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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야기/정치 / / 2024. 2. 3. 07:43

박희태 나이 고향 학력 이력 프로필 (제18대 후반기 국회의장)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박희태 나이 고향 학력 이력 프로필

 

박희태 프로필
박희태

 

박희태

朴熺太 | Park Hee-tae

 

출생

1938년 8월 9일 (85세)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무림리

 

본관

밀양 박씨

 

재임기간

제42대 법무부 장관

1993년 2월 26일 ~ 1993년 3월 7일

제17대 전반기 국회부의장

2004년 6월 7일 ~ 2006년 5월 29일

제18대 후반기 국회의장

2010년 6월 8일 ~ 2012년 2월 27일

 

 

배우자

김행자

 

자녀

장녀 박가경, 차녀 박가주

 

학력

이동국민학교 (졸업)

남해중학교 (졸업)

경남고등학교 (졸업 / 11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건국대학교 대학원 (법학 / 석사·박사)

 

병역

대한민국 육군 대위 만기전역 (군법무관)

 

종교

무종교

 

약력

제13회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

청주지방검찰청 검사

법무부 검사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부산지방검찰청 검사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대검찰청 특별수사부 제1과장

대구고등검찰청 검사

법무부 검찰 제3과장

법무부 송무1과장

서울지방검찰청 동부지청 부장검사

서울지방검찰청 남부지청 차장검사

대검찰청 공판송무부장

법무부 출입국관리국장

제28대 춘천지방검찰청 검사장

제29대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

제28대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초대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

제13대 국회의원 (경남 남해군·하동군 / 민주정의당)

민주정의당 대변인

민주자유당 대변인

제14대 국회의원 (경남 남해군·하동군 / 민주자유당)

제42대 법무부 장관 (문민정부)

제14대 국회 전반기 정치관계법심의특별위원회 간사

법률구조공단 이사

제14대 국회 후반기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

제15대 국회의원 (경남 남해군·하동군 / 신한국당)

신한국당 원내총무

제15대 국회 전반기 국회운영위원회 위원장

신한국당 당무위원

제16대 국회의원 (경남 남해군·하동군 / 한나라당)

한나라당 부총재

한나라당 최고위원

제17대 국회의원 (경남 남해군·하동군 / 한나라당)

제17대 국회 전반기 국회부의장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이명박 캠프 공동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한나라당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

제18대 국회의원 (경남 양산시 / 한나라당)

제18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새누리당 상임고문

 

 


박희태 생애 고향 학력 이력

정계 입문 이전

1938년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무림리에서 태어났다. 경남고등학교(11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61년에 제1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였다.

동갑인 박상천과는 한때 정치적 라이벌이기도 했지만 친분을 쌓았다. 1961년 이래 검사로 근무하면서 대검찰청 공판송무부장을 비롯해 법무부 출입국관리국장, 춘천지검장, 대전지검장, 부산지검장, 부산고검장 등 요직을 맡았다. 특히 춘천지검장 시절 폭탄주를 고안하였다.

 

박희태 국회부의장박희태 정치활동

 

정계 입문 이후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경상남도 남해군-하동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 대변인을 역임하며 서울법대, 사법시험 동기이자 평화민주당 대변인이던 박상천과 설전을 주고받았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3년 김영삼 정부의 초대 법무부장관에 임명되었으나, 곧 장녀의 편법입학 논란에 휩싸였다. 박희태의 미국 연수 중 태어나 이중국적을 가지고 있던 장녀는 3살 때부터 줄곧 한국에서 생활했다. 그러다 고3 때 성적으로 명문대에 들어가기 어려워지자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외국인 특례입학으로 이화여대 동양화과에 입학했다. 박희태는 딸의 편법을 묵인한 책임을 지고 취임 열흘 만에 사임한다. 이후 국회로 돌아가 1994년부터 1996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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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후보가 패배하자, 한나라당에서 대선 재검표를 요구했으나, 결과가 바뀌지 않자, 서청원 대표가 사임하면서, 차순위 최고의원으로서 2003년 1월에 당 대표직을 승계하여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때 당 중진의원으로서 탄핵을 주도하였다. 같은 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또한 2006년까지 2년 동안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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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태 논란박희태 돈봉투 살포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과 국회의장 역임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명박 캠프 최고 지도부라고 할 수 있는 친이 6인회에 소속되어 이명박이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선출되는데 기여하고, 또 이명박 캠프 클린정치위원회의 고문으로서 BBK 의혹을 방어하는데 성공하여 이명박의 대통령 당선에 공을 세운다.

