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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야기/정치 / / 2023. 11. 1. 11:51

정치인 신계륜 나이 고향 학력 이력 프로필


대한민국의 정치인. 전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과 성북구 을에서 4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정치인 신계륜 나이 고향 학력 이력 프로필

 

신계륜 프로필
신계륜

 

신계륜

申溪輪 | Shin Gye-ryun

 

출생

1954년 8월 13일 (69세)

전라남도 함평군 월야면 월야리

 

본관

고령 신씨

 

거주지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 종암SK아파트

 

 

재임기간

제4대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 (고건 시정)

1998년 7월 1일 ~ 1999년 8월 11일

 

학력

광주계림국민학교 (졸업)

북성중학교 (졸업)

광주고등학교 (졸업 / 22회)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 / 학사)

 

가족

배우자 김유미

장남 신경수, 차남 신지수

 

종교

개신교 (장로회)

 

약력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나남출판사 편집주간

신민주연합당 창당발기인

신민주연합당 당무위원

민주당 당무위원

민주당 범민주통합추진위원회 대변인

제14대 국회의원 (서울 성북구 을 / 민주당)

제14대 국회 후반기 노동환경위원회 간사

새정치국민회의 청년특별위원회 부위원장

제4대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 (고건 시정)

제16대 국회의원 (서울 성북구 을 / 새천년민주당)

새천년민주당 서울시당 수석부위원장

제17대 국회의원 (서울 성북구 을 / 열린우리당)

대통합민주신당 사무총장

통합민주당 사무총장

통합민주당 총선기획단장

통합민주당 총선선대본부장

민주통합당 한명숙 당대표 정무특보

사단법인 신정치문학원 이사장

제19대 국회의원 (서울 성북구 을 / 민주통합당)

한국프로낚시연맹 총재

한국배드민턴협회 회장

제19대 국회 전반기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

새정치민주연합 사회적경제정책협의회 위원장

 


신계륜 생애 고향 학력 이력

 

1954년 8월 13일 전라남도 함평군 월야면 월야리에서 초등학교 교사인 아버지 신원식(申元植, 1920. 12. 7 ~ 2000. 5. 28)과 어머니 흥덕 장씨(興德 張氏) 장정임(張貞任, 1926. 3. 28 ~ ) 사이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광주 계림초등학교와 북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1973년 광주고등학교(22회)를 졸업하고 법관이 되겠다는 꿈을 품고서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에 입학하였으나, 당시 유신 상황에 눈을 뜨면서 민주화에 관심을 갖게 되어 학생운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신계륜 정치활동

 

유신정권 하에서 잦은 체포와 감시 속에 있다가 1976년 강제 징집되어 전방 부대에서 복무를 마치고 1979년에 제대했다. 같은 해 10.26 사건으로 만들어진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다시 학생운동에 전념하게 되었고, 그해 봄 학도호국단을 거부하는 운동 끝에 6년만에 부활한 자주적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80년 5월 13일부터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서 고려대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계엄령 철폐시위에 나섰다. 학생들의 가두시위는 5월 15일 정점에 올라, 서울역에는 무려 15만 명의 학생들과 시민이 운집했다. 이때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더이상 시위가 과열되면 군부에게 무력개입의 빌미를 준다고 주장하면서 전국 학생회장단을 설득하여 시위를 해산하고 학교로 돌아가자고 제안하였는데, 신계륜은 이에 반대하였지만, 결국 심재철의 주장대로 이른바 '서울역 회군'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전두환은 고립된 광주를 군홧발로 짓밟고서 정권을 움켜쥐었으며, 당시의 학생 운동권은 전두환의 쿠데타를 막을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서울역 철수 다음 날인 5월 16일에는, 여러 고대생들과 함께 5.16을 규탄하는 가두행진을 고려대에서 수유리까지 진행하여 철수에 대한 항의의 뜻을 알렸다. 그러나 5월 17일 시위를 중단한지 이틀만에 군부는 전국의 대학에 진주하여 점령하고 학원을 군의 병영으로 삼으며 전국적인 휴교령을 내렸다. 5월 18일 수배를 피해 광주로 내려갔다가 계엄군이 도청을 점령하는 5월 27일 새벽까지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리(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의 절친한 친구의 집에 머무르면서 광주에서의 학살을 목격하였다. 당시 그의 어머니는 차량이 끊긴 월야집에서 터벅터벅 걸어서 광주에 와 아들의 소재를 물으며 시위대 사이, 그리고 병원의 영안실들을 헤매고 다녔으나, 그는 어머니가 그토록 처연하게 아들을 찾아 헤매는 것을 알고도 어머니에게 살아있다는 말조차 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점령당하자, 다시 서울로 탈출했다. 그런데 “극한적 학원소요 사태와 광주 사태의 배후 조종자 및 주동 극렬 분자”로 지명수배된 가운데 무려 30일을 더 숨어 지내다가 결국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지독한 고문을 받았음에도 끝내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에 협조하지 않았으며, 군법회의에서 결국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1983년에 출옥한 후 나남출판사에서 편집주간으로 일했다. 그 후 구로공단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여러 해 동안 노동 운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1990년 3당 합당을 보고 충격을 받아, 1991년에 이우정, 박우섭 등의 재야동지들과 함께 신민주연합당의 발기인으로 나서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신계륜 정치입문신계륜 국정활동

