공약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내 대표적인 소장파인 박용진 의원은 라디오에 출연해 “(공공임대주택에 거주하는) 500만명 가까운 사람들을 비하해 버리는 것”이라며 “유승민판 이부망천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반론

유승민의 말은 워딩의 강도가 강해 이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유승민에 대해 민주당과 청와대가 비판한 내용은 문제가 있다. 청와대가 유승민이 비판한 '4인 가족'에 대해서 이는 변창흠에게 질문을 한 것이라고 반박하며 이를 근거로 민주당은' 단순히 궁금해서 질문한 것을 언론이 대통령의 주장이라고 비틀었고 유승민은 이렇게 잘못 만든 기사를 근거로 공격을 했다'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대통령의 발언을 다시 곱씹어보자. 변창흠이 이층침대를 가리키며 위아래 아이 두 명이 살 수 있다고 발언하자 문재인 대통령은 "신혼부부가 아이 둘까지 함께 살 수 있겠네요?"라고 발언했다. 이는 흔히들 말하는 '긍정적 의사의 확인성 질문'이다. 확인성 질문이었기에 변창흠이 망설임 없이 "네"라고 대답할 수 있었고 대통령 본인 역시 본인의 의중을 국토부 장관 후보자로부터 재확인 받았기에 만족하고 추가 질문을 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문재인 대통령이 이러한 생각이 없었다면 변창흠의 발언 이후 추가 질문을 던졌거나 첫 질문 내용을 아예 다르게 물었을 것이다. 실제로 국민의힘 송파구 병 당협위원장인 김근식 교수가 이러한 점을 지적하였다.  대통령이 확인성 질문을 했음에도 청와대가 쨌든 자신이 한 것은 아니라고 잡아떼며 책임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형적인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이라는 지적이었다.

유승민이 공공임대주택을 못 사는 곳이라고 지칭하고 그 거주자들에게 암묵적 낙인을 찍었다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다. 유승민 페북을 보면 알겠지만 이 글의 주장은 '정부가 부동산 시장 마비시켜놓고 이를 정상화 할려고 하기 보단 집을 못 산 6-7분위 소득을 공공주택으로만 몰아간다'는 것이다. 부동산 마비를 일으키고 이 해결책으로 공공주택 카드를 꺼낸 것이 옳지 않다는거지, 이에 대해 "공공주택에도 사람이 있다" 운운하며 물타기를 시도하는 것은 소위 말하는 '논점일탈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박용진 의원의 주장에 대해 진중권 전 교수는 "물론 나 같은 '사람'이 살 곳은 못되지만"이라며 비꼬았다. 

애초에 글에서 유승민은 공공주택이 나쁘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단지 나라가 중산층을 공공임대주택으로 몰아간 것에 대한 비판일뿐이다. 유승민은 19대 대선에서도 신혼부부나 청년을 대상으로한 공공주택만 기획하였지 현 정부처럼 이를 7-8분위 소득에 제공하는 공공주택 공약은 없었다. 통상적 공급정책 대신 본래 저소득층 복지를 위한 용도이던 정책을 시장 안정화 정책으로 끌어들인 것을 지적한 것일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즉 유승민이 비판한 것은 시장 안정 대책으로 소득 7-8분위에 대해 공공임대주택 공급 정책을 늘린 것에 대해 비판한 것이지 공공임대주택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박용진의 '공공임대주택 정책 혹평 = 공공임대주택 거주민 비하' 프레임은 성립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론 유승민이 대선 공약으로 공공임대주택 공급 정책을 걸어놓곤 파기를 했다는 주장인데, 유승민이 공공임대주택 정책의 공급을 약속한 것은 사실이다. 유승민은 19 대선 공약으로 청년층에 대한 15 분의 공공주택을 약속했고 1~2인형 주택의 공급도 약속했다. 1~2인형 소형주택 공급의 경우  2019 초반쯤 다시 강조한 정책이기도 하다. 서술했지만 유승민은 공공주택정책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아파트 시장 마비의 해결책으로 공공주택공급을 꺼낸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유승민은 공공임대주택을 부동산 안정화의 수단으로  것이 아니라 저소득층에 대한 복지의 차원으로 접근했었고 이번 페이스북에서도 소득 6-7분위, 7-8분위에 공급할 돈으로  절박한 3-4분위의 주거복지를 해결하는데 사용하라고 대안을 내놓은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공공주택이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복지 정책인가 부동산 시장 안정을 위한 부동산 정책인가에 대해선 진보와 보수에 따라 의견이 엇갈리고 있기에 각자의 생각에 따라 판단할 문제이지만, 확실한 것은 유승민은 저번 대선에서도 신혼부부와 같은 상대적 약자에게 공공임대를 공급하였고 지금도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공급하기를 제안하는 부분에서 공약을 뒤집은 것은 아니라고   있다.

 

 

유승민 선거 이력 경력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7,613,660 (35.76%) 당선 (14번)

초선

 

2005

하반기 재보궐선거

대구 동 을

36,316 (52.03%) 당선 (1위)

초선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55,394 (84.43%) 재선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57,556 (67.41%) 3선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무소속

61,429 (75.74%) 4선

 

2017

제19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2,208,771 (6.76%) 낙선 (4위)

 

지방선거 출마 경력 없이 국회의원 선거를 4차례 치러 4전 전승을 거뒀다. 다만 지역구가 텃밭인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후 보수 정당의 재통합 속에서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엔 불출마를 선언했고 대신 그 자리에 공천을 받은 친유계 정치인인 강대식이 지역구를 이어받았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4위로 낙선하였다. 거기에 더해 바른정당이 2018년 2월을 마지막으로 바른미래당으로 신설합당하면서 유승민이 바른정당 당적을 달고 주요 선출직에 도전한 유일한 케이스로 남았다.