그러나 정작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세대교체 바람으로 인해 공천에서 탈락하였다. 이렇게 정치인생이 끝나는듯 했으나, 원래 친이 측에서 당대표로 세우려던 이재오가 자기 지역구에서 낙선하면서 치명상을 입게 되었고, 이에 친이계는 이재오를 대신해 박희태를 한나라당 대표로 밀어주게 되었다.

이 때 당대표로 나선 박희태의 선거조직은, 마치 지난해 대선 경선 당시 이명박 후보 캠프를 연상시킬 정도로 인적 중복 현상을 보였다. 좌장격인 최병국을 중심으로, 친이계 내에서도 이재오계의 핵심인 안경률이 총괄본부장을 맡았고, 대선 당시 경선대책위 부위원장이었던 정의화와 경기지역 선대위원장 역할을 했던 고흥길이 고문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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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의 1등 공신 그룹으로 꼽히는 안국포럼 출신의 백성운, 김효재는 각각 조직과 메시지를 전담했다. 참고로 백성운은 대선 경선 당시 종합행정실장을 맡았었다.또 대선 경선 당시 이명박의 '입'으로 활동했던 진수희와 경기지역을 담당했던 차명진이 박희태 캠프의 공보 일을 전담하다시피했다. 각 지역을 총괄하는 인사들 또한 서울의 장광근, 경기도의 원유철, 대구 주호영, 부산의 김정훈, 울산의 김기현, 강원도의 허천, 충남의 홍문표, 경북의 이병석, 경남의 김재경 등 대선 시절 이명박 경선대책위 주요 인사들과 겹쳤다. 

결국 2008년 7월 3일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박희태가 당대표로 선출되었고, 마지막까지 촉각을 곤두세우던 친이계와 청와대 관계자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처음으로 원하는 시나리오대로 됐다는 표정이었다. 고소영ㆍ강부자 내각 논란, 총선 압승 실패, 쇠고기 협상 파문 등으로 그동안 '액션 플랜'이 꼬일 대로 꼬였던 여권이 궤도를 이탈했다가 제 선로를 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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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태 국정 활동

 

상단에서 말했듯이, 박희태를 첫 여당 대표로 만들기 위해 이상득계ㆍ이재오계ㆍ친이 직계를 아우르는 친이계가 총출동했다. 또 다른 친이 인사인 공성진이 6월 17일 여의도 대하빌딩 9층에 사무실 개소식을 할 때만 해도, 공성진 측은 "1등도 할 수 있다"며 기세등등했다. 친이재오계가 조직력을 가동하면 박희태 측도 넘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다. 하지만 이 같은 기세는 개소식 이후 며칠 가지 못했다.