 

신계륜 정치활동

야당의 신진 정치인 시절

정계 입문 이후 김대중이 고향인 호남에서, 특히 함평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하고 서울 성북구에서의 출마를 희망하였다. 그리고 1992년 1월 현직 국회의원인 조윤형을 제치고 민주당 서울 성북구 을 지구당 개편대회에서 약 3,000여 명의 청년 및 당원들이 운집한 가운데 지역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그로부터 몇 달 뒤인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국회의원(37세)으로 당선되었다. 득표율은 41.7%였다. 그 후 신계륜은 민주당 김대중 대선 후보의 노동담당 특별보좌역을 역임했으나, 김대중은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패하였고 정계를 은퇴하고 말았다.

1993년엔 대한민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후원회(후원회장 장하성 고려대 교수)를 결성하였다. 공개모금행사를 실시하고 정치자금을 모두 공개하여 화제를 모았다. 또한 민주당내 ‘깨끗한 정치 실현을 위한 모임’, ‘민주개혁정치모임’ 등에 참여하며 개혁 그룹을 이끌었으며, 2000년에는 송영길, 이인영, 임종석, 우상호 의원등이 함께하는 ‘대안과 실천’이라는 개혁 모임을 창립하고 이를 이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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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제14대 국회에서 그는 젊은 국회의원답게 의정활동을 매우 성실히 하여 주목을 받았다. 1995년 중앙일보 국회의원 평가에서, 상임위에서의 발언 1위, 문제제기 1위, 대안제시 1위, 공무원 평가 1위, 종합평가 1위를 차지해 전체 국회의원 중에서 유일한 5관왕을 차지하였다.

1995년 김대중이 정계에 복귀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신계륜은 민주당을 탈당하고 김대중이 새로 만든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서울 성북구 을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출마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39.2%의 득표율로 낙선했다. 당선자는 신한국당의 강성재였고, 표 차이는 3천여 표밖에 나지 않았다. 당시 통합민주당 황호산 후보가 출마하여 민주진영의 표가 갈린 것이 패인으로 지적되었다. 그리고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청년위원장으로 활약하며 김대중의 당선에 기여하였다.

 

여당 정치인 시절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선거에서 고건을 도와 선거운동을 하였고, 고건의 당선에 기여하였다. 그 후 고건 시장 밑에서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으로 일하면서 행정경험을 쌓았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서울 성북구 을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한나라당의 강성재를 꺾고 52.2%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제16대 국회에서도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일하며, 2001년 직장여성에 대한 출산 휴가의 확대, 영아를 둔 직장여성에서 육아 휴직 급여기간 확대를 포함한 근로기준법과 남녀고용평등법 등의 개정을 이루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때는 노무현 대통령 후보 비서실장을 맡았다.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계속 낮은 상태를 유지하자, 당시 지지율 1위이던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결국 이해찬에 이어 신계륜이 정몽준 후보와의 후보 단일화 협상 단장을 맡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정몽준과의 후보 단일화에 성공하여 노무현의 당선에 기여한 1등 공신 중 하나가 되었다. 그 후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비서실장을 맡았지만, 노무현이 대통령직에 취임한 이후에는 청와대나 정부의 어떤 직책도 맡지 않았다.

 

> 고건 프로필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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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에 환경노동위에서의 활동에 주력하여 2003년에는 근로기준법을 개정하고 주 5일, 주 40시간 근로라는 선진근로제도를 도입하는 데 기여를 하였다. 2003년 새천년민주당 분당 때는 열린우리당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대통령 당선인 비서실장 시절 대출업체 굿머니에서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인해 17대 총선을 코앞에 둔 2004년 3월 불구속 기소되었다. 의혹을 제기한 것은 새천년민주당 소속의 조재환 의원이었고, 당시 대검 중수부장은 그 유명한 안대희였다.