 

 

유승민 예능 방송 출연

2004년

5월 20일

100분 토론

 

2017년

1월 2일

JTBC 뉴스룸 특집토론

 

2월 2일

썰전

 

2월 7일

대선주자를 검증한다!

 

2월 8일

강적들

 

2월 16일

JTBC 뉴스룸

 

2월 20일

대선주자 국민면접

 

3월 5일

청년, 대선주자에게 길을 묻다

 

6월 5일

냄비받침

 

11월 30일

썰전

 

2020년

4월 23일

100분 토론

 

2021년

1월 18일

생방송 심야토론

 

3월 21일

강적들

 

4월 4일

중도를 말한다

 

5월 15일

강적들

 

8월 4일

썰전 라이브

 

8월 4일

더라이브

 

 

유승민 약력 학력 이력 수상 경력

1970. 대구삼덕국민학교 졸업

1973. 대륜중학교 졸업

1976. 경북고등학교 졸업

1981.4. 육군 수도방위사령부 제33경비단 병장 만기전역

1982.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부 학사 졸업

1982.1.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원

1982. 한국개발연구원 원장 공로상

1984.9. 위스콘신 대학교 경제학과 조교

1986. 위스콘신 대학교 Distinguished Teaching Assistant Award

1987. 위스콘신 대학교 Dissertation Travel Fellowship

1987.12.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선임연구위원

1991. 국무총리 표창

1991. 경제기획원 장관 표창

1994.5. 한국 산업조직학회 사무국장

1996.3. UC 샌디에이고 IR/PS대학원 초빙교수

1998.4. 공정거래위원회 자문관

1998.5.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2000.2. 제5대 여의도연구소장

2003.3.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연구교수

2004.6. 한나라당 제3정책조정위원장

2004.5. 제17대 국회 정무위원회 위원

2004.7. 제17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2004. 바른사회시민회의 국정감사 정무위원회 우수의원

2004.4. 제17대 국회의원 (비례대표 / 한나라당)

2005.1.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 비서실장

2005.10. 제17대 국회의원 (대구 동구 을 / 한나라당)

2008. 국정감사 NGO모니터단 국정감사 우수의원

2008.4. 국회 혁신도시건설촉진 국회의원 모임 간사

제18대 국회 국방위원회 간사

2008.5. 제18대 국회의원 (대구 동구 을 / 한나라당)

2008.9. 제18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2008.9. 제18대 국회 국방위원회 간사

2009. 제11회 백봉 라용균 선생 기념사업회 백봉 신사상

2009.6. 군용비행장 문제해결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 대표

2010. 바른사회시민회의 바른사회를 지키는 아름다운 사람 우수의정활동부문

2010. 국정감사 NGO모니터단 국정감사 우수의원

2010.6. 제18대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

2010.7. 한나라당 대구광역시당 위원장

2011.7. 한나라당 최고위원

2011. 국정감사 NGO모니터단 국정감사 우수의원

2012.5. 제19대 국회의원 (대구 동구 을 / 새누리당)

2012.7. 제19대 국회 전반기 국방위원회 위원장]

2013. 제15회 백봉 라용균 선생 기념사업회 백봉 신사상

2014.6. 제19대 국회 후반기 외교통일위원회 위원O국감 모니터단,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선정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 우수위원]

2014.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 우수의원

2014. 국정감사 NGO모니터단 국정감사 우수의원

2014. 제16회 백봉 라용균 선생 기념사업회 백봉 신사상

2015.2. 제5대 새누리당 원내대표

2015.2. 제19대 국회 후반기 국회운영위원회 위원장

2015.3. 제19대 국회 후빈기 정보위원회 위원

2015.3. 제19대 국회 후반기 국방위원회 위원

2015. 제1회 머니투데이 대한민국 최우수 법률상

2015. 한국 매니페스토 실천본부 국정감사 우수의원

2015. 제17회 백봉 라용균 선생 기념사업회 백봉신사상 대상

2016.5. 제20대 국회의원 (대구 동구 을 / 무소속)

2016.6. 제20대 국회 전반기 기획재정위원회 위원

2016. 제18회 백봉 라용균 선생 기념사업회 백봉신사상 대상

2017. 제19회 백봉 라용균 선생 기념사업회 백봉신사상

2017.3. 바른정당 제19대 대통령 선거 예비후보

2017.3. 제19대 대통령 선거 바른정당 후보

2017.11. 제3대 바른정당 대표

2018.2. 초대 바른미래당 공동대표

2018.7. 제20대 국회 후반기 기획재정위원회 위원

2018.10. 바른미래당 대구시당 위원장 직무대행

2018 제20회 백봉 라용균 선생 기념사업회 백봉신사상

2019.9. 변화와 혁신을 위한 비상행동 대표

2019. 제21회 백봉 라용균 선생 기념사업회 백봉신사상

2019.12. 새로운보수당 대구시당 지역위원장

2019.12. 새로운보수당 인재영입위원장

2020. 새로운보수당 보수재건위원장

2021.3. 국민의힘 4·7재보궐선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공동상임부위원장

2021.3. 국민의힘 4·7재보궐선거 서울시장 보궐선거 선거대책위원회 공동선대위원장

2021.7. 국민의힘 제20대 대통령 선거 예비후보 (경선 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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