박희태 진영과 이재오계 당협위원장들이 공동으로 박ㆍ공 공동캠프를 차렸다. 대하빌딩 4층에 박희태 후보 사무실이, 같은 빌딩 9층에 공성진 후보 사무실이 있지만 같은 빌딩 2층에 박·공 공동 캠프가 둥지를 틀었다. 이곳에서는 '1순위 박희태ㆍ2순위 공성진'이라는 카드를 마련했다. 공성진은 4등으로 겨우 최고위원이 됐다. 공성진 측은 "사실 박 대표를 만들기 위해 공 의원이 희생한 감이 없지 않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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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오계 안경률은 박희태 캠프에서 총괄본부장을 맡았다. 또 안경률이 나서서 친이계와 청와대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했다는 고 한다. 6월 30일 친이계의 대거 회동에도 안경률이 역할을 했다. 당시 한나라당 안팎에서는 전당대회 한 주 전까지 계속 1위를 노리던 정몽준 측의 기세가 친이계의 대거 회동 시도를 계기로 급전직하했다고 판단했다. 대의원의 표심이 급격히 정 후보 측에서 떨어져 나와 박 대표 측으로 붙었다는 것이다. 공성진 측은 "친박 쪽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사실은 정몽준 측을 견제하려던 것"이라면서 "모임이 몇 시간 전에 취소되긴 했지만, 성사된 것과 동일한 효과를 발휘했다"고 평가했다.

전당대회 마지막 주부터 모든 시나리오는 친이계의 뜻대로 맞아떨어졌다. 전당대회를 바로 앞두고 이미 '박희태-정몽준-허태열-공성진'이라는 순위 결과가 점쳐졌다. 투표가 진행 중일 때 친이 소장파 권택기는 "박 대표와 정 후보가 각각 1ㆍ2등을 하고, 3ㆍ4ㆍ5등은 1ㆍ2등과 좀 차이가 날 것"이라면서 "허 후보가 조직력에서 앞서지만 정 후보가 일반인 여론조사에서 휠씬 앞서 2등이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결과는 전망 그대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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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태 국회부의장

 

종합적으로 볼 경우, 2008년 전당대회 결과, 친이계는 박희태, 공성진, 박순자까지 3명의 최고위원이 지도부에 들어갔다. 지명직 2명을 포함하면 5명의 최고위원이 친이계열로 분류되었다. 여기에다 당시 원내대표 홍준표와 정책위 의장 임태희까지 가세해 지도부 9명 중 친이계가 7명이나 된다. 정몽준까지 친이로 분류하면 8명이 된다. 허태열만 친박계 인사로 지도부에서 활동했다. 박희태 대표 체제에 대해 이혜훈은 “화합을 내세우는 분이라 잘 할 것”이라면서도, 친박 인사들과 화합 가능성을 묻자 “앞으로 두고 봐야 할 것”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이명박과 가까운 박희태가 당 지도부를 이끌게 됨에 따라, 향후 청와대 친정 체제에 들어갈 것이라는 예상이 공공연하게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박희태는 취임 후 인터뷰에서 “이 대통령에게 할 말은 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친이계 역시 외부의 시각과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조해진은 “대통령이 정치를 잘 모른다고 하는데 어떻게 당을 좌지우지한다고 할 수 있냐”면서 “정치를 잘 아는 박 대표가 당이 중심이 되도록 잘 이끌어 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재오김용태 역시 "대통령 자신이 정치를 잘 모른다고 고백했다"면서 "박 대표가 백전노장이라 정치를 복원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또 김용태는 “박 대표가 우선 사람들을 두루 만나 화합의 통로를 열어나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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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경상남도 양산시 지역구의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2009년 9월에 당대표직을 사퇴하고 출마했으며, 김양수 대신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18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국회의장 재임 당시 한나라당의 각종 날치기를 주도하여 당시 정몽준, 안상수, 홍준표 등 한나라당 지도부와 함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날치기는 아니지만 홍준표, 남경필 등이 주도한 한미 FTA 비준안 강행처리에도 암묵적으로 동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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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태 논란박희태 성추행

 

박희태 논란 및 사건 사고

친인척들의 비행

부인 김행자 前 건국대 교수도 한때 논란이 되었다. 1990년 김씨는 실수로 도서관 책을 무단 반출한 모 여학생에게(당시 21·여) "이런 학생은 사회에서 매장돼야 한다.", "가정교육이 잘못돼 도둑질을 했다." 등의 막말을 했다. 이듬해 이 학생이 자살하자 총학생회 등은 김씨의 사과와 사퇴를 요구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행자 교수는 유족에게 전혀 사과하지 않았음은 물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모습을 안 보였고, 끝까지 교수 노릇이나 잘 하다가 임기를 꽉 채우고 퇴직금까지 두둑히 받고 정년퇴임했다.