물론 그러한 악재에도 불구하고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최수영을 꺾고 51.0%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제16대와 제17대 연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집권여당의 중진으로 발돋움하였지만, 2006년 2월 대법원에서 굿머니 불법정치자금 수수가 유죄로 판결되면서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이후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는 조순형이 당선되었다.

 

정치인 신계륜신계륜 정치

 

다시 야당정치인으로서

2007년 정동영의 제17대 대통령 선거 참패 이후 야권 통합의 필요성이 제기되자, 2008년 손학규 대표 밑에서 대통합민주신당 사무총장을 역임하였고, 구 민주당 인사들과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그 후 민주당과의 통합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통합민주당 사무총장을 역임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통합민주당 총선 기획단장, 제18대 총선 선거 대책 본부장을 역임했으나, 당시 통합민주당 공천심사 과정에서 당 공천심사위원회의 '금고형 이상 형 확정자 공천배제' 방침이 정해지면서 공천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결국 성북구 을 지역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다. 선거 결과도 좋지 않아, 29.1%의 지지율로 낙선하였다. 당선자는 한나라당의 김효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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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30일, 통합민주당에 복당하였다. 비록 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개인적 비리가 아니라 당을 위해 희생됐던 측면이 크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후 잠시 야인으로 있다가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의 공천을 받아 서울 성북구 을의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득표율은 54%였다. 그러나 19대 총선에서 구 열린우리당 의원 출신들이 거의 1명의 예외 없이 모두 공천을 받아 무난하게 당선된 반면, 호남의 비노, 비운동권 출신 의원들은 공천에서 대부분 탈락하여 이때부터 '친노 운동권 기득권자' '당내 86세대들의 맏형'이라는 이유로 야권 내 비주류(비노) 인사들로부터 집중비난을 받게 되었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가 패한 후, 12월 28일 원내대표 경선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당선이 유력하다는 전망과 달리 결선투표에서 박기춘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패배의 원인은 친노진영의 지나친 패권욕에 있다는 말이 나왔다. 어쨌든 대선에서 패배했고, 그 패배의 책임을 친노진영이 져야 하는데, 책임을 지긴 커녕 친노진영이 신계륜을 앞세워 원내대표 자리를 차지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뇌물 혐의 유죄

2015년 6월 8일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SAC) 김민성(본명 김석규) 이사장으로부터 교명 변경 법안 처리 대가로 2013년 9월부터 2014년 5월까지 현금과 상품권 등 5천 500만 원을 받은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로 검찰에 기소됐다. 그리고 아들의 캐나다 유학비용이 어디서 나왔는지 역시 문제되었는데, 신계륜이 국회의원 세비, 후원회비, 상임위원장 직책비 통장 등에서 매달 출금한 금액이 생활비나 아들 유학비에 매달 지출된 돈보다 훨씬 많다는 기록을 제시하고 서울종합예술학교로부터 돈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하자 검사는 상임위원장 직책비를 개인용도로 써도 되냐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신계륜은 "내가 입법 로비로 기소된 것을 아직도 실감할 수가 없고 참담하다. 아들이 초등학교 때 신계륜 아들이란 이유로 선배들에게서 욕을 듣고 싸움이 벌어진 뒤 어렵게 유학을 보냈는데, 검사가 유학자금을 갖고 의심하니 내가 참 나쁜 아버지가 되는 것 같다. 억울함을 잘 살펴 옥석을 가려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공천에서 문희상, 유인태, 송호창 등과 함께 다시 컷오프를 당했으나, 8년 전과는 다르게 당을 위해 백의종군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2017년 7월 상술한 입법 로비에 대해 기소된 5천만 원 중 4천만 원은 무죄, 1천만 원과 상품권 5백만 원은 유죄로 인정하여 징역 1년의 실형 판결이 확정되었고, 출소 후 윤이상평화재단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2022년 윤석열 정부 특별사면으로 사면되었다.

2023년 4월 28일에 지난해 같이 사면복권된 전병헌 전 정무수석과 더불어민주당 복당이 완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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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계륜 뇌물 혐의

 

신계륜 선거 이력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북 을

52,935 (41.67%) 당선 (1위)

초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북 을

41,487 (39.16%) 낙선 (2위)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북 을

50,644 (52.21%) 당선 (1위)

재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북 을

54,979 (50.99%) 당선 (1위)

3선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북 을

무소속

23,577 (29.07%) 낙선 (2위)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북 을

56,177 (53.98%) 당선 (1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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