둘째사위인 김형준 전 부장검사는 스폰서에게 술, 여자 접대를 상습적으로 받은 사실이 드러나 실형을 선고받았다. 참고로 김 전 검사도 장인처럼 정치권 진출을 꿈꿨다고 한다.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관련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당시 부산지검장 근무 이력으로 인해 사건 은폐 가담 의혹도 제기되었는데, 2015년 3월 21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 제작진이 박희태를 찾아가 인터뷰했지만, 그는 "기억이 안 나 모르겠다."고 나 몰라라 했다. 실제로 수사 담당검사였던 김용원 변호사가 한나라당에 있었을 때 같은 친이계였지만 둘 사이에 분위기는 험악했다고 한다.

 

박희태 부산 형제복지원 논란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사건

2012년 초, 고승덕 국회의원이 2008년의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박희태가 돈봉투를 살포하였다고 폭로하여 국회의장직을 사임하였고, 정의화 국회부의장이 국회의장 직무를 대행하였다.

아울러서 당해 4월 있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도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결국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 되었다.

 

 

“손녀딸 같아서” 성추행 사건

이후 정계를 사실상 은퇴하고 새누리당 상임고문으로 있었다가, 2014년 9월 11일, 강원도 원주시의 모 골프장에서 캐디를 성추행하여 논란이 되었다. 당시 "손녀 같고 딸 같아서 귀엽다는 수준에서 터치한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해명을 하여 국민들을 분노케 했다. 검찰은 일부러 사건을 질질 끌며 여론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국민들의 분노가 도통 가라앉지 않자 결국 몇주 뒤 기소하였다.

그 결과 2015년 2월 16일, 1심 재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 성폭력 치료 강의 40시간 수강을 선고받았다. 그 직전에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의 석좌교수로 재임용될 뻔 했으나, 이 사건 때문에 결국 재임용도 전격 철회되는 망신을 당했다.

그 후 2016년 1월 20일, 2심인 항소심에서도 감형 받지 못했다. 이와 함께 박희태 측은 항소를 제기해 대법원까지 가야 최종 결론이 나겠지만, 이 정도면 무죄나 벌금형은 사실상 글렀다 봐야 한다. 인생 말년이 꽤 피곤해질 듯. 만약 상고심에서도 감형 받지 못할 경우 국회의장이면 당연히 가는 국립묘지 안장 혜택도 못 누리게 된다. 게다가 각종 범죄 종류들 중에서도 죄질이 몹시 무겁고 수위도 매우 높고 이미지도 상당히 더러운 성범죄라 죽어서까지 좋은 소리는 전혀 못 들을 수도.

 

2017년 4월 28일, 대법원 1부(주심 김용덕 대법관)는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박 전 의장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 40시간의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수강 명령을 선고한 원심을 최종 확정했다. 이로써 국립묘지 안장 혜택은 날라갔다.

한편, 성추문 사건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 상임고문으로 있었으나, 2017년 1월에 인명진 비대위체제가 되자, 새누리당에서 전격 제명되었다. 돈봉투 파동과 성추행 사건 등 스케일이 큰 논란들을 여럿 일으킨 사람이기에 잘려도 싸다는 반응이 대세.

 

박희태 캐디 성추행박희태 손녀딸 같아서 성추행

 

박희태 여담 일화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도 김포시 갑에 출마해 처음으로 국회 입성한 김두관과는 동향으로 꽤 가까운 사이라 한다. 2003년 김두관이 행정자치부 장관에 올랐을 당시 박희태는 한나라당 대표권한대행이었는데,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 수뇌부를 향해서는 날선 비판을 서슴지 않다가도 김두관 장관에게는 이런저런 덕담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특히 그 해 9월 김두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이 통과될 때 마지막까지 반대한, 몇 안 되는 한나라당 의원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일명 '이장 비하 발언'으로 비판을 받았다. 서청원, 최병렬 등의 당시 한나라당 지도부와 골프를 하다가 "우리도 다 같은 촌놈 아니냐. 김두관이도 이장하던 촌놈이 장관까지 되었는데 이번에는 좀 봐주자."라고 말했는데 앞부분이 쏙 빠지고 김두관을 지칭하는 부분만 언론에 나가서 곤욕을 치렀다. 사실 김두관을 옹호한 건 단순히 고향 후배라서가 아니라 이듬해 선거에서 맞대결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게 가장 컸다는 게 중론이다. 그리고 김두관도 양산시 국회의원(양산시 을)을 역임했다는 점도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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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29일, 부인상을 당했다. 같은 날 고건 전 국무총리의 부인도 세상을 떠났다.

본래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부산고검장 재직 당시에는 이제 검찰총장만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검찰에서 퇴직하면 변호사나 하면서 편하게 살려고 했다고. 그런데 고검장 시절, "박희태가 경남 하동에 공천받아 선거에 입후보할 것"이라고 TV에 보도되었다고 한다. 당연히 본인과는 아무 협의 없이 방송이 나간지라 어안이 벙벙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며칠 뒤, 박희태 고검장은 노태우 대통령과 독대하는 자리에서 "저는 돈도 없고 조직도 없고 검찰에서 몇십년을 일한 사람이니 검찰총장을 하고 싶습니다."라면서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은 "검찰총장은 됐고, 조직하고 돈은 당에서 알아서 해줄테니 걱정마시오!"라는 말로 설득했다. 그렇게 해서 정치를 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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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태 몰락

 

유행어

국회의원으로서의 행적보다도 유명한 것이 바로 유행어. 정치계를 넘어 일상생활에서도 쓰이는 유명한 유행어들을 만들어내거나 널리 퍼뜨린, 대표적인 유행어 제조기다.

대표적 유행어는 정치 9단,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줄여서 내로남불), 총체적 난국이 있다. 박희태는 몰라도 이 단어들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정치 9단의 경우에는 그가 만든 건 아니라고도 하는데, 일단 널리 쓰이게 된 건 박희태가 사용한 이후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경우, 원래 80년대부터 유행하던 유행어였다. 이를 1996년 6월 12일에 국회본회의장에서 신한국당 당시 박희태 의원이 여소야대 정국 하에서 정당의 '의원 빼내기'에 대한 비판을 반박하기 위해 "야당의 주장은 내가 바람을 피우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부동산을 하면 투자, 남이 사면 투기라는 식"이라고 발언하며 세상에 퍼졌다.

 

총체적 난국의 경우, 1990년의 경제위기 상황을 이승윤 경제부총리가 'Total Crisis'라고 이야기했고, 이것을 박희태 당시 집권 민주자유당 대변인이 총체적 난국이라고 번역하면서 세간에 회자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훨씬 많이 지난 2020년대까지도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개판 5분전인 사진 등을 올리며 제목이나 댓글에 쓰곤 한다.

이 외에도 본래 이주일의 유행어였던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겠습니까?"를 사용해 널리 퍼뜨리기도 했고, 폭탄주 역시 만들었다고 한다.

그가 몰락한 계기가 된 성추행 사건 과정에서 내뱉은 '딸 같아서 그랬다.'는 변명도 안 좋은 의미로 유행어이긴 하다.

 

박희태 총체적난국

 

박희태 선거 이력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남해·하동

46,381 (52.93%) 당선 (1위)

초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남해·하동

49,378 (60.22%) 당선 (1위)

재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남해·하동

49,874 (75.83%) 당선 (1위)

3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남해·하동

38,615 (59.63%) 당선 (1위)

4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남해·하동

34,106 (53.50%) 당선 (1위)

5선

 

2009

하반기 재보궐선거 (국회의원)

경남 양산

30,801 (38.13%) 당선 (1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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